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매미가 막바지 울음을 울고 있고 이제 곧 가을이다. 이 여름, 호된 더위 속 전쟁 같은 육아를 치러야 했다. 어제 아침엔 영달이가 포도알을 삼키는 바람에 십년감수. 그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처음 보았다. 새파랗다 못해 새카맣게 질린. 우는데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나는 너무 놀라 울먹울먹. 아빠가 등을 두드리고 엄마가 영달이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뭉글뭉글해진 포도알을 빼내자 그제서야 우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안절부절 제정신이 아닌 나를 보았다. 영달이는 언제 그랬냐는듯 안색이 돌아와 다시 생긋거렸지만 나는 이 아기가 정말 내 아기인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안쓰럽고 고마운 마음에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안아주고 또 안아주고. 여우누이뎐의 구미호 어미마냥 가슴절절. 이럴 때 보면 나는 뭣도 아니고 그냥 하염없이 바보 같은 엄마인 것이다. 벤야민은 <일방통행로>에서 '행복하다는 것은 소스라쳐 놀라는 일 없이 자기 자신을 알아채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썼다. 한때 부디 그랬으면, 했고 여전히 일리있는 발언이지만 이거야 원. 엄마들은 예외랄 수 밖에.       

#  오빠가 출장 왔다가 잠깐 집에 들렀다. 엄마는 피로한 기색일랑 싹 접은 채 부랴부랴 국을 데우고 조기를 굽고. 든든한 밥 한끼 먹여보내기 위해 수선을 떨었다. 오빠는 뚝배기에 밥을 말아 조기도 올리고 파김치도 올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참 맛있게도 먹었다. 사람을 보고 웃기는 해도 안기지는 않는 영달이가 외삼촌 품에 가서는 어째 얌전을 떨었다. 땡깡쟁이였던 내가 또 다른 땡깡쟁이 딸을 낳았다는 것이 오빠는 못내 신기한 모양이었고 그참에 옛날 옛집에 살던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 오빠는 어릴적부터 온순하지만 강했고 나이 먹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 그 점 고맙고 든든하지만 단단한 어깨를 보고 있자니 저것이 단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단단하니 얼마나 또 무거울까 싶어 안쓰러웠다. 사춘기 무렵에는 오빠를 향해, 오빠의 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을 향해 복잡한 양가감정도 많았는데 세월이 지났다고 고스란히 묻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오빠도 어렸다는 것. 나도 부모가 되었다는 것. 그런 사실들이 갖가지 모순된 감정들을 뭉근한 이해로 승화시켜주기도 한다. 모처럼 만났는데도 오빠는 오래 있지 못하고 커피 한잔 마시곤 다시 서울로 출발했다. 전천후 돌격기의 양날개 같은 어깨에 힘을 빡 주고서. 당부의 말은 엄마가 다 했으니 나는 영달이를 안고 손을 높이 흔들어주었다.     

#  운전 중에 사고를 낼 뻔 했다. 더구나 뒷좌석에 영달이와 엄마까지 싣고서. 무개념 차선변경녀, 바로 나였다. 졸음운전까지는 아니지만 머릿속이 약간 멍하거나 띵했고 빨리 집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좌측 깜빡이 넣은 채 마구 왼쪽으로 돌진. 사각지대라 불리는 곳의 은색 승합차는 전혀 안 보였고 뒷쪽의 빨간 마티즈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빠앙-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승합차의 뿔난 아저씨 멈춰선다. 욕 먹어도 쌀 만큼 잘못이 명백하므로 손을 반짝 들고 워워, 죄송하다는 사인을 보냈는데 머릿속은 계속 멍한 상태. 어제는 영달이 목구멍에 포도알이 들어가는 줄도 모르더니 오늘은 개념박살 끼어들기로 세 모녀가 다 같이 황천길 갈 뻔 했다. 아무래도 요새 좀 피곤한가 보다. 피곤할 땐 운전하지 말아야 하는데. 가까운 데만 왔다갔다 하다보니 방심하고 정신 안 차렸던 것이 문제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무슨 짓을 저지르며 집까지 왔는지 그제서야 제대로 기억이 났고 반성을 했다. 이런 일이 없는데, 이런 일이 없는데, 만 계속 중얼중얼. 앞으로 정말 이런 일이 없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영달아, 그나저나 엄마 너무 믿지 말아야겠다. 엄마가 요모양 요꼴이래서 미안.      

9월의 시작이 이랬다. 조심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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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0-09-02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성도 조심성이지만, 피곤하실 때는 쉬셔야죠..

깐따삐야 2010-09-02 18:22   좋아요 0 | URL
그쵸? 그나저나 요새는 어째 쉬어도 피곤합니다. 애엄마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닌가 봐요.ㅠ

레와 2010-09-0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얼마나 놀랬을까..!

깐따삐야 2010-09-02 18:25   좋아요 0 | URL
그 순간엔 얼얼했고 집에 도착하니 식은땀이 송송 맺히더라구요. 혹 징크스가 생길까봐 오늘 일부러 어제 갔던 그 길로 운전했어요. 조심 좀 하다보니 이번엔 뒤에서 빵빵! 우리나라에서는 길에 목숨 내놓고 운전하는 것 같아요.

pjy 2010-09-03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사람을 지치게 하지요--; 우선은 피곤을 풀고 충전한뒤! 그담에 조심 또 조심입니다~

깐따삐야 2010-09-03 16:13   좋아요 0 | URL
처서는 말로만 처서였나요.ㅠ 충전 제대로 하려면 백만년은 쉬어야 할 것 같아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