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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페터 슈탐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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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63년생이라 토끼띠가 아니고 범띠인 스위스 남자.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간 견습회계사를 거쳐 정식 회계사로 5년 동안 일했다. 이 다음에야 나도 한 번 공부라는 걸 해볼까 싶어서 취리히 대학에 입학, 영어, 경영정보, 심리, 정신병리 등 다양한 학문을 접했다는데, 그러니까 뭐 하나 제대로 한 건 없었다는 뜻이다. 이게 바람직한 대학 학부처럼 보인다. 일단 다양하게 공부를 해보고 정말 재미있고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보이는 학문을 골라 대학원에 진학해 열공모드로 한 5년 보내며 학위를 차근차근 따는 게 요즘 시대에 맞지 않나? 그렇게 한다면 학부 학생 전원의 90퍼센트가 법학이나 의학을 지망할 거 같은 음울한 상황을 예견할 수밖에 없어서 문제지만. 법과 의학을 뭐하러 공부하려는 지 모르겠어. 법 공부하면 도둑놈, 사기꾼, 살인자들과 만나야 하고, 의학공부 해 봤자 해골 같은 노인들이나 피, 고름, 똥밖에 더 보느냐고? 나는 내 새끼들한테 농부가 되라고 권했다. 현대의 농부. 네가 포함된 팀에서 개발한 것으로 국민들을 5년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는 기술자-농부가 되라고.
윽,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
하여간 슈탐은 학부를 졸업한 다음에 뉴욕, 파리,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잠깐 살다가 1990년에 스위스로 돌아와 프리랜서 기자와 작가를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스위스에서는 잘 나가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제법 먹고 사는 모양이다. 2014년에 독일에서 무슨 문학상을 받은 것이 여태 이 양반의 가장 큰 자랑이고, 그 전해에 부커-인터내셔널 상 최종후보였다가 미역국 마신 걸로도 어깨에 힘주고 다닌다. 우리나라에는 이이의 우리말 단행본 네 권이 있는데 이 책을 포함한 세 권은 절판이고 문학과지성사에서 2023년에 낸 <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만 살아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달 전에 세상을 뜬 배우 윤석화가 워낙 강렬해서, 아그네스, 하면 그이가 주인공을 한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연상하기 십상이다. 하긴 올드팬이나 그럴 지도 모른다. 윤씨가 공연했을 때를 알아보니까 1983년 실험극장에서이었다. 나는 못 봤지. 마빡에 작대기 두 개에서 세 개 달고 저 이동면 낭유리 늑대 우는 골에서 밤마다 빠따 맞으며 노예생활할 때였는 걸. 반면에 스위스 사람들한테 아그네스는 여성의 이름으로 굉장히 촌스럽거나 색다르게 들렸던 것 같다.
짧은 장편소설. 본문이 203쪽에서 끝나고 해설도 붙어있지 않다. 좀 불친절한 느낌. 모두 36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 장은 새로 페이지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평균적으로 18페이지는 공란이다. 한 페이지가 겨우 열아홉 줄, 한 줄에 띄어쓰기 포함해 스물아홉 자 들어간다. 19행, 29자. 이 문둥이네 출판사는 19, 29. 소수를 편애하는 거 같다. 마음먹으면 반나절이면 다 읽어치운다. 팍팍 진도 나가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 거면 좋겠는데 뭐 그건 아니다.
지은이 슈탐처럼 주인공 ‘나’는 프리랜서 작가 겸 소설가로 보인다. 하여간 글 써서 먹고 사는 인간인데 이름 좀 알려졌지만 길거리 지나다니면서 알아보는 독자가 있을 정도는 아니다. 있기는 있겠지만 겨우 몇 명 정도. 스위스 사람이 시카고에 와 있는데 누가 알아보겠어? 여기서는 미국의 호화 여객열차 풀먼호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시카고 공립도서관에 갔다가 내 맞은편에 앉아 눈에 들어온 아가씨가 아그네스. 그게 작년 4월이었다. 여느 여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마르고, 키가 별로 크지도 않으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갈색머리에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 즉 매력있고 수수한 모습이란 뜻이다. 다음날에도 아그네스는 도서관 그 자리에 앉았다. 오래 책을 보다가 ‘나’와 함께 잠시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함께 피우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그네스에게는 허버트라는 이름의 남자가 있다. 연인이 아니라 그냥 친구. 연극배우. 자기가 도와달라면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친구.
세번째 만난 날은 도서관 밖의 자판기 커피 말고 길 건너 ‘나’가 자주 가는 작고 초라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제서야 아그네스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한다. 물리학 전공이며 지금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중이란다. 논문은 “수정격자 대칭군의 대칭성”이라는 주제. ‘나’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25세이고, 시카고대학 수학연구소에서 시간제 조교로 일한다. 첼로를 연주하고 시와 그림을 좋아하는 여성. 부모는 몇 년 전에 명예퇴직하고 플로리다에서 연금생활자로 여유롭지는 않지만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시카고에 친구가 거의 없고 있다면 매일 만나 사중주를 연습하는 여자 세 명 정도.
‘나’는 그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몇 권의 책을 출간했다는 말은 쑥스럽기도 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그네스의 무관심이 반갑기도 하고.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한 적이 있다. 식당으로 가던 중에 인도 위에 한 여성이 누워 있었다. 아그네스 또래의 붉은 머리 아가씨. 창백하고 주근깨가 촘촘한데 ‘나’가 앉아서 들여다보니 무호흡이다. 얼른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대가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요구해 알려주었다. 소방관이 도착해 여성은 이미 죽은 상태이며 아마도 자살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구급차에 실어 갔다.
식당에 들어가 만난 아그네스. 이이가 말한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요. 언젠가는 죽겠지요. 누구나 그렇듯이.
죽어가는 과정이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요.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아직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이 두려워요.
‘나’와 아그네스는 식당에서 나와 ‘나’가 사는 아파트 도럴 프라자 27층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에서 오랫동안 키스한다. 아파트에 들어와 처음 남자의 몸을 경험하는 아그네스는 그러나 자연스럽게 신발과 옷과 속옷을 벗는다. 아그네스는 며칠 후에 자기가 사는 작은 원룸에서 나와 이 아파트로 거처를 옮길 것이다. 아직 원룸의 기한이 남아 있어서 꼭 필요한 짐만 가져올 생각이다. 생전 처음 해본 섹스가 어떤 감각이었는지, 궁금해하지 마시라, 안 쓰여 있다.
사람이 함께 사는 일. 특히 성인이 된 후 계속 혼자 살다가 갑자기 함께 사는 일. 이거 생각보다 복잡하다. 아그네스는 ‘나’에게 자신과 사는 것을 소설로 쓰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쓴다.
‘나’는 아그네스를 사랑한다. 아그네스도 나를 사랑한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아그네스 역시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아그네스와 함께 스위스로 가서 살까? 미국 시민권이 없는 ‘나’는 시카고에 계속 머물 수 없다. 언젠가는 가야 한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 시카고 공립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것이 4월이었는데 어느새 추수감사절과 할로윈이 오고, ‘나’와 아그네스는 한 지붕 아래서 사랑을 하고 몸을 나누며 생활을 소설로 써가고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와도 아그네스는 부모가 있는 집 대신 시카고에 머문다.
나이 좀 든 독자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일이 생긴다. 아그네스가 피임약을 복용했지만 임신하고 만다. ‘나’는 당황한다. 아이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겨 버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린다. 그만큼 당황한 것이다. 그것을, 아그네스는 임신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랬는지, ‘나’가 진짜로 영원히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한다. 둘 다 자연스럽지만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 갈등은 커지고, ‘나’의 소설은 이제 ‘나’ 혼자 쓴다.
에잇! 어차피 절판이니 팍 말해버리겠다. 결론은 책의 첫 문장에 나온다. 괜히 모른 척 뜸들이지 않겠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그네스는 죽었다. 한 편의 소설이 그녀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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