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구판절판


"그건 사랑에도 표준 규격이 있다는 뜻이야. 잘 들어봐.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벨의 전화, 에디슨의 전구, 자본주의 사회의 낭만적 사랑은 모두 역사적인 발명품이야. 17세기 프랑스 사람 라 로슈푸코는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G 코드 예약녹화가 가능한 VTR을 구입하지 않는 한, TV 편성표 프로그램 옆에 있는 숫자는 고정간첩의 난수표와 마찬가지고 피임약이 발명되기 전까지 성적 방탕이란 남성명사에 속하는 것이었지. 같은 이치로 18세기에 낭만적 사랑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뛰는 가슴으로 만나 일부일처제 가정을 꾸려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는 없었다는 뜻이지."-45~46쪽

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 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 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지고 두 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만 남을 때까지 그 관계 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넣는 일은 계속된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숲 속 빈터가 열리게 되면 뜨거운 육체의 아름답고 털 없는 동물들이 뛰놀게 된다고 서양의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5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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