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아사다 지로의 <저녁놀 천사>를 읽던 중. 예순이 되어 은퇴하는 날, 회사 배지를 달고 귀가해야 하나, 빼고 귀가해야 하나, 고민하는 남자를 보고는 퍼뜩 동아리 배지가 떠올랐다. 그게 어디 갔지?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짜증스러워하는 말 중 하나가 내 입에서 나오는 그게 어디 갔지, 이다. 무얼 찾겠다고 마음 먹으면 자정이든 새벽 네시든 가리지 않고 온 집안을 후벼대니 당연한 반응이다.  

  거의 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리벽 때문이다. 있어야 할 것은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혹시라도 안 보이면 열일 제치고 찾기에 올인한다. 십수년 전에 책 살 때 끼워받은 책갈피부터 커피믹스 박스에 매달려 온 머그컵에 반찬통까지, 어디 있냐고 묻거든 내 낱낱이 대답해 주리라.   

  하지만 영달이가 일찍 잠들어 저녁 일곱시에 소등한 상태. 상전이 따로 없어 그분이 잠드시면 모든 불은 끄고 발소리는 죽이고 입은 다물어야 한다. 상황이 이러니 배지는 찾고 싶고 어디 두었는지 생각은 안 나고 왔다갔다 하다보면 분명히 깰 테고. 손은 근질거리고 정신은 또렷해지며 금단 현상에 시달리는 피폐한 사람마냥 안절부절. 이미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얼른 잠들어야지, -왜냐하면 일찍 일어나 배지를 찾아야 하니까- 싶어 우유도 한잔 마셨다. 하지만 그럴수록 동아리 명칭이 또렷하게 새겨진 금배지가 어른어른. 모닥불 앞에서 선배들이 반짝이는 배지를 가슴에 달아주던 추억이 상기되며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불탔다.    

  그게 반돈이었나. 한돈이었나. 혹시 언젠가 S양한테 준 건 아닐까. 배지를 들고 금은방으로 가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상상까지 하면서 눈만 꿈벅꿈벅. 이건 병이다. 몇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아주 사소한 계기로 인해 퍼뜩 떠오르는 사물의 이미지. 그럼 기필코 찾아야 한다.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어지럽혀진 뭔가가 눈에 띄면 반드시 정리하고 원래 그 자리에 놓고 자야 한다. 이건 정말 병이랄 수 밖에.

  엄마는 말씀하신다. 느이 집은 그림 같이 해놓구 왜 여기 와서 난리통이냐고. 아이가 있는 집은 치워도 치워도 빛이 안 나기 마련인데 이사한 우리집은 아이 안 키우는 집 같단 말을 많이 들었다. 병적인 내가 손발이 안 보일 정도로 재빠르게 쓸고 닦고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로 친정집에서 뭉개고 어지럽히며 난장판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친정집도 부지런히 치운다. 엄마가 영달이를 잠깐 업고 나가면 그 사이 먼지를 털고 장난감을 치우고 바닥을 빤질빤질 닦아대며 로봇처럼 움직인다.   

  그런데 말 그대로 좀 병적인데다 정리하고 치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슬슬 깨닫고 있다. 나의 이런 점을 특히 영달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 정리한 옷가지들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넣으면 영달이는 도로 빼고 내가 다시 바구니에 넣으면 그때는 손을 마구 좌우로 내두르며 짜증을 부린다. 튀밥을 그릇에 담아놓으면 영달이는 꼭 그릇을 엎어놓고 흐트러뜨리며 먹는다. 내가 다시 담으면 메롱하듯 금방 도로 뒤집는다. 그리고는 어디 봐란 식으로 손을 마구 상하좌우로 휘두르며 튀밥 알갱이를 온 방안에 퍼뜨려놓는다. 그뿐인가. 화장대에 쪽나란히 세워놓은 화장품들도 손으로 스윽 한번 밀어서 쓰러뜨리곤 아랫니 두개를 내보이며 능청맞게 웃는다. 내 고집도 어지간해서 다시 세워놓으면 무슨 여자애가 힘이 그렇게 센지 이번엔 아예 방바닥에 던져버린다. 하루에 수차례씩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정리벽을 너머 정리병인 나는 순간순간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영달이가 상전이니 몸종인 내가 변해야지 어쩌겠는가. 일체의 장식을 삼가고 단순깔끔하게 배치하자, 는 주의인 우리집을 영달이는 참 심심해 하더라는. 결국 남편이 뽀로로 포인트 벽지로 아기자기 장식을 하고 영달이 아니면 결코 사지 않았을 알록달록 매트도 깔고 거실 바닥에는 요즘 영달이가 관심있어 하는 세간살이들을 좌르르 늘어놓는다. 열쇠고리, 휴대폰, 리모컨, 숟가락, 맛집전화번호부책 등. 서랍장 속이나 위에 있어야 할 것들이 주섬주섬 나와 있다.   

  사태가 이러니 아예 마음을 좀 풀어놓고 살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머릿속은 허구언날 싱숭생숭, 뒤죽박죽이면서 뭐 그렇게 깔끔떠는 척 하남. 스스로 자아비판도 해보지만 그 와중에도 어김없이 걸레질을 하고 있다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어이 동아리 배지도 찾았다. 엄마가 꺼내서 확인시켜 주셨다. 손톱만한 것이라도 금은 금이라 그런지 또 쓸데없는 것 갖고 집착한다고 구박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책 찾을 때와 정말 비교되더라는. 엄마의 실용적 기억력과 탄력적 지청구는 참 감탄스럽다.

  우야됐든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 하나. 출산 후 여태 정리 안 된 것이 마음속부터 몸둥이까지 말로 다할 수 없지만 끝내 정리를 마칠 수 없는 것이 일상이고 삶이라는 것. 마치 이북의 매스게임 같은 일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나란 인간이 그만큼 주변 사람들한테 얄짤없고 폭력적이라는 것 아닐까. 오감 발달과 정서적 충만감을 위한 나의 놀이가 중요하지 어차피 꺼내입을 옷 나와 있음 어떻고 들어가 있음 어떠냐는 듯, 그깟 화장품 얼굴에 바를 수만 있으면 되지 서 있으면 어떻고 누워 있으면 어떠냐는 듯 매일매일 온몸으로 솔선수범하는 영달이 덕분에 깨달은 바이다. 얼마 전 엄마는 지나간 일을 회상하며 한탄하는 내게 잊어, 라고 충고하셨다. 가제손수건을 박박 비벼빠는 내게 버려, 라고 명령하셨다. 그때는 더 얘기하면 혼날까봐 그렇게 했는데 때로는 그런 과감함도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은 게으른 안이함이 아니라 편리한 용기였다.   

  어느새 지병으로 자리잡았던 나의 질긴 정리벽도 슬슬 정리가 되어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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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1-04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깐따삐야님. 정말이지 영달이 덕에 깐따삐야님의 정리병(?)도 조금 나아지겠는데요. 영달이가 세상에 온 수천수만가지의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엄마의 정리병 좀 덜어주기가 아니었을까요.

깐따삐야 2010-11-05 11:58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가 봐요. 영달이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저 때문에 받던 스트레스도 조금은 해소되겠죠. 애가 상전이니 도리가 없네요.^^

2010-11-04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5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0-11-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 사무실에 일나가면 정리정리정리정리... 하도 정리를 해 놔서 모차장님은 '너네 집은 얼마나 깔끔할까..', 모여직원은 '언니는 정리를 너무 잘해서 언니랑 일하는게 제일 좋아요' 라고 말을 하지만..
실은 우리집은 거들떠도 안봐요 -_-;;; 절대 집으로 사람들을 델꼬올수 없는 경지지요;;
이렇게 이중인격(일까나.. --a)으로 사는 사람도 있는데 뭘 걱정하세요.

울 엄마가 말씀하시길, 저랑 언니랑 어려서 그릇에 강냉이나 튀밥을 주면 다 엎어놓고 먹기 시작했대요. 뭐든 조금만 주면 그냥 먹는데 많이 주면 엎기부터 시작했다나요?
영달이가 왜 저를 닮았을까요? ㅎㅎㅎ

깐따삐야 2010-11-05 12:04   좋아요 0 | URL
에효, 무스탕님. 그 정도를 갖고 이중인격씩이나.^^ 저는 집에서건 나가서건 뭔가 정리가 덜 되어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편인데 그런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싶어요. 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유난을 떨었다니. 반성합니다.

맞아요. 조금 주면 그냥 먹는데 많이 주면 엎더라구요. 영달이 안에 무스탕님 있었군요. ㅋㅋ

2010-11-05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5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