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선인장이 사막 식물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선인장이 또한 목마른 식물이란 것은 아무도 모른다 목마른 것들은 모두 거칠어진다 내심 감추어둔 열망이 깊을수록 온몸의 가시는 무성해지는 법 마른 목구멍의 갈라지는 틈새는 뜨거웠던 세월의 흔적인 것이다 기실 모래 바람 자욱한 세월 속에선 속으로 키워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인장이 붉은 꽃잎을 피우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갈증을 참아야 하는지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 향기가 세상을 진동하려면 몇백 번의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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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바다

    그 시인은 “나의 눈망울 뒤에는 바다가 있다 나는 그 바다를 다 울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었지 이제사 나는 깨닫는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의 바다를 다 울지 못하고 만다는 사실을 엠덴 해연의 갈매빛 깊이. 슬픔의 깊이를 견디고 있는 하늘의 높이가 비친 바다의 물이랑 신록의 푸른 불꽃처럼 타는 그리움 마지막처럼 잔잔히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 이름. 그리움은 물빛이 아니다 뜨거운 이마 가뭄에 갈라진 논밭처럼 튼 입술 그리움은 몸살이다 그리움은 슬픔처럼 아프다 아프다 부풀어 오르는 바다가 마지막 그리움처럼 넘친다. 눈시울 안에 쌓인 지난 겨울 함박눈의 추억. 캄캄한 밤의 부드러운 벼랑을 흘러내리는 바다의 물빛.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바다. 사람은 고유한 자기의 바다를 가지고 이승의 슬픈 눈시울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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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을 보겠다는 의지가
뇌신경 세포 단말을
눈으로 만들었다.

신경생물학자의
최신 리포트를 읽었다.
지난해 Nature다.

그러나
한 시인은 말했다.
보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 밖에 있기 때문에
눈이 생겨났다.

캄캄한 시야
보일 듯 말듯 한
희미한 빛을 잡으려
수장돌기를 뻗어
방향을 잡고
깊이를 만들어가는
신경 세포의 황홀한 전신

망막의 층계를 만들어가는
애처로운 몸부림.
빛에 대한
아득한 목마름.

수평선에 부서지는 갈맷빛 햇살을
거리에 내리는 연보랏빛 으스름을
갈밭을 건너는 노을 묻은 바람을
밤하늘에 떨고 있는 먼 별빛을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의 심연을
감은 눈시울이 감추고 있는 격렬한 통곡을
가시철조망 너머로 바라보는 먼 산하를

보고 싶다.

무구한 사랑으로
안고 싶다.
불지르고 싶다.

뜨거운 사랑의 시선이 머물렀던
바깥은
달려와서 나의 내부가 된다.
품안에서
부드럽게 풀리는.

나는 알고 있다.
의지와 사랑이 하나인 것을,
빛과 그늘이
하나인 것처럼.

나는 보았다.
의지와 사랑의
황홀한 포옹을.

푸른 하늘의 높이를 비치는
바다의 깊이를
하늘과 하나가 되려는
아득한 수평선의 설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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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데리다가 타계한 뒤 지난 열흘 동안 4개의 추모글을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국내에 데리다 전문가가 드물다보니 저같은 문외한이 이렇게 고생을 하는군요. 오늘 마지막 글을 써보내면서 일단 한숨은 돌렸는데, 급하게 여러 편의 글을 쓰다보니 글이 제대로 된 건지도 모르겠고 중첩되는 내용들도 좀 있고 해서, 후련한 게 아니라 꺼림칙합니다. 한 가지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같은 주제로 여러편의 글을 쓰지 말자는 것이라고 할까 ... -_-;;;

그 글들 중에서 비교적 평이하고 분량도 많은 것을 하나 더 올립니다. 지난 번에 가을산님이 데리다 번역본들에 관한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절이 좀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조만간 보충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형이상학의 해체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 데리다의 철학적 삶


지난 10월 8일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한 데리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는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철학자다. 실제로 데리다는 그가 타계한 직후 발표된 성명서에서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그는 프랑스가 배출한 동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인물이지만, 국내에는 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始祖)이자 매우 난해한 책들을 쓴 철학자라는 것,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매우 특이한 철학 사조를 창안했으며, 차연(差延, différance)이라는 불가해한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일 국내의 신문들이 쏟아내는 추모 기사들, 때로는 상생(相生)의 철학자로, 때로는 ‘반골 철학자’로, 또 때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로’ 그를 치켜세우는 기사들은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길래 지성과 사상에 인색한 국내의 신문들이 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그를 추모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현전의 형이상학의 해체

 

데리다는 난해한 사상가라는 평판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나 [기록과 차이]([글쓰기와 차이]라는 얼마간 그릇된 제목으로 번역되곤 하는) 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은 상당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저작들이 6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혀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과 글쓰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켜왔음을 입증해준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처럼 매혹시켰을까?

  이는 무엇보다 그의 철학의 전복적인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초기) 데리다에게 서양의 철학사는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의 역사다.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사태의 의미가 충만하게 의식에 드러날 때, 또는 적어도 그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전제될 때, 비로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또는 로고스를 다른 사람들과 온전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매체, 곧 음성이야말로 참다운 매체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현전의 형이상학의 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반박하는 대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그것은 자신의 타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 타자는 바로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기록이다. 실제로 서양 형이상학은 플라톤에서 루소, 소쉬르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생생한 현재, 주체들끼리 주고받는 음성적 대화를 특권화하면서 기록을 하찮은 것으로 매도해왔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기록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기술적 토대다.    

  왜 기록이 그처럼 중요할까? 왜 이 주장이 그처럼 전복적이고 혁신적이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원이나 로고스가 기원이나 로고스로서 존재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원이나 로고스가 일회적(一回的)인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기록이다.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보존할 수도 반복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기원도 로고스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록에 의해 비로소 기원이나 로고스가 가능하다면, 현전의 형이상학의 주장과는 달리 기원보다 앞서는 것, 로고스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 된다. 기원, 로고스의 이면에는 카오스의 검은 구멍만이 존재하며, 이 카오스와 로고스의 경계를 세우는 것이 기록인 셈이다.  


유령론: 타자들에 대한 환대로서의 정의

 

그러나 이렇게 해서 기원과 로고스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서양의 문명 내에서 그것들이 지니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면, 결국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데리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해체 작업에 의해 현전의 형이상학, 더 나아가 기존의 서양 문명의 질서가 위협받고 있다는, 삶의 질서가 와해될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진의는 여기에 있지 않다. 그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처럼 기원과 로고스를 근원적인 진리로 가정하게 되면, 더 이상 역사도, 정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모든 것이 기원, 로고스에 담겨 있는 이상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며, 서양 문명의 원리, 로고스의 명령에 충실한 것을 정의로 간주하는 이상, 서양의 문명과 다른 타자들에 자신을 개방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마르크스의 유령들] 같은 저작에서 유령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윤리ㆍ정치사상을 전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현존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닌 유령들이라는 형상은 기원의 부재라는 해체의 원리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의를 바로 잡고 정의를 실행할 것을 명령하는 타자들의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이주노동자들, 인종차별과 종교적 박해의 피해자들, 사형수들 및 그 외 많은 “약자들”에서 이러한 유령들의 구체적인 현실태를 발견하며, 이러한 타자들의 부름, 정의에 대한 호소에 응답하고 환대하는 일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ㆍ정치적 책임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데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한 것은 그의 철학사상의 전개과정과 매우 합치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원리가 해체된 이후 중요한 것은 우리와 다른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어떻게 타자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그렇다면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간주하거나 생뚱맞게 상생의 철학자로 치켜세우는 일은 그의 철학이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가 이처럼 엉뚱한 오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저작들 중 제대로 번역된 책들이 매우 드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8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들 중 10 종 이상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심지어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데리다 특유의 현란한 언어유희나 섬세한 논의를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삶이란 저작들의 삶과 다르지 않은데, 우리에게 데리다는 처음부터 생명을 박탈당한 유령, 환영이었던 셈이다.

  빼어났지만 그만큼 치열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데리다는 실제로 유령, 망령이 되어 그의 저작들, 그의 기록들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그에게서 허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쫒는 대신, 데리다가 그랬듯이, 우리도 그의 기록들 안에 깃들어 있는 타자의 부름에 귀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데리다의 작품들

 

 데리다는 80여권의 저서 및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수백편의 논문들 및 인터뷰 등을 남겼을 만큼 다작(多作)의 철학자다. 국내에 번역된 책도『입장들』(솔, 1991)『마르크스의 유령들』(한빛, 1996),『다른 곶』(동문선, 1995),『에코그라피』(민음사, 2002)『시네 퐁주』(민음사, 1998),『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테러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 등 10여종이 훨씬 넘고, 그에 관한 해설서도 여러 권 나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책들은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비전공자들이 마구잡이로 번역하곤 해서 대부분의 데리다 저서들이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번역도 괜찮고 읽을 만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는 상당히 난해한 데다가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긴 하지만, 데리다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책들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입장들』은 초기 데리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이며, 『에코그라피』는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작업을 개관하기에 적합한 책이다. 그리고 『다른 곶』『법의 힘』『테러 시대의 철학』은 유럽 공동체, 법과 정의, 테러와 민주주의, 주권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경으로 데리다의 정치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들이다. 

  데리다 해설서 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데리다』(시공사, 1999)는 데리다 사상 전반을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는 개론서이며,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 2003)는 니체, 하이데거 철학과 데리다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데리다 철학의 특징을 간명하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국내 연구자들의 작업 중에서는 김상환 교수의 『해체론 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6) 및 이성원 엮음, 『데리다 읽기』(문학과 지성사, 1997)을 추천할 만하다. 좀더 쉬운 입문서를 원하는 독자들은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 2003)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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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김사인 교수의 문학편지9 (황인숙/고종석)

김사인 교수의 문학편지9 (황인숙/고종석)
<잠자는 숲, 슬픔이 나를 깨운다, 지붕 위에서>
강연일시 : 2003년 7월 11일(금) 19:00 ~ 20:30

 

김사인(이하 김) : 안녕하십니까? '문학이야기'의 김사인입니다.(함께 박수) 오늘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황인숙 시인의 [잠자는 숲]과 그 외의 두 편의 시 등 세 편의 시를 찬찬히 읽으면서 시인의 말씀을 경청하고, 시인과 더불어 그 시인의 소중한 문학세계에 대해서 도움 말씀을 주실 분을 모셨습니다. 오늘 황인숙 시인과 에세이스트 고종석 선생님 자리 함께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함께 박수)

황인숙 시인께서는 1958년생이시고, 아버님께서는 함경도 분이셨는데, 월남하셔서 황인숙 시인을 낳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0대 중반이신데, 1984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서 활동을 시작하셨구요. 지금까지 첫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를 내신 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에 이르기까지 네 권의 시집을 내셨구요. 황인숙 시인의 아주 아름다운 동화가 있는데, {지붕 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 권 내지 네 권의 산문집을 내셨습니다. 황인숙 선생의 시도 아름다워서 설레입니다만, 산문들도 아주 독특한 아름다움과 향기를 발한다고 많은 분들이 얘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지난 5월 1일이 출간일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숙만필}이라는 제목의 산문집도 내셨습니다.

황인숙 선생은 제 말이 지나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80년대 중반 이후에, 더구나 50년대 후반 출생하신 시인으로서 드물다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진정한 의미의 쾌락주의자가 아니겠는가, 이런 느낌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쾌락주의자'라는 말씀은 말을 바꾸면 '순결한 쾌락주의자'라고 바꿀 수 있을 겁니다. 황인숙 시인은 사유와 시인으로서의 몽상과 언어를 감각적인 기쁨으로 맞이하고, 감각으로 실어낸 시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시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던 최승자 시인, 김혜순 시인, 이런 비슷한 시기의 여성 시인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색깔을 가지고 있는 분이 황인숙 시인이십니다. 80년대라는 시대는 굉장히 사회적 고통과 암울함이 지나쳤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황인숙 시인과 같은, 세상에 대한 순수한 느끼기, 또는 사물과 언어를 통한 순수한 몸 섞기, 이런 감각이 한 모퉁이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희귀한 일이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마치 1920년대나 1930년대를 생각해보시면, 그 시기에 모든 시인들이 이육사 선생과 같고, 임화, 김남천, 이런 분들과 같았다면, 그럼 우리 문학이 참 힘겹지 않았겠나, 이런 생각이 한편으로 드는 겁니다.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대였지만, 같은 시대에 백석과 같은 시인이 한 모퉁이에 있고, 또 한 모퉁이에 이상과 같은 시인이 있고,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20,30년대 문학의 한 축복이 아닌가 싶은데요. 장황합니다만 저는 이런 느낌으로 황인숙 시인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그리고 자리를 같이 해주신 고종석 선생님은 10여 년 전쯤에 한겨레신문을 구독하시던 분들은 아마 잘 기억하실 겁니다. 고종석 선생이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이던 시절에 고종석 선생의 예민한 기사와 칼럼이 한겨레신문의 문화면을 풍성하게 했던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몸 담고 계시구요. 언론인이실 뿐만 아니라, {제망매가}, {기자들}이라는 소설을 출간하신 소설가이고, 또 에세이도 여러 권을 출간하셨습니다.

지난 5월 초에 {인숙만필}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어떠세요? 저는 그 책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황인숙(이하 황) : 왜요?

김 : 그럼 제가 산문집을 내면 '사인만필'이라고 해야 되나요?

황 : 그렇게 내셔도 되지요.(함께 웃음)

김 : 아니, 농담입니다. 바로 그 {인숙만필}의 발문을 고종석 선생님께서 써주셨는데요. 그 제목에 당황하지 않으셨나요?

고종석(이하 고) : 예, 당황했습니다.(함께 웃음) 그런데 제목에 겸손함도 있고 오만함도 있는 거지요. 물론 만필이라는 게 아무렇게나 풀어서 쓴 긴장이 없는 글이라는 뜻에서는 겸손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자기 이름을 책 제목에 내세워서 쓸 수 있다는 것은 오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지요.

황 : 그런데 제 이름이 좀 근사한 이름이었으면 너무 멋있는 제목이 되어서 차마 못 썼을 텐데, 평범한 이름이라서 썼습니다.

김 : 그 책을 보다 보면, {서포만필}을 보고 그렇게 하셨노라고 되어 있는데요. (황 : 네) 어떤 분들은(시인 황인숙 선생께서는 좀 언짢으실 것 같은데) '난 황인숙 선생의 시보다 산문이 더 좋더라'는 독자들도 있던데, 어떠세요? 시를 쓰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와 산문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와 좀 다르신가요?

황 : 아직까지 산문은 쓰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 느껴져서 쓴 적은 없어요. 시는 요즘은 몰라도 원래는 욕구로 썼죠.

김 : 산문은 대개 어떤 경우입니까? 청탁에 의해서 쓰셨습니까?

황 : 예, 그런데 어차피 쓸 바에는 즐기면서 썼죠.

김 : 계속 이렇게 단답형하실 거죠?(함께 웃음) 그러면 우선 황 선생님께 시 한 편 낭송을 좀 부탁드리고, 그 다음 황 선생님 시 얘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박수)

황 : [잠자는 숲]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 혀는 말라 있어요. // 매일매일 내 창엔 고운 햇님이 / 하나씩 뜨고 지죠. / 이따금은 빗줄기가 기웃대기도, / 짙은 안개가 분꽃 냄새를 풍기며 / 버티기도 하죠. / 하지만 햇님이 뜨건 말건 / 빗줄기가 문을 두드리건 말건 / 안개가 분꽃 냄새를 풍기건 말건 / 난 상관 안해요. / 난 울지 않죠. / 또 웃지도 않아요. /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 혀는 말라 있어요. // 나는 꿈을 꾸고 / 그곳은 은사시나무숲. / 난 그 속에 가만히 앉아 있죠. / 갈잎은 서리에 뒤엉켜 있고. /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 은빛나는 밑둥을 쓸어보죠. / 그건 딱딱하고 차갑고 / 그 숲의 바람만큼이나. / 난 위를 올려다보기도 하죠. / 윗가지는 반짝거리고 / 나무는 굉장히 높고 / 난 가만히 앉아만 있죠. / 까치가 지나가며 깍깍대기도 하고 / 아주 조용하죠. / 그러다 꿈이 깨요. / 난 울지 않죠, 또 웃지도 않아요. //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 혀는 말라 있어요. / 하지만 난 조금 느끼죠. / 이제 모든 것이 힘들어졌다는 것. / 가을이면 홀로 겨울이 올 것을 / 두려워했던 것처럼 / 내게 닥칠 운명의 손길. / 정의를 내려야 하고 / 밤을 맞아야 하고 / 새벽을 기다려야 하고. // 아아, 나는 / 은사시나무숲으로 가고 싶죠. / 내 나이가 이리저리 기울 때면.'

김 : 이 [잠자는 숲]이라는 시는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의 제일 앞머리에 들어 있는 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 바로 뒤에 등단하실 때의 시를 놓았는데, 배치를 이렇게 한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으신가요?

황 : 이 시는 제가 등단하기 몇 년 전에 쓴 시인데요. 제가 보기에도 시 같은 시로서 제일 처음에 쓴 시예요. 첫 번째 시집의 경우, (다른 시집도 그렇지만) 제가 쓴 순서대로 시를 배치했어요.

김 : 그러니까 시답다고 느끼면서 처음 완성한 시군요. 두 번째 시가 등단작인데,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는 제목입니다. 대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특히 시인 이문재 씨 같은 분은 자기는 어떤 시인들의 시집을 볼 때 제일 첫 시집의 제일 첫 머리에 실려 있는 시를 유심히 본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마치 사람도 손금을 보는 것처럼, 첫 시집의 첫 시 속에는 어찌 보면 시인으로서의 앞날과 모든 것이 축약되어 느껴진다는 말을 하던데요. 다시 시를 읽으시면서 그런 느낌은 안 드셨는지요?

황 : 이 시를 보면 이문재 시인의 말이 아주 안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데, 모든 첫 시집의 첫 시가 그 사람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시의 경우는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요.

김 : 고종석 선생님은 이 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 : 좋죠. 그런데 아까 김사인 선생님께서 황인숙 시인이 굉장히 육감적인 언어를 쓰는 시인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신 것 같아요. 아까 녹화 시작하기 전에 김사인 선생께서 시인은 몸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영혼으로 사는 존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정말 위대한 시인이라면 몸으로 사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예컨대 시인이라는 것은 말을 다루는 사람인데, 말을 다루는 경지가 어느 정도에 올라가면, 몸과 말 자체가 하나가 되는 거죠. 그것이 따로따로 노는 게 아니라, 몸과 말이 비벼져서요. 그래서 아마 가장 위대한 시인은 언어와 자기 몸뚱아리가 대개 하나가 되는 사람인데, 아까 김사인 선생께서 백석이라는 1930년대 탁월한 시인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백석도 그렇고 정치적으로 비판을 많이 받으셨습니다만, 미당 서정주 선생도 그렇고, 그런 분들의 뛰어난 시들을 보면, 소위 몸과 말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물론 육감적이라는 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황인숙 시인의 시가 육감적이라고 할 때에, 백석의 시가 언어와 몸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과는 약간은 다른 얘기이겠습니다만, 말을 잘 부린다, 그게 사실 시인의 가장 필요한 조건이죠. 그것만으로 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점에서 백석이나 미당 이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황인숙 시인이 아닌가, 말과 장난하며 노는 것이요.

아까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를 말씀하셨는데, 그런 경우에 [잠자는 숲]보다 훨씬 더 육감성이 드러나는 시인데, [잠자는 숲]만 하더라도 그런 낌새가 굉장히 있습니다. 이 시 자체는 약간 어둡죠. 밝은 시는 아닌데, 권태랄까 허무랄까, 이런 것을 뚫고, 제가 읽기에는 이제 어른이 막 되려고 하는, 그 순간의 감각을 그린 시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감각, 허무마저도 감각적으로 그려져 있는 거죠. 예컨대 '짙은 안개가 분꽃 냄새를 풍기며', 이런 구절을 보면, 시인이 안개와 분꽃을 어떻게 등치시켰는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분꽃'과 화장하는 분이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그런 것이 안개 가루와 연결된다거나,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어요'라는 건 자기의 무감각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런 말을 감각적으로 한다거나, 그래서 초기 시부터 김사인 선생이 말씀하신 육감성, 그런 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잠자는 숲]은 그런 점이 두드러진 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요. 황 선생 말씀대로라면 제대로 쓴 최초의 시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벌써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목에서 [잠자는 숲]을 보면, 숲을 잠자는 주체로 해석하는 게 한국말 문법에서는 맞겠지만, 사실 여기에서 '잠자는 숲'이라는 것은 숲을 잠자는 시공간으로 봐야 겠죠. 화자가 숲에 들어가서 잠을 자는 것인데, 이 '잠자는 숲'이라는 제목을 보면, 프랑스 사람(샤를 페로)이 쓴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는 동화가 있는데, 그것도 이태리 전승 동화를 페로가 각색한 것이라고 합니다만, 하여간 그 미녀가 마녀의 마술에 걸려서 몇 백 년 자게 되잖아요. 그런데 잠자는 그 동안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무시간의 공간이죠. 그런데 이 시에서도 황인숙 시인이 이 시를 쓰면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생각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세 번째 연을 보면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시간이 멈춰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있어요. 이 시에서 황 시인이 어른되기의 두려움 같은 것을 표현한 게 아닌가, 막상 어른이 되려고 하는데, 어른이 되면 예컨대 다섯 번째 연을 보면, '정의를 내려야 하고'가 요새 젊은 사람들의 말로 하면 필이 꽂히는데,(함께 웃음)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만사의 이치를 구별한달까, 판단을 해야 한달까 그런 것 같아요. 자기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에는 자유롭게 살 수 있었는데, 어른이 되니까 규율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죠. 그런데 그럴 때 이제 이 시적 화자는 그런 점을 자꾸 두려워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자꾸 숲 속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게 아닌가, (그 동안이라도 시간이 멈출 수 있으니까) 그쪽으로 도망가려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어떤 퇴행의 욕망을(퇴행이라는 감정 자체는 건전한 것이 아닙니다만) 굉장히 아름답게 형상화한 시가 이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 : 지금 고종석 선생님의 독법에 대해서 시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 : 근접한 독법 같은데요. 시를 쓸 때,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제목은 그걸 생각하면서 지었어요.

김 : 숲이 잠자는 것이 아니라, 그 숲 속에서 잠드는 영원한 시간의 숲이라는 건가요?

황 : 예컨대 이 세상이 아닌, 비현실적인 공간으로서 '잠자는 숲'이죠.

고 : 숲이 잠자는 것은 아니고, 숲 속에서 잠자는 것으로 쓴 것이죠?

김 : 동화 속을 보면, 숲도 같이 잠을 자는 것처럼 되어 있죠. 시공간 전체가 멈춰 있죠.

황 : 동화를 보면, 숲은 안 자요. 안 자니까 계속 덩굴이 우거져서,(함께 웃음) 숲 속에 있는 성 안에 있는 모든 것, 물레, 사람들, 화덕, 이런 게 멈추죠. 성 안에 있는 게 멈추고 숲은 계속 자라죠.

김 : 이 [잠자는 숲] 같은 데에서도 앞에 제가 말씀드렸던 것이, 앞질러서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황인숙 시인의 첫 시집을 낼 무렵, 황인숙 시인의 시들은 그때로서 굉장히 신선했다고 저는 기억합니다. 계속 말씀드립니다만, 언어가 말할 수 없이 발랄하고 탄력이 있구요. 감각적인 상상력과 거기 깃들어 있는 어린 요정을 연상시키는 생기, 무언가를 살려내는 힘, 그래서 황인숙 시인의 말과 시에 어떤 사물이건 걸려들기만 하면, 아주 부스스하고 시들어 메말라 가고 있던 것도 문득 예뻐지고 살아날 것 같은 기운이 첫 시집에 강렬하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인숙 시인을 떠올리면서 공기의 요정 같다는 얘기를 하기도 하구요.

고 : 부언 드리자면, 산문은 청탁을 받아서만 쓰신다고 하셨는데, 산문도 거의 시와 다를 바 없이 감각적인 것 같아요. 황인숙 시인의 시의 특징 중의 하나가 정형시가 아닌데도, 모든 시가 끈질긴 리듬의 긴장이 남아 있는데, 심지어는 어떨 때 보면, 산문을 봐도 리듬이 웅숭깊이 자리잡혀 있는 게 아닌가, '야, 어떻게 이렇게 모국어가 이렇게 잘 반죽이 될 수가 있는가' 생각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황인숙 시인이 외국어를 못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모국어를 워낙 반죽이 잘 되어서 뭐가 들어올 틈이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죄송합니다.(함께 웃음)

김 : 어쩌면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우리말과 잘 섞이실 수가 있으신가요?

황 : 리듬이 있는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었느냐는 질문이세요?(함께 웃음) 어떻게는 모르겠는데요. 결과적으로는 쓰면서 혹은 쓰고 나서, 어떤 음악 같은 게, 어떤 운율 같은 게 잡히면 좀 흐뭇해지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고 : 말씀을 길게 안 하시는 건 좋은데, 좀 크게 하세요.(함께 웃음)

김 : 무언가 운율이나 음악적인 것이 몸 깊이 와 닿거나 하면 시를 쓰거나 산문을 쓰거나 굉장히 좋다고 하셨는데, 그게 아마 모든 글쓰기, 시쓰기, 산문쓰기의 리듬과 통하는 어떤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까지 자꾸 말소리가 작아지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함께 웃음) 저는 크게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첫 시집에 요정과 같은 생기, 이것이 정말 우리 눈을 시원하게, 읽는 마음을 시원하게 해줬는데, 그 뒤로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으로 갈수록 무언가 달라지는 느낌을 어떤 독자들은 받습니다. 무언지 우울함이 드리워지고, 현실적 삶의 각박함, 힘겨움, 이런 것들로부터 마음이 첫 시집만큼 자유로워 있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구요. 그런 시적인 변모의 과정에서 시인이 치뤄내는 내면의 갈등과 싸움이 마치 첫 시집의 첫 시인 [잠자는 숲]에서 예견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저는 문득 받았습니다. 고운 햇님이 하나씩 뜨는 것이며, 안개가 분꽃 냄새를 풍기며 버티고 빗줄기가 기웃대고, 이런 진술들은 무구한 어린이의 세계, 동화적 의인화의 세계처럼 느껴지는데요. 그런데 이미 자신의 현실적인 처지의 한쪽 상황은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는 겁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는 이제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날의 삶, 어찌보면 누추하고 비루한 삶 속에 끌려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저는 이 시간을 위해 이 시를 다시 읽으면서, '아, 참 신기한 일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의 끝에서 '아, 나는 은사시나무숲으로 가고 싶다'고 내 영혼의 그리움을 부르는 은사시나무숲, 잠자는 공주의 그 숲에 가고 싶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런 식으로 시읽기라는 것은 꼭 옳은 건 아닙니다. 시의 화자가 꼭 시인이어야 할 까닭은 없는 것인데요. 그런데 왠지 저는 시인과 동일시해서 보게 됩니다.

이게 첫 시집의 첫 머리에 실려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황인숙 시인에 대해서 이 첫 시집 무렵에 많은 분들이 요정 같다, 어쩜 그렇게 요정이 별 달린 막대기로 탁 건드리면 호박도 마차로 변하고, 생쥐도 말로 변하고, 마치 신데렐라 같은데, 요정의 지팡이 같다고 얘기할 때 본인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황 : 저는 어색했어요.

김 : 쑥스러우시구요? 본인 시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동의를 못 하시는 건가요?

황 : 동의는 하는데요. 이게 무슨 요정, 이런 쪽은 아닌 것 같아요.

고 : 그런데, 하여간 요정인 것 같아요.(함께 웃음) 제가 참견하기는 좀 그렇지만, 대답을 좀 성의있게 하시죠.(함께 웃음)

황 : 저는요, 굉장히 성의있게 하려다 보니까, 말이 많이 안 나오는 거예요.

김 : 그냥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아마 제 생각에 요정이라고 하면 왠지 세상의 고통과 어두움을 잘 모르는 철부지라는 느낌이 있어서 잘 승복이 안 되시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황 : 예.) 요정 같다고 말씀하시지만, 황인숙 선생의 첫 시집 너머에 삶이 깊은 곳에서 더불어 안고 있는 비참에 대해서, 어둠에 대해서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죠. 이쯤에서 두 번째 시를 한 번 더 읽어볼까요. 이 [슬픔이 나를 깨운다]는 시는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합니다. 1994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된 시집의 표제시인데, 이 [슬픔이 나를 깨운다]를 어쩔 때 읽으면 저는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제목도 '슬픔이 나를 깨운다'로 되어 있지만, 슬픔 느낌을 저는 가지고 있는데요. 이 시는 고종석 선생님께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 : 얼른 읽으면 되는 거죠?

김 : 좀 공들여서 읽어주십시오.(함께 웃음)

고 :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 벌써 ! /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 소리 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 그리고 조심스레 /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흔히 좋은 문학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 아2름답고 슬프다는 말인데, 정말 슬프고 아름다운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외로운가 싶었습니다.

고 : 물론 이게 슬픔을 노래한 시지만,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시인이 슬픔을 그린 시인데, 이 안에 굉장한 유머가 있습니다. 블랙 유머라고 해도 좋은데, 슬픔을 주체로 해서 '슬픔은 과로하고 있다'거나 '슬픔은 공손히 읍한다'거나, 노래한다거나, 이런 식이죠. 예컨대 이 시는 자신이 슬픈 상태인데, 슬픔을 자기 몸 속에서 끄집어내서 유정화한다고 할까요. 슬픔에 생명을 불어넣어서, 슬픔을 자기 몸에서 분리해내서 기술하는 형태로 시가 이끌어지고 있죠. 사실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착 가라앉아서 심란해야 되는데, 물론 이 시 전체의 기조는 굉장히 심란합니다만, 중간중간에 표현들을 독자들이 읽으면서 문득문득 웃음이 나게 시인이 시적 장치를 해놓고 있어요.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좀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너무 긴 것 같습니다.(함께 웃음)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는 나는 슬픔 속에서 일어나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인데, 시인의 상상력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슬픔을 자기 몸에서 딱 떼어놓고 계속 슬픔을 기술하는 거죠. 뒷부분에 가면,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그러니까 외출을 해서 친구들을 만나서 잠깐 깔깔거릴 때는 슬픔을 잊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보면, 이 시의 화자는 혼자 있을 때, 좀 슬픈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걸 명확히 분석할 수는 없지만, 소리내서 읽어보면 거기서 리듬이 굉장히 강렬하고 끈덕지게 달라붙고 있다는 것을 느낄 거예요. 그게 이제 황인숙 시인의 재주인데, 재주인지 일필휘지에 쓴 시인지 많이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인숙 시인의 몸에는 거의 리듬이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이 양반이 춤을 잘 추는지는 모르겠는데, (함께 웃음) 시를 하는 데에는 리듬이 잘 붙어 있습니다.(함께 웃음)

김 : 이 시에 대해서 황 선생님 한 말씀 좀 들려주십시오.

황 : 굉장히 우울하고 슬픈 시인데요. 아까 김사인 선생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제가 괜히 첫 시를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한 시를 써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같은데, 세상을 구체적으로 살아보기도 전에, 막막함 같은 것이 있잖아요. 앞으로 안 좋은 사연이 나에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잠자는 숲]에 있는데, 그렇게 미리 예감했던 상태에 빠진, 지독히 우울증에 빠진 시예요.

고 : 실제로 이 시를 쓰실 때 굉장히 우울하셨던 거죠?

황 : 우울이라는 말보다도 울음 쪽이에요. 거의 그런 상태로 좀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아요.

김 : 저는 이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는 부분을 읽고 가슴이 철렁하면서 '나도 슬픔이 해주는 밥은 안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함께 웃음) 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자기 밖으로 꺼내서, 고종석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의 또 다른 분신으로 만들어서, 몸 밖의 분신으로 만들고 생명을 가진 어떤 것으로 객관화해놓고, 이런 글쓰기가 어느 한 시인(글쓰는 이)만이 할 수 있는 고요한 자기 위안의 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한편에서 들고,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식의 글쓰기가 슬픔 속에 풍덩 빠져서 자기 넋두리를 늘어놓는 감상적인 확인에 빠지는 것에 대해 방어적인 장치를 같이 하는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시집도 그렇고, 그 이후 시들도 그런데, 본인은 의식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슬프다, 슬픔, 이런 말의 빈도가 상당히 잦은 편이라고 느껴지는데요. 느끼고 계시는지요?

황 : 그런 걸 느끼는데, 제가 아까 요정이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수긍이 안 갔던 것과 관련이 있는 부분인데요. 첫 번째 시집을 보면서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발랄하다는 것인데, 저는 제 첫 번째 시집에서 사람들이 왜 페이소스 같은 것을 못 읽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고 :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 보면 팔자 사나운 요정들이 많이 있습니다.(함께 웃음) 그러니까, 요정이 꼭 뭐 그렇게 발랄한 것만은 아니죠.

황 : 그런데 첫 번째 시집에서도 있는 소지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쪽으로 제 삶이 점점 치달았던 것 같아요.

김 : 슬픔, 운명처럼 닥치는 피할 길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제가 좀 엉뚱한 말씀 좀 황인숙 시인에게 여쭤보려고 합니다. 황인숙 선생의 산문집 {인숙만필}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 안에서 보셨겠습니다만, 황인숙 시인께서 달리기(운동)를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해요. 그런데 다른 문인이라면 몰라도 또는 다른 시인이라면 몰라도 황인숙 시인께는 좀 의외라고 생각하는 독자분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연고로 달리기에 매료되신 건가요?

황 : 현재 매료된 것은, 제가 4년에 걸쳐서 1년에 3kg, 2kg 해서 살이 많이 쪘어요. 그런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안 되려니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림 그리는 남자분이요. '저한테 황인숙 씨는 60kg은 되겠는 걸, 뭐'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건 절대 아니라고 그랬는데, 그 즈음에 정상적인 체중계에 재보니까 그 사람의 눈이 정확했더라구요.(함께 웃음) 너무 충격을 받아서 살을 좀 빼려고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달려보니까, 달리면 달릴수록 달리는 게 좋더라구요.

김 : 어떤 매혹이 있던가요?

황 : 그러니까 전신을, 온 몸, 혈관, 근육, 이런 걸 전부 깨어나게 하는 거죠.

고 : 길을 직접 달리십니까?

황 : 길을 달렸으면 좋겠는데, 전에 한 번 길을 달리려고 하니까, 지나가는 버스나 사람들한테 굉장히 쑥스럽더라구요. 그래서 길은 그냥 산책만 하고, 헬스장에 가서 달리기를 해요. 그래도 2kg 줄었어요.

김 : 글 속에서의 느낌도 황 선생님께서 운동하면서 온몸과 세포 하나하나가 핏줄 하나하나가 다 열리는 것 같은 느낌에 매료되신 것이, 황 선생님의 시가 드러내는 온몸과 온 감각이 사물이나 세상에 대한 열림과 맥이 닿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이 드네요.

황 : 맥이 닿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그렇게 외향적은 아닐 듯하면서도 어쩔 때 보면 외향적인 것 같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아무튼 실제 대체로 사람들을 대할 때 수줍음을 타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는 즐거워하는 것을 제가 보니까요. 저는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정적인 인간이 아닌가 봐요. 동적인 인간인가 봐요.

김 : 말씀 중에도 잠깐 나왔습니다만, 서울 복판인 남산 기슭에서 오래 사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게 이사를 안 가시고, 끝내 남산 주인 노릇을 자처하는 까닭이 있습니까?

황 : 우선 서울에서 제일 살만한 데가 남산인 것 같구요. 근처에 가까이 남산을 두고 사는 게 익숙해져서 그럴 거예요.

김 : 그래서 황 선생님의 첫 번째, 두 번째, 그 이후의 시집을 본 분들은 대개 느끼실 겁니다. 황인숙 선생님 시를 보면, 나무들, 풀들, 이런 게 많이 나와요. 그리고 하늘, 새들, 벌레들,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황인숙 선생 시 속에 나오는 자연물들(나무와 풀들)은 단적으로 김용택 시인의 시 속에 나오는 나무와 풀들과는 왠지 질감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실지 모르겠어요. 자연을 구성하는 수수한 목숨들, 유정, 무정들에 대해서 굉장한 친화감을 가지고 계신데, 그렇지만 농경적인 삶을 자기 뿌리에 두고 있는 사람들의 자연과는 다른 질감의 자연을 황인숙 선생의 시에서는 보여주시는데, 그래서 이 대목이 황인숙 선생의 시인으로서의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은 서울을 고향으로 하고 있고, 농경적 삶을 자기 추억 속에 갖고 있지 않은 도시적 감수성을 가진 한 시인이 도시적 삶의 토대 위에서 자연과 자연적인 어떤 것과의 화해라고 할까요, 조화라고 할까요, 이것이 어디까지 실현 가능한 것인가, 또는 어떤 식으로 구현이 가능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한 답을 황인숙 시인의 시가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느끼기도 하는데요. 제가 어설피 드린 이 말씀에 대해 황인숙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 : 그런데 제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굉장히 오래 살았지만, 지금 서울에서 태어나서 20,30년 정도밖에 안 산 사람들과는 달라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이 동네 여기저기 텃밭도 많았고, 집집마다 꽃밭도 있었고, 그리고 한강에 나룻배도 있고, 강 건너에는 뱃사장, 수풀, 이런 게 있었죠. 지금은 압구정동 같은 곳에 아파트가 있지만, 그런 곳이 전부 자연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농경적 경험은 없지만, 어떤 전원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경험은 있죠.

김 : 예컨대 김용택, 고재종 이런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에 대한 친화의 방식과 황 선생님 자신의 나무와 풀에 대해 느끼는 친화의 방식이 어떻게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황 : 당연히 다를 텐데요. 김사인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저한테 자연을 대할 때 농경적인 경험이 없어서 다를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분들한테 자연은 일상이고, 저에게는 소풍 같은 게 아닐까 싶네요.

김 : 그렇지만, 어떠신가요? 그 분들이 노동을 지불하고, 자연과 농경에 생계를 의탁하고, 이렇게 접촉되는 자연에 비해서 소풍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무언가 주눅드는 어떤 겁니까? 아니면 덜 떳떳한 겁니까?

황 : 그런데 그 분들한테 더 떳떳할 것은 없겠지만, 떳떳치 못할 것은 없을 것 같아요. 그것은 벼를 심는 사람들한테 꽃을 심는 사람들이 떳떳하거나, 떳떳치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요.

고 : 그런데 아까 소풍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시인들한테도 자연이라는 게, 황 선생님이 자연에 대해 갖고 있는 거리보다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양반들은 숲이라기보다는 논 같은 것이고, 황 선생님은 도시 안에 인공적으로 가꾸어진 숲인데, 그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분들이 훨씬 더 밀착해 있고, 황 선생님은 소풍 가듯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황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좀 떳떳하지 못할 게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게 그 분들이랑 다른 식이긴 하지만, 어쨌든 제 식대로의 관계는 있는 것 같아요.

김 : 지금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지만, 시와 문학에 대해 굉장히 중요한 어느 지점을 짚어주신 것인데요. 나락을 심는 사람에 비해서 꽃을 심는 사람이 덜 떳떳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이렇게 물으셨고,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말씀해주셨는데요. 이 지점이 바로 시(예술)가 설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인 것 같고, 나락이 나락다워질 수 있는 지점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꽃을 심는 일을 용납하지 않는 벼, 논, 밭이라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요. 사람이 꽃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만, 나락만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조심스럽게 말씀해주신 부분을 한 화두로 삼아서 생각을 해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되짚어서 질문을 드리는 것인데요. 지금 앞에 첫 시가 [잠자는 숲]이었고, 그 시가 수록된 첫 시집을 보면, 황 선생님의 첫 시집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게 숲이고, 나무입니다. 이런 게 중요한 한 중심을 이루고 있구요. 그리고 그 숲과 나무들 위로 하늘이 펼쳐져 있고, 새들이 날아다닙니다. 제가 제 식으로 황 선생님의 첫 시집을 분해해서 지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쪽에 고양이가 있습니다. 이 분의 등단작인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를 보면, 고양이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관능과 감각과 유연함과 유려함까지, 현실 속의 존재 같지 않기도 한, 고양이의 세계가 한 쪽에 있고, 이 분의 [그 여자 늑골 아래]라는 시 속에 붉은 지네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그 여자 늑골 아래 붉은 지네 한 마리가 산다', 이런 구절이 있는데, 또 읽으면 가슴이 철렁해지는데, 요정과 같은 생기의 시인이 왜 다른 한 옆에 늑골 밑에 붉은 지네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그래서 이 붉은 지네는 대체 정체가 무엇인가? 두 분께 각각 좀 여쭙고 싶었습니다.

고 : 저도 여쭙고 싶은데요.

김 : 거기 무슨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황 선생님께서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일종의 억압된 관능입니까? 제 질문이 너무 상투적이죠.

황 :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고 : 시 쓸 때의 그냥 몸 상태 아니었나요?(함께 웃음) 아니, 평론가들이 굉장히 복잡한 해석을 하는 구절들이 뜻밖에 그런 경우가 있거든요.

황 : 몸 상태는 아니고, 지금 생각났는데, 제가 이걸 진작에 봤으면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왔을 텐데, 저도 세 편만 읽어보고 왔구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아무튼 심장을 말한 것이었어요. 심장의 상태가 붉은 지네의 다른 상태인 거죠. 그러니까 이 여자를 아무 때나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물어뜯으면 치명적인 독이 있을, 심장이 붉은 지네인 상태죠.

김 : 제 생각에는 붉은 지네로 표상되는 생의 잔인함에 대한 생각을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정이라는 표현에 상당히 반감을 가지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고 선생님 다른 말씀 없으신가요?

고 : 시인이 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요.

김 : 또 상투적인 질문을 한 가지 드리려고 합니다. 두 편의 시를 대략 검토한 셈입니다만, 이쯤에서 황 선생님은 시인 노릇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이 난세에요.

황 : 시인 노릇이요. 세상의 이가 되는 시인의 노릇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여기 저기 얘기를 많이 해놔서 제가 아무리 정성껏 말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되풀이하는 게 될 것 같구요. 이 난세에 시인의 노릇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김 : 네. 무얼 하면 시인으로서 제값을 하는 게 되나요?

황 : 김사인 선생은 시인으로서 무얼하면 제값을 하는 게 될 것 같아요?(함께 웃음)

김 : 저도 잘 모르겠어서, 황인숙 선생께 여쭈어본 겁니다.

황 : 세상이 난세이면 일수록 시 쓰는 사람들은 무언지는 몰라도 채무감 같은 것은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이 난세에 무엇하는 사람인가 하는 채무감 같은 거요.

김 : 아니오. 저는 이런 뜻으로 여쭈었습니다. 나락을 심는 것만이 세상에 대한 밥값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꽃을 심을 수도 있는 것인데요. 꼭 나락, 벼를 심는 것에 해당하는 시인이 할 일을 여쭙는 것은 아니구요. 그냥 시인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물어본 것인데요.

황 : 그런데 난세라는 게 어쩐지 굉장히 나락이 필요한 세상을 난세라고 하는 것 같아서요.

고 : 그러게 왜 난세라는 말씀을 하셨어요?(함께 웃음)

김 : 제 실수입니다. 질문을 드리면서 시인의 노릇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고 끝이었으면 좋았을 걸, 쉼표하고 이 난세에?(함께 웃음) 하고 물음표를 붙였더니 많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답 안 하실려구요?

황 : 고종석 선생은 시인이 이 난세에 어떤 노릇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고 : 시인은 시를 써야죠.(함께 웃음) 아무리 난세일지라도, 아까 김사인 선생의 비유를 들자면, 난세에도 꽃을 심는 사람은 있어야죠. 그런 거 아닌가요?

황 : 대답할 거라곤 그것밖에 없는데, 한 번 말한 걸 또 계속 말하면 안 되잖아요.

김 : 알겠습니다.(함께 웃음) 그림 그리는 분한테 도대체 그림 그리는 일이라는 게 뭘 하는 일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아주 딱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황인숙 선생님께 이번에는 죽음에 대해서, 늙어감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왜냐하면, 두 번째 시집 무렵을 보면, 첫 시집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발랄함, 요정이라는 말을 떠올리게도 할 그런 감각의 시적 화자가 두 번째 시집에 가서 자주 부딪히고 있는 것이 늙어감, 나이듦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무언가 굉장히 고통스럽게 부딪히고 있는 예를 시 속에서 여러 차례 보게 되는데요. 황 선생님의 어느 산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늙음에 대한 공포가 길항하며, 서로를 끈덕지게 끌고 나간다. 무서운 일이다. 늙지 않으려면 죽어야 하고, 죽지 않으려면 늙어야 하다니'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무언가 첫 시집의 황 시인의 발랄함을 조금 힘겹게 만드는 요인 중에는 결코 이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늙어감과 죽음의 문제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황 선생님의 여러 느낌이나 생각을 꼭 이로정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꼭 한 말씀 들려주시죠.

황 : 정작 그때보다 훨씬 더 늙은 지금은 자포자기해서 그런지 늙어가는 것에 대한 초조함, 혐오, 공포, 이런 게 좀 덜한데요. 그런데 진짜 이제 정말 다이아몬드 같은 청춘은 지났다 싶은 나이에는 그런 느낌이 굉장히 강했어요. 그리고 자기 나이가 자기한테 굉장히 이물스럽구요. 그런데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지금 역시도 어떤 때는 '이왕 늙은 것, 이제 뭐 더 늙는 것 무섭지도 않네' 라고 생각하지만,(함께 웃음) 이제 다시 50이 넘으면 지금과는 다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제는 늙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쪽으로 집중적으로 느껴지게 될 것 같아요.

김 : 그런데 나이듦과는 일단 어떤 식으로 화해를 하셨습니까?

황 : 화해라기보다 그냥 뭐랄까, 포기한 것이죠. 어쨌든 옛날보다는 편해졌는데, 그래도 제 나이가 굉장히 낯설어요. 어떤 사람이 나이를 깨우쳐주고 나이 얘기하고 그러면, 이제 싫더라구요.

고 : 그러면 처음에 김사인 선생이 생년을 말씀했을 때는 굉장히 싫으셨겠네요?

황 : 그때는 덤덤했고, 말로 들으면 좀 나은데, 신문 같은 데에 괄호 해놓고, 나이가 46, 이렇게 써놓으면 울화통이 터져요.(함께 웃음)  왜 남의 나이를 이렇게 써놓나 하구요.(함께 웃음)

김 : 죽음에 대해서는 좀더 기다려보셔야 되겠군요.

황 : 아니오.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안 하지만, 가끔 몸 상태가 안 좋다든가 이럴 때 동물적인 공포감 같은 게 느껴지죠. 무슨 차원 높은 무(無)가 아니구요.

김 :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게 아마 황 선생님의 근래 시집 속에도 첫 시집과 다름없는 발랄함, 깨어있음, 이런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강하게 느껴지는데요. 그것과 더불어서 그런 발랄함과 탄력이라는 욕구는 중력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비상하고 무게가 없는 상태로 떠오르고 날아오르기를 지향하는 것인데, 늙어감, 나이듦,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점점 중력의 중심 쪽으로 끌어서 주저앉히는 현실 원리겠죠. 그것 사이에서 두 가지 상반된, 필연적으로 늙어가는 나이듦과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욕망이나 감각의 비상, 분출, 이것이 황 선생님 시 속에서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안아들이면서 수습이 될 수 있는가가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고 : 그것과 관련지어서 제 느낌은 김 선생님이 말씀하신 부력과 중력 사이의 찢겨짐이 아래에서 위로 간다거나 위에서 아래로 간다기보다 싸이클이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우리가 오늘 읽을 세 번째 시가 [지붕 위에서]라는 시인데, 시기적으로는 [잠자는 숲]이나 [슬픔이 나를 깨운다]보다 뒤에 있지만, 그야말로 이것은 탱탱 튀는 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이 시를 쓸 때 황 시인은 30대였겠죠.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20대에 쓴 시 못지 않게 굉장히 발랄 무쌍하게 어둠이 없는 느낌이 있어서,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김 : 그런 점을 좀 염두에 두면서 오늘 세 번째 시, 이것은 1994년에 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에 들어 있습니다. 상반되는 이걸 어떻게 수습을 하게 될지를 약간은 예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황 선생님께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황 : [지붕 위에서]

'나는 드디어 소원을 이뤘노라 / 발가벗, 지는 못했지만 / 하나 가득 바람을 채워놓고 / 맨하늘을 향해 대자로 누워 / 눈길을 하염없이 가게 두는 것 // 별이 하나 둘 세 개 / 네 개 다섯 개 여섯 일곱 여덟 개 / 빨랫줄 사이에서 흔들리며 / 잘 마르고 있다 / 한옆에서 달은 / 부표인 척 떠있다 // 아무 것에도 닿지 않는 바람이 / 하늘에서 곧장 흘러 떨어진다 / 끝없이 뱃전에 와 부딪는 물결처럼 / 바람은 내 몸에 와 부서진다 / 바람은 달에 가 부서진다 / 무성한 바람의 이파리들이 / 층층이 켜켜이 부서진다 // 아, 나는 옛부터의 / 달의 마법을 믿노라! / 나는 한 흥얼거림을 듣는다 / 먼 곳에서 그는 노래하고 있다 // 달려라, 바람아! / 저 친근하고 서늘한 / 노래하는 머릿속으로 / 나를 몰아가 주려무나. // 이 순간 나는 / 자랑스럽게 씻겨져 있노라.'

김 : 어떻습니까? 고 선생님, 이 시에 대해서 조금 말씀해 주시지요.

고 : 이 시가 황인숙 시인 특유의 육감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선 별로 앞의 두 작품에 깔려 있는 슬픔이랄까, 어둠이랄까, 이런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아마 화자는 맨 하늘을 향해 대자로 누워 있다고 하는 걸 보니까, 옥상 같은 곳에 누워 있는 것 같은데, 하늘을 보고 별을 세고 달을 보고, 또 뒤를 보면 어떤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이게 육감적이라는 게 세 번째 연에 '아무 것에도 닿지 않는 바람이', 바람이 아무 것도 스치지 않고 자기 몸을 처음 스치는 거예요. 숫처녀 바람, 숫총각 바람 같은 거죠. 바람이 몸에 스치는데, 바람은 다른 것에 닿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여기로 곧장 떨어진다는 거죠. 그리고 그 위에 달을 부표에 비유하면서 그 다음 연에서 갑자기 바다 이미지가 연결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옥상 위의 바람을 바다 위의 바람으로 연결시킨다거나, 뒤에 옛부터의 달의 마법, 특히 서양 설화나 동화에서 보면, 보름달 같은 게 마법과 많이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마녀들이 무슨 빗자루를 타고 가면 뒤에 배경이 보름달이 있기도 하고, 보름달이 뜨면 사람이 늑대로 변하기도 하고, 'E.T'라는 영화를 보면 자전거를 타고 날아가는데, 뒤로 보름달이 배경으로 떠 있죠. 그런 것도 스필버그 감독이 무의식적으로 마법과 보름달을 함께 보는 거죠. 이것은 어느 정도 서양적 감수성인데, 어쨌든 옥상에 누워서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또 바다구나 라고 생각하고, 보름달이 보이니까, 보름달을 통해서 또 어떤 먼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누군가와 교신을 하려는 욕망, 이걸 이끌어나가는데, 행 하나하나가 정말 온몸의 감각이 깨어있지 않는 사람이라면 쓸 수 없는 것이고, 독자들도 그렇겠죠. 이것은 눈으로 읽는 시가 아니라 전신으로 받아들이는 시가 아닌가, 이 정도만 우선 얘기하고 시간이 나면 또 얘기하겠습니다.

김 : 두 분이 가까운 친구 분이시죠? (황 : 네) 그런데 또 한편 그런 점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지붕 위에서] 같은 경우가 정말 황인숙 시인의 정말 맑고 투명한 감각 자체가 한 고비를 넘어서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한쪽에 받으면서요. 그러면서도 첫 시집과 같은 무구하고 천진한 발랄함이나 투명함과는 좀 다른 기운을 느낄 수도 있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약간의 억지가 섞인 작위의 느낌 같은 톤이 얼핏 느껴졌어요. 제가 이 시가 세 번째 시집에 실렸다는 것을 의식하고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각적이고 생기에 넘치고 발랄하되, 그것이 첫 시집의 생기와는 조금 다르다고 느껴졌는데요.

황 : 그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첫 시집을 쓸 무렵만 해도 아무튼 모든 시가 삶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삶이 달라서일 거예요.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은 그 즈음에 제가 좀 비슷하게 좁은 생활 공간에서 살고 있었는데, 크기는 비슷하지만, 닫혀있고 좁은 곳이었거든요. 거기에서 트인 공간으로 이사를 가면서 아무튼 하늘이나 바람 같은 것을 만끽할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에 대한 환호가 섞여 있는데, 억지는 전혀 아니에요.

고 : 이 시가 30대에 황인숙 시인이 쓴 시지만, 이걸 20대가 썼다고 하더라도 '너, 왜 이렇게 억지로 썼니?' 이런 느낌은 안 들 것 같은데요.(함께 웃음)

김 : 아닙니다. 제 억지라는 말은 꼭 그런 말은 아닙니다.

황 : 여기에는 뭐냐 하면, 어쨌건 철부지가 쓴 시는 아닌 거예요. 생활을 이것 저것 잘 아는 사람이 이것 저것 아무튼 답답함을 경험한 사람의 그런 것이 느껴진다는 거죠. 그건 당연히 그렇겠지요.

김 : 자기 스스로를 분발시키기 위해서 목소리를 고음으로 내보기도 하는 그런 느낌을 제가 받았거든요.

황 : 그건 아닌데, 그건 어쩌면 김사인 선생님께서 저랑 아주 안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제 삶을 알아서 그 삶에서 저런 노래가 나오려면 정말 억지깨나 썼을지 몰라, 이렇게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어요. 일종에 저한테 있는 아주 거의 몇 안 되는 드문 복 중의 하나라면 아주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 크게 즐길 줄 아는 복을 타고 났거든요. 그래서 아무튼 저로서는 정말 기꺼워서 쓴 시예요.

고 : 시인들이 대개 그렇겠지만, 황인숙 시인 같은 경우가 방금 말씀하신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조그만 것을 충분히 즐기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하늘의 별, 바람, 이런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찮게 보일 수 있는 것인데요.

황 : 하늘의 별이 그렇게 대단해 보였다는 게 아니구요. 서울에서 제일 넓은 세상이 하늘이잖아요. 옥상에 딱 하니 누워서 온통 바람에 도취된 상태에서 쓴 시예요.

고 : 그러니까, 이게 약간 환각 상태죠.(함께 웃음)

김 : 지금 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작은 걸 가지고도 극대화해서 황홀해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정말 하늘이 내린 복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복에 그 중 가까이에 사는 부류의 인간이 시인이 아니겠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황 선생님께 짓궂은 뜻으로 묻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 대해서 한 번 여쭙고 싶은데요. 왜냐하면 이 성결하고 순수함과 무구함, 어린 시절에 누구나 가졌을 법한 이것을 견딜 수 없이 피곤하게 만들고, 우리의 삶과 세계를 말할 수 없이 비루하고 누추한 것으로 만드는 그 어떤 힘, 현실원리를 상징하는 것이 돈이 될 텐데요.(물론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겠지만) 상업주의랄지 뭐라고 하는 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황 선생님의 한 생각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황 : 돈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은 여러 가지 생각이 있지만 딱 한 가지 생각만 말하자면요. 돈이라는 것은 테마 파크나 놀이공원에 가면 모든 놀이공원을 출입할 수 있는 칩을 주잖아요. 돈도 바꿔주지만, 그런 칩 같은 게 돈이라고 생각을 해요.

김 : 그저 칩일 뿐이다.

황 : 칩일 뿐일 수도 있지만, 칩이 중요하죠. 칩이 없으면 놀고 싶은 것 못 놀고, 타고 싶은 것 못 타죠.

고 : 때로는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인가요?

황 : 지금 아무리 난세지만, 굶주림에 대한 불안 같은 것까지는 제가 안 느끼면서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저를 제일 괴롭히고 저로서는 괴롭힐 때 달리 다른 수가 없는 게 돈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김 : 그것이 인간의 삶에 본질적인 행·불행을 좌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이 말로 들을까요.

황 : 저한테는 그래요.

김 : 그건 굉장한 힘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좀더 힘이 있다면 '나날의 일용할 양식과 그것을 살 돈과 아이들을 키우는 데 필요한 돈, 이런 것에 이렇게 순책으로 발목이 잡힌 채로 누추하게 나이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을'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요. 이렇게 힘이 세신 황 선생님을 뵙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고 선생님 한 말씀 있으실 것 같은데요.

고 : 아닙니다. 저는 그냥 시를 읽으면서 [지붕 위에서]에서 '이 순간 나는 / 자랑스럽게 씻겨져 있노라'라고 끝나는데, 씻겨졌다는 게 바람에 씻겨졌다는 건가요? 그러니까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을 맞기 전보다 좀더 깨끗해졌다는 건가요?

황 : 그런 거죠.

고 : 끝났습니다.

김 : 너무 길어졌죠.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오늘 세 편의 시와 함께, 두 분 선생님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박수)

오늘은 황인숙 시인과 귀한 도움 말씀 들려주신 산문가 고종석 선생님을 함께 모시고, 좋은 세 편의 시를 읽어보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황인숙 시인이라는 그 이름과 몸을 빌어서, 또 그 분이 구사하는 우리말의 힘을 빌어서 구현되고 있는 어떤 마음의 세계, 마음의 몸가짐, 이것에 대해서 독자분들께서는 좀더 예민하게 함께 느끼면서 황인숙 시인의 시를 읽어봐주시면 무언가 많은 힘을 얻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을 합니다. 오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원우 선생을 모시고, 그 분의 근작인 {객수산록}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박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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