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즐거움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97
나카가미 겐지 지음, 이정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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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가미 겐지. 1946년에 일본 와카야마 현에 있는 피차별 주거지, 옛날 우리 말로 하자면 향, 소, 부곡 같은 곳, 카스트적 게토를 일컫는 ‘로지’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친부도 다른 지역의 카스트 게토, 부락 출신으로 주로 암시장에서 기생하는 깡패, 폭력배 비슷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나카가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거야 뭐 우리가 알 필요 없지.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아이를 건설업자한테 데려가 양아들로 입적시켰는데, 이 양아버지가 부락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해 벌인 사업이 성공, 덕분에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 괜찮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부락(위키피디아 용어), 즉 로지(부락의 부분 네트워크) 학생을 위해 중등교육 인센티브를 주었는데 이 인센티브를 제대로 활용한 첫번째 로지 아이였다고 한다.

  와카야마 현의 부락에 자신의 이복형제가 많이 살고 있는 조상 대대로 천대를 받던 곳이라 그곳 소년들은 너무 일찍부터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았고, 이어서 외면받을 짓을 골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도 없고, 그래봤자 학생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받을 터이니 기껏해야 글을 읽고 쓰는 수준에 머물렀겠지. 작품을 읽어봐도 열다섯 살 정도가 되면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댐 건설 막일을 하거나 벌목공을 하거나, 도둑질 혹은 지역 깡패로 장사하는 소상공인으로부터 소위 보호비를 뜯어 술과 여성을 사고, 근근이 먹고 산다.


  소설집 《천년의 즐거움》의 ‘천년’은 당연히 정확하게 1,000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카스트적 게토인 피차별 지역 ‘부락’이 생긴 것이 천년 정도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향과 부곡이 삼국시대에, 소가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었다. 향, 소, 부곡이 일본으로 넘어가 부락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기억이 아니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주로 소가죽 무두질과 가죽 신발을 만들어 파는 (우리말로)갖바치, 그리고 고리버들 작업을 하는 (역시 우리말로)고리백정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부락은 메이지 유신 당시 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하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메이지 일왕도 몰랐을 것이다. 차별 철폐에 열을 잔뜩 받은 사람들이 생겼다는 걸. 바로 보통의 농민들. 이들이 칼과 낫, 그리고 죽창을 들고 부락에 침입해 중인환시리에 부락 사람들의 배를 꿰어 죽이는 일이 전국에서 벌어질 것은. 부락 사람들은 그리하여 더 깊은 곳을 찾아 움막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이렇게 사건을 피해 작은 움막이 모은 골목을 ‘로지’라고 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향, 소, 부곡이 조선시대 초기에 없어졌다지만, 아마도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라진 것으로 추리하는 바, 그럼에도 짐승을 잡고 짐승의 머리와 발, 내장 등 부속물을 얻어 그것을 일반 농민들에게 팔아먹고 사는 백정, 백정에게 가죽을 얻어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나무껍질로 광주리를 만들어 파는 고리백정들은 큰 마을의 변두리 지역에서 옹기종기 움막을 짓고 그들끼리 따로 살았으니 그걸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명희가 쓴 미완성 명작 <혼불>에 잘 나와 있다.


  이 로지에 터줏대감이랄 수 있는 부부가 있으니 레이조와 오류. 작품은 전부 전쟁이 끝난 후인 194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때 부부는 벌써 늙을 만큼 늙은 상태이다. 아마도 메이지 유신 당시 농민들이 저지른 학살을 피해 이 로지로 피해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한 1세대나 2세대의 후손 정도 되는 듯싶다. 남편 레이조가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로 먹고 살았다. 그러다 세 돌까지 키운 아들이 차에 쌀을 넣고 팔팔 끓인 죽粥, 자가유를 머리부터 뒤집어쓰는 바람에 크게 화상을 입고 죽는 모습을 보고, 다음해 교토의 절로 중이 되기 위해 수행을 떠나버렸다. 그래서 스물세살의 오류는 동네의 유일한 산파를 하고 살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로지의 거의 모든 아이를 받았다.

  로지에서는 생식 능력을 잃은 완숙한 여성을 ‘오바’라고 칭했지만, 유일하게 아이를 받는 오류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건만 탄생에 관계하는 일종의 삼신할매 역을 해서 그랬는지 오류에게도 오바의 칭호를 붙여 “오류노 오바”라 부르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쿄토에서 수행을 끝내고 돌아온 남편 레이조는, 로지로 돌아와 게보즈, 정식 중은 아니지만 절과 중이 없는 지역에서 중을 대신해 죽은 자의 명복을 빌고, 제사를 바치는 대리 중 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아내는 거의 모든 로지 사람들의 탄생에 직접 간여하고, 남편은 모든 로지 사람의 죽음에 관여하니, 원래부터 터줏대감 부부의 로지 내 신망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이야기를 주로 오류노 오바를 중심으로 이 로지에서 가장 오랜 가문인 나카모토 집안 출신의 남자들을 기억하는 이야기로 전개한다.

  나카모토 남자들은 원래부터 씨가 좀 남달랐다. 키가 크든지 몸이 단단하다. 피부가 맑다. 로지 출신만 아니라면, 그래서 더 잘 배웠더라면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할 수도 있는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오류노 오바는 생각한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 고귀한 핏줄 속에 또한 더러운 피가 섞여 흐르고 있으니, 여자를 가리지 않고, 악한 일도 가리지 않는 것. 사실은 여자를 가리지 않는 게 아니라, 살면서 주위를 보니까, 꽃이 아름다우면 벌과 나비가 꿰는 법인 것처럼, 벌 나비가 아름다우면 꽃도 꿰는 게 인생살이라서, 여성들이 잘 생긴 나카모토 남자만 보면 눈알이 커지고 콧구멍이 넓어지며 아랫배에서 찌르르르 전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거다. 하다못해 오류노 오바마저 자기가 직접 받은 다쓰오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놈의 전류가 짜릿짜릿하게 흘러 직접 다쓰오를 자빠뜨린 적이 있었다는 거 아니냐. 동정인 줄 알았더니 오류 아줌마가 세번째 여자였다고 해서 김이 좀 빠지긴 했지만.

  고귀한 피와 엉겨 흐르는 더러운 피는, 먹고 사는 일에도 영향을 주어, 폭력과 살인, 도둑질, 주로 히로뽕인데 마약복용까지 망라한다. 오류노 오바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일을 하는 사람 답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든 기형이든, 아니면 지체장애든, 범죄자가 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아야 좋은 것이고 씨를 더 많이 퍼뜨리는 것이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카모토 집안의 남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다니니 제 명에 죽는 사람이 드물거나 없다. 그래 거의 전부 20대 중반의 나이에 요절을 하는데, 그때마다 오류노 오바는 고귀하고 더러운 피가 스러졌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연작 단편들의 결말을 장식한다.


  부락과 로지라는 특수한 장소. 특수한 사람들이 특별한 삶의 모습을 그려낸 작업이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 문제가 있다.

  나카모토 남자들은 성적으로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아무래도 DNA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다. 손끝만 대도 여자들은 곧바로 엑스터시의 황홀경으로 빨려간다. 소설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픽션이고 조금의 과장일 터이니 웬만하면 독자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도 나카가미 겐지의 성애 장면은 과하다. 나카모토 남자들의 방중 광경은, 표현의 노골성은 다음으로 하고 지독한 가학/피학이 넘쳐 변태 포르노의 혐의를 받아 마땅하다. 여성/남성을 끈으로 묶고 애무나 삽입을 하거나, 여성의 전신을 바늘 쌈지로 찔러 온몸에 흐르는 피를 탐하다가, 비록 여성이 그렇게 해달라고 피학적 성애를 원했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 같은 것, 시신을 자신이 어렸을 때 산속 정령을 목격한 소나무 밑에 땅을 파고 유기하며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환상문학 장면과 비슷하게 처리하려는 거, 이건 뭥미?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를 슬쩍 넘어버리고 시침 뚝 떼는 듯해서 눈살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 지고 말았다. 에로틱한 장면, 야한 묘사 좋아하는 나도 그럴 정도이니 점잖은 독자들이야 어땠겠느냐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 문장이 좀 서걱거린다는 거. 역자 이정미는 2022년에 대산문화재단으로부터 외국문학 번역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어 이 책을 번역했다. 이때 같이 선정된 작가들이 엘리자베스 캐스켈의 <메리 바튼>을 번역한 김정연, 그라치아 델레다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번역한 김효정이었다. 이 정도면 믿고 읽을 수 있는 역자라고 생각했건만, 놓친 것이 하나 있다. 이정미의 역서를 보니까 이 책을 포함해 모두 스물세 권인데, 《천년의 즐거움》이 유일한 문학 책이다. 즉 이정미는 《천년의 즐거움》으로 문학 번역 데뷔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는 주식, 스포츠, 자기계발서 등등. 처음 번역하는 텍스트로 만연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길고 긴 문장의 작가를 고른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이를 지원대상자로 선정한 인천대 남상욱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라고 했을까? 뭐 그랬을 수도 있고. 나는 번역도 습작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는 독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어순은 비슷하지만 같은 문장 속에 우리말 단어를 어떻게 배치할까, 하는 것을 조금 더 신경썼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자주 들었다. 단어 배치까지 일본어 순서를 따른 것처럼 읽힌다. 내가 뭘 아나, 그렇게 우리말 문장이 서걱거리니까 혹시 그런 거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지.

  결론. 과한 베드씬 묘사와 서걱거리는 우리말 문장. 이것들 때문에 나름 독특한, 독특해도 많이 독특한 작품이 좀 바랬다. 그래도 외면할 필요 까지는 없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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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5-09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노골적일 필요가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과하다 과해!

Falstaff 2026-05-09 15:35   좋아요 1 | URL
뭐 일본이니까요. 아무리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못 따라가는 장르가 그쪽이잖아요.
 
반가운 손님 ㅣ 김지숙 희곡집 3
김지숙 지음 / 연극과인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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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숙이 좀 흔한 이름이라 혹시 헛갈릴 지 모른다. <장수상회>, <바냐 아저씨>, <졸업>을 공연한 유명 연극, 영화배우 1956년생 김지숙이 아니다. 아마 올해 나이 쉰여섯일 듯한 부산 출신 연극배우였던 이다. 단편영화를 하다가 마흔의 나이에 다시 부산으로 귀향해 연극 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것도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다. 딱 하나, 부산에 터를 잡고 가장 활발하게 연극판을 꾸리고 있단다. 원래 시, 소설 같은 것도 습작을 해, 부산 극작가 김문홍 문하에서 극작을 배우면서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희곡을 쓸 수 있었다고.

  《반가운 손님》이 이이의 세번째 희곡집이다. 모두 다섯 편의 희곡을 실었다. 제일 앞에 “작가의 글”을 놓았다. 작가는 말한다.

  “이 책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이걸 읽자마자 곧장 책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책을 읽으면 얼마나 더 읽는다고 아팠던 기억을 일컫는 문학적 ‘상처’를 파헤치겠는가 싶어서.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아픈 것도 싫고, 상처도 싫다. 거대한 비극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도 별로 기껍지 않다. 뒷방으로 찌그러졌으면 그저 세상 모른 척하며 조용히, 도서관에나 출근하면서 잔잔하게 숨쉬다가 그냥 그렇게 저물고 싶다. 


  실린 작품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매미가 운다> ㅆㄴㄹ 드라마

  <구워 먹을까요?> 그로테스크 살인극

  <반가운 손님> ㅆㄴㄹ 드라마

  <변신(變身), 변심(變心)> 카프카 클리셰

  <후두둑, 빗소리> 그로테스크한 상처, 어쩌면 ㅆㄴㄹ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한 내 기호에 의해 말하자면, 즉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관계없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읽은 감상을 소개하면, 정말 안 맞는다.

  표제 작품이며 소극장 이상의 무대를 전제로 쓴 것이 아마도 확실한 <반가운 손님>만 이야기해보자.


  1944년에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사치코. 화장을 해 분골을, 일본인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유골함에 담아 집에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후 80년의 세월이 지난 202X년 현재, 해방전에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달동네 산복마을의 노인 영숙의 집에 어쩐지 이 사치코의 하얀 유골함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일곱 살에서 한 살도 더 먹지 않은 어린 사치코가 연극의 첫 대사를 한다.

  “집 앞에 별이 한가득이다.”

  달동네 산복마을. 하도 산비탈이라 영숙네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항구에 정박했거나 예인을 기다리는 선박들의 불빛이 마치 별들처럼 빼곡하게 깜박거린다. 맞다. 사치코, 얘가 귀신이다. 그러니 첫 대사부터 ㅆㄴㄹ,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산복마을도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 황폐화하기 시작한 곳. 거주민들은 거의 영숙처럼 늙은이들이거나 싼 맛에 잠깐 머리 뉠 곳을 찾는 떠돌이 젊은이들뿐. 지금 산복마을에 관광객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같은 것들로 빈집을 개조하거나 비슷하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일본인의 투자를 유치하려 해쓰고 있다. 그래서 등장하는 사람이 담당 공무원인 주무관과 일본인 투자자 히로시.

  히로시는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할아버지가 식민지 조선에 와서 토지 사업을 벌여 성공을 했다. 아버지 소년 시절에 아주 귀여워했던 동생, 그러니까 히로시한테는 고모뻘인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그만 일찍 죽어버렸다. 고모 죽은 다음 해에 일본이 패전을 해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채 귀국하게 됐다. 이때 아버지는 동생의 유골을 이 산복마을 어딘가에 두고 갔던 모양이다. 이후 일본에서 사업을 벌여 성공을 했으나 결국 동생의 유골을 찾지 못했고, 죽어가면서 자기 아들 히로시한테 동생의 유골을 찾아 자기 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해버렸다. 이런 몹쓸 늙은이같으니라고. 자기가 못했으면 말아야지 애먼 아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래서 히로시가 아빠 죽어 장사 지내자마자 부산으로 날아와 옛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산복마을까지 기어올라와서 80년 전에 죽은 자기 고모의 유골을 찾으러 왔으니, 그 정성을 봐서라도 찾아주기는 해야겠지? 근데 등장인물이 바라는 걸 다 들어주면 현대 연극이 좀 덜 된 것 같기도 하고.

  독자는 딱 안다. 어려서 죽은 히로시의 고모가 사치코인 것을.

  사치코 귀신은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영숙이나 기춘처럼 곧 죽을 늙은 사람들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다. 딱 한 명 등장하는 젊은 바리스타, 근데 웬 바리스타? 좀 난데없는 직업이기는 한데 뭐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하여간 한 방에 거금을 벌어 곧 늘 바라던 대로 산복마을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남게 되는 철우도 사치코 귀신이 눈에 보인다.

  그저 그렇다. 모두 좋은 게 좋은 결말. 에필로그로 가면 귀신이 하나 더 늘어 둘이 된다. 누군지는 아시겠지? 강릉에서 왔지만 50년 동안 산복마을에서 살았으니 결국 부산 산복마을 토박이 귀신이 되는 영숙. 그리하여 마지막 씬은 감동이 이렇게 몸부림친다.

  “어둠 속에서 영숙(귀신)의 눈물 한 방울이 반짝인다.”


  다시 말씀드리는 바이오니,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내 취향에 입각해 마구잡이로 쓴 독후감에 불과하다. 극작가 김지숙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쓴 것이니 절대 믿지 마시라. 그로테스크한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즐겁게 읽을 수 있고, 관람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라는 것이 세평이다. 이런 독후감밖에 남기지 못해 극작가에게 미안한 바도 크다. 김지숙은 앞서 이야기한 “작가의 말”을 이렇게 끝낸다.

  “저 역시 희곡을 쓰며 묵묵히 정진해 나아가겠습니다.”

  나도 김지숙의 건필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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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램프 - 2025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바누 무슈타크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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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부커 인터내셔널을 받은 책. 대개 “수상작”이라 하지 “상 받은 책”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데, 굳이 이렇게 말하는 건, 이 책이 부커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최초의 소설집, 즉 단편소설을 엮은 책이기 때문이다.

  1948년에 인도 남부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인텔리 여성. 지금 78세니까 이이가 젊었을 당시에 대개의 인도 또는 무슬림 여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즉각 결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라고 《하트 램프》에 여러 번 나온다. 간혹 결혼 대신 대학에 입학시키는 가정도 있었는데, 이 책의 작가 바뉴 무슈타크의 집안이 그러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행간에 무슈타크라고 대학 진학을 쉽게 한 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집안 내에서 나름대로 다툼을 겪었으리라.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 라디오 방송국을 거쳐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1970년대 후반 인도 남서부 지역에서 시작한 저항문학 운동 ‘반다야 사히티야’에 참여했다. 반다야 사히티야는 인도의 하급 카스트, 여성, 노동 계급의 삶을 문학으로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무슈타크가 비교적 부유하고 진보적인 가정 출신이라 하지만 남아시아의 무슬림 커뮤니티 안에서 여성으로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을 터, 평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판이 제대로 깔린 것이었으리라.

  48년생 작가는 당시 관습으로 보면 거의 할머니가 될 나이인 26세에 자유 연애를 통해 결혼을 했다. 스물여덟 살에 아이를 낳고 지독한 산후우울증에 걸린 다음에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단편소설집 여섯 권, 장편소설 한 편, 시집 한 권, 에세이 한 권을 냈다. 인도는 땅도 넓고 사람도 많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다양한데, 무슈타크는 작품을 칸나다 어로 써서 인도의 여러 지역 언어, 우르두어, 힌디어, 타밀어, 말라얄람어 등으로 알려졌다.

  2020년대 들어와 무슈타크의 새까만 고향 후배 디파 바스티Deepa Bhasthi가 근 반세기에 걸친 무슈타크의 단편소설집 여섯 권 가운데 마음에 드는 작품 열두 편을 골라 영어로 번역했고, 이것이 저 먼 잉글랜드의 책가게까지 알려져 2025년에 부커-인터내셔널을 먹게 된 거다.


  이 책이 다분히 페미니즘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무슈타크가 처음부터 페미니즘에 입각해 작품을 썼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내가 읽기로 바누 무슈타크는 여성 소설가로서 같은 세대를 사는 여성들의 여러 모습을 소설로 그려냈다. 시간이 지나 다음 세대의 독자가 읽으니 사회와 종교, 문화가 여성을 어떻게 억압했는지가 드러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게 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작품들을 읽어보면 아마도 1970~80년대 남 인도, 그리고 무슬림 커뮤니티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독자마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정말 그런 촉감으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목을 콱 조르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한 순간의 빛도 발견하지 못하는 질식 상태.

  그러나 이런 것들만 들어 있지는 않다. 앞에서 말했듯 무슈타크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한 시절을 집중한 작품을 모은 것이 아니라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쓴 것 가운데 수작이라고 판정한 것들을 골라 실었으니. 그러니 여성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스토리가 다양하고 모두 나름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노작가의 평생 작업 가운데 좋은 것들만 골라 실은 소설집에 세계 유수의 상을 주는 건 반칙 아냐? 예를 들어, 아직 박완서 선생이 생존해 있다면, 그이의 작품 중 빼어난 것들만 골라 번역해 책을 만들면, 솔직히 우리끼리 얘긴데, 《하트 램프》는 게임도 안 될 거 같은데 말씀이지. 그렇다고 《하트 램프》가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재미도 있고 앞에서 말했듯이 수작秀作이지만 아무래도 시대적, 문화적, 지역적, 종교적 거리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읽어보시라 추천하기는 애매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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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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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반스는 이 책을 하이브리드라고 규정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자서전이 합쳐진 책이란다. 책을 읽어가면서 문학의 하이브리드가 어떤 방식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 독자는 그냥 읽기만 하면 될 일이다. 주로 나이 든 픽션 작가가, 결국 개(책에서는 루이라는 늙은 개)한테 주지 못한 버릇인 픽션을 조금 섞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책. 그래서 상당한 부분은 마치 에세이를 읽는 것 같고, 어떤 쪽에서는 자기 삶의 특정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작중 화자 ‘니’는 작가 줄리언 반스이다. 대략 76세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 78세까지의 반스.

  책의 초반을 끌고 나가는 주제는 불수의 자전적 기억 involuntary autobiographical memory.

  혈액암에 걸린 줄리언 반스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닥터 재키 한테 엉치뼈 위에 뻐근한 느낌이 들게 하는 마취 주사를 맞은 후, 작은 드릴로 척골에 구멍을 내고 골수를 채취해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의사 재키가 하는 말에 따르면 예후가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암에서 나을 방법은 없고, 평생 암을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암은 반스를 죽음으로 몰고가지 않으며 반스가 죽어야 암도 사라질 것이라고. 즉,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혈액암을 죽이는 결과가 된다.

  반스의 책을 몇 권 읽어 엽기적이고 극단적 관심을 잘 알고 있는 주치의 닥터 재키가 <브리티시 메디컬 센터> 스크랩 글을 보내주었는데, 기사는 좌측 시상 후부 출혈성 뇌졸중을 겪은 45세의 남자 케이스가 나온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침상에서 먹었던, 먹어도 참 변함없이 여러 번 먹었던 마들렌을 떠올리며, 이때도 마르셀이 한 번 마들렌을 연상하고 그것이 불수의자전적기억IAM에 의하여 기억 속에서 잠재하고 있던 거의 모든 마들렌 먹던 기억이 와그르르 쏟아져 나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역시 반스는 엽기적인 인간이니, 마들렌, 비스킷 또는 애플파이로 변화시키지 않고, 만일 사람이 소리 죽여 방귀를 뀌었는데 이 순간 IAM이 작동해 몸에서 새 나간 모든 방귀가 시간별로 상황별로, 냄새의 강약 별로 떠오른다면 어떻겠는가, 아니면 평생 먹은 베이컨 샌드위치가 날짜별로 휙휙 지나칠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진이 빠질지 상상해보란다. 이게 좌측시상후부에 출혈성 뇌졸중이 발병해서 생기는 일이라면.


  이 기사를 읽은 70대 중후반의 줄리언 반스는 혹시 자기 뇌에서도 이런 IAM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도 지금 출혈성 뇌줄중이 있는 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노령의 초입에 들어선 독자 나도 마찬가지인데) 반스는 지금까지 먹은 모든 파이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행동하거나 비도덕적으로 행동한 순간들도 시간 순으로 정리되는 것 같은 기분이고, 진심이든 아니든 “사랑해”라고 말했던 모든 순간, “사랑해”라고 말해야 했으나 말하지 못했던,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 저질렀던 모든 거짓말, 위선, 피할 수 있었던 또는 피할 수 없었던 잔혹, 매정한 망각, 시치미, 지키지 못한 약속, 언행불일치의 기록 같은 것들이 와장장창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반스는 이런 불수의자전적기억IAM을 스펠링을 조금 다르게 나열하여 I AM, 즉 자신의 현재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나는, 이게 나 한테만 일어나는 특수한 기억현상이 아니고 내가 어느새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표식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구나,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하고 조금, 아주 조금 안심했다. 왜냐하면 이런 IAM 현상은 대부분 좋지 않은 기억을 위주로 연상을 시작하는데, 글에 관한 한 세계적 명성을 즐기고 있는 반스의 경우에는 글을 씀으로 해서 IAM을 다스릴 수 있지만, 나같은 범부는 여전히 그 시절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과 자책과 죄의식 때문에 이게 뇌 속에서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육체적으로도 떨림 혹은 호흡의 아주 약한 불규칙, 어쩌면 혈류 속도의 경미한 이상 같은 현상도 생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IAM,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머리글자. 이걸 수천년 동안 잘 써먹은 집단도 있다. 우리가 한 낱낱의 행동, 생각, 감정을 다,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가 죽은 뒤에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협박해 돈과 권력과 최고의 위세를 얻은 집단. 오랜 동안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죄의 기록, 목록은 성베드로의 외상장부에 새겨져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의 뇌, 시상 후부에 담겨 있으며 그걸 열 수 있는 열쇠는 신경의학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안다.

  새로운 궁금증. 그러면 이제 누가 하느님의 역할을 대신할까? 뇌수술 전문의? 신경분석학자? 천만의 말씀.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한테 역할을 맡기면 괜히 얻는 것 없고 돈만 깨진다.

  여기서 마르셀 프루스트, (당연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그에 관한 반스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나,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생략한다.


  대신 하이브리드라고 말했으니 반스는 실제 자기가 겪은 실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화이기는 하지만, ① 두 중심인물의 이름을 바꾸었으며, ② 이야기를 하려면 대부분 픽션일 수밖에 없는 배경을 제공해야 했고, ③ 이야기의 시작과 끝만 실화일 수 있는데 아무래도 중간의 빠진 부분은 개략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④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20년 동안 금지, 타 대학 배경은 10년간 금지했으나 2004년 부터는 그걸 20년씩 더 연장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옥스포드 출신인 줄리언 반스 입장에서,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의 시작은 적어도 40년 전에 시작한 사건/일화라는 뜻이겠다.

  반스는 60년대 중반에 옥스포드에 입학했는데 당시 여학생은 16.1%. 성비가 5.26.대 1.

  이때 반스는 두 명의 친구를 만난다. 진과 스티븐.

  스티븐은 반스처럼 중산계급 출신의 장학생이었지만 그는 장차 공무직 또는 경영 분야에서 일하려고 철학을 공부하며 뇌를 정리하고 있었고, 반스는 작가가 되기 위하여 더 진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철학과목을 듣고 있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 중산층의 아들들 답게 참을성 많고, 친절하고, 잘 파악되지 않는 명제나 이론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자유분방함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진은 처음에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두 남자 아이들과 달리 약간 더 화려하고 약간 더 불안정한 집안 출신이었다. 별거중인 부모 가운데 아버지는 애인이 있었고 집에서는 만날 말다툼이었다. 상황도 아슬아슬하고 이건 진 역시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그래도 벌써 스페인과 이탈리아, 모로코에 가보았고 러시아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으니 스티븐과 반스 보다는 진취적이었다고나 할까?

  셋 가운데 스티븐과 진이 드디어 사랑했던 모양이다. 반스는 다른 아가씨와 한 침대에 오르긴 했는데 하도 서툴러서 밤새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내려온 적 밖에 없었지만, 먼저 스티븐이 반스에게 와서 고백했다.

  “이제 결혼을 하든지 헤어져야 하겠어.”

  진도 반스에게 와서 고민을 털어 놓았다.

  “이제 우리한테 남은 건 결혼하느냐, 아니면 헤어지느냐야.”

  이들은 원만한 합의 하에 이별을 선택했고, 이후 몇 년간 전화, 우편 등으로 연락을 이어가더니 흐지부지 헤어졌다. 스티븐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아내와 아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스티븐 혼자 잉글랜드에서 이것저것 하며 중산층 조금 윗길로 살아간다. 진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화훼 회사를 차려 괜찮게 사는 평생 독신녀로 늙었다.

  그러다가 반스를 찾아온 스티븐. 이제 반스에게 두 번째로 진과 만남을 주선하란다. 40여년 전에 그렇게 했으니 이제 한 번 더 못해줄 이유가 없지 않으냐며. 하지만 연락처가 없다. 전화번호 적어 놓은 건 벌써 번호가 바뀌었겠지. 그래도 어찌어찌 해서 인터넷 메일 주소를 찾았다. 반스가 힘을 보태 둘을 연결시켰고, 셋이 만나 적당한 시간에 반스가 자리를 피해주었으며, 이때부터 스티븐과 진은 로맨스 그레이, 늙은 연애를 꽃피우기 시작했는데, 아이고야, 마음은 20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나? 심지어 이미 70대 중반인 스티븐은 그때까지도 절륜한 전립선을 보유하고 있어서 진 평생에 그런 밤은 또 처음 지내봤단다. 거 참 주책들이야.

  하지만 쉽지 않다. 예전에 사랑을 쏟아주지 못한 스티븐은 늘 조금이라도 많은 사랑을 쏟아부으려 하고, 세상 살면서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진은 그게 버겁다. 행복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한테만 골라 온다는 것을 이들은 몰랐고, 반스도 몰랐고, 나도 몰랐고, 세상 사람 거의 다 모른 채 그 자리를 오해 및/또는 착오에게 물려준다.


  이들의 결혼에 대표 증인으로 나섰던 반스는 이들의 결혼생활을 지켜본다. 그리고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 낯설지 않은 죽음. 그러나 자신의 작업을 중도에 죽음에게 뺏기기 싫어, 그럴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마음먹고 자신이 쓸 마지막 책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쓴다.

  줄리언 반스답다. 팬으로 반스의 픽션은 거의 섭렵을 했으나 정작 더 이상의 픽션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들으니 섭섭한 마음을 피할 수 없다.

  반스 선생.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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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5-07 1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반부에 소개해 주신 불수의(involuntary)가 ‘걸리는‘ 단어네요.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많이 서글픈 느낌이네요.
주위에 파킨슨병 환자가 있는데, 이 분들의 증상 대부분이 불수의적 행동들이라고 합니다.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행동들도 괴로운데 이로 인해 많은 차별적 인식이 생긴다고 하니 안타까울 밖에요.
신체든 정신이든 자기가 안다는 것의 힘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데, 그 기전을 파고들어 가는 과학과 의학의 힘도 새삼 놀랍습니다.

Falstaff 2026-05-07 15:34   좋아요 1 | URL
신체적 불수의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반면에 반스가 이야기하는 ˝불수의 자전적 기억˝은 자기 기억이 왔다갔다 한다는 것 같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신체의 일부인 ˝뇌˝ 불수의 현상, 치매와 다른 것이겠습니다.
주위에 파킨슨에 고생하시는 분 이야기를 들으니 안타깝습니다.
 
아그네스
페터 슈탐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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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른 63년생이라 토끼띠가 아니고 범띠인 스위스 남자.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간 견습회계사를 거쳐 정식 회계사로 5년 동안 일했다. 이 다음에야 나도 한 번 공부라는 걸 해볼까 싶어서 취리히 대학에 입학, 영어, 경영정보, 심리, 정신병리 등 다양한 학문을 접했다는데, 그러니까 뭐 하나 제대로 한 건 없었다는 뜻이다. 이게 바람직한 대학 학부처럼 보인다. 일단 다양하게 공부를 해보고 정말 재미있고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보이는 학문을 골라 대학원에 진학해 열공모드로 한 5년 보내며 학위를 차근차근 따는 게 요즘 시대에 맞지 않나? 그렇게 한다면 학부 학생 전원의 90퍼센트가 법학이나 의학을 지망할 거 같은 음울한 상황을 예견할 수밖에 없어서 문제지만. 법과 의학을 뭐하러 공부하려는 지 모르겠어. 법 공부하면 도둑놈, 사기꾼, 살인자들과 만나야 하고, 의학공부 해 봤자 해골 같은 노인들이나 피, 고름, 똥밖에 더 보느냐고? 나는 내 새끼들한테 농부가 되라고 권했다. 현대의 농부. 네가 포함된 팀에서 개발한 것으로 국민들을 5년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는 기술자-농부가 되라고.

  윽,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

  하여간 슈탐은 학부를 졸업한 다음에 뉴욕, 파리,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잠깐 살다가 1990년에 스위스로 돌아와 프리랜서 기자와 작가를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스위스에서는 잘 나가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제법 먹고 사는 모양이다. 2014년에 독일에서 무슨 문학상을 받은 것이 여태 이 양반의 가장 큰 자랑이고, 그 전해에 부커-인터내셔널 상 최종후보였다가 미역국 마신 걸로도 어깨에 힘주고 다닌다. 우리나라에는 이이의 우리말 단행본 네 권이 있는데 이 책을 포함한 세 권은 절판이고 문학과지성사에서 2023년에 낸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만 살아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뜬 배우 윤석화가 워낙 강렬해서, 아그네스, 하면 그이가 주인공을 한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연상하기 십상이다. 하긴 올드팬이나 그럴 지도 모른다. 윤씨가 공연했을 때를 알아보니까 1983년 실험극장에서이었다. 나는 못 봤지. 마빡에 작대기 두 개에서 세 개 달고 저 이동면 낭유리 늑대 우는 골에서 밤마다 빠따 맞으며 노예생활할 때였는 걸. 반면에 스위스 사람들한테 아그네스는 여성의 이름으로 굉장히 촌스럽거나 색다르게 들렸던 것 같다.


  짧은 장편소설. 본문이 203쪽에서 끝나고 해설도 붙어있지 않다. 좀 불친절한 느낌. 모두 36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은 새로 페이지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평균적으로 18페이지는 공란이다. 한 페이지가 겨우 열아홉 줄, 한 줄에 띄어쓰기 포함해 스물아홉 자 들어간다. 19행, 29자. 이 문둥이네 출판사는 19, 29. 소수를 편애하는 거 같다. 마음먹으면 반나절이면 다 읽어치운다. 팍팍 진도 나가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 거면 좋겠는데 뭐 그건 아니다.

  지은이 슈탐처럼 주인공 ‘나’는 프리랜서 작가 겸 소설가로 보인다. 하여간 글 써서 먹고 사는 인간인데 이름 좀 알려졌지만 길거리 지나다니면서 알아보는 독자가 있을 정도는 아니다. 있기는 있겠지만 겨우 몇 명 정도. 스위스 사람이 시카고에 와 있는데 누가 알아보겠어? 여기서는 미국의 호화 여객열차 풀먼호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시카고 공립도서관에 갔다가 내 맞은편에 앉아 눈에 들어온 아가씨가 아그네스. 그게 작년 4월이었다. 여느 여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마르고, 키가 별로 크지도 않으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갈색머리에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 즉 매력있고 수수한 모습이란 뜻이다. 다음날에도 아그네스는 도서관 그 자리에 앉았다. 오래 책을 보다가 ‘나’와 함께 잠시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함께 피우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그네스에게는 허버트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다. 연인이 아니라 그냥 친구. 연극배우. 자기가 도와달라면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친구.

  세번째 만난 날은 도서관 밖의 자판기 커피 말고 길 건너 ‘나’가 자주 가는 작고 초라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제서야 아그네스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한다. 물리학 전공이며 지금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중이란다. 논문은 “수정격자 대칭군의 대칭성”이라는 주제. ‘나’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25세이고, 시카고대학 수학연구소에서 시간제 조교로 일한다. 첼로를 연주하고 시와 그림을 좋아하는 여성. 부모는 몇 년 전에 명예퇴직하고 플로리다에서 연금생활자로 여유롭지는 않지만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시카고에 친구가 거의 없고 있다면 매일 만나 사중주를 연습하는 여자 세 명 정도.

  ‘나’는 그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몇 권의 책을 출간했다는 말은 쑥스럽기도 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그네스의 무관심이 반갑기도 하고.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한 적이 있다. 식당으로 가던 중에 인도 위에 한 여성이 누워 있었다. 아그네스 또래의 붉은 머리 아가씨. 창백하고 주근깨가 촘촘한데 ‘나’가 앉아서 들여다보니 무호흡이다. 얼른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대가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요구해 알려주었다. 소방관이 도착해 여성은 이미 죽은 상태이며 아마도 자살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구급차에 실어 갔다.

  식당에 들어가 만난 아그네스. 이이가 말한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요. 언젠가는 죽겠지요. 누구나 그렇듯이.

  죽어가는 과정이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요.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아직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이 두려워요.

  ‘나’와 아그네스는 식당에서 나와 ‘나’가 사는 아파트 도럴 프라자 27층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에서 오랫동안 키스한다. 아파트에 들어와 처음 남자의 몸을 경험하는 아그네스는 그러나 자연스럽게 신발과 옷과 속옷을 벗는다. 아그네스는 며칠 후에 자기가 사는 작은 원룸에서 나와 이 아파트로 거처를 옮길 것이다. 아직 원룸의 기한이 남아 있어서 꼭 필요한 짐만 가져올 생각이다. 생전 처음 해본 섹스가 어떤 감각이었는지, 궁금해하지 마시라, 안 쓰여 있다.

  사람이 함께 사는 일. 특히 성인이 된 후 계속 혼자 살다가 갑자기 함께 사는 일. 이거 생각보다 복잡하다. 아그네스는 ‘나’에게 자신과 사는 것을 소설로 쓰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쓴다.

  ‘나’는 아그네스를 사랑한다. 아그네스도 나를 사랑한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아그네스 역시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아그네스와 함께 스위스로 가서 살까? 미국 시민권이 없는 ‘나’는 시카고에 계속 머물 수 없다. 언젠가는 가야 한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 시카고 공립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것이 4월이었는데 어느새 추수감사절과 할로윈이 오고, ‘나’와 아그네스는 한 지붕 아래서 사랑을 하고 몸을 나누며 생활을 소설로 써가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와도 아그네스는 부모가 있는 집 대신 시카고에 머문다.

  나이 좀 든 독자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일이 생긴다. 아그네스가 피임약을 복용했지만 임신하고 만다. ‘나’는 당황한다. 아이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겨 버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린다. 그만큼 당황한 것이다. 그것을, 아그네스는 임신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랬는지, ‘나’가 진짜로 영원히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 둘 다 자연스럽지만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 갈등은 커지고, ‘나’의 소설은 이제 ‘나’ 혼자 쓴다.

  에잇! 어차피 절판이니 팍 말해버리겠다. 결론은 책의 첫 문장에 나온다. 괜히 모른 척 뜸들이지 않겠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그네스는 죽었다. 한 편의 소설이 그녀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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