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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사람의 마음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사람의 성격은 각각 다르다. 사람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마음이 아니라 성품이며, 그 성품은 나아갈 행동의 향방을 결정지운다. 마음과 성품의 차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해를 끼쳤던 사람이 잘 사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누구나 비슷하다. 다만, 여리고 무른 사람은 조금 속상해 하기만 할 것이다. 독하거나 오기가 있는 사람은 때를 보았다가 복수의 계기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누가 더 선한가. 아무도 선하지 않다.
가까이 지내던 동료 중에 곤란한 궁금증이 생기면 꼭 나를 시켜 질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멋 모르고 응해주다가 나중에 사람들의 낯빛을 보고 아차, 싶었더랬다. 나의 착오는 수줍음과 내숭의 차이를 혼동한 데에 있었다. 진정 수줍은 사람은 잇속을 챙기는 데에도 서툴 뿐더러,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조차 부끄러워 한다. 교묘한 우회전법으로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잇속을 챙기는 그를 보며 내가 배운 한 가지는 가만히 있을수록 이익이 가마니로 떨어진다는, 참으로 게을러빠진 교훈이었다. 그를 A로 놓고, 그 가운데 내가 있고, 또 한 사람의 동료인 B가 있었는데 A와 B는 여건상으로나, 연령상으로나 친밀하게 지낼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음에도 융화되지 못했다. 나중에 이유를 깨닫고 보니 간단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닮아 있었기에 말도 섞지 않은 채 미리 알아보고 경계했던 것이었다. 스물넷 이후였던 것 같다. 사심 없는 교제라는 것에 대해 사심 있는 회의를 품게 된 것이.
나쓰메 소세키는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인간의 속마음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심리소설의 대가라고 불리우는 슈테판 츠바이크나 아르투어 슈니츨러처럼 적나라하거나 악랄하지 않다. 그의 화자들은 얌전한 글방도련님이자 정갈한 에고이스트이다. 인간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표정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절제되어 있고, 사사로운 감정과 사회의 윤리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을 만큼 정제되어 있다. 웃음과 눈물의 자유를 외면하고 있는 소세키의 백수들은 고상하지만 고통스럽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않고 아버지와 형의 경제력에 기댄 채 유유자적하고 있는 고등룸펜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근대 일본에서 빵을 위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는 고귀한 한량인 동시에, 아버지가 누누히 강조하는 '성실'과 '열의'에 무관심한 사회 부적응자이다. 대학 시절, 진심 어린 소통이 가능했던 친구 히라오카가 사회에 나온 이후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간 느낌을 받으며 다이스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은 히라오카만이 아니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현대 사회는 고립된 인간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대지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 위에 집을 지으면 금세 토막토막 분리되어 버렸다. 집 안에 있는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문명은 인간을 고립시킨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 히라오카와 친하게 지내던 시절의 다이스케는 남을 위해서 울기를 좋아했었다. 그런데 점점 울 수가 없게 되었다. ... 서구 문명의 압박을 받아서 그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며 격렬한 생존 경쟁의 무대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을 다이스케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p.142 문명에 동화되기엔 너무 데카당하지만, 그 데카당함을 유지하려면 재빨리 시류에 편승하여 자본을 쥐게 된 아버지의 경제력에 의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다이스케의 운명이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덕목에 반하는 그의 '나태'와 '무관심'은 스스로의 아이러니한 운명에 맞서는 최후의 자존심일지도.
이러한 다이스케로 하여금 빵을 구하러 가게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히라오카의 부인 미치요이다. 친구의 여동생인 미치요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죽은 친구에 대한 무거운 부채감과 결단력 부족으로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히라오케에게 미뤄 버린다. 직업사회의 경쟁에서 번번히 실패하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히라오카는 병든 아내 미치요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지 못하게 되고, 내막을 파악한 다이스케는 미치요에 대한 옛 감정이 되살아나며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갈등한다. 기대했던 집안과의 결혼이 수포로 돌아가고, 다이스케가 미치요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아버지와 형은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린다. 이제 다이스케는 푹푹 찌는 더위 속으로 직업을 구하기 위한 발걸음을 뗀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친구의 아내를 사랑했네, 라는 삼각관계의 통속성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미덕은 심플한 플롯 안에 정교하고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다이스케의 심경이다.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는 담담한 어조로 자기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마음을 읽어가는 과정은 차분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한편으론 점점 문명화 되어가는 일본 사회에 쉽사리 동화될 수도, 전복할 힘도 없기에 시종일관 어정쩡한 포즈만을 취하고 있던 다이스케가 미치요를 동정하고 그녀에게 스스로를 거는 행위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해 보이지가 않는다. 과거의 비겁한 자신을 부정하고, 물신화된 결혼을 종용하는 아버지와 형을 부정하고, 실패에 찌들어 사랑을 망각한 히라오카를 부정하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 적이 없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경제 사정으로 인해 신앙도, 믿음도 잃어버린 일본사회를 부정하는 반항의 행위는 아닐까. 일자리를 구하러 나와 전차를 탄 다이스케. 그가 새빨갛게 타오르는 더위 속에서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은, 숨막힐 듯 후텁지근한 문명에 대한 구토의 징후처럼 느껴졌다.
다이스케는 '마음'에서 유서를 남기고 떠났던 선생님의 과거 분신일 듯 싶다. 쉬이 자존심을 버릴 수 없는 자는 고독해지고, 양심을 외면할 수 없는 자는 우유부단해진다. 다이스케는 바깥 사회에 적응하는 대신 내면 세계에 길들여짐으로써 때로 비웃음을 면치 못한다. 들여다보면 대개 거기서 거기인 게 사람의 마음이지만 성정에 따른 선택에 따라 누군가는 하리오카가 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다이스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다이스케를 비웃는 주변 인물들을 조롱하는 동시에, 주변 인물들을 무시하는 다이스케를 반성하게 함으로써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거침없지만, 결코 터프하지 않다. 한 가지도 제대로 버릴 줄을 모르지만, 참 양심적인 작가다. 그의 미덕은 격조 높은 이율배반에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