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결혼을 했다. 아이들의 축가가 흘러나오자 활짝 웃는 신부와는 달리 나와 동기 S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남의 결혼식마다 혼자 찔찔 울고 다닌다며 S와 나는 서로 옆구리를 찔러댔다. 보내는 마음은 조금 아쉬웠지만 K의 결혼 덕분에 그 동안 잠시 잊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그새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은 선배와 동기들의 얼굴에선 편안한 안식 같은 것이 느껴져 부러움을 샀다. 사진 촬영을 할 때는 K가 부케를 받으라고 한 것을 두 번이나 거절했던 것이 왠지 미안했다. 부케를 선배 언니가 받았는데 언니도 짝이 없는 것 같았다. 아예 이렇게 된 거면 그냥 동기인 내가 받을 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모처럼 미장원 가서 머리도 만지고 왔는데. 까짓 거 6개월 안으로 후다닥 가면 되지 뭐? -_-
하객들로 북적대는 식장을 빠져나와 오랜만에 동기들끼리 회포를 풀었다. 오지랖 넓은 S의 제안으로 모임 하나가 그 자리에서 급! 결성되었다. 사심 없이 이런저런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에 대한 열망을 모두가 느끼던 바였는데 마침 이렇게 모였으니 구체적으로 다음 모임부터 추진하자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군소리 없는 만장일치로 S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연락과 엑셀에 능한 J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총무로 뽑혔다. 이번에 신규발령이 난 두 동기들을 마지막으로 학부 때 친하게 지내던 동기들이 이제 모두 드디어 같은 길을 가게 되었고 누구의 말처럼 다시 모인 이 자리가 괜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친하게 지내던 K의 결혼으로 쓸쓸함에 사무쳐하던 S는 한꺼번에 모인 너희들 덕분에 힘이 팍팍 솟는다며 모임에 대한 강한 추진 의지를 드러냈다. 원래 시험 때만 되면 여자 아이들 노트를 빌리러 다니던 J는 지금도 꼬박꼬박 가계부를 쓰고 있단다. J는 조만간 계좌번호 문자로 전송할 테니 월급날에 맞춰 늦지 않게 입금해달라고 특유의 꼼꼼함을 과시했다. 모습들은 조금씩 달라졌는데 하는 짓은 별다르지 않아서 나는 끊임없이 손뼉을 치며 쿡쿡거려야 했다.
3월이 되면 친구들은 새로 발령을 받거나 본래 있던 학교로 돌아가고 나도 대학원으로 돌아간다. 1999년도의 우리는 채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애송이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 꿈을 이루고 다시 한 자리에 모인 지금의 모습 역시 사회의 애송이들이긴 마찬가지였다. 무에 그리 시시콜콜 할 이야기도 많고 풀 이야기도 많은지.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의 화제가 직장생활과 재테크와 결혼 등등으로 옮겨졌다는 것. J는 소개팅 했던 여자가 마음에 든다고 지갑 선물을 고르려는 데 어떤 게 좋겠냐며 우리 여자 동기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뷔페에서도 인삼만 우적우적 씹던 실리주의자인 또 다른 J는 재테크의 달인인 S에게 이것저것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대학원 시스템에 대한 질긴 호기심과 회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 빈축을 사기도 했다. 초임 발령을 받고 염려가 많은 E와 H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 도토리 키 재기에 다름없을 신출내기인 우리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야기에 이야기를 거듭해 보아도 결국 시간 지나면서 스스로 터득하라는 맥없는 결론만 났다. 아마도 다음 만남에 그들은 언뜻 어마어마한 것 같지만, 별로 새롭지도 않은 숱한 이야기들을 가져올 것이다.
사회에 나와 만난 좋은 동료도 있지만 동기는 참 편한 것 같다. 갓 스무 살 대학에 던져지다시피 해서 서로 우왕좌왕하던 모습에 익숙한 사이라 그런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다지 부끄러울 것도, 위축될 것도 없고 마냥 즐거웠다. 서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서도 나 아니면 누가 너한테 이런 쓴 소리 하겠냐고 큰 소리 쳐대는 것까지 예전과 똑같았다. 단과대 특성 상, 남자 동기들이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여전히 조금 짓눌려 있는 형상은 어쩌지 못하지만 어느덧 남자로 성장했다는 듯 갑빠에 힘주고 있는 모습이 눈물 나도록 귀여웠다. J는 부실한 갑빠를 내민 채 독사진을 찍겠다고 주장하여 또 한 차례 빈축을 사기도 했다. 역시 굴하지 않고 사진 한 방 반드시 남기고 마는 녀석은 정말 하나도 달라진 게 없더라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참 오지게 안 변하는 동물인 것 같다.
K는 소란스런 학생 하객들에게 오늘도 버럭버럭 생활지도를 하며 우리 곁을 떠났다. 눈부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아이들을 향해 소리 지르는 K는 역시 멋졌다. 양복 안 입고 온 남자 동기를 사정없이 꾸짖던 새 신부 K. 칼있쑤마 작렬하는 매력적인 그녀를 데려간 그 분은 참 행복하여라. 비록 오늘도 눈물을 찔끔거리긴 했지만 한 자리에 모인 동기들과 새로 결성된 모임 덕분에 하루 종일 참 많이도 웃었다. 보냄과 만남이 함께 했던 분주한 오늘. 여전히 열심히 착하게 살고 있는 동기들 덕분에 새로운 기운을 많이 얻어온 하루였다. 그들의 앞날에 진심으로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