철수와 춘희

철수가 손수 끓인 찌개를 식탁으로 가져오자 마구 이상한 소리를 내고 박수를 치며 좋아하던 춘희(심은하 분)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극중에서는 순진하고 게으르고 매력 없는 여자로 설정되어 있지만 심은하란 배우에게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동화같은 화면 속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가벼운 조울증 환자마냥 까불던 심은하는 참 귀여웠다. 영화를 같이 보던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어째 똑같은 짓을 하는데도 심은하는 예뻐 죽겠고 너는 안타까워 죽겠냐고. 그렇듯 그녀는 나와 닮아 있었다. 오로지 하는 짓만.

결혼 비디오 촬영기사 춘희(심은하 분)는 결혼식 장에서 종종 마주치는 보좌관 인공(안성기 분)을 짝사랑하는 스물 여섯의 여자이다. 어느 날 그녀의 방에 침입한 철수(이성재 분)는 그의 애인(송선미 분)이 아직도 이 방에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찾아왔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얼결에 두 사람은 이상한 동거 생활에 들어가고 춘희는 애인을 잃어버린 철수를 안타까워 하지만 철수는 온통 머릿속 몽상으로밖엔 사랑할 줄 모르는 춘희를 뭘 모르고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짝사랑에 관련된 줄거리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춘희의 글을 어느 날 철수는 훔쳐 보게 되고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그들이 사랑했던 이들의 이름을 빌려 '미술관 옆 동물원'이란 제목의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 나간다. 그 속에서 철수가 그리는 다혜는 춘희를 변화시키고, 춘희가 그리는 인공은 철수를 변화시킨다. 그 과정 속에서 둘은 서로의 사랑 방식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음을 알게 된다.

춘희는 철수에게 말한다. "만약 네가 아직도 다혜씨를 보내 줄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집착이야." 철수는 춘희에게 말한다. "넌 사랑을 언제나 머릿속으로만 해. 그게 다라고 여기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으니까 언제나 그 모양인거야." 춘희는 사랑은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간절하고도 운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철수는 사랑은 함께 체온을 나누듯 뜨겁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춘희의 사랑이 미술관이라면 철수의 사랑은 동물원인 셈. 사실 어느 하나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다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한쪽만을 극단적으로 몰고 갈 때가 아닐까. 추상적인 감정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인 행위로 옮겨가든, 구체적인 행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추상적인 감정으로 발전하든, 사랑은 하나고 그 순서로 인해 어떤 사랑은 고결하고 어떤 사랑은 비루하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아이들처럼 유치한 다툼 속에서 서서히 싹트는 애정을 실감하게 되고 그들이 서로를 만나기 이전에 사랑과 연애에 대하여 어떤 룰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새로운 사람끼리는 다시 새로운 룰을 만들어 가는 것이 옳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인 줄은 몰랐어." 이 영화에서 건진 대사 중 단연 돋보이는 말이다. 장대같은 소나기를 기다려 보는 것도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미 사랑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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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krksmsrlf2 2006-01-03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올리 셨네요.
참 여러 일들하시네요..

마늘빵 2006-01-0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거 오늘 디비디 주문했는데. 참 좋은 영화.

깐따삐야 2006-01-04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의 리뷰도 기대할게요. 전 오늘 비포선셋 DVD를 구해서 이제 보는 일만 남았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