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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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덕지게 책상에 붙어서 책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해서, 생각한 것이 단편소설. 고골리의 <외투>의 줄거리를 여기저기서 소개해 놓은 글을 읽고는 언젠가 꼭 읽어봐야지, 라고 생각했건만 결국은 체호프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심각한 갈등과 고뇌를 담지 않으면서도,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독자에게 영혼의 충격까지는 주지 못하지만, 삶의 단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그 다채로운 표정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단편소설이 아닐까. -- 어쨌든, 나는 체호프를 만나기 전에 이런 작은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체호프는 이런 내 물음표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빈곤 속에서 허덕이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 입학 이후부터 온갖 싸구려 잡지에 유머에서부터 콩트 따위들을 기고했던 이력을 보여주듯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단편 [관리의 죽음]은 가벼운 유머를 보여준다. (역자의 작품해설을 보면 이것은 독자에 대한 그의 친절한 배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동시에 체호프의 인생과 문학의 행로를 어느 정도 배치해둔 결과이기도 하다.) 작은 해프닝에서 일파만파로 번져 가는 희극적 죽음에 대한 체호프의 시선은 그가 삶의 진실을 캐내고자 했던 일련의 문학작업들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 책의 마지막 단편, [주교]는 체호프의 후기작으로 한 종교인의 죽음을 다룬다. 죽음을 앞둔 그의 깊어진 눈이 거기에 어른거린다.

<체호프 단편선>을 읽는 도중에 대학로에서 [체홉단편소설]이라는 연극을 관람했다. 다섯 편의 단막극을 무대에 올리는데 내게는, 연극이 보다 더 인상적이다. [아뉴따], [소파 밑 극장주] 등의 작품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단편집에 없다. 역자는 체호프를 현대 단편소설의 완성자라 부르는데, 연극에서 체호프의 위상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라뵤프스키는 그녀의 손을 밀치며 비켜났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혐오감과 분노 같았다. 그때 주인 여자가 양배추국이 담긴 접시를 양손에 들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올가 이바노브나는 여자의 커다란 손가락이 국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배가 옷 밖으로 비어져 나올 듯한 지저분한 여자, 랴보프스키가 걸신들린 듯이 먹고 있는 양배추국. 처음에는 바로 그 소박함과 예술적인 무질서 때문에 사랑했던 이 모든 생활이 지금은 그녀에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느끼며 차갑게 말했다.
'우린 당분간 헤어져야 되겠어요. 안 그러면 권태에 지쳐서 대판 싸우게 될 것 같아요. 이제 신물이 나요. 난 오늘 가겠어요.'(「베짱이」, 59쪽)

이 단편집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을 옮겨 보았다. 사랑에서 환멸의 감정으로 옮겨가는 그 순간을 놀랄 만큼 잘 표현해냈다. 두고두고 되풀이해 읽을 만한 장면! '애증'의 순간을 품고있는 모든 문학들 중에서 이 부분을 최고에 올려두련다. 다른 도전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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