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는 못 속인다고 입춘다운 날씨였다. 아침에 짙은 안개가 끼었지만 정오 무렵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하늘은 온화한 푸른색을 띄었다. 좀 더 가까이서 봄기운을 느끼고 싶어 근처 산성에 갔다. 평일인데도 산악회 사람들이 곳곳에 많이 보였다. 고사를 지내는 모습도 보이고 호일에 싸온 김밥을 먹는 모녀도 있었다. 등산 모자 아래 알록달록 곱게 화장한 할머니들이 남편과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갔다.
남편은 자주 넘어지는 내게 걷는 법부터 가르쳐 주었다. 발끝으로 걷지 말고 뒤꿈치가 먼저 닿도록 또박또박 걸으라고 했다. 안개를 품은 능선과 산에 걸린 구름에 감탄하자 언젠가 지리산 노고단에 한번 가자고 했다. 구름이 내 발 아래서 휘몰아치고 다시 그 구름이 산봉우리에 부딪치며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얀거탑’ 이후로 다른 드라마들이 시시해졌듯 지리산을 한번 다녀오고 나면 다른 산들에 쉽게 마음을 줄 수가 없단다. 딴지를 걸 틈도 없이 지리산에 가고 싶어졌다.
봄을 기다리는 산성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내 목소리만 너무 큰 건 아닐까 싶어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야 했다. 명색이 산인데 아직 추울 거라 생각하고 챙겨 입었던 파카는 조금 덥게 느껴졌다. 평소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 등에 땀이 솟고 두 발이 더워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코끝에 은은히 스미는 솔잎 향과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볕이 나와 내 주변을 공평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운동 부족으로 내리막길에선 자연스럽게 후들거리며 게다리춤을 추었고 남편은 손을 잡아주었지만 나는 그런 내가 재밌어 계속 게다리춤을 추며 내려왔다. 호젓한 숲속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입을 꼭 다문 봉오리들이 가냘픈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너희들은 참 조용하고 성실하구나 싶었다. 그렇듯 단단하고 조용하고 성실한 것을 볼 때면 숙연해진다.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당연한 심상인데도 요즘은 어째 더욱 그렇다.
오랜만의 외식. 얼큰한 육수에 쑥갓향이 좋은 칼국수. 테이블엔 밥맛없는 중앙일보가 놓여 있고 보나마나 글들 참 자알 쓴다. 세계김치연구소 까지는 좋은데 이명박 아이디어라고 굵은 글씨로 박아놓았다. 하여간 툭툭 던지긴 잘한다. 새로운 것도 좋지만 당장 하라는 거나 잘했으면 좋겠다. 강호순이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라는데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수성가한 아집쟁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둘 다 연구 대상이기는 매한가지이다.
저녁엔 엄마가 끓여주신 냉이된장국을 가지고 왔다. 냉이국을 끓이고 달래무침을 하고 봄동으로 겉절이를 만들기 시작하면 봄은 시작된 것이다. 냉이, 달래, 봄동... 봄을 알리는 귀여운 이름들. 새삼 우리말이 참 예쁘단 생각을 한다. 이렇듯 귀엽고 예쁘고 좋은 것만 생각하기에도 하루가 짧고 계절 또한 순식간에 바뀌어 간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 자연은 인간이 깝치지 않는 한 항상 무자극의 위안을 준다. 잠깐 산에 다녀온 것뿐인데도 심신이 조금은 맑아진 기분이다. 이 기분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