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들을 뒤적이다가 책장을 보니 생뚱맞은 책 몇 권이 눈에 띄었다. ‘경제기사는 돈이다.’, ‘돈의 비밀’, ‘우울한 경제학자의 유쾌한 에세이’ 등등의 책이었는데 내가 이런 책을 샀을 턱은 없고 가만 생각해보니 장가가기 전, 오빠가 구입한 책들이었다. 사춘기 무렵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해가면서 폼 잡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렇게 팍팍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군 제대와 동시에 ‘모든 역사는 일요일에 이루어진다’며 말수는 더 적어지고 눈빛은 더 비장해졌더랬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때론 든든하고, 때론 쓸쓸했던 것 같다.

 사람이 낭만을 잃지 않고 사는 일이 생각보다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아이들이야 워낙에 영악해지고 시니컬해져서 나보다 더 사막하구나 싶을 때도 많지만. S양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니는 누군가가 언니의 비밀을 퍼뜨리고 다니면 어떨 것 같아?” “그야, 당연히 기분 나쁘지. 이런 배신자! 걔랑은 안 놀거야.” “그래? 그 비밀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참하고 반듯하여 칭찬을 먹고 사는 S양이 그럴진대 다른 아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듯.

 세상의 차가운 룰에 일찌감치 길들여진 근래의 아이들 외에 내 또래 80년생을 비롯하여 다소 애매한 감수성의 세대가 있는 것 같다. 별 헤는 밤과 돈 세는 밤의 갭이라고 할까.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을 읊조리던 열다섯의 촉촉했던 청춘은, 통장 하나에 아파트와 통장 하나에 교육비와 통장 하나에 노후자금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이다. 독서행위 그 자체라는 순수한 동기로 '데미안‘과 ’독일인의 사랑‘을 마음으로 읽었던 십대의 감성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채, 잠재된 낭만을 억누르고 배반하는 삶. 별로 새삼스러울 것 없는 현실이고 형이하학적 일상이 주는 만족감에 길들여지고 나면 그만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역사처럼 책꽂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의 눈길에 조금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별의 비밀이 더 이상 돈의 비밀만큼 호기심을 끌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 비교적 낭만이 남아 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는 시시각각 더해가는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이긴 하면서도 그 야무진 포즈에 있어서만큼은 96년생 S양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나처럼 도시의 세련된 타산에 영원히 적응하기 힘들게끔 타고난 얼치기들은 가능한 한 보폭을 줄이고 부대낌을 최소화하며 소심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어린 마음을 설레게 했던 밤하늘의 All Twinkle Magic은 더 이상 Automatic Teller Machine의 24시간 불빛만큼 관심을 끌지 못한다. 과거 어느 시절에인가 유전자 속에 새겨진 채 틈만 나면 형형한 별빛처럼 스멀대는 감성, 그 감당불가의 감성으로 인해 현실 속에서는 어딘가 늘 어설프고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내 또래의, 나를 닮은 젊음들. 이른 세대의 동지애든, 어린 세대의 자기애든, 그 어느 편으로도 완벽히 기울지 못하는 낀 또래의 양가감정은 나만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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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28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또래 80년생을 비롯하여"- 이 부분에서 확실하게 세대차이를 느끼고 있는 중...
(아울러. 낭만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되버린지라..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도 역시나 돈과 경제 혹은 부동산에 관련된 책들이고, 모든 학문 또한 앞에 "순수"가 붙어버리면 배굷는다는 인식이 강하게 풍기는 사회구조상 이리도 모질게 변해버린게 아닐까 라고 생각 중.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낭만의 불꽃이 켜져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생각 중..
-도라지 위스키에 나름대로 차려입은 마담에게 실없는 농담 던지면서 메피스토가-

깐따삐야 2008-01-28 18: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90~99 학번 안에는 들어가시는 거죠? 아닌가. -_-a
이 곳이야 책 읽는 낭만알라디너들이 숱하지만 밖은 참 다른 것 같아요.
산삼주도 아니구 도라지 위스키는 뭔가요? 대낮에 지금 마담이랑 노시는 거여요? 마님하고 주니어한테 일러야겠다. =333

Mephistopheles 2008-01-28 19:32   좋아요 0 | URL
더더욱 세대차이를 느끼게 하는 답글...
최백호씨의 "낭만에 대하여"란 탱고풍의 가요 가사라는 것...

이매지 2008-01-28 20:01   좋아요 0 | URL
전 80년대생이지만 도라지 위스키 알아요 ㅎㅎㅎ
메피님 너무 세대차이 느끼지 마세요 ㅎ

낭만을 잃지 않고 사는 건 정말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요새는 어릴 때부터 계속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지라
너무 팍팍하게 자라는 것 같아요.
뭐 저도 통장하나와 아파트 하나 뭐 이런걸 위해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거지만요. 쩝.

웽스북스 2008-01-28 20:24   좋아요 0 | URL
난 80년대생이고 낭만에 대하여를 알지만 도라지 위스키를 몰랐어요
(가사를 몰라서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나나나나나나나나~ 이렇게 불렀다는 거 ㅋㅋㅋ)

깐따삐야 2008-01-29 00:45   좋아요 0 | URL
메피님- 오오... 그랬군아. 몰랐어염. 최백호 아저씨는 아는데.

이매지님- 앗! 이매지님은 도라지 위스키를 아신다! 요즘 그렇죠? 할랑하게 살다보면 막 치이게 되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독서실은 참 외로운 곳인데... 그래도 열심히 하셔요.^^

웬디양님- 한 술 더 뜨네. 미쵸미쵸! ㅋㅋ

깐따삐야 2008-01-29 00:47   좋아요 0 | URL
살청님- 어디서 구라를! 그것도 재미도 없는 구라를? =333

깐따삐야 2008-01-29 01:02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저는 낭만고양이로 응수하리다요!

웽스북스 2008-01-29 01:36   좋아요 0 | URL
그럼 난 낭랑18세를 개사한 낭만 29세? 막이러고 ㅋㅋㅋ

깐따삐야 2008-01-29 01:44   좋아요 0 | URL
아! 정말 맥주 마시면서 노래 땡기고프다. (오... 과거 전력 나온다.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9 01:57   좋아요 0 | URL
사실 여기서 저처럼 구슬프게 "낭만에 대하여"를 부를 사람은 아마도 없을 껍니다.=3=3=3=3

마노아 2008-01-29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 쓰고 답장을 받았는데, 다시 답장 보내면서 윤동주의 '별헤는 밤'을 써서 보냈어요. 그랬더니 더 이상 답장이 안 왔어요. 상처였다구요. 흑....ㅜ.ㅜ

깐따삐야 2008-01-29 01:26   좋아요 0 | URL
시만 보내지 마시고 사진을 함께 동봉하셨으면 당근 답장 받으셨을텐뎅~ ^^
별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었나 보네요. 어릴 때 딱지 놀이를 하다가 별 갯수가 모자라서 가방을 들어줘야 했다던가 하는... ㅋㅋ

깐따삐야 2008-01-29 01:37   좋아요 0 | URL
우앗! '국인 위문편지'란 제목만 빼곤 넘흐 좋아요오! ㅋㅋㅋㅋ


깐따삐야 2008-01-29 01:44   좋아요 0 | URL
군대 안 다녀오셨어요? 어쩐지... 중얼중얼...

깐따삐야 2008-01-29 01:51   좋아요 0 | URL
하긴 제가 나라였어도 살청님은 그냥 집으로 보내드렸을 것 같아요. 이거야 원. 국민들이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있나. ㅋㅋㅋㅋ

순오기 2008-01-29 01:54   좋아요 0 | URL
ㅎㅎ 난, 위문편지에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를 인용했는데, 담임샘이 부르시더니 고치라고 했어요~ㅎㅎㅎ그때 난, 정말 순수했었나봐! ㅋㅋㅋ
데미안, 독일인의 사랑을 읽던 그 시절이 좋았어요.ㅠㅠ

깐따삐야 2008-01-29 01:5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순오기님 덕분에 야밤에 찰리 브라운 포즈로 확 얼굴 제껴가며 웃었습니당. (독일인의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책 중의 하나에요.^^)

가만 보니 사진이 우째 아오지 탄광을 배경으로 찍으신 것 같아요. 컴컴허니... ㅋ


Mephistopheles 2008-01-29 01:58   좋아요 0 | URL
군대는 저도 안갔습니다..신검받으러 갔더니 군의관이 늬 눈은 장식이냐..니가 군에 가면 분명 아군 쏴버릴꺼다..옛다 면제...라더군요.
(살청님의 경우...북에서 귀순용사도 전방에 세우는구나 할지도 모릅니다..)

Mephistopheles 2008-01-29 02:02   좋아요 0 | URL
특수임무...는 제가 90년대 중반 여후배들에게 잘 써먹었던 수법이였습니다.
선배는 왜 군대 안갔어요.../미안해 나 내년까지 그 이유 말못해..라면서..키득키득..

마노아 2008-01-29 02:21   좋아요 0 | URL
문제는 제가 증명사진도 같이 보냈다는 거죠. 사진 보고서 급 실망했나봐요..;;;;

깐따삐야 2008-01-29 02:2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야양청스 남성멤버들 확 갈아버리고 싶으당. ㅠㅠ

교복 입고 찍은 사진이라 그래요. 비키니였어야 하는뎅.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9 02:36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무섭습니다...믹서기로 갈다니..한니발 렙터도 아니고...

깐따삐야 2008-01-29 02:44   좋아요 0 | URL
살청님- 그냥 솔직히 졸리니까 잔다고 하세요. 사람이 말이야...

메피님- '갈아만든 야양청스' 해갖구 방문판매 들어가야겠당. ㅋㅋ

깐따삐야 2008-01-29 03:07   좋아요 0 | URL
다리도 안 모으고 졸고 있었던 거 다 알거든요? 흥!

웽스북스 2008-01-29 09:46   좋아요 0 | URL
깐따님 우리 어떻게, 공개모집 공고라도 내볼까요?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9 11:12   좋아요 0 | URL
교주가 더 이상 남성교인모집을 금지시킨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성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라고도 합니다.

깐따삐야 2008-01-29 19:28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남자 없던데. 남자의 탈을 쓴 여자들만 우글거리던데. -_-
아무래도 그래24나 교복문고를 뚫어봐야 할 듯?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