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90대 80대 70대 60대 4인의 메시지
피천득 외 지음 / 샘터사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2003년 4월에 가졌던 대담을 채록, 월간 샘터 400호 기념으로 나왔던 책이다. 1부는 피천득 선생님과 샘터사 고문인 김재순, 2부는 법정 스님과 소설가 최인호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피천득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 상냥하고도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 같아 좋았다. 이 분은 다시 뵈어도 참 귀여우시다. 예전에 '인연'을 들고 '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하신 적이 있는데 검버섯이 피어나는 얼굴 안에 아이 같은 천진함이 깃들어 있어 참 귀여운 할아버지네, 라고 생각했었다. 금아라는 예쁜 아호처럼 그야말로 맑고, 곱고, 깨끗하게 늙어가셨던 분. 동시에 아래 인용한 구절처럼 겸손한 예지까지 겸비하셨던 분.

금아: 그런데 소설에 보면 사랑방 손님이 떠나간 후 계란 장수가 왔을 때 어머니가 "이제 계란 먹을 사람이 없어요"라며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전 그게 아주 못마땅해요. 사랑하는 딸에게 계란을 사 먹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 p.37

금아: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은 대개 글을 좋아하고 문장이 좋은 그런 친구들인데 일반적으로 가난했지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좋은 글이란 가난 속에서 나오거든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남보다 더 물질적인 향락을 누리며 산 사람들은 고생하면서 산 사람들의 내면을 잘 알 수가 없어요. - p.62

 나이 먹을수록 친구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친구의 숫자는 더욱 줄어든다. 누군가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깊이를 더해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나로부터 자꾸만 미끄러져 간다. 시정의 대화에 둔감한 나는 연세가 있으신 어른들이나 한참 어린 아이들과는 비교적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인데 별로 터울이 안 지는 또래들 사이에선 보기좋게 연기만 하고 있을 뿐.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 물론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나를 향해 솔직하고 재미있다는 평가까지 내려준다. 어쩌면 일리가 있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너만큼은 계속 솔직해라, 앞으로도 웃겨주길, 이라는 암묵적 명령처럼 들리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머리가 조금씩 아파오고, 입술이 마르고, 그 자리에 대해 회의감이 들 무렵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신들과 이야길 나누느니 샘터에서 나온 '대화'를 읽겠어요, 라고 말하진 못하더라도 이젠 점점 체력도 달리고 소갈머리는 옹졸해지는데 굳이 소모스러운 수다에 끼일 필요는 없지 싶다.

 가장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 중의 하나가 그이가 없는 자리에서의 뒷담화인데 요래조래 얽혀 사는 사람인 이상, 전혀 안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도가 지나치면 눈살이 찌푸려지기 마련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그 부분이었다. 돌아가는 이익에 따라 서로를 헐뜯던 어제의 웬수가 오늘의 다정한 친구로 지내는 것에 대해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나로서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황희 정승이나 스위스마냥 중립노선을 지키곤 했다. 그조차도 버거워지면 너무 피곤해서 말수가 줄어든 것으로 무마하기도 하고.

 불의만 보면 인내심이 솟구치는 비겁한 회색분자여!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나의 고집은 나 자신을 사수하기 위한 것일 뿐. 타인과 쓸데없이 넝쿨지기 위한 것이 아닌 바. 비 오기 전, 조용조용 줄지어 피신하는 개미처럼, 약하고 무능한 나의 생존본능이었다. 책과의 대화로 에너지를 장전하여 세상에 나가면 어르신들은 이런 내가 순진하고 딱해서, 아이들은 그야말로 수준이 맞아서, 어쩌면 나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위안까지 받으면서, 스스로의 조숙함에 으쓱해지기도 했겠지.

 넓어진 세상, 대화의 통로와 방법이 훨씬 더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 혹은 서로 다른 코드를 가졌더라도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문학계의 훈남, 최인호와 불교계의 완소남이신 법정 스님의 대화는 그런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고도 부럽게 보였다.

최인호: 노래 가사도 예전과는 무척 많이 달라졌어요. '네가 날 버려? 나도 널 잊어버릴 거야' 같은 내용들이더라고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같은데 뭔가 왜곡된 느낌이에요.
법정: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그러니까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도로 무른다고 그렇게 수고들을 하지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이기적인 흥정이지요. 사랑은 따뜻한 나눔이고 보살핌이고 관심이지요. 더 못 줘서 안타깝고 그런 것이 사랑인데 말이지요. - p.80

최인호: 주인공이 못 되는 것이지요.
법정: 그렇지요. 완전히 소도구로, 부속품으로 전락해 가는 것이지요. 우리의 교육은 사람을 활짝 펴게 만들지 못하고 잔뜩 주눅이 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해외에 나가 보면 학생들 표정이 아주 발랄한데 우리 아이들은 굳어 있어요. 그래서 기회만 되면 술을 마시고 때려 부수고 하는 것이지요. - p.99

최인호: 문학상의 심사위원도,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강의하는 사람도 아닌, 글 쓰는 사람으로 사는 일. 저는 창작이 제 남은 삶을 채우기 바랍니다.
법정: 참 소중한 꿈입니다. 내게도 꿈이 있지요.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남은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군요. 그리고 추하지 않게 그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 p.118

최인호: 우문입니다만, 스님도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으신가요?
법정: 그럼요. 사람은 때로 외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을 모르면 삶이 무디어져요. 하지만 외로움에 갇혀 있으면 침체되지요. 외로움은 옆구리로 스쳐 지나가는 마른 바람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그런 바람을 쏘이면 사람이 맑아집니다. - p.140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놀라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예술가들은 소통 부재를 화두로 삼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올려가며 소통을 시도한다. 시대의 징후를 느끼는 독자와 관객들은 문득 쓸쓸해지면서도 굳게 입을 다문다. 상대의 닫힌 입을 보았거나, 세치 혀에 찔렸던 아픔을 상기하면서.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는 어르신들의 대화를 읽으며 지식의 내공이나 연륜에서 묻어나는 지혜가 부러웠다기 보다는, 서로 깍듯하게 삼가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나가는 대화법이 참 그립고도 소중했다. 세치 혀에서 꽃이 피는가, 독침이 돋는가는 자신에게 달린 몫. 스스로에게 엄격하되, 타인에겐 겸양의 자세를 잃지 않는 자세를 연마하고 또 연마하여 각자의 혀에서 화사한 꽃이 피어나고 그것들이 만발하여 향긋한 이야기꽃을 피워보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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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08-01-0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주옥같은 책을 만난 것 같아요!

리뷰만 읽었을 뿐인데 날이 선 제 마음이 조금은 무뎌지는 느낌이네요..

아.. 좋다!! ^^*

깐따삐야 2008-01-08 12:24   좋아요 0 | URL
레와님, 반가워요.^^
이 책 옆에 두고 가볍게 읽기에 좋아요. 그러면서도 내용은 가볍지 않구요.
저는 피천득 선생님의 상냥한 어조를 다시 볼 수 있어 좋았답니다.

2008-01-23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3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1-24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이군요! 축하해용, 깐따삐야님^^

순오기 2008-01-24 15:21   좋아요 0 | URL
저도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 축하해요 깐따님! ^^
멋진 책에 멋진 글이군요.

깐따삐야 2008-01-24 16:44   좋아요 0 | URL
어떤 친절한 분이 알려주셔서 저도 어제 알았어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당.^^

네꼬 2008-01-2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축하해요. 저 어제 봤는데 인제야 답을.. 우리 이제 호떡 먹는 거예요? (5만원어치?)

깐따삐야 2008-01-25 11:28   좋아요 0 | URL
앗!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당.^^ 제가 사는 청주에 '쫄쫄이호떡'이 아주 유명하거든요. 찹쌀로 빚어서 바삭바삭 튀겨내는 호떡인데 한 개에 오백원이니깐 오만원 어치면 네꼬님이랑 저랑 부족함 없이 먹겠네요. ㅋㅋ

개츠비 2008-01-2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주 리뷰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 5만원, 생각보다 거금이더군요..ㅋㅋ 마음의 양식, 눈의 양식, 마니 구입하세요!!

깐따삐야 2008-01-25 21: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책들이 보관함에 그득했는데 이제 좀 비워야지요. ㅋㅋ 요즘 님도 열심히 읽으시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