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 신입생 시절, 담배를 꼬나문 여자 선배가 나른하게 연기를 피워올리다가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헤르만 헤세요. 고양이마냥 가느다랗던 선배의 동공이 문득 커지며 헤세가 책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든? 다시 물었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 어쩌고 저쩌고 했던 것 같은데 급작스레 파안대소를 하는 선배의 얼굴은 흡사 메두사. 온몸이 돌로 굳었던 그 순간은 내 생애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정신사나운 어미의 취향 탓에 룰라부터 비틀즈까지 숱한 노래를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달이에게 어디 노래 한번 불러볼까, 하면 산토끼가 바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헤르만 헤세는 내게 그런 작가였다. 십대 초반 '수레바퀴 밑에서'를 거듭 읽어가며 한스 기벤라트에게 내 사춘기의 음영을 드리웠고 이후에는 작가소개에 나온 헤세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 읽기 시작했다. '크눌프', '봄의 폭풍우'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유리알 유희' 등 헤세의 알려진 작품은 모조리 읽어나갔다. 흥미롭게도 카뮈, 무질, 도스토옙스키, 소세키 등 한때 나를 사로잡았던 대가의 작품들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헤세는 떠올릴 때마다, 다시 만날 때마다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필시 외롭고 험난했던 나의 사춘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메두사 선배와는 수강생이 대여섯 밖에 되지 않았던 교양철학시간에 우연히 또 만났다.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선배는 니체를, 나는 마르크스를 선택했다. 강퍅했던 교수는 선배를 게으름뱅이로, 나를 선동가로 규정했다. 전날 술 먹느라 발제 준비를 제대로 못해 우물우물하는 선배와 마르크스가 직계 존속이라도 되는 듯 화염을 뿜어대는 나에게 아주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평가였다. 그리고 학기말에 우리는 둘 다 A+를 받았다. 불성실한 합리주의자와 성실한 낭만주의자, 혹은 그 반대, 또는 뒤엉켜 얼버무린 존재들 같던 우리는 내 머리가 제법 굵어져 선배 앞에서 시건방을 떨게 되는 그날까지, 아마도 그 이후로도 그럭저럭 온건하게 지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톨스토이를 말했다 한들 웃지 않았겠는가. 실컷 비웃고 마음대로 욕하고 인정사정 볼것 없이 깔아뭉개준 선배들 덕분에 좌절과 질투와 살의를 극복해가며 나날이 커가는 후배들이 있지 않았겠는가. 선배가 남긴 헤세의 트라우마 덕분에 헤세를 다시 읽으며 뭔가 다른 것이 있나보다, 순진한 독서에 몰입했던 당시를 떠올리면 파안대소의 저의에 상관없이 무려 고마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나왔다.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한 줄 비판을 가할 때조차 작품이 시사하는 큰 그림을 훼손시키지 않고 작가에 대한 존중을 거두지 않는 휴머니즘 서평의 진수를 보여주는 책. 매순간마다 작품과 사랑에 빠져버리는 열정적인 사춘기 소년, 예민한 직관과 열린 감성으로 작품의 빛과 그림자를 단번에 읽어내는 예술가의 서평이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관한 페이지를 읽을 때는 과연 대가다운 안목과 통찰에 무릎을 치게 된다.

헤세는 본인의 작품 속에서, 그리고 넓고 깊은 책세상에서 마치 동서양을 가로질러 영생을 사는 듯 그 목소리가 활발하면서도 융숭깊다. 그가 펼쳐놓은 광대무변한 사유의 세계를 몇줄로 인용하기란, 한줄 밑줄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한 일. 역시 책은 읽어야 한다.

 

그들의 잔을 너무 깊이 들이마셨기에 그들에게 등을 돌릴 수 없는 작가들.-p.182

헤세는 작가 '크누트 함순'에 대해 위와 같이 평했다. 나에게 있어 헤르만 헤세도 그런 작가들 중 하나다. 점점 현실에 매돌되어 리얼 다큐를 찍고 있는 일상이지만 한때 깊이 들이마셨던 세계란 정신과 몸 안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코앞의 일거리들을 해치우고 모두 잠든 밤이 되면 좀비처럼 떠돌며 책 속의 정령들을 만나고 다녔던 방학도 이제 끝났다. 그래도 내게는 읽을 책이 남아있고 영달이에게 읽어줄 책도 더 남아있으며 서평으로 다시 만난 헤세가 내가 사랑한 헤세가 맞아서, 사랑한만큼 훌륭하여서 참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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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2-02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사랑한 헤세~~~~ 메두사 선배ㅎ
책을 읽을때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면 행복하죠~~ 영달이 많이 컸죠?

깐따삐야 2015-02-03 10:19   좋아요 0 | URL
네. 그땐 거인 같던 선배들도 지금 제 나이에 와서 생각해보니 다들 참 어렸구나, 싶습니다. 엄마인 저도 많이 컸다, 많이 컸네, 할 정도로 많이 컸어요.^^
세실님도 여전히 생기발랄 잘 지내시죠?

yamoo 2015-02-0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련한 추억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근데, 제게는 매두사 같은 선배가 없어 좀 아쉽네요..ㅎㅎ

깐따삐야 2015-02-03 1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젠체하는 모습이 싫어서 나는 저런 선배 되지 말아야지, 했었고 그 결심을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후배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또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