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토크쇼에 나온 부활의 김태원이 그런 말을 했다. “학생 시절에 한 번도 차여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곡을 쓸 수 없습니다.” 3등은 괜찮지만 3류는 안 된다고 말해서 탄성을 지르게 만들던 김태원. 그는 노래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말도 참 잘한다. 이번에도 그의 말은 옳다. 네버엔딩 스토리 같은 명곡을 쓰지 못하는 범인들도 한 번 차여보지 않고 어른이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나와 남편은 목에 마구 힘줘가면서 소개팅만 나가면 백전백승이었다느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한테 대쉬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느니, 한 번도 차여보지 않은 것처럼 구라를 치는 일이 빈번한데 물론 서로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남편은 성격 상 호되게 차였어도 조용히 집에 돌아와 발 뻗고 주무실 타입이고 나는 한 며칠 자학하다가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는 타입. 듣자하니 그는 일찍이 대학 동기한테 차였었고 나는 동아리 선배한테 차였었다. 최초의 차임이었다.
D선배.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을 떠올리면 얼굴이 훅훅 달아오르며 내가 왜 그런 사람을 좋아했을까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 그 선배만큼은 군계일학이다. 가끔은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뿌듯할 때까지 있다. 나의 안목은 그때가 최상급이 아니었을까. 남편은 내가 만나보았던 남자 중에 가장 착한 남자고 그 착함은 미덕이지만 갓 스물을 넘긴 그때. 내게 착해빠진 남자는 물에 빠진 남자만도 못했다. 닿을 수 없는 것들에 이끌리던 나이였다.
동아리 현동인 중 최고학번이었던 D선배. 사실 그는 나를 아기 보듯 했었다. 문제는 나를 귀엽게 바라보던 그 눈빛을 내가 사랑으로 착각했다는 데 있었다. 나중에 깨달은 건데, 착각은 자유지만 그 자유에 매몰될 지경에까지 이르면 안 된다. 늘 스스로를 냉동실에 건냉보관 해두었다가 잠시잠깐 외출을 한 것처럼 보이던 그가 내게 시종일관 따듯한 태도를 보였을 때, 나의 므흣한 상상력은 무한정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 설렘만으로도 벅차서 선배에게 닿기까지의 절차를 생각하거나 계획할 수조차 없었다. 별별 생각을 다하다가도 마주치는 순간 얼음! 하고 굳어버렸다. 결국 싹튼 연정을 되새김질만 하다가 선배가 졸업과 동시에 이 도시를 떠나고 나서야 고백이란 걸 했다.
정확히 일주일 후 선배는 아주 공들여 쓴 메일을 보내왔다. 작품성 높은 거절 편지. 그는 장문의 메일 속에서 오히려 나의 생뚱맞은 고백을 칭찬해주고 있었다. 그 나이 땐 그래야 한다고. 다 쏟아버리는 것도 좋다고. 젠틀하게 차는 방법을 아는 남자였다. 내가 울지 않도록 여기저기 당의정을 발라놓아서 이런 메일을 받고 차였다는 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싶을 정도였다. 그는 나를 많이 아껴주었는데 그 글 속에서도 여전히 아끼고 있었다. 그 느낌이 전해져 오자 나는 나의 급작스런 고백이 오히려 미안해졌다. 그래도 거절은 거절이고 차인 건 차인 거고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상처 입은 나는 읽고 난 즉시 메일을 삭제했다. 거절 편지는 작품성과 상관없이 소장가치가 없는 글 중 하나다.
그 이후 몇 차례 그의 홈피를 들락거리고 휴대폰을 쏘아본 적은 있지만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고 깨끗이 돌아섰다. 돌아서지 않으면 어쩌라고. 조바심이 날 때마다 스스로를 윽박지르며 위협했다. 네가 그만두지 않으면 어쩔 건데. 얼마 후 먼저 연락을 취해온 것은 선배였고 그 후로는 고백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착각의 자유가 함께 한 추억까지 매몰시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픔은 깊어 한동안 오래도록 아무도 좋아할 수 없었다. 지금은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쯤에서 그치길 잘했다. 짝사랑의 추억이 스토킹 전과로 변질되는 건 순간이다.
가수 이소라는 실연 이후에 앨범을 한 장 씩 발표한다고 들었다. 김태원은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랑할수록’을 썼단다. 나는 예술가가 아닌 탓에 수많은 일기를 쓰고 동아리에 나가 어줍은 시들을 발표했다. 친구들에게 가차없는 연애 상담도 해줬다. 절대 먼저 고백하지 마. 그리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순간 깨끗이 돌아서. 그렇듯 뻣뻣하게 곧추세우기엔 목도 허리도 예전 같지 않지만 지금도 비슷하게 충고한다. 웬만하면 먼저 고백하지는 마. 그리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순간 웬만하면 그냥 돌아서. 자존심도 뭣도 아니다. 정답도 아니다. 임상경험에 비춘 나름의 조언이다. 더욱이 내가 하라고 해도 안 할 사람은 안 하고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사람은 하고야 만다. 다만, 추해지면 안 된다. 자칫하면 내성이 생겨 습관된다.
P.S. 이쯤에서 김석기 씨에게도 한 마디. 그렇게 뭉개고 있으니 추하다 못해 너절해지는 거다. 마치 부모 빽 믿고 돈으로 사랑도 살 수 있다며 징징거리는 막장 드라마 속 찌질녀 같다. 내가 차여본 사람으로서 충고하는데 국민들이 좋은 말로 거절할 때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