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아 / 민음사 / 1996년 1월
평점 :
품절


<책>이라는 책을 읽는다. 「책」이라는 표제 소설을 포함한 송경아의 '소설<책>'이다. 「책」은 교통사고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과 그로 인해 혼자 남게 된 '나', 혜진의 이야기이다. 혜진은 어머니의 사십구일재되는 날, 책장 정리를 하다가 '고풍스럽게도, 갈색 장정에 금박으로 '김숙희'라는 책 제목이 새겨져 있는 책을 발견'한다. 그 책은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책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어머니의 책으로의 변신 또는 책으로의 윤회는 이렇게 쓰여 있다 :

그 책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쓴 책이라거나, 어머니에 관한 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죽음 후에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는 한 권의 책으로 변해 내 방 책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처음 책장을 넘길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말투, 눈길, 희망, 걱정, 그 모든 것이 책 속에 들어가 있었다. (16쪽)

그녀는 어머니를 사후의 세계로 보내고 나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책을 얻는다. 그리고 이 어머니 텍스트는 그녀를 독자로 얻는다. 저자가 죽어야만 독자가 태어날 수 있는 것! 어머니 생전의 모든 삶이 담겨 있는, 어머니 그 자체인 책읽기를 통해 그녀는 어머니의 고백 ─ 혹은 그녀 자신의 관음과 만난다. 특히 어머니의 연애 기록은 자신이 혼외정사로 태어난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에까지 연결되는, 충격적인 삶의 재발견을 가져다 준다. 어머니를 읽음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다시 읽는 격이다.

책이 기록이고 저장의 기능을 한다면 이전 세대의 지성과 감성과 그리고, 사적인 비밀을 담는 문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이전 세대와 이전 시대와의 은밀한 만남을 의미한다. 책은 읽혀짐으로써 고백의 기록은 은밀한 관음의 해독과 번역 작업을 거친다.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책의 가상현실은 안일한 현실에 대한 무지하고 반성 없는 독자들의 인식과 안주를 거침없이 파괴한다. 책은 친절한 문화의 전달자로 교육자의 몫을 하면서 동시에 죽비를 매섭게 내리치는 수행의 인도자 역도 하는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죽음을 본 후에 자기 자신의 죽음도 맞이한다. 책을 읽기 전의 독자와 책을 읽은 후의 독자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출생의 비밀을 일러 준다. 비밀을 알게 된 독서후의 독자는 다른 사람으로 깨닫는다. 존재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뤄지는 셈이다. 책은 인간 의식의 변혁을 꾀하는 혁명가요, 비밀을 폭로하는 누설자이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텍스트를 읽고 나서 그녀의 책에 대한 생각은 인간의 존재론과 인간 관계론으로도 심화된다. '인생이 하나의 책'이라는 것. 어머니 삶이 담긴 그 책은 어머니에 대한 회상일 수 있고 추억일 수도 있고 슬픔의 망각을 위한 '어머니 새로 쓰기'일 수 있다. 어머니의 책, 즉 어머니의 삶이 지닌 파란의 주름과 결을 더듬어 어머니를 생생하게 부활시키고 자신의 삶을 갱신시킨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오히려 어머니와의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와는 달리 어머니책의 독서 후 애인과의 관계는 헤어짐으로 조정된다. 그녀는 애인까지를 포함한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 읽히기를 거부하고 '해독되기를 거부하는 코드, 읽히기를 거부하는 책'이 되길 원한다. 읽기는 사람 읽기이고 관계 읽기이며 '사람 얽기'였다. 읽히기 거부는 얽히기 거부이므로 타자와의 관계 단절을 야기하며 관계를 변화시키고 때로는 파괴했다. 인간 대 인간의 소통으로서 읽기는 책 읽기의 대화성에 다름 아닌 것.

어머니가 책이 되었다는 말은, 책은 어머니라는 말로 바꿔볼 수 있겠다. 책은 저자 자신의 죽음을 통한 거룩한 모성애로 창조적 독자를, 그래서 결국은 작가를 낳는 데에 이르른다. '갈수록 두꺼워지는' 어머니책에 대한 언급들은 불러오는 산부의 배를 연상케 한다. 그대로의 자기 생이 읽혀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본래 이름을 감춘 남의 이름으로 자기 생을 읽히기 바라는 작가의 길을 택한다. 점점 불러오는 어머니책의 자궁은 작가의 산실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