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외가 친척들 모임이 있어 대전에 다녀왔다. 딸부자집의 셋째 딸인 엄마 덕분에 외삼촌은 딱 한 분인 반면, 남들보다 이모들은 좀 많은 듯 싶다. 그리고 그 이모들은 어찌나 다들 개성이 뚜렷하시고 입담 또한 청산유수인지 모여서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하면 장소팔 & 고춘자 듀오는 저리가라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어떻게 한 뱃속에서 나온 사람들인데도 저렇듯 각양각색일 수 있는가 참말로 신기할 따름. 더군다나 엄마들의 개성 때문인지 그 엄마들이 낳고 길러주신 딸들 역시 색깔이 모두 다르다.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반갑고 즐거워서, 딸들은 딸들대로 재미있고 신이 나서, 쌓였던 테트리스를 화끈하게 날려버린 주말 밤이었다.

 언니나 여동생이 없는 나로서는 엄마의 여형제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물론 오빠가 있어 든든한 맛은 있지만 그 튼튼한 언덕 이외에 때론 살갑게 부비고 싶은 언덕도 필요한 법이니깐. 가끔 언니나 여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쇼핑을 하거나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는 친구들을 보면 나도 여자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엄마가 점점 연세가 드실수록,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모들을 더욱 가깝고 편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볼 때마다 자매란 참 좋은 것이구나, 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딸내미 하나 더 낳아주지 않으신 부모님한테 괜시리 칭얼댄 적도 있는데 돌아오는 말은 항상 뻔하다. "야이노무 지지배야. 오빠하고 너하고 둘도 많다. 둘도 많어!" 네네. 어무이, 아부지. 그 동안 애쓰셨사와요. -_-

 우리 큰 이모는 언제 뵈도 타고난 맏언니스러우시다. 말수가 많진 않으신데 바지런을 떠시며 동생들을 고르게 배려하시는 모습이 참 정성스럽다. 한 차례 큰 수술을 받으신 후로는 기력이 많이 약해지셨지만 동생들을 향한 깊은 애정과 그간의 연륜으로 다져진 깡이 있달까. 연세도 가장 많으시고 체구도 가장 작으신데 맏딸로서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쇠할 줄을 모른다. 동생들이 마구잡이로 떠들어대면 한편에서 조용히 웃고만 계시지만 결국 끄트머리에 가서 자분자분 정리해서 마무리를 하시는 건 항상 큰 이모 소관이다. 같은 여자인 내가 뵙기에도 참으로 이상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면서, 믿음직한 맏언니다. 

 둘째 이모는 멀리 사시는 이유로 자주 뵐 순 없지만 사실 엄마의 여자 형제들 중에 가장 독특하신 분이다. 참고로 엄마는 둘째 이모가 그 나이 먹도록 천사병에 공주병을 아직도 못 버리고 산다며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둘째 이모는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아래 동생인 우리 엄마한테 실컷 얻어맞으면서 컸다고 하는데 가끔 동생한테 맞은 게 억울하다는 듯 엄마와 다투시는 걸 보면 재미있다. 한때 꽤 미인이셨고 지금도 여전히 고우신 편인데, 할 일만 생겼다 하면 열일 제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는 다른 이모들과는 달리 뒷짐 진 채 상황만 관조한다면 맞을까. 엄마 말씀을 빗대자면, 손에 구정물은 안 묻히고 호사만 누리겠다는 심보라는데 내가 뵙기론 그저 다른 자매들에 비해 조금 느긋하고 순수하신 분인 것 같다. 다른 식구들이 이모를 보살피는 식으로 곱게만 사셔서 그런지 연세에 비해 세상물정에 어둡고 간혹 뜬구름 잡는 말씀을 하실 때가 있다. 엄마는 둘째 이모라면 지금도 대충 무시하고, 둘째 이모는 그런 엄마에게 서운해 하시고, 큰 이모는 중재하시려 들고, 제삼자인 나로선 그런 모습들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셋째는 바로 우리 엄마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데 솔직히 엄마는 그 정도로 미인은 아니고 예쁘기는 둘째 이모나 넷째 이모가 좀더 예쁘시지. 대신 엄마의 최대 장점은 두뇌 회전이 남보다 빠르고 적확하단 것이다. 엄마는 그래봤자 제 발등 찍는 격이라고 혀를 차기도 하시지만 가끔은 젊은 내가 봐도 기가 찰 정도로 총명하고 영특하신 데가 있다. 큰 이모 말씀으로는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말도 잘하고 일도 잘했다는데 세상살이 아이러니 투성이라고, 도무지 악한 생각이라고는 요만큼도 하실 줄을 모르는 착하신 우리 아버지랑 결혼하셔서 고생 마이 하셨더랬다. 그래도 딸들 가운데 가장 낙천적이고 화끈하신 우리 엄마. 만약 엄마를 많이 닮았으면 내가 요래요래 맹하고 소심하진 않으련만. 그래도 아빠를 닮아서 뭐든지 오래 고민을 안 하는 건 좋다. :)             

 넷째 이모는 소설 '토지'의 '임이네'를 떠올리게 하는, 순도 백퍼센트의 완벽한 깍쟁이다. 딸들 중에 가장 늘씬하면서 이십대 후반의 딸이 있다고는 도무지 상상을 못할 만큼 동안인데다 천원짜리 머플러 한장을 하더라도 폼나게 두를 줄 아시는 멋쟁이라지. 엄마 말씀으론 어릴 때부터, 빤질빤질 머리 매만지고 책보 예쁘게 싸느라 통학기차를 놓칠 때가 태반이었단다. 지금은 알뜰하고 야무지게 살림을 일궈 이모부로부터 중전마마 소리를 듣고 사시는 팔자 좋은 아줌마시다. 솔직하고 뒤끝 없는 성품에 속으론 인정도 많다. 딸들 중에서 머리도 가장 나쁘고 공부도 가장 못했다는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더니,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가며 단란하게 잘 살고 계신다. 테트리스 자체를 안 받는 성격이라서 스스로도, 그리고 남들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게 이모의 미덕. 

 막내 이모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참 착하신 분이다. 거침없는 엄마의 직언을 빌리자면 "무녀리마냥 못난 게 속도 없이 남 좋은 일만 하고 다니는 꼴"이라는데 결국 마음이 너무 좋단 뜻 아니겠는가. 위로는 극성맞은 언니들한테 치이고, 아래로는 귀염만 받고 자란 남동생한테 치이다보니 자신은 죽이고 남을 살리는 일에만 애쓰며 살아온 격이다. 엄마는 내가 가끔 멍청한 짓을 하고 다닐 때마다 "넌 막내이모가 낳았나보다"라고 면박을 주신다. 오해가 생겨 원성을 듣는 한이 있더라도 결국에 남을 도와줘야만 발을 뻗고 주무신다는 이모는 무늬만 천사인 둘째 이모와 비교할 때, 네추럴 본 천사임에 틀림없다. 소싯적엔 공부 잘하고 글 잘 쓰기로 근방에서 꽤 유명하셨다는데 지금은 삐침쟁이 이모부와 엄마 밝힘증 아들내미 사이에서 고생하신 탓에, 넷째 이모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는 것 같아 그 점 참 속상하다. 

 마지막으로 훈훈하신 우리 외삼촌. 언제 뵈도 참 반듯하신 분이다. 말 그대로 FM 같으신 분. 음기가 강한 집안에서 자라신데다 지금도 여고에 재직하고 계신 덕분으로 마흔을 넘긴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줍은 청년 같은 데가 있으시다. 귀염 받으며 오냐오냐 자란 외동아들 특유의 고집이야 어쩌지 못하지만 타고난 성품 자체는 착하고 유순하신 편이다. 다만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보기에도 너무 얄짤없이 정의로우신 데가 있어 답답할 때가 있는데 그래도 외삼촌만큼은 다른 아저씨들처럼 빤하게 아저씨화 되지 마시고 그 마음 그대로 올곧게 늙어가셨음 좋겠다.

 엄마의 형제들 모습 속에는 엄마도 있고, 나도 있다. 어떤 면은 참 다행이다 싶고, 어떤 면은 끝끝내 부정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이렇게 뭔가를 쓰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그분들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면 새삼 고마워지기도 하고. 가끔 똑같은 사안을 두고 패를 갈라 대척하는 모습을 보면 애들이나 어른이나 별 거 없구나 싶다가도 서로서로 기대고 포개어져서 좋은 일, 힘든 일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뒤에 남은 형제들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애틋한 느낌도 든다.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으로, 동기간이 힘들면 다 같이 힘들어진다고 하시는데 나도 하나 뿐인 오빠의 짐이 되거나 골칫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인생 참 책임감 있게 꾸려가야겠단 비장한 생각이 들곤 한다. 사실 능수능란하게 뭘 잘 못하는 편이라서 평소에 가족들로부터 구박도 많이 듣는 편인데다 남들 다하는 흔해 터진 연애 하나를 제대로 못한다고 종종 타박도 듣지만, 이모들도 각자 생긴대로 열심히 사시다보니 지금은 나름 다들 자리잡고 잘 사시지 않느냐 말이다. 굳이 힘들게 살 생각도 없지만, 굳이 내 본성을 어그러뜨리면서까지 남들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살고 싶지도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나저나... 어쩌면 이런 자의식을 가장한 똥고집 또한 엄마와 이모들의 그것인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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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23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혈족으로 뭉쳐진 원더시스터즈가 깐따삐야님 대에서는 아무래도 핵가족제도 탓인지 볼륨감이 없어보이는군요. 어느집이나 다 그렇죠 제 외가쪽도 벌써 미국에서 이미 오래전에 이민가신 외삼촌, 내일모래 하시는 이모, 거기다가 사변나고 미쳐 피난 못온 작은이모까지..하지만 지금은 저도 깐따삐야님과 마찬가지고 단 둘뿐이랍죠.^^

(무수리 아닙니다. 상궁으로 승격되셨습니다.)

깐따삐야 2007-12-23 22:10   좋아요 0 | URL
단촐한 게 좋은 점도 있지만 복작대는 이모들 보니깐 부럽더라구요. 오빠는 있으니깐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머 어차피 혼자 가는 인생이지만.-_-
(이래 힘드나, 저래 힘드나 도찐개찐입니다요.)

순오기 2007-12-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제 어머니한테 자매를 기대할 순 없으니까 깐따님이 엄마되시면 반드시, 기필코 자매는 낳으셔야 한다는 사명을 완수하세요~ 바로 저, 순오기처럼요! 우하하하~~~ 내가 제일 잘 한 일은 우리 애들한테 자매를 만들어주었다는 거! ^^
이모님들이 우리 이모들이랑 비슷하네요. 우리 엄마는 맏딸이시라, 외할머니 돌아가시니까 이모들이 친정엄마처럼 받들어주더군요. 깐따님 외가도 보기 좋아요!!!

깐따삐야 2007-12-24 08:25   좋아요 0 | URL
그게 제 맘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순오기님 따님들은 참 좋으시겠당.^^
맏딸은 정말 어머니 대신인 것 같아요. 저희 큰 이모를 봐도 그렇더라구요. 그만큼 책임감도 무거워 보이지만요.


웽스북스 2007-12-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자형제가 없어서, 언니고 여동생이고 부러워요. 어린 시절엔 오빠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럽더니, 크고나니 여자형제들이 부럽더라고요. 남동생 부러워하는 사람은 그러고보니 내가 본 적이 없네 그냥 ㅋㅋ

깐따삐야 2007-12-24 08:28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도 여형제가 없군요. 이젠 나한테 언니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겠어요.ㅋㅋㅋㅋ
남동생 귀엽지 않아요? 주변에 보니깐 오빠처럼 누나를 챙겨줄 때도 있구 아주 귀여워 죽겠던데.^^

레와 2007-12-2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빠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답니다.

깐따삐야님, 메리 크리스마스~*

깐따삐야 2007-12-24 14:07   좋아요 0 | URL
오빠 있음 든든하긴 하죠. 요래조래 부려먹을 땐 귀찮기도 하지만.
레와님도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