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erturbation > 불행한 정신분석
욕망 이론
자크 라캉 지음, 권택영.민승기.이미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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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한국어로 정신분석을 공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심각한 오역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이 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 저작의 거의 유일한 번역본이라는 이유 만으로 읽히고 인용되고 있으니, 우리는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있지만 전혀 공부하고 있지 못하다.

아래 글 쓰신 분이 이 책의 번역 상태에 호의를 표하셨지만, 절대로 동의하기 어렵다. 예컨대(아래 예는 정말 아무렇게나 골라 본, 이 역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오역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  "신, 그리고 [빗금쳐진] 그 여성의 희열"이라는 논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 나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경우 성과 성의 대립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이 전제되어야만 존재하지도 않는 성과 성의 대립관계를 보충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274쪽)

성과 성의 대립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들 사이에는 조화로운 관계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뜻일 것이다.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왜 있지도 않은 '대립관계'를 우리가 '보충'해야 한다는 것일까? 조화로운 관계에 일부러라도 반목과 대립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는 라캉 주장을 거의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원문을 토대로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말을 하는 존재들의 경우에는 성들 사이의 관계가 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오직 여기에 근거할 때에만, 그 관계를 보충하는 것들이 제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처럼 말을 하는 존재들의 경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녀 간의 조화롭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라깡의 주장이다. 남녀 관계를 보충하려는 노력들은 그 불가능성으로부터 발원한다는 것, 불가능하지 않다면 뭐하러 그런 노력들이 제안되었겠느냐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이라는 생물학적 은유도 우리에게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지 못한다고 라캉은 주장한다. 역서에서 이 대목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다른 때보다 오늘 논의에서는 생물학적 은유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긴장을 풀어도 좋다." (275)

이 정도면 이젠 웃을수조차 없다. 인용된 논문을 번역한 사람은 권택영 씨다.  이 분은 현재 한국 라캉 정신분석학회 회장을 맡고 계시다고 한다. 권택영 씨가 한국의 라캉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면, 이 책을 속히 절판시키는 일이다. 한국에서 라캉은 이토록 불행하고(지젝도 역시), 한국어로 라캉을 읽지 못하는 우리들도 불행하다.  행복한 곳은 '한국 라캉 정신분석학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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