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재灰 > 하나의 방법론,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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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소설의 기원
권보드래 지음 / 소명출판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가 태동하는 19c말~20c초의 시기를 '1900년대'라는 용어로 규정하며 그 시기 내부의 "폭발하는" 역동적 생명력에 매력을 느끼는 저자는기존의 인식의 틀을 넘어 한국의 근대에 대하여 재사유한다. '문학'이나 '소설'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심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
저자는 산업의 발전과 현실주의의 확대, 신분제 폐지와 개인주의의 등장·발전이라는 근대적 기획들의 상징적 산물들은, "없었던 사실의 생산"이기도 하면서 "있었던 사실의 재배치"이기도함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재배치의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된 것이 '문학'이나 '소설'이라고 했다.
저자에 따르면, 문학이 미(美)적인 영역이자 예술의 한 분과로서의 자율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오늘날의 인식은 '1900년대'에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知)·덕(德)·체(體)론의 대타적인 위치에서 발생한 지(知)·정(情)·의(意)라는 인간이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적 문학의 개념은 정(情)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발견과 동궤에 놓여 있는데 이 근저에 놓인 인식의 틀이 지·정·의론인 것이다. 정적이고 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발견하기 이전의 문학의 개념은 학식과 문물 일반을 가리키는 넓고도 모호한 개념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미(美)와 예술은 지식·도덕에 비하여 상대성과 개별성을 더욱 중시하는 속성을 가진다. 이는 이제 막 생성되려는 '민족 국가'가 수행할 다른 이질적인 구성물의 배척이라는 과업에 긴요한 수단의 하나로 자리 매김된다. '1900년대'의 '소설'은 이러한 도정 안에서 그 지위가 급상승한다. '균질화'를 목적으로 하는 근대 민족(국민)국가의 배제의 논리는 1900년대 소설에 있어 그것이 '자국어'로서의 글쓰기임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국민'이라는 신조어(新造語) 아래에서 모두가 이해 가능한 글쓰기에의 긴급한 제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기획에 가장 핵심적인 거점을 '소설'(문학)이 마련해 주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사실의 기록'임을 주장하는 1900년대 신소설과 '허구'임을 강조하는 1910년대 소설의 차이를 서술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알릴 만한 정보의 전달이라는 '신문'의 근대적인 변모는 '사실'의 영역을 구축하였고, 이 지점에서 "세세한 이야기의 요소와 개인의 내밀한 정보"는 제외되게 된다. 이 제외된 측면이 허구에 의한 소설의 근거가 됨으로써, '소설'과 '사실'이 각기 다른 논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내면 탐색으로서의 글쓰기'와 연결된 소설의 문체적 정립과정도 제시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기원'을 해부하는 저자의 시각은 가라타니 고진의『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유사한 듯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는 푸코의 큰 그림자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적 기획들의 생산물들을 인식하는 장(場)을 뒤흔들어 전복시키는 이 같은 방법이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통쾌함의 이면에 숨겨진 방법론상의 부조리를 명확하게 풀어내기 위한 독서가 절실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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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봤을 리 없는 '1900년대'를 이해하기 위한 저자의 기본자료(p.335)에 대한 꾸준한 섭렵이 개인들이 살아있는 집합적 연대를 통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