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 문고판의 얇은 책.표지를 장악하다시피 한 완고하면서도 단호한 표정의 저자 얼굴이 선뜻 책을 펼쳐드는 것을 망설이게 한다.그러나 페이지를 넘겨 서문을 읽고 본문 첫 단락에 시선을 박는 순간 서늘한 전율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다.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책을 손에서 놓는 것이 힘들 정도로 이 책은 강한 자력(磁力)을 발산한다.

제목이 주는 인상과 달리 <국가와 황홀>(문학과지성사)은 정치학이나 심리학 분야에 속한 책이 아니다.저자 송상일이 문제 삼는 것은 시, 나아가 문학, 나아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면 이 책의 제목을 '시학(詩學)'으로 했을 것이다.아도르노였다면 '미학이론'이란 제목의 책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이 서구 인문학이 이 땅에 상륙한 지 처음으로 이 땅의 지식인에 의해 저술된 본격적인 '문학원론'이라고 생각한다.

드디어 이 땅에서도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나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저작이 등장한 것이다.서구 문예이론가와 철학자들의 이론을 얼기설기 엮어서 펴낸 국내의 그 흔해빠진 '시학'이나 '시론' 혹은 '문학개론' 따위의 책과 이 책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책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가 우리 지식사회의 그 어떤 학파나 유행에도 얽매이지 않고 제주도라는 변경에서 홀로 사유와 언어의 정련에 임했기 때문일 것이다.따라서 이 책은 독학자의 오랜 꿈과 독서의 응결체라 할 만하다.저자는 성서와 불경과 프로이트와 하이데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이들을 충돌시켜가며 읽는 사람의 눈 앞에 새로운 사유의 오솔길을 낸다.

문장은 극도로 짧고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이어서 그 하나하나가 잠언이라 해도 될 만큼 깊고 그윽한 느낌을 준다.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한 단락에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갈 때마다, 마치 산을 올라가면 갈수록 저 아래 골짜기의 풍경이 서서히 그 전모를 드러내는 것처럼, 사유의 상승과 더불어 세계의 감춰진 모습이 드러나는 듯한 상쾌한 부력(浮力)을 제공한다.

저자의 이러한 사유의 등반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문학은 결국 무(無)에 대한 탐구이자 탐닉이라는 것이다.역사 이후 모든 문명사회가 강조한 생산과 생식 지상주의에 반대해서 저자는 시로 대표되는 오르가즘과 죽음의 황홀경을 대립시킨다.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예술가는 창조보다는 소멸에 기여하는 존재다.그것은 발전과 성숙을 모르는 퇴행과 동어반복의 세계다.시의 황홀만이 국가 권력의 전횡을 그 근저에서 반성 심문할 수 있게 한다.

이쯤해서 저자의 '국가'와 '황홀'이 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혹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無)'의 교묘한 번역어임을 알 수 있다.저자의 독특성은 이들 개념을 극단으로 몰아붙여 감히 프로이트나 사르트르조차 엄두내지 못했던 곳에까지 사유를 진척시킨다는 점이다.

이 작은 지면에서 저자의 논리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기는 어렵다.혹자는 개념의 지나친 단순화를 볼 것이고 혹자는 작품과 유리된 이론의 추상성을 문제삼을지 모른다.그러나 이 모든 제기 가능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 땅에서 문학이론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잊고 지낸 오랜 꿈 하나를 다시 상키시켰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중요한 책으로 평가받아 마땅한 '작품'이다. - 남진우(문학평론가) ( 2001-06-05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