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친구들, 또는 친구라고 부르기엔 뭣하지만 친구 아니라고 하기에도 달리 호칭이 없는 여인네들로부터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시원섭섭하달까, 잠시 그런 기분이 든 다음, 결혼하는 상대는 어떤 남자일까 문득 궁금해졌다가는, 몇 마디 식상한 축하인사를 건넨 후에 나도 어여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찰나, 다시 먹는 일이라든가 책 보는 일로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그런데 친구 K 같은 경우는 머리보다 몸으로 먼저 반응했던, 특별한 경우였다. 오늘 그녀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하마터면 나는 짠하다 못해 거의 울컥할 뻔 했다. 감격과 서운이 동시에 엄습해오는 바람에 내가 지금 축하인사를 건네야 하는 건지, 왜 그렇게 빨리 가버리는 거냐고 칭얼대야 하는 건지, 당최 애매무쌍해서 잠시 갈피를 잃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녀의 부군이 될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의 선한 인상과 따듯한 마음씀에 나조차도 훈훈해졌던 터라 재차 목소리를 높여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녀도 마치 철딱서니 동생 놔두고 시집 가는 언니처럼 이런저런 염려를 해주었는데 나는 걱정 말라는 투로 코 큰 소리를 하다가는, 사실은 조금 서운하다고 이실직고를 해버린 후, 조만간 곱창을 사주겠다는 말에 기분이 반짝 들어, 아니, 들은 척 했다. 부케는 네가 받아달라 하길래 왠일인지 한번 더 짠해졌고, 그녀의 부군이 나를 한번 더 만나고 싶어한단 말에 벌써 바람을 피우는 건가, 오버한 다음 평소처럼 심하게 깔깔거리다간 통화를 맺었다.

 새내기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만나오고 있는 그녀는 말하자면 내게 있어 든든한 큰 언니 같은 존재였다. 터울이 많이 지는 오빠 밑에서 무수리로 자란 나에겐 또래 자매들의 살가운 제스처들이 못내 부러웠고, K는 딸부잣집 둘째 딸로서 태생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매우 노련미 넘치는 언니였던 셈이다. 면접고사 날,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땐 그녀가 과연 남자화장실로 들어갈까, 여자화장실로 들어갈까, 모두들 귀추를 주목했을 만큼 성별이 불분명한, 살짝 톰보이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자면 그것은 매력적이라기 보다는 어느만치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는데, 그렇듯 중성적인 이미지가 내뿜는 카리스마로 덜컥 과대표가 되더니만 "너 처음 봤을 땐 디게 독종 같았는데. 알고보니 바보잖아. 하하하하하!"라고 내게 들이댈 만큼 근사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 앞에서 철옹벽 같던 내 자아는 삽시간에 본색을 드러냈고, 그것은 부끄러운 발가벗음이 아니라 화사한 만개였다. 나는 완벽하게 나일 수 있었고, 내가 나 아니고 싶은 날 조차도 그녀는 나를 나로서 봐주었으니, 내가 그녀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우리는 허구언날 토이의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불러제끼며 대체 우린 언제쯤 사랑 때문에 좀 야위어 보겠냐며 너스레를 떨었고, 과축제 때에는 촌스런 후드티를 맞춰 입곤 북어와 백세주를 상품으로 준비하는 등, 유치찬란하기 짝이 없는 만행을 저질러가며 듀오엠씨를 보기도 했었다. 웃기고, 웃겨주는 게 일상이었고 그게 지루해지면 서로를 울려놓곤 달래주기까지 했다. 포화상태의 에너지를 담아내기엔 이노무 세상이 너무 비좁고, 내 진심을 알아주기엔 그노무 자식이 너무 경박하다며, 눈에 띄거나 손에 집히는 것들은 모두 묵사발을 만들어가며 날밤을 새기도 했다.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사심없이 헤매일 수 있었던 참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항상 순탄할 수만은 없듯이, 우리에게도 오해와 이해 사이를 위태위태 오가며 그간의 사연들을 몽땅 되짚어 볼 만큼 위기의 순간이 없지 않았다. 많이 좋아했기에 서로 그만큼 실망도 컸던 셈인데, 실망이 크다고 해서 안 좋아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더욱 힘들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편으론, 그녀가 남자가 아니었던 덕분에 우리가 지금까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도 든다.

 언니도 없는데 큰 언니 시집 보내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하는 묘한 느낌. 하나 뿐인 오빠가 결혼할 때도 칠칠맞게스리, 눈물 참느라 콧잔등을 문질러대고 안경 밑으로 손수건을 비집어 넣으며 온갖 추레한 꼴을 다 보였더랬는데 이번에도 K의 동생들보다 내가 더 울면 어쩌나 벌써부터 염려스럽다. 조만간 그녀의 부군을 만나게 되면 형부 한 분 생긴 거라 생각하겠다고, 오버 섞인 진담을 늘어놓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놓고는 제가 쫌 동안이죵? 고따구 말로 시시하게 무마하겠지. 바보. K는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씩씩한 사람이니,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듬직한 부군과 함께 알토란 같은 가정을 이루고 잘 살 것이다. 벌써 기대가 된다. 그녀가 얼마나 믿음직한 아내이자, 현명한 엄마가 될지.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언제고 그리우면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학 동안 그녀가 고향집에 가 있을 때보다 왠지 더 멀고도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 기분이란, 어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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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1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그분이 얼마 전 남이섬 동반 나들이 갔다 오셨던 분인가요??

깐따삐야 2007-12-19 00:32   좋아요 0 | URL
걘 저처럼 방바닥만 잡아먹고 있는 무모한 싱글이구요.ㅋㅋ 이번에 결혼하는 친구는 그런 저희랑은 스케일 자체가 다른, 대고모, 왕언니 쯤 되시겠습니다. 하루 다섯 시간 주무신다니 체력이 좋으신 건지, 그렇듯 긴장 타는 삶을 살고 계신 건지, 문득 걱정 됩니다요.-_-

가시장미 2007-12-19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님이 퍼스트? 막이래 ㅋㅋㅋ

아 친구들 결혼하면 무지 심난하고 그러던데..
깐따님은 아직 어리셔서 안그런가요?
(나이도 모르면서 어리다고 막이래 ㅋㅋ)
<- 이 말투는 웬디양님 말투? =_=

K가 궁금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어요.
K가 디스코치면서 나올 때까지 기다릴꼬에요.
전해주세요 으흐흐

깐따삐야 2007-12-19 01:42   좋아요 0 | URL
K라니요.-_- 가시장미님은 이미 J군한테 빠져 계셔서 저의 퍼스트 따윈 눈에 들오지도 않으실텐데요 머. 훙!
저 아마도 장미님이랑 동갑일걸요? 유치한 게 나이만 들입다 먹었나 봐요. 흐흐
(써어드 되셨으니 웬디양님과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시길.^^)

가시장미 2007-12-19 01:51   좋아요 0 | URL
그럼 여기서 질문!
써드에서 퍼스트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리고 원래 경쟁자들끼리 친하게 지내는거 아니에요. -_-;;
막 질투하고 서로 미워하고...
인형사서 주문걸어서 대신 때려주고. 막 그러잖아요.
아 웬디양님과 퍼스트(누군지는 모르지만)님과...
그런 사이가 되어야 한다니....
저 아무래도 써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께요. ㅋㅋㅋ
(치고 빠지기?! -_-*)

깐따삐야 2007-12-19 01:58   좋아요 0 | URL
허걱~ 장미님. 인형 사서 주문 걸어서 대신 때려주고... 저도 장미님 써어드로 책정하는 거, 다시 생각해 볼래요.-_-

Mephistopheles 2007-12-19 02:45   좋아요 0 | URL
가시장미님이 말씀하신 그 지푸라기 인형은 정말로 인터넷에서 판매하고 있더군요...정말입니다..

웽스북스 2007-12-19 09:02   좋아요 0 | URL
가시장미님 무서운 사람이네요
써드로 만족한다고 말씀하셨던 건 일단 떡밥? ㅋㅋ

깐따삐야님과 가시장미님과 저 셋다 같은 나이인 걸로 알고 있어요
내년에 스무살의 막바지를 즐겁게 보내는 모임 이런거 만들어볼까요?
근데 퍼스트가 새파랗게 눈뜨고 막 돌아다니면서
우리 깐따삐야님과 서로 수면시간도 챙겨주고 막 그러고 있는데
진짜 모르시겠어요?

가시장미 2007-12-19 19:55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_-;;
왜 나는 모를까요.
엘신님이 아니시라고 하시니...
아무리 생각해도 잘..
혹시 메피님?
아이. 그건 안되는뎅..
마님이 계신데 ㅋㅋㅋ

그래요? 우리다 동갑이에요? 와우~!
모임하나 만들어야 겠군요. ㅋㅋ
그 인형.. 인터넷에서 판다니,
더 무섭네요. _-_)~
한 번 사봐? ㅋㅋㅋ

깐따삐야 2007-12-20 13:18   좋아요 0 | URL
메피님- 퍼스트의 갑빠가 있으실텐데 투기를 종용하심 안되져.-_-

웬디양님- 모임 결성 좋아요! 진짜 함 추진해보까요? 근데 메피님은 진짜 주무셔야 돼. 날로 거만해지시는 게 알라딘과 수면부족 때문임.

가시장미님- 나를 니코틴 중독으로 몰아세운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가정파괴범으로 몰고 있군요. 역시 연애하는 츠자들은 눈에 뵈는 게 없다는.-_-

더씨크릿 2007-12-2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주 들러 이것저것 뒤져보는 알라딘에서 우연히 서평을 하나 보았어요...
눈에 아주 화아악 띄는 서평~!

그 서평의 주인이 누군가 궁금해서 따라와 보니 여기네요...ㅎㅎ...
작가 못지 않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글솜씨에 반해서 잠시 머물다 갑니다...

가끔 들러서 훔쳐보다 가도 되겠죠?
마음의 평화 늘 함께 하는 나날이길요......

깐따삐야 2007-12-26 14: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훔쳐보시다니요. 대놓고 보셔도 됩니당.^^
그나저나 더씨크릿님의 눈에 확 들어온 서평이 대체 몰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