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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에서 ㅣ 창비시선 40
곽재구 지음 / 창비 / 198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확실히 마음은 몸을 따른다. 겨울이라던가? 몸이 느끼는 한기는 마음으로 전해진다. 그러더니만 가을에는 느낄 수 없던 따스한 서정시들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빵처럼 성큼성큼 다가온다. 가을에는 낙엽이 뒹굴면서 질러대는 비명 때문에 온통 절망과 비탄과 절규밖에 보이지 않더니만, 겨울은 힘이 세다. 따스한 시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겨울은.
여기, 우리 앞에 고개를 내민 곽재구의 시들도 겨울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 이 시집에 실린 표제시 '사평역에서'와 '그리움에게'같은 절창의 시도 계절적 배경이 겨울이다. 시린 겨울, 전라선의 시골역을 지나치는 기차 안에서 그리움에 사무치고, 소박한 이웃들의 풍경에 녹아든다. 시에 구질구질한 삶이 담겨져 있고 털장갑 같은 온기가 묻어있다. 익숙한 간이역의 한 자리에는 독자 몫의 한 자리가 비워져 있을 법도 하다.
삶의 언저리, 삶의 모서리를 파고드는 그의 시선은 그대로 언어가 되고 시가 된다. 이토록 詩眼이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일까. 평범한 삶의 구석을 옮겨놓았음에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 주변부의 그늘를 향하는 그의 눈빛은 정답고 맑다. 그러나 '後記'에 실린 그의 말을 들어보면; '한 시대의 삶과 시가 공유해야 할 필연적인 과제들을 절실하게 느끼기 시작했던 내 이십대 후반에 내게 처음 찾아온 생각은 서정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도 종래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범주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후퇴한, 오천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삶 속에 녹이 탱탱 슨 우리만의 뜨거운 감성들을 되찾아 우리 민족 고유의 튼튼한 서정시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 나의 꿈이었다.'라는데, 그 꿈은 아름다운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跋文'을 참고해 보면, '대학의 교양과정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반도의 남쪽 끝 어디거나, 지리산이나 섬진강 등지를 비닐 백 하나만으로 떠돌아다닌 것'을 알 수 있는데, 며칠 전 TV 안에서 그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발로 쓴 시, 삶으로 쓴 시, 그것은 너무도 쉽게 드러나는 곽재구 시의 비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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