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

- 조정권


풀밭에 떨어지면
풀들과 친해지는 물방울같이
그대와 나는 친해졌나니
머언 산 바라보며
우리는 노오란 저녁해를 서로 나누어 가졌나니

오늘 먼 산 바라보며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대의 무덤
빈 하늘 가득히 비가 몰려와
눈알을 매웁게 하나니

  이 영화를 세 번 봤다. 처음 볼 때는 잭(제이크 질렌홀 분)과 에니스(히스 레저 분)의 관계가 불편했고 두 남자간의 감정이 낯설었다. 두 번째 볼 때는 브로크백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두 ‘남자’가 아니라 두 ‘인간’의 사랑이 보였다. 히스 레저의 비보를 전해 듣고 세 번째로 보게 된 브로크백 마운틴은 위의 시처럼 빈 여백 가득히 아픔이 몰려와 눈알을 매웁게 했다.

 60년대, 8월의 브로크백 마운틴. 양떼 방목장에서 함께 일하게 된 잭과 에니스는 차츰 마음을 터놓는 우정을 넘어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다정하고 활달한 잭에 비해 속을 잘 내비치지 않고 과묵한 에니스. 각기 다른 성품의 두 사람은 짧은 여름 동안의 애틋한 추억과 미묘한 감정을 뒤로 한 채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평범한 일상을 구가하던 두 사람. 4년 만에 잭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엽서가 도착하고 에니스는 잭을 보자마자 과거의 감정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그러나 단 둘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픈 잭에 비해 에니스는 이미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이후로 잭은 일 년에 한두 번, 14시간씩 트럭을 몰고 에니스에게 달려오지만, 두 사람의 만남을 묵묵히 받아주는 곳은 브로크백 마운틴뿐이다.

 길고긴 기다림 끝에 잭은 지쳐가고 에니스도 그로 인해 힘들어 하지만 두 사람의 뚜렷하고 진실한 감정에 비해 앞날은 불투명하고 가파르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니스에게 ‘수취인 사망’이라는 엽서가 반송되어 오고 에니스는 잭의 갑작스럽고 비참한 죽음을 전해 듣는다. 유해의 반이 묻혀 있다는 고향집을 방문한 에니스. 잭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방의 옷장 구석에서 두 사람이 브로크백에서 헤어지던 날, 마지막으로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셔츠 두 장을 발견한다.

 영화 초반에 내 셔츠가 없어졌다는 에니스의 말에 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나도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이었다. 덕분에 끝나갈 즈음 옷장 구석에서 찾은 셔츠 두 장은 그 슬픔을 배가시켰다. 검게 말라버린 혈흔은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에니스와 브로크백을 그리워하던 잭의 아픔을 보여주는 듯 했다. 에니스는 그토록 다감하고 섬세했던 잭에게 사랑한다는 말 대신 "Jack, I swear."라고 말한다. 떠나기 싫다고, 떠나지 말라고 할 수 없기에 혼자 주먹으로 벽을 때리며 오열하던 에니스다웠다.

 영화는 뜨거운 고백 대신 침묵을 고수하며, 시정의 소란함을 여백으로 처리한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서 잭과 에니스는 누구의 시선에도 신경 쓸 필요 없이 마음껏 교감하고 사랑한다. 하늘과 가까운 브로크백은 그들의 사랑을 받아주지만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그들의 사랑은 비난당한다. 뜨거운 열정과 사무치는 그리움은 인간 대 인간이 아닌 남자 대 여자일 때, 관습이라는 기준에 의해 노멀함으로 인정받는다. 사람들은 사랑의 불가해함을 알면서도 불평등함에 대해서는 잊고 산다. 숨어 있는 소수의 진실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마련이고 그것이 브로크백 아래의 현실이다.

 고인이 된 히스 레저는 곧 에니스였을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기쁨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듯 오랫동안 약물에 의지해왔다는 그는 아마도 남몰래 웃거나 울고 있었나 보다. 다음달 2월 22일은 이은주의 기일이고 히스 레저는 지난 1월 22일에 죽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배우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이 참 안타깝고 쓸쓸하다. 내향적이고 섬세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화려한 배우로 스크린에 설 때 마음을 다칠 일도 잦은가 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히스 레저의 죽음으로 사랑의 이면을 넘어 생의 이면까지 담게 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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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2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읽었을 때 그냥 단순히 약간은 노골적인 동성애를 처음 만나고 흡...했다가 마지막 옷장에서 발견되는 포개져 걸려 있는 셔츠 두벌의 묘사를 읽으면서 아..했었어요..

깐따삐야 2008-01-25 22:06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메피님 페이퍼를 읽고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저도 불편한 동성애 영화, 그 이상을 생각하기 힘들었는데 세 번을 보고나니 그제서야 아... 합니다.^^

Mephistopheles 2008-01-25 22:40   좋아요 0 | URL
단편이 모여 있는 에나 프루의 책도 좋았어요..읽어보셨나요??

깐따삐야 2008-01-25 22:47   좋아요 0 | URL
아뇨? 브로크백 마운틴도 책으론 아직 못 읽었어요...

Mephistopheles 2008-01-26 00:49   좋아요 0 | URL
브로크백 마운틴...이 제가 말한 에나 프루의 단편집 묶음 제일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편이거든요. 책은 황량하고 거칠거칠하지만 좋았다는..^^

깐따삐야 2008-01-26 00:5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읽어보고파요!
표현이 잼나요. 황량하고 거칠거칠하지만 좋다...ㅋㅋ

순오기 2008-01-25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못 봤는데 깐따님의 후기로 촉촉히 젖어듭니다.
언제 빌려다 봐야겠어요.

깐따삐야 2008-01-25 22:08   좋아요 0 | URL
'동성애' 중심으로 보지 마시구 '꽃미남' 중심으로 보시면 더 즐거우실 거에요. 저도 처음에 그랬거든요.^^

2008-01-26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6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1-26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님의 영화 리뷰 너무 좋아요. 이 영화 보기 직전에 엄청 화나는 일이 있었어요. 근데 영화보다가 다 잊을만큼 푹 빠졌었죠. 작가의 동명소설 책에 대한 리뷰로 하이드님의 리뷰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지금은 리뷰를 다 지우셔서 제목을 확인할 길이 없네요. 아마도 제 기억에 '외로움도 침범할 수 없는 고단함'... 이었을 거예요. 저도 나중에 소설 읽어볼 생각이에요. ^^

깐따삐야 2008-01-26 01:32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처음엔 좀 멍했구요. 두 번째 볼 때부터 좋았던 것 같아요.^^
메피님도 권해 주시고, 마노아님도 좋다 하시니 책을 꼬옥 읽어봐야겠네요!

turnleft 2008-01-26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스 레저의 죽음에 가슴이 촉촉해진 분들이 많으시군요.
리뷰 멋지게 잘 쓰셨어요. 저는 영화 보고 그저 가슴이 먹먹해서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답니다.

깐따삐야 2008-01-26 23:56   좋아요 0 | URL
히스 레저의 사망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메피님 페이퍼를 읽고 알게 됐어요. 자연스럽게 이 영화를 떠올렸고 다시 보게 됐죠. 침묵과 여백이 많은 영화라서 보고나서 먹먹해지는 기분, 알 것 같아요.^^

라로 2008-01-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오늘 캠프에서 돌아왔어요,,,
남편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다가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어요,,,각자 아이들을 옆에 끼고
주문을 한뒤 마주보는데
남편의 첫마디,,,"알지? 죽었데,,,"
제가 그랬어요,,,"아직도 안믿어져,,,"

브로크백 마운틴,,,제겐 예사롭지 않은 영화였어요,,,책은 더 그러했구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깐따삐야 2008-01-26 23:57   좋아요 0 | URL
제 또래인데 참 안타깝죠...
그나저나 배우의 죽음에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비님네 부부의 모습이 역시 부럽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