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 > [펌] 김규항, 진중권 대담

[김규항,진중권 특별 좌담]
"대한민국은 균열중, 전쟁세력 살아남지 못 한다"

김규항, "개혁의 후퇴, 변질이란 말은 부적절, 개혁은 지배세력의 자구책이었을 뿐"
진중권, "노무현지지 세력 정신분열증 겪고 있어. 패러다임 변화에 새로운 발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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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오 기자
인터넷 논객으로 잘 알려진 김규항 씨와 진중권 씨가 마주 앉아 정세 좌담을 진행했다. 두 논객은 여러 파병 논리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파병을 주장하는 개혁세력을 향해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다.

김규항 씨는 김선일의 죽음 이후 개혁세력을 바라보는 대중의 판단에 대해 "김선일 씨의 죽음을 통해 대중들은 개혁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고 개혁은 진보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고 있다"고 진단하고, "20년 가량 승승장구해온 개혁에 근본적인 균열이 생기고 있다"고 밝혔다.

진중권 씨는 "파병세력의 논리를 파헤쳐 깨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노무현이 대통령이라서 파병에 반대해야 할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통령이 이회창이었다면 엄청난 반대로 1차 파병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진중권 씨는 무엇보다 개혁세력이 실질적인 파병세력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진중권 씨는 "파병 철회가 안 되었다는 것은 수구세력의 문제도 아니고, 조중동의 문제도 아니고, 미국 문제도 아닌, 순전히 열린우리당의 문제"라고 규정하고 "열린우리당이 원하면 파병 철회가 되는데 문제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밝혔다. 덧붙여 "그들이 소수정당일 때는 파병에 전부 반대해도 파병은 되는 상황이었지만 총선이 끝나고 다수당이 된 후 태도가 바뀌었다"고 비난했다.

유시민을 필두로 한 개혁세력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발언이 쏟아졌다. 김규항 씨는 "유시민 같은 사람의 논리적 파탄은 200자 원고지 한두 장으로도 정리가 된다"면서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사람 참 나쁜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데 그런 상태로 개혁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았으니 세상에 겁나는 게 없어졌다"고 지적했다. 진중권 씨는 "유시민도 옛날에는 좌파였다가, 방법적 자유주의라고 하다가, 지금은 자유주의도 아닌 허접이 되어버렸다"며 유시민의 변절을 비난했다.

이날 두 사람은 파병 철회 운동을 전개중인 '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의 대응 기조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말을 쏟아냈다. 또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노무현 퇴진' 구호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미국만을 문제삼거나, 꼬리만 자르고 이번 사태를 정리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각각의 특유의 언어와 논리로 문제를 짚었다.

두 사람은 개혁 세력의 균열을 주시하는 가운데 진보세력의 정치적 과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으며, 변화하는 사회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고, 역사의 진전을 위한 새로운 발언을 해나가야 한다는 데 생각을 같이 했다.

미디어참세상이 마련한 김규항, 진중권 두 논객과의 정세 좌담은 30일 오후 1시30분부터 약 2시간동안 야간비행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파병 세력의 비열한 논리 깨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

유영주(사회/미디어참세상편집장) : 유력한 글쓰기활동가 두 분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돼 뜻깊습니다. 최근 '전쟁세력'을 비판하는 두 분의 글도 여느 때처럼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데요, 김규항 씨는 작년 9월 <국익>을 통해 전쟁세력의 논리를 정확히 짚은 바 있고, 최근에는 <우리의 전쟁>, <유시민, 아비투스, 김태촌>,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 등의 글을 통해 일침을 가했고요, 진중권 씨는 <노혜경, 그런다고 땅에 스민 피가 지워지나?>, <김정란의 구주, 적그리스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의 글로 전쟁세력들의 이러저러한 논리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셨는데요, 전쟁과 전쟁세력을 보는 데 있어 두 분의 입장 차이는 없어 보이나 말하자면 구질은 상당히 다른 듯 합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맞서 젖 먹던 힘을 모아 싸우는 이라크 민중들, 그리고 고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이 땅의 민중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나눠주시죠.

진중권 : 최근 인터넷 글쓰기를 잘 안 하려고 했는데, 원고를 끝내고 인터넷을 검색하다 김선일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새벽에 속보를 보며, 크게 분노하고 황당했죠. 그래서 인터넷과 경향신문과 씨네21 등에 글 몇 개를 썼는데요, 지금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한 번 파병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일상에서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돼요. 파병세력의 논리를 파헤쳐 깨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차라리 대통령이 이회창이었으면 별 문제 없었을 거예요. 노무현이니까 파병에 반대해야 할 사람들이 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잠잠해하고 있는 거죠. 만약 이회창이었다면 파병 결정조차 지금처럼 쉽게 못 했을 겁니다. 사람들의 정치의식, 즉 개혁이면 개혁, 진보면 진보, 이런 가치에 의해 현실 정치가 강제되고 활용돼야 하는데, 오히려 정치인들에 의해서 활용 당하고만 있단 말이죠. 정치인들에 의해 포섭되어서 개혁이나 진보의 가치를 자기들 멋대로 입맛에 따라 활용되고 있는 거예요. 이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픈 대목입니다.

26일 촛불집회에 갔었는데, 민언련의 최민희 씨, 정말 짜증나더군요. 노무현이란 가치는 절대 불변의 가치예요. 노무현을 지지하는 데도 여기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이 따위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파병 철회가 노무현을 살린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아주 짜증나거든요. 사람이 죽었는데 거기 앞에서도 아직 노무현 이런 얘기가 나오느냐 말이죠. 그런 식으로 얘기가 나오는 것들이 뭐랄까 굉장히 비정상적이에요.



김규항 : 고 김선일 씨 사건이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그 일이 개혁의 기만적인 현실을 드러내는 데 어떤 논리적 주장보다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들 개혁의 후퇴다, 변질이다 그런 말을 합니다. 하지만 실은 개혁이 그런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대중의 의식이 높아져서 권위주의 통치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지배세력이 선택하는 자구책이거든요.

절차적 민주주의 같은 형식적인 문제들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진보세력을 대부분 체제내화하고 계급 문제나 분배 같은 실제적인 사회변화를 차단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독재를 사용하던 지배세력이 민주의 옷으로 갈아입고 지배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혁이라는 게 잘 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오랫동안 야만적인 독재에 당해왔기 때문에 독재만 아니면 좋겠다는 그런 의식이 있습니다. 수구 우파나 조중동만 공격하면 나머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게 있는 거죠. 탄핵 사태로 노무현정권이 민주주의의 순교자가 되었다가 부활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바로 그런 거지요.

길게 잡아 87년부터 그런 상황이 지속되어 왔는데 이번 김선일 씨의 죽음을 통해 대중들은 개혁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고 개혁은 진보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고 있습니다. 20년 가량 승승장구해 온 개혁에 근본적인 균열이 생기는 겁니다.

퇴진 구호, 파병 철회를 위해 외치는 것 당연

유영주 : 독재만 아니면 좋겠다는 의식이 개혁에 대한 과도한 기대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말씀하셨고, 개혁의 비정상성과 근본적인 균열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좀더 섬세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 이번 일련의 사태의 중심인 김선일 씨 사망 사건의 원인부터 따져보는 것이 순서일 듯 합니다. 한국 정부의 파병 방침이 결국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태를 부르게 된 원인 진단을 어떻게 하느냐, 이게 쟁점이 되고 있는데요.

진중권 :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조희연 씨의 주장을 보면 미국에 초점을 맞추어야 되고, 미국의 부시를 낙선시켜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미국의 부시를 낙선시키느냐 당선시키느냐가 우리의 임무는 아니에요. 그건 미국 유권자들의 문제라는 거죠.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냐면 파병이에요. 파병 결정을 누가 내렸느냐의 문제에요. 노무현정권이 내렸잖아요? 또 정부와 의회의 역할이 있을 수 있어요. 터키 같은 경우는 정부에서 파병안을 제출했지만 의회에서 부결시켜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청와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의회에서 부결시킬 수 있는데 그렇게 안 하는 거예요.

열린우리당 지금 다수거든요. 민주당 의원들 파병 철회 공약으로 내세웠잖아요? 민주노동당 의원들 원칙적 파병 반대론자들이고요. 합하면 거의 7:3이죠. 절대적 다수가 되는데 그런데 왜 안 하느냐 이말입니다. 파병 철회가 안 되었다는 것은 수구세력의 문제도 아니고, 조중동의 문제도 아니고, 미국 문제도 아니고, 순전히 열린우리당 문제에요. 그들이 원하면 파병 철회가 되는 거예요. 문제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탄핵 때 뭐라 그랬나요? 민주개혁을 위해서 다수를 만들어내자 그랬거든요.

유영주 :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노무현정권에 대한 태도 문제가 제기됩니다. 파병반대국민행동 안에서도 그렇고... 노무현 퇴진을 주장할 거냐 말 거냐 같은 논란도 그 연장에 있어요.

진중권 : 그런 논쟁 짜증나요. 왜냐하면 노무현 퇴진 구호 쓸 수 있어요. 문제는 뭐냐면 그건 슬로건에 불과한 거예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퇴진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고, 퇴진시킨 다음 무슨 대안을 갖고 있느냐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슬로건으로 퇴진 이야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 정도로 파병이 중요한 문제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게 왜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예컨대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의회주의 정당이거든요. 의회주의 정당 내에서 그런다면 그건 무책임한 말이 되니까요. 그들은 합리적인 시스템 내에서 게임의 규칙을 따라야 되거든요. 의회주의 규칙에. 그런데 시민단체라든지 밖에서는 내세우려면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잖아요. 그걸 갖고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네요.

전쟁은 철저한 이해관계의 반영일 뿐. '북괴가 내려온다' 공포 심리 조장

유영주 : 어제 민주노동당은 파병 일정 중단을 요구하는 입장을 표현했는데, 그런 맥락인 것 같고요. 국민행동이 향후 사업 기조를 제출한 걸 보면 파병 철회는 당연한 거고요, 그런데 그것 외에는 미국에 초점을 맞추거나, 외교부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등에 무게를 두는 의견이 주된 기조거든요. 집회를 하는 모습도 추모 분위기로 하자, 시민과 함께 하는 기조로 하자, 이런 게 많이 강조되는데, 일면 당연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공세적인 대응을 자제하자는 것으로 연결되기도 해요. 집회 진행할 때 깃발 내리자는 이야기도 수월찮게 나오거든요. 이런 현상도 따져보면 노무현에 대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지 않나 싶은데요.

김규항 : 아까 조희연 씨 이야기와도 연결되는데. 미국에 초점을 맞추자는 말의 정확한 뜻은 노무현정권을 옹호하자는 거예요. 국민행동의 주장도 그렇게 가는 것이죠.

진중권 : 시민 핑계 대지 말라고 그래요. 자기들의 의식의 한계를 시민들의 의식의 한계로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왜? 국민들의 60%가 반대하고 있어요. 6:4로 파병에 반대하고 있는데 자기들의 정치적 견해로 시민 전체의 의사를 보지 말라는 거죠.

김규항 : 그런 맥락이 자발적으로 모인 대중들의 의사를 보편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현장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요. 탄핵 반대 때는 분위기가 일원화되는 게 있었어요. 그 때는 전쟁반대 깃발이나 피켓이 끌어내려진다거나 해도 손을 쓸 수가 없었어요. 순수한 민주수호의 의지를 악용하지 말라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옆에서 따로 집회도 하고 너희가 왜 우리 의사를 왜곡하느냐 이런 식의 국민행동에 대한 비판도 많이 올라와요.


진중권 :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흔드는 게 초점을 미국으로 돌려놓는 겁니다. 우리한테 중요한 건 이라크 전쟁 테마가 아니라 파병 테마예요. 그게 핵심인데 논점을 비껴가는 거고, 두 번째는 외무부 라인에서 책임을 추궁하는 게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본질은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파병을 계속 하는 한 김선일 씨를 살리는 방법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뭐라고 하냐면 파병을 하고도 외교력과 정보력이 있었으면 김선일 씨를 살릴 수 있었는데, 외교력과 정보력에 문제가 있어서 김선일 씨를 살리지 못했다는 말이에요. 반기문이 물러가야 한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도마뱀 꼬리 자르기라는 거죠. 파병 결정은 머리와 몸통이 있는데 꼬리만 자르고 꼬리가 아프다고 바둥바둥 거릴 때 사람들의 그 관심을 끌어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핵심적인 건 파병을 철회하지 않는 이상 김선일 씨가 살아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보세요. 미국이 외교력이 부족합니까, 정보력이 부족합니까? 닉 버그 씨도, 다른 사람도 참수되었잖아요. 외교력과 정보력의 문제가 아니에요. 뭐냐면 파병을 했기 때문에 당하는 문제거든요. 이제 곧 국정조사로 갈텐데 자기들은 그냥 외무부만 날리면 되거든요. 그리고 한나라당 놈들은 자기네가 파병을 주장해서 김선일 씨를 죽인 공범인데, 쉽게 말하면 주범과 공범에 의한 국정조사라니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거예요.

김규항 : 설사 외교나 정책상의 기술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더라도 24시간이라는 시한이 주어졌을 때 굳이 그런 공격적인 파병 의사를 밝힌 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 무슨 전화를 받았니 안 받았니, 누가 있었다느니 없었다느니 그런 건 우스운 이야기지요.

진중권 : 그렇죠. 외무부에서 미리 알았으면 어쩔 거냐는 거죠. 그러면 파병 안 할 거냐 라는 겁니다.

김규항 : 심지어 외무부 직원들의 서비스 태도를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 고시 출신 공무원들의 태도야 구제불능이지만 그게 다 본질을 숨기려는 개수작입니다. 그런 이야기로 외무공무원들의 대민 서비스가 좀 달라지긴 할 거예요. 그거 외에 달라질 건 없죠.

진중권 : 그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게 이런 거예요. 파병론자들이 얘기하는 필연성이라는 게 여태까지 아무런 논리가 없어요. 예컨대 말은 안 하지만 파병을 안 하면 부시가 열 받는다는 거예요. 부시가 열받아 북한에 폭격을 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김정일이 열 받아서 남한에 핵을 떨어뜨리게 된다는 거예요. 만화같은 시나리오거든요. 그런 식의 시나리오를 은근히 흘리는 거죠, 사실 주장은 못 해요. 워낙 황당하니까. 이라크에서 미국이 수렁에 빠져있는데 북한하고 무슨 전쟁을 할 수 있겠어요. 또 다른 전쟁은 말도 안 되요. 생각을 해 보세요. 미국의 동북아 안보전략이 대한민국에서 3천명 보내느냐 안 보내느냐에 따라 확 달라진다는 게 말이 되요?

온갖 왜곡 논리 난무, 파병 철회만이 김선일 씨 살릴 수 있었던 것

김규항 : 아주 봉건적인 생각이죠. 옛날 삼국지에서처럼 어떤 나라가 지도자의 인격이나 성격에 의해 좌우되고, 의리나 배신이 난무하는, 그래서 막 전쟁을 하기도 하고... 옛날 이야기 보면 그런 게 많잖아요. 그런데 현대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철저한 이해관계에 의한 대대적인 상행위 같은 것이거든요. 요즘은 조폭도 그런 이유로 전쟁을 하진 않아요.

진중권 : 그러니까 무슨 뭐 열 받아서 3천명 안 보낸다고 쯧쯧...

유영주 : 그런 논리가 실재 대중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게 문제일 텐데요.

진중권 : 공포심리죠. 반공 논리 있잖아요. 이게 북괴가 내려온다의 새로운 버전이에요. 국민들에게 막연한 공포감 조성해놓고, 그런데 막상 까 보라고 하면 못 하잖아요? 우리가 파병 안 하면 미국이 정말 뭘 어쩔 건데, 한 번 생각해보자고요.

김규항 : 미군 철수 문제도 우리가 약간씩은 이견이 있지만 대중적인 이해 자체가 상당히 낮은 편이에요. 실재 정보 전달이 정확하게 된다거나 리영희 선생 같은 분의 이야기가 좀 더 편하게 전달되고 한다면, 대중들의 미군 철수 지지율이 높아질 수 있을 텐데, 지지율이 낮은 것은 합리적인 이유보다는 그런 공포에 기반하는 거죠. 그런 게 여전히 야비하게 작동되고 있죠.


진중권 : 한국이 파병을 안 하게 되면 미국과의 경제도 단절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의 국가 시스템이 옛날 그런 시스템도 아니거든요. 지금은 경제와 정치가 따로 놀아요. 터키가 파병 거부했는데 거기랑 단절합디까? 중남미 국가들 파병 거부했다고 고립되었습니까? 그 나라들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 굉장히 높잖아요. 유럽은 미국보다 강대국이라서 파병을 거부했어요? 중남미 국가들은 우리보다 강대국이라서 파병을 거부했냐 말이에요. 말이 안 돼요. 파병은 한국과 미국의 외교 문제가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한국 내부의 문제죠. 친미파라는 놈들, 그런 놈들에게 쉽게 투항한, 또는 그런 놈들을 은근히 이용해먹는 노무현정권이 문제라는 겁니다.

386 개혁세력 원래가 그런 애들, 반독재가 진보인줄 알아

유영주 : 일반 시민들은 소위 386, 운동권 세력들이 돌아서게 된 배경을 궁금해합니다. 전대협을 했던 사람들이고, 늘 반미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인데... 친미파는 워낙에 그렇다고 치고요, 이른바 386 개혁세력들이 그렇게 급속하게 바뀌게 되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진중권 : 다 바뀐 거죠. 예컨대 옛날에 임종석 씨 만났을 때 진보세력들이 정치적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예요. 베를린에 있을 때 많은 이야기 나눴는데요, 정말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민주당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황당해서.... 그 사람들 생각 자체가 그렇더라고요.

김규항 : 임종석 같은 경우는 반독재면 진보라고 생각하는 무지가 있는 거죠. 하여튼 학생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된 놈들은 그 자체로 끝난 겁니다. 지나치게 그 사람들의 신념을 고려해서 분석할 필요는 없어요. 다들 당리당략과 자기 정치적 입지에 의해서 그렇게 가고 있는 거죠.

진중권 : 총선 전에는 소수여당이었죠. 총선 전에는 개혁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나라당 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잖아요? 그리고 그들이 소수정당일 때는 열린우리당이 파병에 전부 반대해도 파병은 된단 말이죠. 총선 끝나고 이젠 다수당이에요. 문제는 자기들이 결의하면 파병이 되요. 상황이 바뀌니까 태도가 바뀐 것이죠.

유영주 : 최근 임종석 대변인의 발언이나 신기남 의원이 발표한 글도 그런 맥락일 텐데, 특히 신기남 의원이 발표한 글을 보면 개혁세력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황당하게 받아들이거든요.

진중권 : 황당하죠. 특히 '테러리스트에게 굴복하면 안 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게 테러리스트가 내건 요구 자체가 문제냐는 거예요. 요구 자체는 정당하거든요. 외국군 철수잖아요. 그걸 요구하는 방식이 문제이긴 해요. 그런데 보세요. 예컨대 터키에서는 풀려났거든요. 왜냐하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어요. 사람을 살렸단 말이죠. 미국에 군납 안 하겠다고 한 거잖아요.


김규항 : 처음 참수 당한 미국사람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당한 사람들은 일관성이 있어요. 미국의 군수업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아주 유감스럽지만 김선일 씨가 일하던 회사도 그 쪽의 일을 하기 때문에 저항세력의 입장에서 이 사람을 순수한 한국의 민간인으로 볼 수 없는 거죠.

진중권 : 한국이 추가 파병만 안 한다고 했어도 그 선에서 해결되었을 겁니다. 일본도, 터키도, 이태리도 그렇고, 돈을 주고 빼냈거든요. 터키는 아예 군납 업체를 포기한다고 했거든요, 아마 김천호 사장 문제일 수도 있어요. 사업을 포기하고 떠나라 했는데 못 한다 그러고 협상하는 중에 추가 파병 결정이 나버리니까 완전히 상황이 달라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항세력들의 요구 수준도 바뀐 거죠. 이제 한국군 오지 말라는 겁니다. 신기남 같은 경우 옛날에 뭐라고 했냐하면 한국의 외교라인과 안보라인은 친미세력의 문제다, 솎아내야 한다고 했거든요?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거죠. 지금은 슬쩍 입장을 바꾼 거죠. 한국과 미국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라는 겁니다.

김규항 : 유시민 씨가 전에 그랬어요. 노무현이 처음에 파병하겠다니까 원래 대통령은 그렇게 하는 거고, 국민들은 반대하는 거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이 반대할 수 있도록 힘을 몰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후 유시민 씨의 전쟁에 대한 입장 변화를 보면 참 질이 안 좋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유주의자라는 사람이 진보정당 찍으면 사표라는 소리나 하질 않나...

진중권 : 자기들도 먹고살아야겠죠. 이미 정치가가 되었다면 끝난 겁니다. 유시민도 옛날에는 좌파였다가, 방법적 자유주의라고 하다가, 지금은 자유주의도 아닌 허접이 되어버린 거죠. 왜냐하면 당 안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먹고사는 문제가 생기는 거고 그 안에 들어가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김규항 : 민주화 운동 출신이라고 우리가 말하잖아요? 민주화 운동이란 게 우리나라에선 시민이라는 말과 함께 굉장히 두루뭉실하게 쓰이는데, 민주화 운동에는 두 가지 스펙트럼이 있었죠. 70년대엔 김대중, 윤보선, 김영삼 이런 사람들이 하는 절차적 민주화 운동이 있었고, 80년대 초중반 이후에는 근본적인 민주화 운동이 있었죠. 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실제로 민주화운동 성원들 대부분은 급진주의자들이었어요.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군사파시즘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서 그런 사람들의 상당한 부분이 현실적 선택을 하게 되죠. 그것이 제도 사회 주류 사회로 들어가는 것이고, 지금 정치 쪽만 부각되고 있는데 사실은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벤처, 영화, 연예 사업 등을 보면 운동권 출신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 사람들의 변신, 그 행로는 아주 비슷하고 일관되죠. 그들은 변화된 세상의 개혁 진보세력을 자처합니다. 예술계도 마찬가지고, 기업계도, 정치계도 마찬가진데 이전의 정치인들과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은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차이라기보다 아주 모호한 윤리나 도덕의 차이, 비리에 연루되지 않았다거나 구 정치의 파벌에 휩싸이지 않았다거나 그런 것인데, 그런 차이들도 급격하게 없어지고 있습니다.

개혁세력 정체 드러나. 한나라와 열우당 합당해도 문제없어

유영주 : 개혁세력과 정치적으로 단절하고, 그 이데올로기나 영향으로부터 대중들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확대해서 봐도 될까요?

진중권 : 열린우리당이 잘해주고 있잖아요.

김규항 : 이젠 개혁세력이 숨길래야 숨길 수도 없어요. 정체가 드러나는 거죠. 탄핵 때만 해도 수구우파와 개혁우파의 차이가 뭐냐는 말이 잘 안 먹힌 게 민주세력과 독재 세력이니 정서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런데 그건 다 과거의 일일 뿐이죠. 엄밀히 따져보면 민주화 운동 출신이냐, 독재 출신이냐 이외에 경제, 정치, 외교, 노동정책 모든 부분을 다 봐도 수구 우파와 개혁 우파의 실제적인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진중권 : 둘이 합당해도 돼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김규항 : 탄핵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좌파의 억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는데 지금은 전혀 달라요. 대중들이 광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거든요. 무슨 진보 교양을 하고 의식적인 학습을 해서 그 사람들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어 이거 가짜구나, 이거 우리 편이 아니구나', 이렇게 스스로 생각을 해서 달라지니까 이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거죠.

진중권 : 유시민이 그랬잖아요. 몇 달 전만 해도 파병 반대를 외쳐서 노무현에게 힘을 몰아주자 했는데 이제는 파병 찬성해서 노무현에게 힘을 몰아주자 그래요. 힘을 몰아주자는 방식이 바뀐 건데, 자기모순에 빠지는 거죠. 아무리 사람들이 광기나 열정적으로 정당을 지지한다 해도 논리적 모순을 담고 살기는 힘들거든요.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그러고, 왜 안 하냐고 따지니 전문가들이 튀어나와 안 되는 근거를 대더라고요. 그럴 거면 아예 총선 전에 약속이나 말던지... 이런 게 대중들에게 폭로가 되고 있는 거죠. 보통 사람들이 논리적 모순을 따지면서 그런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워낙 중요한 사안에서 모순이 딱 드러나니까, 자기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고서는 유지가 안 되는 거예요.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에서 내걸 수 있는 개혁적 정치인의 최고 상태가 노무현이었거든요. 이제는 더 이상 대중들에게 더 안 먹힌다는 겁니다.

김규항 : 개혁세력의 승승장구가 최근 2-3년간 지나치게 원활했어요. 그러면 자기 정비에 소흘하게 되죠. 유시민 같은 사람의 논리적 파탄은 200자 원고지 한두 장으로도 정리가 돼요.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사람 참 나쁜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데 그런 상태로 개혁 정치인으로 각광을 받았으니 세상에 겁나는 게 없어진 거죠. 그런데 그것이 균열되고 폭로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죠. 얼마 안 가 유시민이 경찰 호위를 받는 날이 곧 올 겁니다. 유시민은 대중 연예인의 쇼맨쉽으로 성장을 했어요. 국회에 백바지 입고 나가고, 울면서 끌려나가고 하는 쇼로 이미지를 유지했는데, 지구당 사무실을 경찰이 지키고 이러면 완전히 구겨지는 거죠. 순간이에요.

진중권 :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건 정신분열증 같아요. 최민희 씨 이야기 보세요. "노사모 여러분 노대통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이 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잖아요. 내가 그 말을 듣고 최민희 씨가 그 사람들한테 감사해야 할 이유가 무언지 궁금했어요. 우리가 파병 반대 시위에 나왔는데 그게 왜 남들한테 감사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내 목숨 때문에 나온 거예요. 내가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라는 소리를 듣고 이 사람들 정말 끔찍하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건 변태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김규항 : 그거야 무조건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고 여기에 나와 주었으니 당신들 참 훌륭하다 그런 말 아니겠어요.

진중권 : 나는 굉장히 거슬렸던 게 노무현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감사하다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니까 나와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건 당과 당 차원에서 도와주러 온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시민의 문제이고 시민 모두의 생명이 걸린 문제거든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마치 노무현을 지지하는 게 대단한 고려 변수가 되는 양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김규항 : 그것이 현재 광장의 형편이에요.

개혁에 근본적인 균열 발생. 좌파, 이제 목소리를 내야

유영주 : 제가 보기에 그날 집회에서 최민희 씨 발언에 대중들의 반향이 가장 컸던 게 사실입니다. 내용적으로도 그렇고, 선동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이 점을 잘 봐야 하는데, 아까 균열이라 표현하기도 했고, 정신분열이라고도 했는데, 바로 지금 대중들의 상태가 이 정점에 와 있다는 거거든요. 노사모 참가자에게 감사하다는 발언이나 사회자가 "노무현 대통령님 파병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동요와 혼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김선일 씨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의 상태가 이 지점을 경과하고 있지 않나 싶거든요.

김규항 : 아주 중요한 지점이죠.

진중권 : 이제 목소리를 내야 돼요. 그 사람들이 어떤 견해를 갖는 게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낯선 것은 거부감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사람들이 안 받아들이거든요. 이제 우리 목소리를 내야 되고, 그 다음에 왜 문제인지 계속 이야기해줘야 한다는 거죠. 지금 이런 상황에서 또 그렇게 나가면 저 사람들 선거 때 또 그렇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김규항 : 개혁 비판의 목소리가 반향이 적은 시점이 있고, 큰 시점이 있는데, 균열이라고 표현하는 건 때가 무르익었다는 겁니다.

진중권 : 그 때가 언젠가는 와요. 본질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어요.

김규항 : 이 지점에서 좌파가 대중적인 차원에서의 정치적인 소통을 본격화해야 하는데, 좌파가 20여 년 이상 대중들에게서 오랫동안 고립, 배제되어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 대중과의 소통 감각도 없어져서 성명서를 한 장 써도 안 읽히게 쓰고 그러죠. 그래서 좌파의 본령에 속해있지 않은 좌파들의 개인적인 활동이 부각되는 측면이 있었어요. 이젠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다들 대대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유영주 : 이 균열의 흐름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더 잘 낼 수 있는 방법적인 부분을 좀 이야기 해보죠.


진중권 : 일단 매체에서 밀리니깐... 정치적이라는 것이 옛날처럼 총칼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설득력을 통한 지배인데 일단 우리는 매체가 없잖아요? 좌파 매체가 하나 있어야 돼요. 옛날처럼 오거니제이션 하던 시대는 지났거든요. 네크워크인데,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노사모가 먼저 보여줬죠. 지금 언론이 굴러가는 걸 보면 조중동이 있고, 그 반대편에 오마이뉴스와 한겨레가 있어요. 거기에 방송이 끼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아젠다는 항상 이들 사이에서 나오게 된다는 거죠. 치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요. 그렇다고 했을 때 사회적 아젠다를 제기할 좌파 매체가 꼭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싸움들이란 게 사람들이 식상해하고 있어요. 다르지 않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노무현이 한 걸 보면서 한나라당이 했을 법한 일은 다 했거든요. 그 다음에 다시 노무현이 중요한 결정을 하면 다 조중동이 키워줘요. 그래서 조갑제가 대통령에게 "밥 먹으러 오세요, 밥 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어차피 노무현이 이야기한 중요한 결정은 조중동이 다 편들어줬다는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은 의석 수 싸움밖에 없어요.

김규항 : 제가 노빠에 대해 경멸적인 표현을 한 적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개혁적, 도덕적으로 보이는 정치인에 대해 감성적으로 몰입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워낙 반세기 동안 야만적이고 더러운 정치에 당해 놔서 그렇지요. 그러다보니 정치의식이라는 게 자신의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이념적으로 나뉘어져야 하는데 도덕이나 윤리 같은 모호한 기준으로 나뉘어집니다. 그 틈을 개혁이 파고들어 승승장구해왔는데 그게 균열이 나고 있는 것이죠. 김선일 씨 사건이 대중적인 계기가 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더 이상 가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이라는 레퍼토리가 식상해진 데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에 의한 서민 대중들의 삶의 변화는 도저히 속일래야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진중권 :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대통령은 선출할 수 있지만 권력은 절대 선출할 수 없어요. 대통령 노무현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고, 외교 안보라인들이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한 노무현이 됐든 이회창이 됐든 변할 수가 없는 거거든요. 대통령 열심히 뽑고 자기들은 뭔가 개혁했다고 믿을지 몰라도 요번에도 돈을 주는 구조가 똑같잖아요. 그놈들이 돈을 주거든요. 한나라당에도 주고, 열린우리당에도 주고. 돈 나오는 구조가 똑같고, 정책도 똑같아요. 어차피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이란 말입니다. 예컨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하면 평당 3백만 원이 다운돼요. 30평이면 1억이에요. 20평이면 6천만 원인데 그걸 서민이 내느냐, 저들이 내느냐, 여기서 누구 편을 들 것이냐는 문제죠. 가진 자들의 편을 들어줬거든요. 가진 자들이 로비를 하고 인력을 충원하고, 이들을 위해 굴러가는 체제가 계속되는 거예요.

유영주 :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접근이랄까, 그런 수준의 고민도 있어야 할텐데요.

진중권 : 맞아요. 우리가 지금 좌파든 진보든 간에 국방과 외교가 없어요. 외교와 안보 쪽에 전문적인 식견과 안목을 가진 사람들 키워내야 되요. 이걸 어떻게 할 노하우가 없으니까 저들이 거저 먹는 거죠. 노무현정권의 한계가 그거예요. 엔엘 애들 썼거든요. 그런데 맨날 반미만 이야기했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거예요. 이러니까 미국놈들이 거저먹고 그랬죠. 민주노동당은 장학금을 주고 유학을 시켜서라도 인력을 키워야 돼요. 인력이 있어야 배치도 하고 감시도 하고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경제도 실물경제를 읽어야 해요.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게 좋다는 이야기 백날 하면 뭐해요. 무지는 아무 도움이 안 되거든요.

웬만한 논객들 역사적으로 할 말 다해, 역사 진전시킬 새로운 발언 필요


김규항 : 중권 씨 이야기에 동의하지만, 돌아보면 진보 세력에게 지난 10년 간의 형편이란 게 개혁 세력에 몰려서 굉장히 수세적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부족한 준비가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이죠. 문제는 이제부터인데 개혁세력이 말하는 개혁들의 실제적인 결여부분들을 파고드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정치개혁 언론개혁이 갖는 대중적인 파장력은 커요. 그런데 그 기준이 뭐냐면 정치개혁의 경우 주로 도덕이나 개인 윤리 문제로 국한하고. 낙천낙선운동은 해도 국보법에 대한 입장 이런 게 아니라, 입건된 적 있느냐, 돈 받은 적 있느냐 이런 거거든요. 무슨 학교 도덕선생 뽑는 것도 아니고 계속 그런 식으로 몰고 가요. 언론개혁도 조중동에 국한함으로써 그 외에 오마이뉴스나 한겨레가 갖는 반동성 같은 것은 아주 도외시되는 이런 부분도 이제는 면밀하게 부각시켜가야 합니다.

진중권 :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 건 사실이에요. 논객들 보세요. 저쪽 논객들 강준만 유시민 저 꼴 됐지, 노혜경, 김정란 저 꼴 됐지, 조희연이라는 사람도 얼굴 들고 다니겠습니까. 웬만한 논객들 역사적으로 할 말 다했다는 겁니다. 이제는 새로운 발언이 역사를 더 진전시켜야 해요.

김규항 : 근래 시민운동 쪽에서 급진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물론 그 중엔 사회변화에 조응하려는 것도 있지만 그 보다는 시민운동이 대중들의 의식 수준을 더 이상 선도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한계가 있는 거죠. 시민운동의 기여를 무작정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중권 씨나 나나 강준만 5중대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그 긍정적인 부분에 진지하게 대응했었죠. 그러나 한국에서 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의 주요한 사회적 역할이 진보운동을 체제내화하고 진보세력을 고립 배제하는 것이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의 한계가 왔다는 건 이젠 좌파적인 차원이 아니면 해결할 수 있는 게 없게 된 상황이라는 거죠. 문제는 좌파의 준비가 부족하다는 건데 다들 힘을 모아 노력해야겠습니다.

유영주 :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한 좌파 운동의 고민도 많이 가고 있어요. 운동의 흐름이나 대중적인 조건, 상황을 봤을 때, 지금 대중과 함께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균열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패러다임을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중요하게 제기되는 시기인 건 분명한 것 같아요. 자기 발언의 역사를 갖는 사람들 중에 살아있는 사람들, 특히 앞으로 두 분의 발언의 무게도 더 커지는 거 아닌가 싶고요, 분투를 당부드리면서, 오늘은 이 정도로 일단락 하겠습니다.
2004년07월02일 0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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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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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사악한 것은 단지 대규모의 폭력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가장 공공연한 착취극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조국의 이익’을 빌미로 벌어진다. 그러나 전쟁이야말로 조국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쟁은 언제나 벌이는 놈과 치루는 놈이 따로 있는 것이다. ‘조국의 이익’은 언제나 전쟁을 벌이는 놈들의 이익이다.

말하자면, 전쟁이란 가진 놈들이 좀더 갖기 위해 제 나라의 없는 집 자식들의 목숨을 팔아 벌이는 장사놀음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에 빌붙어 사는 나라의 괴뢰정권은 다시 제 나라의 없는 집 자식들의 목숨을 판다. 이 일사불란한 동원 체제에서 전투병인가 비전투병인가, 군인인가 민간인 신분인가를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 침략전쟁의 저항 세력에게 그런 차이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건 더욱 우스운 일이다.

김선일은 그 일사불란한 동원 체제의 첫 제물이다. 제국주의에 빌붙어 사는 나라에서, 없는 집 자식으로 태어난 게 그의 죄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그와 같은 죄를 가진 모든 우리의 죽음이다. 민주고 반민주고 이념이고 정치고 다 떠나서, 김선일의 죽음 이후에도 파병을 말하는 모든 세력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게 우리가 치러야 할, 우리의 전쟁이다.(2004.06.24 목)

 

국익

결국 놈들은 전투병 파병을 요구해왔다. 놈들이 순수한 장사 놀음으로 시작한 침략전쟁에 우리 죄 없는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보내라는 요구다. 워낙 더러운 요구다 보니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영감들과 미국을 하느님이 축복한 나라라 믿는 목사들 정도를 빼고는 다들 전투병 파병을 반대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함부로 말하는 버릇 때문에 늘 욕을 얻어먹는 노무현씨조차 이번엔 꽤나 신중해 보인다. “먼저 보내는 것도 국익이 아니고 먼저 거부하는 것도 국익이 아니다.”

그러나 매우 신중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만 보이는 그 말 속엔 실은 매우 강한 파병 의지가 들어있다. 바로 ‘국익’이라는 말 속에 말이다. 한국에서 ‘국익’이라는 말은 주술에 가깝다. 노동자들의 싸움이든 농민의 싸움이든 전쟁을 반대하는 싸움이든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당한 싸움들은 언제나 국익이라는 주술 앞에 힘을 잃는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아야 하고 농민은 모두 배를 가르거나 몸을 불살라도 어쩔 수 없으며 청년들은 기꺼이 더러운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야 한다.

우리가 그 주술에 대적하는 무기는 이른바 ‘명분’이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농민을 죽이는 개방’, ‘명분 없는 전쟁’ 그러나 사랑이나 존경 같은 고상한 가치마저 돈으로 사고 팔리는 세상에서 명분으로 실리를 이기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오늘 한국에서 명분으로 실리를 이기려는 노력은 한국에도 명분을 좇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외에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국익’이란 주술과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그 주술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명분’이 옳지만 어딘가 국익에는 배치되는 데가 있다는 노예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그놈의 국익은 대체 누구의 국익이지?’

국익이란 ‘나라의 이익’이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나라에도 ‘나라의 (단일한)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층층한 여러 계급들로 이루어진다. 계급들의 이익은 몹시 다르거나 심지어 적대적이다. (이경해씨 추모집회에서 제 몸을 불사른 박동호 씨와 제 아비의 막대한 재산을 모조리 물려받는 이재용 씨는 서른넷 동갑내기 한국인이다.)

‘국익’이란 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속여 이르는 말이다. 지배계급은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을 국익이라 주장한다.(그게 자기들만의 이익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다.) 노동자의 정당한 싸움도 농민들이 제 배를 가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일도 죄 없는 청년들이 더러운 침략 전쟁에 총알받이로 가는 일도 단지 자기들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한 일이지만 국익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걸 거스르는 사람은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이거나 반역자라는 오명을 들씌운다.

주술을 깨트려야 한다. 진정한 국익은 한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뒤엉킨 것들을 바르게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싸움을 존중하는 게 국익이며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게 국익이며 더러운 침략전쟁에 절대 전투병을 보내지 않는 게 바로 국익이라면 누군들 애국자가 되려 하지 않겠는가.(씨네21 200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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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이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면, 시는 그 문학의 가장 예민한 性感帶를 이룬다. 시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사회의 이념과 풍속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개인의 창조물 속에서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한다는 것이 지식인들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 있는 오늘날, 시인들의 창조적 자기 표출을 예리하게 감득하지 못하는 한, 그것도 한낱 도로에 그칠 가능성을 갖는다. 시인의 직관은 논객의 논리를 뛰어넘는 어떤 것을 그 작품 속에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의 시인 총서>를 발간하기로 결정한 것은 시인들의 그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ㅡ 오늘의 시인총서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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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헌책방 사이트들



작년에 정리해둔 헌책방 사이트 목록이다. 알라딘 곳곳에서 좋은 헌책방, 나쁜 헌책방을 분류한 글이 떠도는 걸 보았는데, 그건 작성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다. 웹서점이든 웹헌책방이든 조금만 이용해 보면 안목과 요령이 생긴다. 옥석을 가리는 건 떠벌리는 사람이 아니라 독자가 할 일. 참고로, 헌책의 가격이 5000원 이상 넘어가면 의심하시라. <고서점>이라는 배너가 붙은 서점들은 일단 조심하시라. 의심하고 조심은 해도 아예 터부시하진 마시라. 간간 돈주고 못 구하는 책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 비싸지 않은 가운데 옥석을 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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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간달프 > 홍기빈 - 폴 스위지, 역사와 정면대겨한 거목의 위대한 패배

폴 스위지 : 역사와 정면대결한 거목의 위대한 패배   
 
 
홍기빈

폴 스위지(Paul Malor Sweezy)가 지난 2월 27일 영면했다. 향년 93세.
스위지가 경제학자로서, 진보적 사회사상가로서 또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20세기의 미국과 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공황, 파시즘, 2차 대전, 냉전과 탈냉전을 거친 그의 인생 여정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영국의 진보매체인 『르몽드』『가디언』 정도를 빼면 이 괄목할 만한 인물의 서거를 추모하는 글이 아직 별로 나오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1980년대에 한국의 사회현실에 대한 이론적 고민을 시도했던 이들이라면 의식하든 못하든 스위지에게 상당한 ‘정신적 빚’을 지고 있다.

하버드의 마르크스주의자

스위지의 부친은 시티뱅크의 전신인 뉴욕내셔널 뱅크의 고위 임원이었다.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덕분에 스위지는 뉴잉글랜드의 상류층 기숙학교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준수한 용모(대학 동창 폴 사무엘슨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스위지는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한다)와 최고의 학력을 갖추었던 전도유망한 청년이 이후 미국 마르크스주의의 ‘괴수’로서 험난한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31년의 영국 유학이었다.

당시 경제대공황은 이미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속 예언했던 바인 ‘자본주의의 최후’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스위지가 유학했던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는 오스카 랑게나 해롤드 라스키 같은 열정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열정적이지만 무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스위지는 “마르크스주의를 미국의 지적 담론에서 존경받는 전통으로 확립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렇게 시작한 하버드대에서의 경제학 박사과정에서 스위지는 보수주의자 조셉 슘페터 교수와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나름대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을 발전시켜 간다.

졸업 후 하버드대 경제학과의 조교수로 일하면서 스위지는 대공황의 늪에서 허덕이는 미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했다. 당시 그는 「미국 민주주의를 위한 경제적 강령」에 저자와 서명인으로 참여하는데, 이 문서는 뉴딜 정책(‘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핵심으로 하는)을 케인즈주의적 관점에서 합리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바 있다. 특히 스위지가 「미국 경제의 구조(1939)」(‘미국의 소유집중과 독젼에 대한 유명한 보고서)에 게재한 논문 「미국의 이익 집단」은 주요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미시경제학이나 경제원론 책에서 과점시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등장하는 ‘굴절 수요 곡선’은 스위지가 당시의 작업 속에서 이뤄낸 성과의 일부이다.

이렇게 실천적으로, 학문적으로 순탄했던 스위지의 이력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정치?사회가 냉전에 휘말리면서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된다. 스위지는 자신의 정치?사상적 신념 때문에 하버드대에서 조만간 축출될 것을 감지하고 조교수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반동화에 맞서 1947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월레스 후보의 지지운동에 참여하지만, 결과는 아주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루스벨트 사후 미국사회는 그가 대표하던 진보적 뉴딜 노선의 개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월스트리트의 금융세력과 강경 군사세력의 주도하에 보수적 사회 질서로 회귀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압도적인 반공주의 열풍에 질린 진보당과 월레스는 그 갈림길에서 진보적 방향으로의 대안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는데, 스위지는 이를 진정한 패인이라고 봤다. 그의 생각은 미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뚜렷이 내걸지 못한다면 미국의 양심세력은 수동적인 비판세력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한창 몰아치던 1949년, ‘소련에 독립적인 사회주의 잡지’를 표방하는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를 리오 휴버맨과 함께 창간한다.

지금까지 수십 년째 유유히 출간되고 있는 이 잡지는 냉전으로 얼어붙은 세계에서 사회주의적 가치야말로 인류의 곤경을 풀어나갈 대안이라고 믿었던 세계적 지식인들(아인슈타인, 러셀, 사르트르, 말콤 엑스 등)이 자신의 신념을 천명하는, 신앙고백의 장인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착취의 현장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짧은 글들로 넘쳐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의 미국에서 이토록 ‘간이 부은’ 대담한 반란자들은 그만한 대가를 종종 치러야 했다. 스위지 자신부터 1955년 뉴 햄프셔 법원으로부터 대학 강연 내용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바람에 투옥을 포함해 몇 년 간 다양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냉전적 사회구조도 1960년대 들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진보적 사회변혁을 향한 움직임이 다시 시작된다. 이 같은 사회 변동의 결과물인 동시에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기폭제로 기능했던 책이 바로 스위지와 폴 바란이 함께 저술한 「독점자본」이다.

신고전학파를 기사회생시킨 케인즈의 맹점

「독점 자본」이야말로 경제학자로서 스위지의 업적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스위지는 이른바 주류 경제학은 물론 정통파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이단’으로 비난할만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 「독점 자본」은 경제이론 및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이정표임이 분명하다. 왜 그런지 살펴보기로 하자.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완전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는 총수요와 총공급의 일반 균형을 자연스럽게 가져온다’는 신고전파 경제 이론은 두 방향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첫째, 영국의 챔벌린이나 조안 로빈슨 등은 완전경쟁시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비현실적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실제의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독점 혹은 과점 기업들이기 때문에 완전경쟁은 공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총수요와 총공급이 결국 일치한다는 신고전파의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수요의 부족, 투자 부족, 그로 인한 불완전 고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첫 번째 관점에서의 이론적 발전은 이후 경제학설사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이른바 케인즈혁명은 이 두 번째 비판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케인즈혁명은 개별 시장의 구조가 독점 및 과점이라는 현실을 지적한 첫 번째 비판의 문제의식을 거의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시장경제의 구조에 대한 신고전파의 이론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 결과 폴 사무엘슨 같은 ‘사생아 케인즈주의자’들은 케인즈 경제학을 ‘거시 경제학’으로 한정, 퇴출되어야 마땅했던 신고전파 이론을 ‘미시경제학’으로 기사회생시키고 만다. 그 대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학계에서 전세가 역전되면서 ‘미시적 이론적 기초가 없는’ 케인즈주의는 거의 축출되고 신고전파가 득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의식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시켜 ‘미시적 기초를 갖춘 거시경제학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은 케인즈파가 아닌 다른 이론적 흐름에서 구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칼레츠키, 슈타인들에서 스위지와 바란으로 이어지는 ‘독점 자본’ 학파의 흐름이다. 칼레츠키는 이미 1930년대 초(케인즈의 「일반 이론」은 1936년에 출판된다) 폴란드어로 쓴 그의 저작에서 케인즈의 주요 논지를 포괄하는 이론을 독자적으로 구성한 바 있다. 칼레츠키와 그이 지적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슈타인들이 일관되게 해명하려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독점도(degree of monopoly)로 표현되는 독점자본의 사회?경제적 지배력이 어떻게 생산 설비에 대한 투자를 낮추고 실업을 증대시키는가,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나는 국민소득 분배의 왜곡은 어떻게 장기적인 과소 소비로 이어지는가.’

독점자본은 경제위기를, 경제위기는 전쟁을

스위지도 1942년에 출판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이론서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비슷한 방향의 작업을 시도했다. 자본주의 공황에 대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대신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과소 소비로 인한 ‘(가치)실현 공황’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저서에서 모호한 채로 남아있었던 독점과 장기 공황의 관계에 대한 스위지와 바란의 견해는 칼레츠키와 슈타인들의 작업에서 큰 영감을 얻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동료 폴 바란은 1957년에 나온 「성장의 정치경제학」에서 ‘잠재적 경제 잉여’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이에 근거하여 제 3세계의 부가 어떻게 선진국으로 착취되는지 해명한다. 그리고 스위지, 바란 두 사람은 1966년 드디어 「독점 자본」을 출간, 이 같은 전통의 주요한 한 매듭을 짓게 된다.「독점 자본」의 주요 논지는 아주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기업은 폭발적인 기술적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여 엄청난 규모의 거대 기업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 거대 기업은 금융이나 시장의 완전경쟁 법칙 따위로 통제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독점 자본이다.

둘째, 이 상황에서는 독점 자본의 압도적 생산성과 대중들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 경제잉여는 계속 증가하는 한편 총 수요는 계속 제약 당한다. 그 결과 만성적인 ‘과잉 생산, 과소 소비’ 상태가 나타난다.

셋째, 이 과잉 생산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면 다시 과잉 생산이 나타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잉 생산을 해결하는 방법은 완전히 비생산적인 물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완전히 비생산적인 물품엔 물론 광고 산업 따위가 포함되겠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군수 산업의 확장이다.

넷째, 독점 자본주의의 장기적 추세는 따라서 누적되는 과소 소비로 인한 대중들의 빈곤, 독점 자본의 팽창, 국가의 군국주의화와 끊임없는 침략 전쟁 등이다.

이 저작은 출판 당시 주류 경제학계로부터는 냉소와 무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 저작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이 서서히 판명되었다.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장기 불황, 소위 스태그플레이션은 신고전파의 경기변동론이나 케인즈주의적 총수요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실업과 빈곤이 증가하지만 소수 독점 자본의 이윤은 오히려 팽창되는 가운데 전 세계가 끝없는 전쟁과 불안정으로 빠져 들어가는 당시의 상황은 실로 스위지와 바란의 진단과 적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독점 자본」과 미국 신좌파의 부흥

이 저작의 정치-사상적 텍스트로서의 의미는 경제학 저작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섰다. 그 정치적 메시지 또한 경제학 이론 이상으로 명쾌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즉,
‘사회 전체가 도달 가능한 생산력(잠재적 경제 잉여)은 소수 독점 자본의 이윤과 독점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제약당하고, 공장 가동률은 도처에서 50% 에도 못 미치고 있다. 실업과 저소득으로 인해 대중의 빈곤은 늘어만 간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생산적이기 짝이 없는 무슨 광고 따위의 불필요한 서비스 산업만 팽창해간다. 게다가 군수 자본은 끝도 없이 팽창하면서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 모든 비합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독점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만 한다.’

1960년대의 미국 젊은이들이 목도했던 미국의 현실을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이론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베트남 전쟁의 엄청난 군사적 물량 공세가 그랬고, 사회 전체에 넘쳐나는 광고와 소비주의가 그랬다. 분명히 1960년대까지 선진국의 고용이나 소득 수준은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 그러나 바란과 스위지는 이에 대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즉, 선진국 노동자들은 제 3세계를 착취한 잉여로 사육되고 무마되고 있으며, 그래서 제 3 세계에서의 빈곤과 참상은 늘어만 가는 반면 선진국 노동자들은 혁명성을 상실한 대중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줄을 잇던 탈식민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이러한 주장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1970년대 공황이 도래하면서 그 빈곤의 물결은 드디어 선진국까지 덮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 제기된다.

‘제 3세계의 인민들과 미국의 양심적인 세력은 힘을 하나로 뭉쳐 독점자본에 맞선 공동 전선을 펼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 세계적인 고통과 파국(당시의 미소 핵 경쟁을 상기하라)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신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적 원천의 하나가 이 「독점 자본」이었다는 것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스위지와 그가 창간한 『먼슬리 리뷰』는 신좌파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첫째, 첫째, 미국 ‘급진파 정치경제학 연합’ 등 진보적 학문 그룹의 태동이다. 이 진보적 학자들은 성?인종 차별 등 미국사회에 만연한 각종 모순과 부조리를 자본축적의 흐름에 연결시키며 좀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요구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종속이론이나 세계 체제론 같은 주변부 정치경제학의 태동이다. 선구적 이론가였던 프랑크를 필두로 종속이론 진영의 이론가들이 『먼슬리 리뷰』 진영과 맺은 긴밀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냉전의 그늘 아래에서 미국 사회의 절벽까지 떠밀렸던 스위지는 이제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 누구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되살아났다. 스위지와 바란을 그토록 경멸하고 무시하던 주류 경제학계 조차 이렇게 돌변한 사회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일정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스위지는 1970년대 들어 미국 경제학회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71년엔 영국 캠브리지 경제학과의 유서 깊은 마샬 강의도 맡은 바 있다. 스위지가 영국의 경제사 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과 벌였던 자본주의 이행 논쟁은 경제사 연구에서의 고전적인 성과이다. 나아가, 그는 1970년대 이후, 공산주의 국가 내부의 계급 모순을 적나라하게 분석하는 한편 환경 문제에 새롭게 천착하는 등 지적인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한 때 무슨 빨갱이 삐라 같이 불온 선전물 취급을 당하던 『먼슬리 리뷰』(1950년대에 우편으로 배달할 때에는 꼭 안 보이는 봉투로 싸야했다고 한다)는 이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지적 담론장에서 가장 중요한 저널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모든 대학 도서관에서 마땅히 구독해야 할 자료가 되었다. 스위지는 그를 박해했던 미국 사회의 틀을 넘어 유럽은 물론 제 3세계 지식인들 사이에서 깊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다. 1981년 인도의 네루 대학은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21세기 : 스위지의 패배?

1980년대 이후의 세상은 스위지와 『먼슬리 리뷰』가 쌓은 성과를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는 또 다시 패배한 것일까.
스위지의 일생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첫째, 경제학자로서 둘째 사회사상가 및 운동가로서 셋째, ‘독립적’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서…. 그러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를 그가 잠든 2004년의 시점에서 볼 때 스위지는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다.

첫째, 자본주의의 성격과 발전 방향은 그가 예측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인수합병 붐과 함께 터져 나온 세계적인 금융자본주의는 「독점 자본」의 분석과 주장의 상당 부분을 정면으로 논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점은 그가 1991년 12월호 『먼슬리 리뷰』에 기고한 ‘「독점 자본」 : 25년 후의 회고’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그는 자본의 성격과 축적의 논리를 파악함에 있어서 자신이 근거했던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이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실토한다. 자본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스위지 자신은 ‘실물’ 부문의 역동성에 치우치는 바람에 ‘화폐와 금융’ 부문의 중요성을 놓쳤다는 회고였다. 그로서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고백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이론을 수립하려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자본’을 다시 정의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데 스위지 자신은 이미 팔순의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둘째, 스위지와 종속이론가들이 내걸었던 주장과 예측 즉 주변부 지역에서 혁명운동의 고조와 자본에 맞선 지구적 연대는 거의 정반대의 상황으로 되어 가고 있다. 선진국의 자본을 착취와 종속의 덫으로 거부하는 흐름은 이제 완전히 옛말이 되었고,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나라들, 심지어 미국 등의 선진국마저 ‘더 많은 자본의 유입만이 살길’이라며 국제자본의 흐름 앞에 거의 모든 것을 내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민족해방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은 이미 서구의 ‘좌파’들로부터도 ‘구닥다리’로 취급받고 있다. 급진파들은 이제 ‘사회주의적 세계’ 같은 ‘역사의 구체적인 방향성’이 아니라 기껏해야 ‘억압적 담론구조의 해체’나 가지고 노는, 머리 큰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셋째, 스위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독립적인 지식인’이라는 실천 형태는 현재 세계의 시류 속에서는 실로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퇴물이 되고 말았다. 이념이 대립하던 ‘극단의 시대’인 20세기가 저물어버린 지금, 세계는 어쩌면 ‘광고의 시대’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이 시대에 최후의 승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매체’이다. 그리고 그 매체의 힘을 대중적 명성을 얻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아주 저급한 차원의 ‘인정 투쟁’이 세계 어디에서나 거의 유일한 지식인들의 존재형태가 되고 말았다. 반지구화 운동가도, 해체주의 철학자도, 시민운동가도, 내로라하는 좌파정당 지도자도, 일단 매체에 이름을 내고 얼굴을 내야만 자신의 메시지가 의미 있게 사회적으로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TV 드라마의 카메오 제의에 열심히 줄을 서기도 하고, 유행을 잘 타는 영화감독이 알쏭달쏭한 기법의 카메라를 들이대면 아주 기쁘게 자기 얼굴을 피사체로 바치기도 한다.

이 경박한 광고의 시대, 매체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에, 이제 그 어떤 지식인이 스위지와 같은 존재 형태를 기꺼이 받아들일까.사회 전체에 의해 반사회 분자로 찍히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걸핏하면 법원으로 불려 다니면서, 기약도 없이 아득하기만 한 그 ‘미러라는 것만을 붙들고 냉전으로 얼어붙은 미국 사회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초기의 『먼슬리 리뷰』를 보면 그 초라한 모습에 실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이다. 필자들은 원고 청탁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 버리고, 배달할 때에는 무슨 불온문서마냥 안 보이는 봉투에 꼭꼭 싸서 보내야 했던 그 『먼슬리 리뷰』. 이 같은 상황에서 가녀린 목소리나마 빠지지 않고 사회로 내보내기 위해, 매달 거르지 않고 힘든 격무를 해나가는 식의 ‘독립적’ 지식인의 존재 형태가 이제 가능할까. 스위지가 그토록 지키려했던 지식인의 ‘독립성’이 이젠 그 누구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으며, 부담스럽기조차 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근본적 비판의 전통 살려야

스위지의 이 ‘세 가지 패배’를 종합해보면 현재 세계의 뚜렷한 흐름이 나온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장에서 언젠가부터 ‘자본’과 이에 종속된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원천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참신함’ ‘개혁성’ ‘도덕성’ ‘진보’ ‘정의’ 같은 알쏭달쏭하지만 누구나 옳다고 할 수밖에 없는, 김빠진 동어반복이 비판적 담론의 자리를 차지했다.

모두 다 착하고 모두 다 지적이다. 하지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숨 막히는 경제적-군사적-정치적 폭력 앞에 거꾸러지고 있는데도,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 지구화의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시원하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위에서 지구적 자본과 전쟁 세력은 “본업은 이제부터”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폴 스위지라는 존재는 1980년대 이후 역사의 흐름에 의해 또 다시 ‘또라이 바보’로 되돌아간 채로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한 때 스위지에게 거의 꼬리가 잡히는 듯 보였던,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악동은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시한 소인배들이 아닌 역사와 맞붙어 처절하게 논박 당해본 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야곱은 신의 천사와 밤새 씨름한 덕에 ‘신과 싸운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폴 스위지라는 거인의 주검 위에 섣불리 발을 딛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며 조롱을 퍼부으려는 인간들은 뒤로 물러서야 할 것이다. 노신의 말처럼, “쓰러졌어도 영웅은 영웅이요, 아무리 팔팔하게 왱왱거려도 파리 떼는 파리 떼”이기 때문이다.

거목은 이제 편히 몸을 누일 때가 되었다. 젊은 나무들은 힘차게 위로 뻗어 그가 쉴 수 있는 울창한 그늘을 만들어줄 몫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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