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쎈연필 > 그리고 다시, 기형도

모든 것은 기형도로부터 시작되었다. 헐벗은 나무처럼 두 팔을 벌리고 있어도 좋다, 단 한 번의 포옹으로 눈과 눈이 스치고 귀와 귀가 맞닿는 순간을 그려내고 싶었던 나의 詩를 읽은 문학 선생님은 기형도를 읽으라 했다. '장밋빛 인생'을 펼쳐주며 이것이다, 했다. 시인은 하늘만이 알고 있는 것을 너무 많이 알아냈기 때문에 요절한다는데 뇌졸중으로 어둡고 침침한 극장 한 구석에서 죽어버린 기형도는 그 순간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냈을까. 그의 시집은 차라리 한 장의 유서이다.
처음 그의 전집을 읽고 울고 싶었다. 지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죽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소주 두 병만 마시면 그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휭하니 바람따라 날면 사뿐히 바닥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기형도를 읽고 나서 시를 쓰지 않았다. 단 한 편도 쓸 수 없었다. 윤동주가 그리웠다. 때묻지 않은 순결한 미소가 그리웠다. 기형도는 너무 아픈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순간마다 떠올리며 산다. 특히 눈이 내리는 어두운 겨울엔 더욱 그의 숨결을 가까이 느낀다. 나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느낄 때면 그는 마치 나의 연인처럼 바삭바삭한 어깨를 대어준다. 기형도는 젊은 날의 잊지못할 이름이며,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눈에게 감히 닿을 수 없던 죽음처럼 그는 죽음같은 시를 남겨놓고선 오히려 삶이 되어 너무 많은 젊은이들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미친 듯이 방황하고 많이 외로웠던 젊은이들의 삶 속에.
그리고 기형도는 늘 시작된다. 입 속에 질기게 달라붙은 검은 잎처럼 두려운 환희로 세상의 경계에 서 있는 그에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기형도를 알고 난 후부터 나는 울지 않는다.
ㅡ 셰헤라자데님의 <입 속의 겊은 잎> 독자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