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간달프 > 현대 대한민국의 기원
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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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박노자는 현대 한국의 정체성은 '나'를 배반함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도대체 '나'를 배반하는 정체성의 역사적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따져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기원은 단순히 한국의 기원만은 아닌 듯 하다. 중국이며 일본도 포함된다. 동아시아적, 아시아적 혹은 퇴영-기형적 근대의 모습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자아의식의 발달이 미비했던 동아시아에서는, '자유', '개인', '사회'에 대해 '동아시아적' 왜곡을 일삼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모양새가 서로를 닮아버렸다. 지금 일부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들이 서로를 맹비난을 해대는 일이 빈번한데, 이것이 난데없는 듯이 보일 정도로 동아시아인들은 닮아있다. 에도든 베이징이든 서울이든 평양이든, 피식민자였건 식민지배자였건 어떤 면에서 모두 하나였던 것이다.

중국처럼 단기간은 아니고, 36년의 식민지 근대화기를 겪은 한국은 이 기형적 근대에 대해 손쉽게 악의 기원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었다. 한국의 '나'없는 기형적 근대는 일본식 근대가 이식된 탓이고, 박정희는 그런 일본식 근대를 되살린 사람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박노자는 우리의 이런 역사적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너희들은 본래부터 일본식의 기형적 근대를 신나게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없었으면 현대 한국의 극우적, 기형적 모습도 없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마치 동학을 당시의 대단한 대안이었던 것인양 받아들이는데 동학의 내부를 들여다보라! 미신과 봉건적 이데올로기 투성이였다. 당시에 당신들 조상에겐 제대로된 근대로 나갈 길이 아예 없었다.'

이것은 박노자의 의견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의견을 저렇게 극단화시켜서 받아들이는 것이 나에겐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가망없는 과거에서 옥석을 가리는 것 보다는, 가망없는 과거에서 변명거리를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 보다는 현재 '나'를 배반하는 현대 한국의 사회외 문화, 법률과 시스템들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편이 더 낫고 유교 자본주의니 유교적 근대화니 하는 약간 사기성이 농후한 개념들에 오염되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퇴계 열풍이 못마땅한데, 이 열풍의 뒤안에서 나는 퇴계유학이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퇴계는 그냥 조선 시대 퇴계로 놔두시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하신 분이다. 욕보이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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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재灰 > 하나의 방법론, 계보학
한국근대소설의 기원
권보드래 지음 / 소명출판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가 태동하는 19c말~20c초의 시기를 '1900년대'라는 용어로 규정하며 그 시기 내부의 "폭발하는" 역동적 생명력에 매력을 느끼는 저자는기존의 인식의 틀을 넘어 한국의 근대에 대하여 재사유한다. '문학'이나 '소설'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심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

저자는 산업의 발전과 현실주의의 확대, 신분제 폐지와 개인주의의 등장·발전이라는 근대적 기획들의 상징적 산물들은, "없었던 사실의 생산"이기도 하면서 "있었던 사실의 재배치"이기도함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재배치의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된 것이 '문학'이나 '소설'이라고 했다.

저자에 따르면, 문학이 미(美)적인 영역이자 예술의 한 분과로서의 자율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오늘날의 인식은 '1900년대'에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知)·덕(德)·체(體)론의 대타적인 위치에서 발생한 지(知)·정(情)·의(意)라는 인간이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적 문학의 개념은 정(情)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발견과 동궤에 놓여 있는데 이 근저에 놓인 인식의 틀이 지·정·의론인 것이다. 정적이고 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견하기 이전의 문학의 개념은 학식과 문물 일반을 가리키는 넓고도 모호한 개념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미(美)와 예술은 지식·도덕에 비하여 상대성과 개별성을 더욱 중시하는 속성을 가진다. 이는 이제 막 생성되려는 '민족 국가'가 수행할 다른 이질적인 구성물의 배척이라는 과업에 긴요한 수단의 하나로 자리 매김된다. '1900년대'의 '소설'은 이러한 도정 안에서 그 지위가 급상승한다. '균질화'를 목적으로 하는 근대 민족(국민)국가의 배제의 논리는 1900년대 소설에 있어 그것이 '자국어'로서의 글쓰기임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국민'이라는 신조어(新造語) 아래에서 모두가 이해 가능한 글쓰기에의 긴급한 제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기획에 가장 핵심적인 거점을 '소설'(문학)이 마련해 주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사실의 기록'임을 주장하는 1900년대 신소설과 '허구'임을 강조하는 1910년대 소설의 차이를 서술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알릴 만한 정보의 전달이라는 '신문'의 근대적인 변모는 '사실'의 영역을 구축하였고, 이 지점에서 "세세한 이야기의 요소와 개인의 내밀한 정보"는 제외되게 된다. 이 제외된 측면이 허구에 의한 소설의 근거가 됨으로써, '소설'과 '사실'이 각기 다른 논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내면 탐색으로서의 글쓰기'와 연결된 소설의 문체적 정립과정도 제시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기원'을 해부하는 저자의 시각은 가라타니 고진의『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유사한 듯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는 푸코의 큰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적 기획들의 생산물들을 인식하는 장(場)을 뒤흔들어 전복시키는 이 같은 방법이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통쾌함의 이면에 숨겨진 방법론상의 부조리를 명확하게 풀어내기 위한 독서가 절실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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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봤을 리 없는 '1900년대'를 이해하기 위한 저자의 기본자료(p.335)에 대한 꾸준한 섭렵이 개인들이 살아있는 집합적 연대를 통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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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je0525 > 문학이라는 제도와 근대성의 기원
한국근대소설의 기원
권보드래 지음 / 소명출판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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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묶어냈다. 1910년대를 전후로 하여 문학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어가는가를 추적하고 있는 글이다. 이 책은 물론 소설의 기원에 대한 연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근대의 기원을 탐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분화 상태의 여러 개념들이 서구문화의 영향을 통해 점차 분화되면서 자율적 공간을 형성해 간 것이 우리의 근대라는 것이다.

근대 계몽기의 신문들과 신소설, 역사 전기소설 그리고 번역소설 등을 통해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형성되고 포괄적인 광의의 문의 개념이 서구 Literature의 역어로서의 문학 개념으로 정립되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서술하고 있다. 이런 작업은 황종연의 <문학이라는 譯어>나 김동식의 박사학위논문인 <한국의 근대적 문학개념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에서도 깊이있게 논의된 바 있다. 계보학적 논리를 통해 근대의 기원을 탐사하고 그 기원을 해체하는 일이 한국문학의 현단계에서 무엇보다 적실한 작업이라고 보여지지만 미국과 일본의 연구 동향을 너무 추종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사실 이런 작업들은 무대만 한국으로 옮겼을 뿐 연구의 방식이나 의도가 일본 학계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어떤 외래적 논리의 수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현실의 구체적 특질을 고려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이 줏대있는 연구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서구 이론으로 우리의 현실을 재단하는 폐단을 가져올 위험이 짙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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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wasulemono > 낯선 목소리와의 만남
연애의 시대 - 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권보드래 지음 / 현실문화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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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혁명의 시대는 곧 연애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혁명만 보고 연애에는 눈 감아 버린다. 그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연애는 모든 것에 적대적인 것이다. 혁명과 이념을 따르는 데도 방해가 되고, 학문을 하고 사업을 하는 데도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 생각이 낡고 편향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연애를 하찮은 것의 범주에서 구출하기에 주저한다.


역사상 격동기는 혁명과 함께 연애가 함께 했다. 혁명이든 연애든 그 본질은 똑같다. 기존의 관계를 새롭게 꾸며 보고픈 것. 그런 의미에서 연애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연애에의 열망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새로운 힘과 열정을 느낀다. 암울한 문화정치의 시기, 정치와 문화와 연애가 가장 왕성하게 상호작용을 하던 시기, 1920년대는 그런 시대였던 듯하다.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생각이 가로놓여 있다. 정치사적 감각만으로 역사를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역사를 다른 감각으로 보도록 한다. 물론 이 책만 보면 1920년대는 연애의 시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또 다른 일반화는 기존의 정치사적 감각을 교정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인다면 좋을 듯하다.


낯선 그림과 기사들을 중심으로 꿰어가는 1920년대의 시대상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낯설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재미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연애의 사도들이 펼치는 사랑의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이 시대가 과연 그때만큼 살아 움직이는 시대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각종 정치사적 파란과 역풍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정치 올인’의 시대인 듯하다.


이 책을 읽기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문체가 낯설어 한 번에 문장 하나를 읽어 내려가기가 쉽지 않다는 건데, 이 책의 문장이 신문 기사 속의 문장과는 다른 호흡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깔끔하게 읽히지 않는 문체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저자의 개성이라고 보는 게 합당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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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누가 라캉을 두려워하랴?
라캉 하룻밤의 지식여행 15
다리안 리더 외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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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라캉이 귀환하고 있다(그가 언제 억압되었던가?). 한때 근거없는(텍스트 없는!) 라캉 유행을 경계하면서 그의 대책없는 난해성과 현학에 대한 비판이 떠돌기도 했지만, 라캉의 한국 상륙, 혹은 라캉의 한국화는 더이상 저지할 수 없는 대세인 듯하다. 이미 그는 두툼한 책으로 <재탄생>되었고, 사위이자 유산 상속자인 알랭 밀레르 계열(지젝과 핑크 등)의 저작들도 연이어 번역되고 있다.(밀레르의 가장 큰 기여는 라캉 이론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 있다.) 그의 주저인 <에크리>와 세미나들도 곧 한국어본을 얻을 예정이라고 하니 아마도 푸코와 들뢰즈를 잇는 새로운 열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르겠다(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다리안 리더의 <라캉>은 그런 열풍을 슬쩍 예감하게 하는 미풍처럼 다가온다. 그 바람은 가볍고 경쾌하지만, 라캉의 매력과 라캉 읽기의 곤경 또한 집약적으로 전해준다. 라캉 자신이 '프로이트로의 귀환'을 이야기하고, 혹자는 프로이트를 읽지 않고 라캉을 읽는 일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래도 그 읽기의 순서는 라캉부터이어야 할 듯싶다. 우리가 아무리 프로이트를 읽어도 거기서 라캉이 도출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라캉 이후의 프로이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후에 사람들이 나라는 의식 너머에 있는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무의식에 대해 근심했다면, 라캉 이후의 '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정신분석학은 여느 책처럼 읽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망각과 억압 속에서도 그것은 귀환한다! 라캉에 대한 거부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모든 신경증과 편집증과 분열증이 그의 수수께기 같은 언어들과 도식 속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라캉은 모든 정신분석(학)은 저항을 동반한다고 했다. 그것은 라캉을 읽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그 '저항'이 바로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형식이다. 우리의 앎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방식으로(not-all) 이루어지니까. 거기엔 항상 어떤 잔여가 남는다. 어떤 불충분성이 항상 떠도는 것이다. 다리어 리더의 '만화'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라캉의 모든 것을 요약해서 전해주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이해의 막다른 길(impasse)에서 그대로 통과(pass)된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징후이고 예감이며 미풍일 따름. 아직은 전부가 아닌(not-all)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라캉을 두려워하기에 너무 이른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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