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오마르 카이얌 - 루바이야트(The Rubaiyat)

루바이야트(The Rubaiyat)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 1040년경 ∼ ? . 페르시아 시인)

1
그대 잠을 깨라. 먼동이 트자 태양은
밤의 들판에서 별들을 패주(敗走)시키고
하늘에서 밤마저 몰아 낸 후
술탄*의 성탑(城塔)에 햇빛을 내리쬔다.
*회교국의 군주
2
아침의 허망한 빛이 사라지기 전
주막에서 들려 오는 저 목소리
"사원에 예배 준비가 끝났거늘
어찌하여 기도자는 밖에서 졸고만 있나."
3
꼬끼오, 닭이 울자 주막 앞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문을 열어라.
우리들이 머물 시간은 짧디짧고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4
지금은 새해*, 옛 욕정이 되살아나고
생각에 잠긴 영혼 고독으로 돌아가니     
거긴 모세**의 하얀 손이 가지 위에 내밀고   
예수의 숨결***이 대지에서 꽃피는 곳
*페르시아의 새해는 절기상 춘분에 시작
** '모세'와 '예수'는 모두 봄에 피는 꽃이름  
*** 예수의 숨결 : 치유력을 지녔다는 페르시아 신앙에서 유래
5
장미꽃 만발하던 이람* 정원 사라지고
잠쉬드의 칠륜배(七輪杯)도 간 데 없지만   
루비가 불붙는 포도원은 예와 같고   
숱한 정원이 물가에서 꽃피우네.
* 이람 : 아라비아 사막에 매몰된 궁중의 정원
6                 
다윗의 입술 다물렸지만, 울리는 건 거룩한  
펠레비* 노래, "포도주를 다오, 붉은 포도주"   
핏기 없는 얼굴을 물들이고자
장미에게 애소(哀訴)하는 나이팅게일.
* 페르시아의 고어
7
오라, 와서 잔을 채워라, 봄의 열기 속에
회한(悔恨)의 겨울옷일랑 벗어 던져라
세월의 새는 멀리 날 수 없거늘
어느 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


* 미국이 드디어 아프가니스탄에 지상군을 투입했다. 뉴욕 쌍둥이빌딩 비행기 폭탄테러가 있은지 두 달여 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던 파미르고원 인근의 한 약소국이 세계 최강대국의 시비에 휘말려 공습과 재난, 기아 속에 방치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아프가키스탄에 대한 외세 침략사는 당나라 시대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의 침공을 격퇴한 이래 소련의 침공을 격퇴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세계 곳곳에서 반전 시위가 벌어지고 수많은 시위대가 그 동안 이란과 이라크, 팔레스타인, 소말리아, 수단 등에서 자행된 민간인 희생에 대해 침묵했던 자신들을 반성하고, 자신들의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오랫동안 서구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던 고립무원의 고원국가 아프카니스탄의 일에 대해 어째서 많은 국가의 시민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각자 생각해볼 몫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그와 관련해 중동지역 출신 시인의 시를 읽어보는 것으로 <망명소식>을 시작해볼까 한다.
오마르 카이얌이란 시인의 <루바이야트>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처럼 아랍권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전 시편이다. <루바이야트>는 11세기경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지역)에 살았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역사학자, 철학자였던 오마르 카이얌이라는 시인의 시를 19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번역가였던 에드워드 피츠제랄드라는 사람이 페르시아어를 영어로 번역하며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카이얌이라는 말은 '천막제조업자'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데 오마르는 '카이얌'을 필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이슬람 문명권을 아랍이라고 통칭해서 무슬림을 말하지만 아랍은 지리적 호칭이고, 이슬람이나 무슬림은 종교적 호칭에 해당하는 것이다. 원래 아랍이란 말은 좁게는 아라비아 반도 일대만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아라비아 반도를 세력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마호메트의 지지자들에 의해 사상적, 정치적으로 포섭된 페르시아 지역까지 아랍이라고 통칭했던 것이 점점 그 의미가 확대되어 결국 이집트나 모로코 등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문명권에 들어가는 지역까지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인 양 쓰이고 있지만 틀린 호칭이다.

실제로 전세계 인구 60억 중 17억이 이슬람을 종교로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아랍 지역에 거주하거나 아랍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전체 인구의 1/6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시편들 <루바이야트>가 이슬람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페르시아 지역 민족의 정서를 담았다고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바이야트가 쓰여질 무렵의 페르시아는 이미 이슬람 권역으로 편입되었다.

"루바이야트"('루바이'의 복수형. 루바이는 4행시라는 뜻)란 뜻으로 직역하자면 "4행시집"정도의 뜻이다. 우리의 시조처럼 율격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형식상 자유시이지만, 4행이 한 연으로 이루어지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4행을 하나의 연으로 독립적인 시 한 수가 되며 그 시 한 수 한 수는 각기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품 전체의 정서는 거의 한결같이 현세적인 풍요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머물고 있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긴 아랍의 정서라는 것이 우리처럼 연못에 우연히 도끼를 빠뜨렸다가 산신령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알라딘처럼 시장에서 우연히 물건을 구입하는 상업적인 마인드라고 한다면 그들의 시에서 현세적인 풍요로움을 갈구하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은 오랫동안 낙타를 타고 사막을 누빈 대상 무역자들이 아니었던가?

사막의 아침은 분명 보기 드물게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기에 르 클레지오는 그의 아내와 사막을 여행하고 사막을 예찬하는 사진집까지 출판하지 않았을까. 영화 <아라비라의 로렌스>의 한 장면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의 지평선 저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이 작품의 첫 시작은 그렇게 사막의 먼동이 트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 그대들에게 신은 태양을 다시 돌려보내 준 것이다. 물론 아랍을 상징하는 것이 밤의 초생달이기는 하지만 역시 생명의 원천은 태양이다. 먼동이 트는 데서 시작되는 첫 번째 시에서부터 오늘은 아름다운 것임을 강조하고 있고, 작품이 계속되면서 그런 태도는 더욱 강조된다.

'우리들이 머물 시간은 짧디 짧고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란 말은 마치 페르시아 우화 중에서 "죽음을 피해 달아난 사내"라는 이야기가 연상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우화의 내용은 한 사내가 점장이에게 점을 쳤는데 점괘가 오늘밤 안으로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내는 죽음의 사자를 피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 죽음의 사자는 테헤란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그 사내를 찾고 있었다. 죽음의 사자는 말한다. "이 녀석이 오늘 안에 테헤란에 와서 죽기로 되어 있는데 아직도 도착을 안했네." 그때 사내는 말을 달려 테헤란 시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죽음의 사자는 그를 보고는 반갑게 달려가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뭐, 이 시가 반드시 그런 우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누구에게나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현실인 죽음을 척박한 사막에 사는 그들은 언제나 맞닥뜨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시편들 역시 시에서 드러내고 있는 이미지들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이면엔 역시 현재의 삶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다소 교훈적이기조차 한 것들이다. 오늘은 마땅히 즐겨야하는 중요한 것이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포도주, 장미 등이 중심 이미지가 되고 있는 이 작품에서 현세주의적 태도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아랍 지역의 현실 중심적인 문화와 오랫동안 대상 무역에 종사하거나 유목을 위해 사막을 횡단하며 체득한 삶의 양식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오랫동안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체득한 우리 민족의 문학적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사시사철 농사를 위해 땅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은 언제나 고정된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막의 유목민이나 대상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이란 언제나 낯선 땅에서 낯선 이들 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손님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담아 환대하는 여러 이유 중 한 가지는 나의 가족이 언젠가 모르는 이들에게서도 그런 대접을 받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특색을 통하여 문학의 보편성과 함께 민족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편들 <루바이야트>를 오늘날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대형서점 서가에 비치할 수 있도록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에드워드 피츠제랄드라는 사람으로 1809년 빅토리아 왕조시대 영국 상류 계급 출신 작가이자 번역가였다. <바람구두가 선정한 20세기 세계 10대 사건> 중 가장 첫 번째로 꼽히는 사건은 "유럽중심의 세계통합과 그 유산들"이었다. 그 진두에 섰던 나라는 당연히 영국이었고, 그런 대영제국의 태양이 지지 않았던 시대가 바로 빅토리아 왕조였던 것이다.

그는 당시 영국의 유한 계급이 그러했듯이 특별히 자신의 노동 없이도 살 수 있는 계급에 속해 있었으므로 취미 삼아 번역에도 손을 댔다. 그는 자신의 고상한 취미를 자랑하기 위해 페르시아 시인인 오마르 카이얌의 시 75편을 번역해서 1859년 얄팍한 팸플릿으로 제작하여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이 시집을 오늘날처럼 전세계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재발굴한 이는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Rossetti, Dante Gabriel)였다. 로세티는 자신의 친구이자 시인인 스윈번(Swinburne, agernon Charles )에게 이 책을 소개했고, 이 책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시인이자 공예가인 윌리엄 모리스(Morris, William), 비평가 존 러스킨(Ruskin, John) 등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들에게 전해지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해서 읽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대목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에드워드 피츠제랄드가 이 시를 오마르 카이얌의 원래 의도대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판의 성공에 고무된 피츠제랄드는 이후에 계속해서 그의 시를 추가로 번역해 덧붙였는데 그렇게 번역되어 완성본이 나온 것은 1879년, 모두 101편에 이른다. 그러나 그 중에서 오마르 카이얌의 원시에 충실한 것은 불과 49편에 불과하고 , 특히 8편 가량은 피츠제랄드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를 서로 덧대거나 생략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편집되고 잘린 시를 오마르 카이얌의 시라고 생각하고 읽어왔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 시기의 영국 뿐 아니라 유럽은 허버트 스펜서(Spencer, Herbert )의 '사회진화론'이란 철학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사회진화론이란 다아윈의 <종의 기원>에 영향을 받은 사상으로 '생존경쟁, 적자생존'이라는 자연계의 법칙을 인간세계에 고스란히 도입한 것이다.

인간세계에서도 약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으며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권리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우생학과 인종학으로 발전해 결국 파시즘과 나치즘으로까지 확장되는 단초가 된다.

영국과 영국민에 있어 빅토리아 왕조 시대는 제국의 영광이 전세계를 뒤덮는 자랑스러운 시대였다.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이끈 보수당(保守黨)과 윌리엄 E. 글래드스턴(William E. Gladstone)이 이끈 자유당(自由黨)의 양대정당이 번갈아 수상직을 맡으며 양당의회정치(兩黨議會政治)라는 영국식 의회 민주주의와 제국주의 정책에 의한 식민지 통치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세계대제국(世界大帝國)을 건설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이면은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해 중국과 무역 마찰을 빚자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선거법 개정으로 선거자격이 확대되었으나 영국 지배 계급은 헤게모니를 더욱 공고히 하는 시기가 되었고,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부결되었으며, 노동조합법이 실행되었으나 다른 한 편으로 노동자 가정에서는 영아살해가 빈번히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에도 사회진화론은 뿌리를 내리고 제국주의의 든든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피츠제랄드는 오마르 카이얌의 시를 자신이 마음대로 고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오마르 카이얌이란 페르시아 촌구석의 무명시인에게 문명세계의 고상한 지식인 집단에게 읽힐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의기양양해했을 지도 모른다.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그런 찬란함 뒤에는 노동자 계급의 한숨과 겉으로는 고상한 척, 유식한 척 하지만 뒤로는 퇴폐와 위선을 숨기고 있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런 풍토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일례로 우리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0여년 전 프랑스 육전대 병사들에 의해 벌어진 외규장각 도서 약탈 사건으로 우리는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 당했고 그외에도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우리는 그중 어떤 것도 되돌려 받지 못했다. 같은 유럽 국가간의 문화재 반환이나 기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피해 배상, 사과 문제에는 민감한 그들이 아시아의 작은 약소국가에 대해서는 그들의 대통령이 약속한 일까지도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그들의 변명 중 하나는 40년간 일본의 지배를 당했고, 전쟁 겪으며 멸실될 뻔한 우리의 문화재를 보전해줬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오마르 카이얌의 시가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이 시기의 문학적 경향은 통속적인 사실주의(寫實主義)가 크게 유행한 시기였으며, 동시에 그런 경향을 초월하는 실제적 인간성을 추구하였고, 위선과 허영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 하나의 특색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루바이야트>가 당시 영국 문단에서 환영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빅토리아 시대의 근엄한 표정과 엄숙한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당대의 지식인들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더불어 현세의 삶을 예찬하는 <루바이야트>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읽는 에드워드 피츠제랄드 판의 <루바이야트>가 오마르 카이얌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번역된 시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까맣게 몰랐을 것이고,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마르 카이얌이 현세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덧없음을 노래했음에도 그들은 현재의 풍요와 쾌락, 제국의 번영을 구가하며 마치 달콤한 초콜릿을 입안에 넣어두고 살살 녹여먹듯 이 시를 즐겼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루바이야트>는 민음사판 <세계시인선> 이외에도 몇 종이 더 있지만 그 모두 저자가 에드워드 피츠제랄드로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카프카처럼 독일어로 쓴 작품을 번역할 때 영역(英譯)본을 기본으로 삼았다해서 카프카의 작품을 번역한 영국 작가를 지은이로 삼는 것과 같다. 어쩌면 이 <루바이야트>가 오마르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피츠제랄드의 것에 가깝다는 그런 뜻일까? 그렇다면 해석이 가능하다. 마치 민음사판 삼국지를 우리가 '삼국지'라 하지 않고 '이문열의 삼국지'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오역을 바로잡은 번역도 있으므로 다시 한 번 출간되길 희망해본다. 이처럼 장황하게 <루바이야트> 이야기를 한 까닭은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처럼 우리는 서구적(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적인) 시각으로 편집된 렌즈만으로 아랍과 이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참고로 이슬람교를 마호멧교로 부르는 것과 알라를 알라신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슬람교에 있어서 마호메트는 신의 위대한 사도이지만, 그 자체가 신으로 숭배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Quran)은 아랍어로만 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 무슬림 가운데 80% 이상은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비아랍인이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꾸란의 의미는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있고 또 번역되고 있다. 다만 최초의 계시 내용이 번역의 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인간의 지침서가 ‘편리함’ 하나만을 위해 번역에 번역을 거듭할 경우 그 변질과 손상, 왜곡의 폐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를 번역하는 해설서에도 반드시 꾸란의 원문은 함께 병기하도록 하고 있다. 아랍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아랍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된 꾸란은 반드시 아랍어와 병기하도록 한 이유는 피츠제랄드 같은 이가 자기 멋대로 번역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블룸 - 시의 정원 http://bloom.sio.net/rubaiyat/rubailist.htm
- 우리 말로 된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를 읽어볼 수 있는 사이트이다.

아라비안나이트 사이트 - 루바이야트
http://www.arabiannights.org/rubaiyat/index2.html
- 아라비안나이트 사이트로 피츠제랄드판이 아닌 제대로 된 번역(물론 영문)의 루바이야트를 볼 수 있는 사이트이다.

'이슬람을 바르게 알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
http://www.islaminkorea.org
- 말그대로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편견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는 사이트이다.

<200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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