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58년 12월 도쿄에서 태어난 개띠 남자 마쓰이에 마사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들어가 연년세세 높은 고과를 받은 모양이다. 해외문학 시리즈를 론칭하고, 계간지 창간에 힘을 보탰으며 여기저기 편집장을 역임하다가 2010년 퇴직했다. 그의 편집 실력을 알아본 게이오 대학은 2009년부터 몇 년 간 초빙교수로 강단에 세우기도 했다. 마쓰이에는 그러나 퇴직과 더불어 창작을 시작해 2012년에 자신이 오래 몸담았던 신쵸샤에서 출간하는 잡지 “신초”에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이듬해인 2013년 이 작품으로 일본 최대의 우익 신문 요미우리가 주최하는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았다. 54세에 소설쓰기를 시작했으니 시작은 비록 늦었지만 이후 열심히 작품을 쓰고, 쓰는 것마다 일정부수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인기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등극했단다.

  <거품>을 2021년에 발표했으니 마쓰이에가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서 62세. 뭐 물론 글을 쓰기 전에 편집 일을 열라 했다니까 글의 흐름, 그러니까 세월에 따른 문법의 변화에 따라갈 수 있기는 했겠지. 그런데 글, 특히 픽션이란 것이 자신이 잡지 또는 작품을 편집할 때와 직접 쓸 때, 이 두 가지 경우는 거의 완벽하게 다른 일일 걸? <거품>이 이이의 다섯번째 장편소설인데, 나는 책을 다 읽기 전에 이이의 나이, 출생지, 가방끈 같은 거 하나도 몰랐으니 지금 전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팍, 느낀 것만 이야기하는 바로서, 작품 곳곳에서 저 오래 전부터 유독 일본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게 보인 사소설의 경향성이 문득문득 찾아냈다는 거다. 그러면서, 2021년 작품이면 요즘 작가일 터, 거 독특하네. 이렇게 쑤석거렸다는 거 아냐? 58년 개띠 작가한테 말이지. 70년 개띠도 아니고 원조 개띠.


  막이 올라가면 가정집 목욕탕. 욕조에 몸을 담은 사람은 십오세 청소년 가오루. 남자 아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욕실만이 안심할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하는 가오루. 소년은 도쿄에서 나고 자라 지금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다. 재학. 학교에 적을 두긴 했어도 1학기 초부터 등교를 하지 않고 있다. 가오루가 다니는, 아니지, 적을 둔 학교가 유별나게 수컷들의 세상인 밀림, 일찍이 모리스 샌닥이 이야기한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서 그런 건 아니다. 군복 같이 흰 플라스틱 칼라를 목에 댄 검정색 교복에 흰 플라스틱 칼라를 달고, 똑 같은 모자를 쓴 채, 딱 몇 시까지 등교해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유도와 검도를 필수과목으로 배워야 하는 대학진학 기계들이 모인 곳. 검정 사각형 같이 딱 규격화된 인간들이 규격화된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하여 규격화된 방법으로 애들을 조지는 곳. 이게 너무 싫은 거다.

  이것도 스트레스. 가오루는 습관적으로 공기를 많이 흡수한다. 흡수한 공기가 모두 폐로 들어가면 형관 내 산소농도가 높아져 더 건강하게 될 텐데, 그러지 못해서 소화기관으로 넘어간다. 공기는 위장과 소장을 거쳐 대장에 집중했다가, 가뜩이나 대장에 모인 섬유질 소화물과 유산균이 발효하여 생긴 가스와 함께 다량의 방귀를 생산한다. 정말 이런 이상 기질/병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 인구 70억 명가운데 뭐 있기는 하겠지. 하여간 가오루는 욕조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배에 힘을 빡, 주면 물 속에서 거품이 뽀그르르 올라온다. 꽤 큰 거품. 그게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폭, 터져 대기의 흐름을 타고 사라질 때까지 가오루의 몸을 형성하는 일부였다니 기분이 새롭겠지? 웃기게도 책에서 가스 거품이 터질 때 폴폴 풍기는 냄새는 1도 묘사하지 않았다.


  가오루의 부모 두 양반 다 학교 교사. 가오루가 집에 가서 나 학교 안 다니고 싶어, 라고 딱 꺠놓고 이야기했다. 잘했다. 확실하게 말을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게다가 특히 아빠가 좀 깬 인간이라. 좋아,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래?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는 거 아냐? 대학은 안 가더라도. 그리하여 여름방학 끝날 때까지 친척 가운데 도쿄에서 가장 멀리 사는 사람한테 보내기도 부자간에 합의했다. 엄마의 반대가 좀 있었지만 대가리 다 큰 자식한테 이기는 엄마 봤어?

  아빠가 자신의 막냇삼촌한테 전화를 해 승낙 받았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7백km 이상 떨어진 태평양 연안의 마을, 사리하마. 그러니 가오루의 막내 종조부가 사는데 거기서 재즈 카페를 열고 있다.

  가오루의 할아버지가 아홉 남매 가운데 맏아들이다. 다 합해 아들 여섯, 딸 셋. 가네사다가 막내. 가네사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당연히 육군에 징집되어 만주 괴뢰국에 주둔했다가 패전과 동시에 소련군의 포로로 잡혀 있었다. 불쌍하게 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일 불쌍한 처지로 떨어졌던 인종은 소련에 전쟁포로로 잡혔던 패잔병들이었다. 독일군 포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 혹은 중앙아시아 벌판에 그냥 떨궈놓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 포로들이 몇 년이 지나 거의 해골바가지 수준이 되어 어떻게 독일에 있는 집으로 갔는지 아시나? 걸어갔다. 일본 패잔병들은 이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가네사다의 경우에 바이칼 호수 근처로 데려가 벌목 작업을 시켰다고. 소련 병사가 하는 이야기가 기막히다. “너네 나라에서 너네들을 돌려보내라는 말을 하지 않아.” 패전 일본은 자기들 살 방도를 찾기에도 바빠 쉼 없이 눈알을 굴렸을 뿐 아직 살아있는 병사들의 안위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군에 잡힌 병사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소련군에 잡힌 병사들은, 일본 정부에서 생각하기를, 포로 생활을 하면서 이들이 일본으로 복귀하면 일본 적화의 분자로 활동하게 만들기 위해 철저한 빨갱이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돌아와도, 만일 돌아온다고 해도 나라의 정책을 입안하거나 시행하는 직위에는 절대로 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세상은 냉정시대였거든.

  1950년대 초에 귀국한 가오루의 막내 종조부 가네사다가 이런 포로 출신이었다. 어디서도 가네사다를 고용하지 않았다. 큰형 구와타로를 비롯해 남매들도 가엽게 생각하지만 색안경을 끼고 막둥이를 바라봤다. 이러니 어디 사람이 살 수 있나. 성격은 살면서 여러 번 바뀐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거. 고쳐 쓰지도 못하는 인간을 위하여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힌 거는 아니잖아?) 가네사다는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곳이 저 남쪽의 해안도시 사리하마.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동네에 가서 선뜻 지원한 곳이 보험회사 외판원. 자기도 말주변이 이렇게 좋았는지 몰랐는데 작은 도시에서 거의 탑 급으로 실적을 올렸다. 기본급 외 성과수당으로 상당한 돈을 벌어, 벌어봤자 외판원 수입이니 큰 돈은 아니었어도 처자식 없이 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한 가네사다는 번 돈을 계속 모아 50대 초에 원래 우유판매점이었던 건물을 사 거기다 재즈 카페 ‘오부브’를 열었다.

  그렇다고 도쿄의 사나이 가문, 사나이가 “진짜 사나이” 그런 게 아니라 일본의 가문 이름이 그렇다, 사나이 가문에 완전히 돌아선 건 아니고 중요한 관혼상제 때는 참석하려 애썼다. 그렇게 살았다.


  ‘구두 くつ’의 러시아 말인 ‘오부브’를 혼자 운영해온 가네사다. 여름에는 해수욕객이 많아 손이 좀 달린다. 말이 재즈 카페이지 점식에 간단한 식사와 커피, 저녁에도 간단한 식사와 주류 같은 걸 파는데 큰 돈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 죽는 비용, 즉 병원비와 숨 넘어갈 때까지의 간병비만 있으면 된다. 그래 세상 살면서 이젠 아무 바라는 거 없이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며 여유작작하게 사는 데, 우울한 표정을 한 30대 정도의 남자가 카페에 들어왔다. 세번째 주인공 오카다.

  오카다는 불쑥 나타난 것처럼 어느 날 불쑥 사라질 수도 있는 사람. 그게 5년 전이었다. 5년이 흘렀지만 아직 떠나지 않았다. 물론 소설이니까 가능하겠지만 마치 카페에 최적으로 맞춤한 솜씨와 부지런함을 갖춘 인물이다. 게다가 잘 생겼다.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니까. 일 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는 가네사다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카다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이거 뭐야? 독자로 하여금 오카다의 정체가 사람 죽이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아니면 살인범 또는 살인범에 가까운 범죄자인데 지금 몸을 숨기고 있다는 암시야? 끝날 때까지 작가는 이이의 정체를 말해주지 않는다. 카페를 떠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결국 가네사다는 자기가 죽으면 카페와 모든 재산을 오카다에게 물려줄 생각도 한다.

  이때 가오루가 막내 종조부에게 몇 달만 신세를 지겠다고 연락을 했고, 기차타고 해변에 도착해 세 남자의 자잘한 살림을 시작한다. 가오루는 당연히 짬짬이 구두 카페에 나가 서빙도 하고, 잔심부름도 하고, 조금씩 오카다에게 음식 만드는 법도 배운다. 15세 사춘기면 이제 이성에 관한 호기심도 지극할 때. 한 여성에 대한 환상도 생길 만하다. 물론 아직 대장에 가득 고인 가스 때문에 방귀가 뿡뿡 나오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 소년은 성장하고, 종조부는 늙어가고, 오카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 베이징 묘보설림 7
쉬쩌천 지음, 양성희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쉬쩌천은 1978년에 장쑤성 둥하이현에서 태어난 중국 소설가, 단편 작가, 에세이스트이다. 출판사 글항아리의 책 앞날개와 위키피디아에서 이이의 가방끈에 대한 디테일이 조금 다른데 썩 중요한 건 아니다. 하여튼 위키에 의하면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장쑤성 성도에 있는 회음사범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다 졸업은 난징사대에서 했다. 이후 베이징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역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소설쓰기에 전념해 오늘에 이르렀다. 아, 중국어도 할 줄 아느냐 묻지 마시라. 구글번역 돌려봤더니 그렇다는 말이다. 난징사범대의 동문목록에 이이의 이름이 올라 있으니 이게 맞는 듯.

  쉬쩌천은 다작 성향의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이의 작품 목록을 감안하면 우리말로 번역해 나온 단행본이 이 책 딱 한 권인 것이 의아스러울 정도이니까. 그렇게 많이 썼는데 번역 단행본이 단 한 권?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정말 그렇다는 건 아니고, 작품 목록에 우리나라 독자의 구미에 맞는 게 별로 없어 보여서 출판사에서 번역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궁리를 좀 하게 된다는 말이다. 책이 재미없어서라는 말은 아니다. 혁명 전 몰락한 봉건 지주 가문의 불행을 그린 <고대의 황혼>과 문화혁명 당시 죄 없이 조리돌림을 당한 타지 출신 학교 교장 선생 이야기인 <굵은 목소리>는 이이가 쓰지 않더라도 이미 50년대와 60년대 초에 출생한 선배 작가들이 충분히, 그리고 다양하게 설레발을 푼 것들이며, 다른 작품들도 내 눈에는 그리 삼빡하지 않다는 것. 이미 누군가가 광장에 서서 크게 외쳐버려 이젠 읽는 중간에 벌써 기시감을 느끼는 정도가 되었으니 단순히 인구 비례로 따져 얼마나 많은 비슷비슷한, 고만고만한 작품 속에 반짝일 수 있겠느냐고. 하여간 빛을 내려면 반짝거려야 한다니까.


  책의 제목이 《아, 베이징》이라 해서 베이징을 무대로 하는 작품이 다수가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고향인 장쑤성, 장강 하류 지역의 시골을 무대로 하는 작품이 더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베이징으로 상경해 베이징 대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딴 후에 계획을 바꿔 군대에 입대한 화자가 친척 할머니가 세상을 떠 장사지내러 고향에서 가니, 베이징 생활, 인민군 장교 출신이라는 권위를 누구나 다 우러른다는 <귀향 이야기>의 무대처럼 마을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 장강의 지류가 흐르고 동, 서로 거리가 있는 마을을 중심인 소설도 몇 편 있다. 살아있는 개를 산 채로 물이 펄펄 끓는 커다란 가마솥에 빠뜨린 다음 솥뚜껑을 깔고 앉아 푹푹 삶아 특제 소스를 첨가한 별미의 개고기를 요리해내는 개백정이 홍등가 화제花街의 한 윤락여성한테 삶은 개를 화대 비슷하게 제공하다가 매춘부의 청부로 돈 많은 뱃사람을 칼로 난자해 죽이는 <우뢰비>도 <귀향 이야기>와 <굵은 목소리>와 같은 공간에서의 일이다.

  그런데 열두어살 먹은 소년을 괴롭히기 위해 같은 반 악동들이 스무살 먹은 소년의 이웃집 지체장애 여성을 윤간하고 소년의 집에서 키우는 암캐의 코를 철사로 뚫어 괴롭히는 장면(굵은 목소리), 베이징에서 아가씨와 연애를 하지만 차마 시골의 아내한테 이혼을 하자는 말을 못하는 남자가, 자신이 동행한 동업자의 착한 아내와 대낮에 소파 위에서 교접하는 장면을 본 순간 꼭지가 돌아 시퍼런 칼로 평소에 동생이라 부르던 동업자의 두 개의 손가락에서 한 마디씩 잘라버리는 씬(오, 베이징)은, 이제 마음이 쫄보가 되어 영 읽기가 거시기하더라는 것. 전에 위화나 쑤퉁의 소설에서 여러 번 봤잖아, 이런 중국제 잔인, 잔혹한 장면은.


  나는 제일 마지막에 실린 <지난 몇 년 나는 늘 길 위에 있었다>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빌리고 시간이 별로 없어서 짧은 축에 드는 이걸 제일 먼저 읽어서 또 한 명의 마음에 드는 중국 작가를 발견했다고 자잘하게 좋아했는데, 집에 와서 더 읽어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아니더라는 것.

  기차 침대칸에서 자다가 기침이 멈추지 않고 발작적으로 쏟아져 다른 승객한테 영 면목이 없던 차, 여기저기서 막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욕설이 터지기 일보직전, 맞은편 칸 한 여성이 핸드백 속에서 물약을 건네주어 기침을 멈추게 도와준다. 아침이 되어 주인공 ‘그’는 여자한테 고마움의 표시로 식당칸에 가서 아침을 사겠다고 제안해 그렇게 한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차량 사이의 연결부로 가 함께 담배를 나누어 피우기도 한다. 그러다 혹시 여자 사는 근방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다시 한번 “뵙고 싶으니”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고 번호를 얻어낸다. 여자는 산이 많은 도시에서 내린다.

  날들이 가고 정말 이 이혼남 ‘그’가 여자가 사는 근처로 지나갈 일이 있어 기차에서 내렸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그때 들었던 걸 기억해 직접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만난다. ‘그’는 정말로 그때의 고마움이라는 인연으로 한 번 보고 싶었던 것. 시간이 이미 오후 해질녘이라 둘은 자연스럽게 저녁을 먹고, 술도 마시고 객점에 들어 남자의 방에 함께 든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공무원 남편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 있던 때였는데 이후 무죄가 드러나 오히려 직장에서 승진 발령되어 아내도 자기 힘으로 더 좋은 보직으로 발령시켰지만, 착했던 남편은 그 일이 있은 이후 사람이 바뀌어 일단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 위주로 살기 시작했다. 만날 외박했다는 뜻이지 뭐.

  여자는 그래서 홧김의 서방질이라도 염두에 두었던 듯하지만, 주인공 ‘그’는 둘이 함께 객점에 들었건만 오직 당시의 고마움으로 전에 말했듯 한 번 보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이게 끝인 건조한 사는 이야기. 이게 제일 좋았는데 그만 어이구, 산 개를 산 채로 끓는 물에 던져 넣지를 않나, 청부살인에다가, 개 코에 코뚜레를 하고, 나름대로 형수한테 이혼을 설득하다가 몸으로 말하게 된 순간을 들켜 손가락이 날아가니, 이거 원 살벌해서 말씀이야. 근데 내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고 이런 건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분이 틀림없이 있을 터, 그분들은 재미나게 읽을 작품. 내 판단을 별점으로 말하자면 3.5? 세 개는 너무 짜다. 넷은 조금 과하지만 너그럽게 봐줄 수준. 그러니까 여태 말은 이렇게 했어도 괜찮다는 뜻이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델타
마르코 미시롤리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마르코 미시롤라는 1981년 이탈리아의 리미니에서 출생했다. 리미니?

  잠깐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편” 5곡으로 가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단테를 인도하여 지옥 구경을 시켜주는데 제일 먼저 지옥의 유황불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프란체스카를 만난다. 프란체스카는 왜 지옥으로 떨어졌을까? 사랑 때문에. 

  인용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지옥편》 2007. 박상진 역.


  “사랑은 온화한 가슴에 이내 스며드니,

  지금은 내게서 없어진 아름다운 몸으로 이이를 

  사로잡았어요. 그 일은 아직도 나를 괴롭힙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결코 놓아주지 않으니,

  이이에 대한 차오르는 기쁨으로 나를 사로잡았어요.

  보다시피, 이이는 내 곁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어요.” (p.55)


  그러니까 프란체스카는 사랑 때문에, 드런 사랑 때문에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 지옥으로 떨여졌다. 책의 다음 페이지에는 아마도 지옥편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당신의 선생님은 아시겠지만,

  비참할 때 행복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는 일만큼

  괴로운 것은 없어요.’” (p.56)


  프란체스카는 리미니 공국의 공작이자 영주인 란체오토 말라테스타한테 시집온 아름다운 여성. 이이는 영주부인이 아니라 영주의 동생인 파올로의 짝이 될 줄 알았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르지? 파올로는 젊고 무지하게 잘 생긴 미남자로 유명했거든. 근데 결혼식장에 입장해보니 신랑이 짐승 같은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주먹을 가진 란체오토 영주님이었던 거다. 게다가 드럽게 못생기기까지 했다. 어때, 다른 작품 생각나는 거 하나 있다. 프리드리히 폰 실러의 <돈 카를로스>.

  근데 프란체스카는 <돈 카를로스>의 엘리자베스하고 좀 다른 캐릭터이다. 엘리자베스는 어쨌든 혼인의 순결을 끝내 지켰다. 반면 프란체스카는 아니다. 이를 눈치챈 영주님. 프란체스카와 동생 파올로 사이가 아무래도 수상해서, 영주님이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라고 광고했다. 그리고 정말로 군대를 소집해 적국을 향해 행진하는 동안 프란체스카는 친절한 시동생 파올로를 불러 뭘 했느냐 하면,


  “어느 날 우리는 한가롭게

  렌슬롯의 사랑 얘기를 읽었어요.

  우리뿐이었어요.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p.57)


  렌슬롯의 사랑 이야기는 당시 기준으로 봐서 야설 수준은 아니더라도 되게 야한 책이었다. 그런 걸 파올로가 소리내서 읽다가 점점 손끝이 이게 영 이상한 동네로 이동하기 시작하는데, 뭐 다 그런 거지, 자동이거든. 그리하여 점점 달아오른 둘이 급기야 비단 모기장 드리운 기둥 침대 위로 홀라당 올라가 뜨거운 사이가 되었던 터, 딱 이 때 시간을 맞춰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친 란체오토 말라테스타. 영주님은 관운장이 쓰던 청룡언월도를 휘둘러 훌렁 벗은 둘의 허리를 댕강, 잘라 죽여버리고, 두 연놈의 영혼은 사이좋게 손잡고 지옥으로 떨어졌던 것.

  이거 이 책에도 안 나오고, 민음사 《신곡 지옥편》에도 안 나온다. 《신곡 지옥편》을 감명 깊게 읽은 러시아의 극작가 모데스트 차이콥스키가 쓴 작품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이야기이다. 모데스트는 우리가 아는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 이야기 어디 가서 들어보기 쉽지 않을 걸? 잘난 척하느라 그냥 써본 거다. 나는 잘난 척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지 몰라!

  《신곡 지옥편》 5곡의 프란체스카와 파올로가 어디서 지옥으로 미끄러졌느냐 하면, 지금이야 이탈리아 땅이지만 당시엔 리미니 공국이었던 곳.

  그것 때문에 이렇게 길게 변죽을 울렸느냐? 설마. <페델타>의 지은이 마르코 미시롤리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리미니에서 살다가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 대학에 진학했는데, 작품 속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리미니에 살다가 대학을 거쳐 대학원을 밀라노대학에 다니던 중 자기 지도교수와의 염문이 알려져 중도작파하고 다시 리미니로 돌아가 아버지가 하던 철물점을 물려받아 대를 이어 가업에 종사하는(윽, 스포일러군!) 여성, 소피아가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 페델타. Fedelta 마지막 철자 a 위에 점 하나를 찍어야 하는데 찾기 귀찮으니 그냥 이렇게만 쓰자. 이탈리아 말로 정절. 충성심이란 뜻도 있지만 책에서는 ‘정절’ 또는 ‘혼인의 순결’로 이해하면 되겠다. 근데 작품의 주제는 정절과 정 반대말 ‘배신’이다. 즉 불륜, 혼외정사 같은. 그래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 이야기를 열라 떠들었다.

  카를로 펜테코스테 교수. 부르주아 집안의 1남1녀 중에서 장남. 밀라노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특별하게 뭘 한 게 아니라, 집이 좀 사니까 가능했겠지만, 이것저것 설렁설렁, 카피라이터도 해보고, 여행지 소개문도 써보다가, 아버지 뒷배로 밀라노대학 대학원에서 창작과목 전임교수 비슷하게 하는 중이었다. 자기 반에 작은 얼굴과 잘록한 허리에 어리게 보이는 스물두 살 먹은 소피아가 있었는데 은근히 눈길이 자꾸 소피아한테 가더란 것.

  소피아 말고 다른 신입 여학생이 작품 초장에 하필이면 지저분하게 화장실에서 교수가 소피아 학생을 껴안고 목을 쓰다듬는 것과 비슷하다고 판단할 수준의 장면을 목격해 교실로 돌아와 입을 털었다. 이 일 이후에 펜테코스테 교수와 소피아가 의심스러운 성격의 접촉을 가졌다는 소문에 힘이 실렸다고 쓰여 있으니, 아마도 교수가 소피아를 편애했던 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사실이고말고!) 이 뒷담화가 학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바야흐로 문제가 되었을 때, 펜테코스테 교수는 동료 교수 몇 명과 학장을 데리고 현장에 가 직접 상황을 재연해 주었다. 이렇게: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고, 공동구역으로 나와서 손과 얼굴을 씻은 후에 말리고 있을 때, 여자 화장실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 문이 조금 열려 있어 (라기보다 덜 닫혀 있어) 들여다보니 자기 수업을 듣는 소피아 카사데이가 거의 정신을 잃고 넘어져 있는 거였다. 그래 문을 열어놓은 채 들어가 학생을 향해 몸을 기울인 상태에서 이름을 여러 번 불렀고, 앉았다 일어날 수 있게 도왔으며, 잠시 구석에 기대게 조치했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학생은 진정되어 얼굴을 씻을 수 있게 세면대로 데려갔는데, 상황이 긴박하지는 않았어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신입생이 현장에 있었는지는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럴 수 있겠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이 일 때문에 제일 기분이 언짢은 사람이 누구? 당연히 아내 마르게리타.

  오늘 아침 남편이 늘 복용하는 항히스타민제를 두고 와서 직접 가지고 학교까지 왔다. 구태여 문자나 전화로 알리지는 않았다. 마르게는 몰랐지. 한 10미터 정도 자기 앞을 걷던 여학생이 바로 소피아였던 것을. 소피아가 강의실에 들어가 카를로 펜테코스테 교수한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 부인이 날 따라왔어요.”

  소설은 이 대사로 시작한다. 카를로가 창문 밖을 내다보니 아내가 담벼락에 걸터앉아 네미로프스키를 읽고 있다. 네미로프스키? 소설집 《무도회》를 쓴 작가? 맞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곧바로 도서관에 상호대차 신청해서 네미롭스키의 다른 책 한 권 읽기로 했다.

  근데 이상하지? 마르게는 심지어 아직까지 (나중엔 알게 되지만) 소피아라는 이름만 들었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데 어떻게 따라오겠어? 소피아도 속으로 교수와 모종의 썸이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일종의 염문이 살포된 상황에서 썸을 이어갈 수 없지. 당연하지.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교수는 아예 이 바닥에서 매장될 터인데. 그래서 교수 스스로 현장검증을 신청하기 전에 극비리에 시내 모 카페로 소피아를 불러내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테니 너는 저렇게 자세를 잡아라, 뭐 이 비슷한 시나리오를 짜고 그대로 진행한 거다. 똑부러지는 소피아는 몇 시간에 이르는 사전 미팅을 휴대폰에 전부 증거로 녹취했지만 그건 교수가 알 턱이 없다. 그래 잘 수습이 된 상태에서 교수가 다시 소피아를 만난다? 그건 곤란하고, 소피아도 마찬가지다. 소설가를 꿈꾸는 소피아는 소설도 잘 써지지 않아, 소설이고 뭐고 고향 리미니로 돌아가 아빠 하던 일을 이어서 하기로 결정해버렸다.

  근데 미련이 남잖아? 교수도, 소피아도. 소피아가 기차를 타는 날이 하필이면 교수의 친엄마 생일날이었는데, 핑계를 대고 소피아 집에 들러 마지막 짐을 역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자진해서 해준다. 집에 가서? 그렇다. 그럼 짐만 옮겨주었을까? 에잇, 확 말해버리자. 그렇다 짐만. 시도는 했지만 소피아가 싹 거절해버린다.


  문제가 또 있으니 교수의 아내 마르게리타.

  밀라노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부동산 중개업자. 자기관리에 철저한 비즈니스 우먼. 아직 애도 없다. 몸도 빵빵하다. 몸매를 위해 헬스에 다니는데 석달 전에 트레드밀을 겁나게 열심히 한 뒤 치골에서 무릎으로 이어지는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래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중.

  물리치료를 받으면 꽉 막힌 좁은 치료실에 스물여섯 살 먹은 안드레아라는 건장하고 잘생긴 젊은 남자가, 물리치료를 받기 적절한 반바지와 속옷을 입은 마르게리타를 뉘어 놓고 치골 부근의 근육과 힘줄을 열 손가락 모두 사용하여 꾹꾹 눌러 근육의 결과 밀도, 그리고 탄력까지 모두 짚어본 후에 허벅지 안쪽 근육, 소위 햄스트링이란 곳까지 모두 꼼꼼하게 훑는다.

  30대 중반을 향해 돌진하는 여성의 농익은 몸은 안드레아의 손길이 금지된 곳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를 속으로 바라지만 결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외국 여성이 우리나라 TV에 나와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속담 가운데 하나가 “홧김에 서방질한다.”라고 했던 걸 기억한다. 서양에서는 그런 말이 없단다. 뭐 그런가 보지. 그러나 2년 전 여름에 읽은 모드 방튀라의 <내 남편>에서도 그랬듯이 <페델타>에서도 우리의 마르게리타도 홧김인지, 아니면 아슬아슬한 리비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인지, 자신이 결국 안드레아를 안다리후리기로 자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이게 마르게리타가 딱 한 번 저지르는 불륜. 대단한 것이 안드레아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음에도.


이렇게 마르게리타와 카를로 펜테코스테 부부의 불륜. 불륜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진짜 사랑은 둘 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마구 치고 나가는 그냥 그런 애정 소설. 잘 쓰기는 하지만 별거 없다. 조르조 바사니의 <금테 안경>을 읽을 때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역자 김희정의 우리말 문장도 거칠게 서걱거려 재미를 조금 떨어뜨리…는 거 같다.

  오늘 독후감, 분량이 많지만 리미니 이야기 빼면 그냥 늘 쓰던 대로다. 여기까지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다. 쐬주만 안 마시면 소설도 한 편 쓸 기세라니까, 글쎄.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6-05-17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도 한 편 써주세요!

Falstaff 2026-05-17 21: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안 쓸 겁니다. 남 보여주기 창피해서요.
 
피뢰침
헬렌 디윗 지음, 김지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

  헬렌 디윗은 2000년에 장편소설 가운데 제일 먼저 발표한 <최후의 사무라이>가 제일 유명하다. 이 책이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 가운데 29번째 자리를 철퍼덕 깔고 앉았다. 헬렌 디윗이 비록 외교관의 딸로 유소년기에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에콰도르 같은 라틴 아메리카를 누비며 성장해, 옥스포드 대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을지언정, 졸업 후 소설 <최후의 사무라이>를 쓰는 동안, 부모가 독립한 자식을 지원해주지 않았는지, 디윗 자신이 도움을 바라지 않았는지 하여튼, 1957년생이니까 PhD까지 빠르면 1985~7년 정도에 공부를 마쳤을 터이니, 소설을 완성한 1998년까지 사전에 실린 단어에 딱지 붙이기, 회사 복사 담당, 던킨도너츠 직원, 변호사 사무실 따가리, 세탁 잡부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단다. 위키피디아에 그렇게 써 있다. 던킨 도너츠 파는 박사님. 우리 같으면 생각도 하기 힘들 텐데, 이거 참 뭔가 부럽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하여간 좀 낭비인 건 확실한데 거 생각이 복잡하네. 하여간 끝이 좋았으니 됐지 뭐.

  여차하면 유명세를 타게 해준 <최후의 사무라이>에 이어 1999년에 두번째 장편소설 <피뢰침>을 완성하고 2003년에 출판 계약서에 엄지손가락에 인주 듬뿍 묻혀 지장을 꾹 누른다. 그런데 이게 책이 안 나오는 거라. 결국 좀 복잡한 법적 절차를 거쳐 2011년에야 다른 출판사 인쇄기를 통해 책이 나온다. 그리하여 비록 2011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난 세기에 완성한 작품답게, 작의 무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이다. 작품 속에 테스크탑도 나오지만 1990년대니까 PC와 별도로 워드프로세서라는 문서 작성기도 등장하고, 1분에 몇 글자를 오타 없이 타자하느냐 하는 것이 특히 여직원의 능력 척도 가운데 하나인 장면도 나온다. 좀 후진 동네, 후진 직장이었던 듯하다. 80년대라면 이해가 가는데 말이지.


  우리나라는 아직 십년 정도의 세월이 더 필요했지만 이때 미국의 기업에서 상당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 사업장 내 성희롱 문제였다. 앗, 조금 이따가 이야기하자. 주인공 먼저 등장시켜놓고 보자.

  주인공 조. 막이 올라가면 장소는 미국, 미주리 주의 유레카. 조는 32세, 외판원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판다. 12권짜리와 15권짜리. 미주리에 유레카라는 도시가 정말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쌍한 조는 6개월 동안 한 질은커녕 한 권도 팔지 못한다. 맨 농사 짓는 집만 있는데 누가 책을 보고, 책을 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등장인물이나, 나오는 배경 같은 것이 궁금해 백과사전을 들춰보겠느냐고? 조가 생각해보니 이건 자기 잘못도 아니고, 상품이 후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전하고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만 모인 것이 첫째요, 그들이 배운 게 없는 것이 둘째요, 도무지 호기심이란 걸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다. 다 합해 미주리 유레카 인간들 한테는 안 되는 거다. 그러나 기백이 하늘을 찌르는 조. 그는 생각을 달리해 빛나는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일렉트로눅스사의 전기청소기의 가까운 대리점을 찾는데 그게 하필이면 플로리다에 있다. 어쨌냐고? 거기까지 갔다. 가자마자 트레일러 한 대 임대해서 숙소로 삼고 과감하게 대리점으로 직진, 그날로 취직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얼마전에 플로리다에 허리케인 에드나가 휩쓸고 지나가 거의 모든 집이 홀라당 떠내려갔거나 완전한 침수피해를 입어 모든 가전제품을 싹 교체해야 하는 처지가 됐고, 모르긴 해도 중앙/지방정부에서 보조를 해주었겠지, 집을 수리하는 것과 동시에 전에 썼지만 이젠 못 쓰게 된 전기청소리를 신품 일렉트로눅스 청소기로 썩 개비 해버린 상태였다. 아뿔싸, 조가 한 발 늦었다. 플로리다 주민들은 조가 청소기를 들고 나타나면 일렉트로눅스 전기청소기가 얼마나 튼튼하고 성능도 좋은지 정말 잘 쓰고 있다고, 커피와 차, 호박 와플 같은 걸 대접해주어 호박 와플이라면 이젠 질려버릴 정도였다나? 그래서 청소기 딱 한 대 팔았다. 새로 플로리다로 이사온 집에.


  낙담한 조. 그저 트레일러에 히루종일 박혀 엉뚱한 공상만 한다. 누군지 허리케인 에드나가 물러가자마자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온갖 가전제품을 팔아먹은 전임, 몇 대 전임도 아니고 조 바로 앞에 플로리다를 휩쓸고 지나간 운 좋은 세일즈맨을 부러워하다가, 진짜로 엉뚱한 공상을 시작한다.

  (여기서 정중하고 진실하게 말씀드리는 바, 허리 아래 이야기 싫어하시는 분과 만 19세 미만이신 분은 나중에 다른 말씀하지 마시고 이쯤에서 읽기를 마치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상 시작.

  예를 들어 담벼락이 있다고 치자. 담벼락 위로 어여쁜 여인네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다. 더하여 눈웃음이라니. 보는 거 하나로 눈이 뱅뱅 돌아간다. 그림이 그려지지? 좋다. 그러나 담벼락 아래, 이 금발의 눈부신 아가씨의 블라우스 밑으로는 타이트한 미니 스커트에 손바닥 만한 팬티 한 장만 입고 있다. 때로는 아예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수도 있다. 다 공상하는 놈 마음대로.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가씨 뒤에 털이 숭숭한 웬 쇠도둑놈 같은 사내가 한 명 서 있는데 벌써 아래도리를 훌렁 벗어 큼직한 것을 내놓고 있다가 그나마 미니 스커트를 위로 훅 올리고 앙증맞은 팬티를 아래로 쑥 내려버리거나,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맨궁둥이 사이에다, 흠, 그만하자. 어떤 광경인 줄 아시겠지? 32세의 조, 이런 공상을 하며 열심히 자위라도 하려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두드려 패도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니 이걸 어째? 겨우 서른두 살인데.

  비슷하지만 다른 공상.

  TV 쇼. 흰 벽면에 구멍 세 개가 있고 구멍마다 어여쁜 아가씨가 목과 팔을 내밀어 손짓을 하며 방실방실 웃고 있다. 5미터 앞에는 대여섯 명의 패널이 앉아 아가씨들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얼굴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다. 뭔가를 해보라고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손톱에 메니큐어를 칠해보라는 등. 근데 벽면 뒤에는 적어도 한 명, 어떤 때는 세 명 전부 다 앞에서 했던 공상 속의 쇠도둑놈 같은 털이 북슬북슬한 사내가 서 있어서 마찬가지로 궁둥이 사이로 흠흠. 패널들은 아가씨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나 몸짓의 비정상을 찾아내 어떤 아가씨가 지금 삽입 중인지 맞추는 게임이다. 한 명일 수도 있고, 두 명, 세 명 다일 수 있지만 한 명도 없을 때는 없다. 역시 이런 공상을 하며 자위라도 한 번 해보려는데 도대체 그게 제대로 서야 뭘 하든 할 거 아닌가비여?


  이제 간략하게 이야기하자.

  다시 플로리다 벌판에서 세일즈에 나선 조. 도중에 차를 세우고 오줌을 누다가 팍 떠오른 것이 요즘, 그러니까 1990년대 미국 기업에서 가장 골머리를 썩이는 이슈 가운데 하나인 성희롱, 성추행 문제. 일을 열심히 해서 성과가 좋은 남자 사원들일수록 스트레스가 쌓여 성희롱과 성추행을 하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다. 여직원들이 얼마나 모멸감을 느낄까, 안타깝다, 에서 시작해, 만일 특정 여직원, 대단히 높은 급여를 받는다면, 완벽한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조건으로 누구인지 모를 남자직원에게 딱 거기, 뒤 궁둥이 사이 모종의 장소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제는 그런 여성을 찾는 일이다. 마치 화장실에 가거나, 코를 푸는 것을 당연하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듯이, 리비도가 넘쳐 폭발할 지경의 남자 직원을 한 번 사정하게 해주는 대신 월급을 왕창 받는 동시에 회사 업무도 훌륭하게 수행하는 직원. 이들을 번개를 예방하는 피뢰침이라고 칭한다.

  그래서 조는 인력 회사를 만들어 업무수행 능력이 뛰어나고 자신과 생각을 공유하는 여성들을 뽑아, 고객 회사에 취직을 시켜 업무 시간에 고과우수자들만 대상으로 익명의 피뢰침을 통해 성적 불만족을 해소시켜 궁극적으로 업무 향상을 꾀하는 프로젝트를 이끈다. 반드시 지켜야할 것은 익명성.

  프로그램을 짜서 특정한 고과우수자들 한테 내부 전산망을 통하여 알림이 도착한다. 오늘 피뢰침과의 만남이 있으니 시간을 통보하고 그 시간에 장애인 화장실로 가십시오. 회사에 장애인은 없다. 하지만 법령으로 장애인 화장실은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그러니 밀실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남자 직원이 남자 장애인 화장실에 가서 조금 기다리면 창문 비슷한 크기의 문짝 비슷한 통로가 열리면서 여성의 엉덩이가 뒤로 쑥 밀고 나온다. 그러면 부름을 받고 입장한 남자 직원은 아랫도리를 훌렁 벗고 먼저 콘돔을 완벽하게 착용한 다음, 벽면에 두 손을 의지해 하낫둘, 하낫둘, 그거, 만날 하는/했던 거, 열나 하고 일이 끝나면 세면대에 뒤처리를 한 후 모른 척하고 그냥 나와 다시 열심히 일을 하면 되는 거다. 엉덩이만 내민 피뢰침은 뭐 했게? 대개 잡지를 보던지, 뜨개질을 하던지, 아주 똑똑한 한 명은 이 시간을 쪼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프랑스어로 읽는다. 이 여직원은 피뢰침이 받는 많은 봉급을 모아 훗날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미국 대법관이 된다. 놀랍지? 이이 말고 역시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소송전문변호사가 되어 연수입 백만달러가 넘는 피뢰침도 생기고.


  근데 이게 웃기지가 않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나빠진다. 아무리 풍자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험한 방식으로 말이지. 화장실 벽에 구멍을 뚫고 성기만 노출해 섹스를 한다고? 기XX가 죽음을 맞은 파고다 극장의 화장실이 그렇게 생긴 건 다 아시지? 홀링허스트의 <스파숄트 어페어>든가 어디서 등장하는 동성애자 전용 화장실도 그렇게 생긴 것도. 헬렌 디윗도 133쪽에 이렇게 실토한다.

  “이성애자들이 게이들의 특정한 문화를 파악하고 그걸 베껴 가면서, 정작 그 문화의 가치 있는 요소들은 죄다 놓쳐 버리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헬렌 디윗은 성희롱과 성추행을 해결하기 위한 회사/권력/남성들의 행동을 이런 식으로 비틀었다가 점점 의식을 확장해서 장애인과, 피부색에 따른 인종등에 가하는 모든 차별까지 포함시킨다. 더 웃긴 건 처음엔 피뢰침의 벽 창문 속 엉덩이와 성기 제공으로 배배 틀린 시각으로 시작해, 그런 (분명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일종의 매춘) 행위를 통해 다수의 비 피뢰침 여직원들을 향한 성희롱과 성추행이 근절되었다는 주장을 또 뭐임? 그래서 결국은 누이좋고 매부좋은 미국식 결말로 향하는데, 그것 참. 왜 나는 이게 웃겼을까?

  아주 묘하게 기분 나쁘게 끌고 가다가 또 한 번 묘하게 좋은 게 좋다고 끝맺는 거.


  1999년에 소설 쓰기를 마쳤으니 디윗의 나이 42세. 여전히 디윗은 남자의 섹스를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기 성기를 누군가의 안에 집어넣는 것을 상대방을 지배하는 행위로 여기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중략) 문제는 그들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지배 욕구다.” (p.41~42)

  대부분의 남자가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삽입을 통해 여성을 지배하는 기분을 느낀다고? 뭐 완벽하게 틀린 말은 아니다. 지배욕 충족을 아주 안 느끼지는 않지.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즉 삽입과 사정을 끝낸 후에 내가 이 여자를 지배했다는 느낌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남자에게 위안과 보람을 주는 건 “내가 이 여자를 만족하게 했다.”는 기쁨이다.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기분이 들면 그것 때문에 남자들도 속으로 열폭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나? 몇 안 되는 자칭 전문가들의 말 또는 쓴 글만 읽고 그렇거니, 하지 마라. 언니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오직 파트너가 상심할까봐 아이 좋아, 아이 좋아, 좋은 척해봤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어. 하긴 글 목적 상 그렇게 썼겠지만.


  요새 독후감이 좀 길지? 조만간에 건강검진이 잡혀 있어 며칠 술 안 마셨거든. 술 안 마시면 이런 꼴이 난다. 독후감 길어지고, 책 읽는 양도 못 말리게 많아져서 어떻게 주체하지 못하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메랄드 시티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영어 제목은 모르겠고, 우리말 제목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아 크게 밑진 장편소설이 한 편 있으니 제니퍼 이건의 2010년 작품 <깡패단의 방문>. 아직 안 읽어 보셨으면 얼른 쇼핑하시라. 470쪽짜리가 10퍼센트 깎아서 12,400원이다. 이건 여사가 스물일곱 살 때인 1989년에 쓴 소설집이 오늘 독후감을 쓰는 《에메랄드 시티》. 내 속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욕을 와장창 먹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확 말해버리자. 잘 쓰는, 이라기보다 잘 쓴다고 하는 우리 작가의 소설집을 읽고 곧바로 이 책을 읽은 건 진짜 고의가 아니었는데, 아니다, 됐다. 이제 배짱이 확 쫄아들어 말할 기력 달린다. 그냥 짧게 별점으로 말하자면 똑 같은 별 넷. 어제는 자라나는 새싹한테 별 셋 주기 미안해서, 오늘은 차마 다섯, 만점까지 올리기엔 아주 조금 거시기해서.


  열한 편의 단편소설을 모았다.

  <깡패단의 방문> 독후감에서 얘기했듯이, 제니퍼 이건이 젊었을 때 다른 인간도 아니고 스티브 잡스와 (얼마나 진했는 지는 몰라도) 연애를 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에메랄드 시티》에는 부잣집 남자와 연애 또는 결혼한 여자 이야기가 제법 나온다. 모델을 꿈꾸며 미국 중서부 시골이나 북유럽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사진사, 아니지, 포토그래퍼 혹은 프로듀서한테 잘 보이려 안달이 난 쭉쭉빵빵하고 비쩍 마른 아가씨들도 나오고, 두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는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한테 최고의 복지 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횡령이나 사기를 친 남편/아빠 이야기도 나온다.

  작품의 무대는 미국을 비롯해서 아프리카, 아시아, 스페인, 리비아, 멕시코 등등 대륙을 불문하고, 백만장자부터 노숙인까지 빈부를 망라한다.

  영어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했다고 해도 참 재미있게 잘 읽었다. 물론 미국 작품답게 하나같이 개운한 결말, 적어도 우울하지 않고 폭망도 아닌 상태로 끝을 맺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릿한 맛을 은은하게 전하기도 하니, 제니퍼 이건, 거 참, 잘 쓰네.

  내가 지금 여기서 아무리 변죽을 울려도 확실히 직접 읽는 것에 비하지 못하니, 웬만하면 이 정도에서 독후감 접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권을 후르륵, 삼복에 냉콩국수 들이 마시듯 후르륵 읽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쓰는 단어가 부족해서. 우리 작가들도 이렇게 좀 써 주었으면 좋겠는데….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망고 2026-05-14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니퍼 이건 좋아해요😄 장편소설도들도 참 재밌답니다

Falstaff 2026-05-14 17:56   좋아요 2 | URL
다음에 읽을 이건은 <맨해튼 비치>로 골라놨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