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밥 대신 먹을, 라면을 끓이는 동안, 기형도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소리내어 읽던 기괴하고 게으른 독자가 다시 한 번 그를 욕보였다. 아, 나는 이번에는 볶은 번데기들을 씹어 먹으면서 그의 전집을 읽게 되었다. 내가 먹은 라면과 번데기 사이에 그의 시가 놓인다는 건, 그에게 어떤 느낌일까. 그가 쓰러진 극장에서는 '뽕2'의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루머를,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실로 믿고 있으며, 그런 이상한 신앙에 대해 스스로 여러 번 생각한 적이 있는 황당한 독자를, 그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이런 나를,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生을 온통 슬픔으로 살았고 슬픔으로 시를 쓰던 시인이 더 이상 슬퍼해서 뭐하랴. 요절 시인은 요절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청년 시기로 고정시킬 수 있었다. <기형도 전집>은 그렇게, 미라가 된 어느 청년 시인의 문학세계와 삶을 담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시, 소설, 산문, 자료로 이루어진 이 박물관에는 역시나, 청년들이 웅성대고 있다. 그 관객들처럼 나도 그 미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안개에 질식할 것만 같다. 그 안개는 벌써 내 '입 속의 검은 잎'을 사막처럼 마르게 하고, 다시 그 갈증은 폐부 깊숙한 곳까지 고통을 전달한다. '아아, 목구멍 가득히 안개가 들어찬 느낌이다.'(환상일지, 247쪽)

…일부러 장난스레 글을 시작하려 했으나, 마지막까지 그렇게 버틸 힘이 도저히 없다. 이 모두가 기형도가 부린 안개의 흑마술 때문이리라. 아, 이제는, 그만 사라지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