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출출이=뱁새, 마가리=오막살이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항상 저 구절이 내 눈길을 끈다.
사랑은 하고.
사랑하고, 가 아니라 사랑은 하고.
묘하게 마음 아픈 구절이다.
겨울이 되면 백석이 생각난다.
白石, 하얀 돌이란 뜻인데 결국 눈을 가리키는 건가.
그래서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시인을 생각하게 되는 건가.
어쩌면 시에 기대어 포개놓았던 기억들을 반추하고 싶은 건지도.
낮게 읊조리는 듯한 근사한 목소리를 가졌던 동아리 선배라든가,
모닥불 주위에 모여 숨죽여가며 들었던 친구의 첫키스 이야기,
입대를 앞두고 눌러쓴 모자 아래로 빨갛게 얼어있던 동기의 얼굴...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주저없이 말하던 시절도 있었지.
"너는 너를 너무 사랑하는구나."
오늘 누군가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야."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는 마치 오지 않는 나타샤가 된 기분이었다.
아흑... 저 순수하고 가지런한 눈매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