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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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책 읽고 저자를 위키피디아 검색해봤더니 전부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먼저 이야기해둘 것은 자기 살아온 것을 소설로 쓴 작품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왜 그런가 하면 이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딱 이 경우인데, 집안 대대로 의사, 장군, 기업가 등을 지낸 빵빵한 집안에서 아버지 역시 의사, 의사라도 그냥 의사가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연소 주립병원 원장을 지낸 헤르만 마이어호프 박사/교수로, 가족 모두 함부르크와 덴마크 사이에 있는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주에서 가장 큰 헤스터베르크 어린이청소년정신병원 구내의 원장 관사에 살며 하여간 남들 눈에 모자란 것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살면서 자기가 겪은 지난 삶에는 나름대로 다 회한이 있는 법이라 쓸쓸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암만. 자신이 살아온 내력의 쓸쓸함, 애잔함을 내가 무시하는 건 전혀 아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겪은 것이 가장 절실한 법이니까.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이자 화자 ‘나’이며 작가이기도 한 요하임, 애칭 요세 마이어호프의 아빠 헤르만 마이어호프 박사가 병원장으로 취임할 당시 이 어린이청소년정신병원에는 환자 수가 무려 1천5백 명이 넘었는데, 입원 환자 전부 정신병, 즉 조현병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물론 많은 수가 조현병 환자였지만 적지 않은 지독한 수준의 기형, 정신지체 같은 사유로 사실상 버려진 환자들도 또한 있었다고 한다. 즉 요하임 마이어호프보다 더 험한 세월을 사는 최소한 1천5백 편의 장편소설이 병원에 있었다는 얘기. 이 가운데 어느 하나 요하임보다 절절한 내력을 가지고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걸 생각하면 좀 그렇다는 거다. 입원 환자 가운데 누가 이 작품을 읽었으면 아마도 이렇게 한탄하지 않았을까?

  “나 같으면 앓느니 죽겠다!”

  이런 의미에서 노골적으로 자전적인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지 뭐 특별한 건 아니다.


  요하임 마이어호프는 1967년에 중서/남서부에 있는 홈부르크에서 아들 삼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1972년부터 아버지따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헤스터베르크 정신병원의 원장 사택에서 자랐다. 자라도 오래 자랐다. 다 커서 훗날 연극배우가 될 때까지. 형제간 나이 차이는 각 3년. 당연히 다양한 놀이에 두 형들이 한 편을 먹고 어린 요하임은 다분히 따돌렸겠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으면 형들이 위로해주고, 달래주고, 뭐 그랬겠지.

  이대로 계속 쓰다가는 작품의 스토리를 다 실토할 거 같다. 시기를 훌쩍 넘어가자.

  고등학생 시절 미국 와이오밍 주에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가 있었다. 이 시기에 세 형제 가운데 제일 공부 잘하는 작은 형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다. 다시 귀국해 학교를 마친 다음에 요하임은 연극계에 투신해 지금은 독일에서 가장 바쁜 배우, 연출가, 영화 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단다. 

  연극에서 가장 눈부신 활약은 2011년에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6부작 연극으로 만든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를 공연한 일로, 여기저기서 다양한 상도 받았다. 이후 6부작 가운데 (본문 이전의 “일러두기”에 따르면) 2부 <언제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우리말로 번역해 사계절에서 출간했다. 위키피디아에 6부까지 모두 소개한 걸 보면 이 책 말고도 다섯 권이 더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것 한 권이면 충분할 듯하다.

  안타깝게 2017년에 뇌졸중이 발병해 그의 경력사항을 봐도 2017년 이후의 활동은 상 받은 거 하나 말고는 없다. 그때 겨우 쉰 살이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어떻게 하나. 사는 게 다 그런 걸.


  나는 이 책이 자전적 이야기인줄 모르고 읽었다. 알라딘이 내게 말하기를 AI가 나더러 이 책 읽으면 좋다고 권하다 해서 딱 희망도서 신청했다가 거절당해 다른 동네 도서관에 상호대차 서비스 신청해서 읽었다. 제목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라니까 삶과 죽음에 관한 좀 심각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뭐 사실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이라는 건 맞는 말이다. 그래도 첫 문장을 이렇게 써 놓으면 자전적 삶과 죽음, 둘째 형과 키우던 개와 아버지의 죽음은 아닌줄 안 게 당연할 수도 있지 않나?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죽은 이는 연금 수급자였다.”

  사실 이 문장을 과하게 강렬하게 읽는 바람에 다음 문장을 놓친 내 잘못이기는 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사고와 질병, 노환으로 떠나기 오래전의 일이었다. 형과 너무 젊은 아버지, 조부모, 심지어 어린 시절 키우던 개까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기 오래전…”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말하고 싶어하는 또는 공연하고 싶은 죽음은 가족의 죽음인데, 초장에 저 연금수급자의 죽음을 과하게 진지하게 얘기한다. 일부러 그랬을까? 나 같은 독자 헛갈리라고? 게다가 아직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일곱 살 먹은 주인공 ‘나’가 정신병원에 살고 있단다. ‘나’가 작가 자신이며, 진짜로 정신병원 구내에 있는 원장 관사에서 살고 있으며, 거의 매일 밤마다 커다란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이 크고 높은 목소리로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면서 잠에 든다는 걸 전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어린 화자 ‘나’가 정신병원에 살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으니 이거 뭔가 중요한 사연이 있는 거 아니겠느냐는 것이지.

  아니, 이 색다른 구성은 뭐야. 이거 흥미진진한데…

  ‘나’는 엄마가 딱 정해준 큰 길로 등교를 하는 대신 일곱살 생일 일주일 후에 정신병원 시설 담장 밖의 주말농장 쪽에 혹시 다른 길이 있을까 싶어 그쪽으로 들어섰다가 길을 잃고 만다. 조금 헤맨 다음에 드디어 길을 찾았지만 주말농장 철문을 넘어야 한다. 그래서 넘었다. 넘고 보니 늙은 남자를 발견했다. 말쑥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다. 모두 베이지색 옷. 퍽 고상해 보인다. 발과 종아리는 풀밭 위에 놓였고 나머지는 꽃 속에 파묻혔다. 괜히 주말농장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지각이다. 생일선물로 받은 손목시계를 보니 그렇다. (또 잠깐 헛갈림. 정신병원에 사는 아이가 험한 곳에서 생일선물로 손목시계를 받았다는 말이지?) ‘나’는 학교 정문을 통과해 교실까지 달려가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

  그래서 담임선생, 교장선생까지 한 바탕 난리가 났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 하고 물으니까 ‘나’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빠가 의사예요.”

  아직도 이게 실명 자전 소설이라는 걸 모르는 독자는 거 참, 복잡하게 됐다. 다시 생각해봐야겠군.


  이후부터 아버지 헤르만 마이어호프 박사/교수, 어머니 마리아, 큰형 헤르만, 작은형 마르틴, 키우는 대형견 한 마리의 지지고 볶는, 지겹게 지지고 볶는 게 아니라 재미있고 귀엽게 지지고 볶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식탁에서 가족들이 모여 퀴즈 시합을 하거나, TV를 보면서 어린 요하임(요세)는 9시에 올라가 자라고 해서 주둥이가 댓발 나온다거나, 형들이 병원의 입원환자들한테 바보, 미치광이, 병신, 천치, 백치, 멍청이, 머저리, 사이코, 도라이 등등 마음대로 별명을 붙여 부른다거나, 아빠의 마흔번째 생일 선물로 감자요리 마흔개를 하려다가 엄마의 과잉친절에 기분이 상해 다 없애버렸다거나 뭐 이렇게 그냥 좀 있는 집 사는 이야기. 501호나 502호나 비슷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뭐 색다른 것이 있다면 아무래도 장소가 정신병원이니까 환자들과의 교류, 신병동에 주지사가 직접 방문해서 생긴 요절복통, 정말로 열람실에서 키득키득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것이 본문 483쪽 가운데 300쪽 가까이 차지한다. 이중에서 유별나게 특징적인 것은 주인공 요세,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전반성불안장애가 있다는 거. 즉 한 번 열을 독하게 받으면 거의 경련 수준으로 난리를 치는 증세가 있다. 발악 수준의 비명과 난장판, 그리고 경련, 실신까지. 이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작가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쉰 살의 나이에 뇌졸중이 발병한 것도 이런 사유 때문이 아닐까, 라고 위키피디아를 보면서 조금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제일 앞 장chapter에 나오는 대로 “형과 너무 젊은 아버지, 조부모, 심지어 어린 시절 키우던 개” 가운데 조부모 빼고 등장인물의 죽음을 차례로 경험하면서 일곱 살짜리 요세는 스물다섯 살 연극배우 요하임 마이어호프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결말을 맺기가 좀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것이지, 한 소년의 성장기라고 하면 딱이다.

  청소년 문학작품 출간에 전력을 다하는 사계절이 찍었다는 것 때문에 혹시, 했다가 역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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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타이완 여행기 - 2024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 2024 일본번역대상 수상, 2021 타이완 금정상 수상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 마티스블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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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쐉쯔楊双子. 양씨 성을 가진 쌍둥이라는 뜻의 이름. 1984년생 타이완 쌍둥이 여성 맞다. 자매 가운데 언니는 창작에, 동생은 번역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가, 동생이 2015년에 암으로 먼저 갔다. 그러니까 이 책의 작가 양쐉쯔는 언니 쌍둥이 양뤄츠다.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면 타이완 타이중에서 나서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정치적 운동을 하고 뭐 이런 복잡하지만 책을 읽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정보만 좍 쓰여 있다. <1938 타이완 여행기>를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그래도 좀 알고 싶으면, 양솽쯔가 어느 종족인지를 찾아야 하지만 그런 건 찾을 수 없다. 2020년에 타이완의 만다린어로 이 책을 써서 2021년에 상을 받았고, 일본말로 번역 출간해 2024년에 일본에서 최우수 번역상을 받았으며, 영어로 번역한 건 미국에서도 국가도서상을 받았다는 내용만 나온다. 좋겠다. 여기저기서 상 잔뜩 받아.

  타이완에 가장 많은 인구는 한족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에 장제스와 함께 중국의 보물을 잔뜩 싣고 도망한 한족이 한 20퍼센트 되나? 그 전에도 주로 푸젠성 출신 한족이 대거 타이완 섬으로 이주해 처음부터 타이완에서 살던 원주민들을 무지하게 차별하며 섬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원주민의 고달픈 삶은 탕푸루이가 쓴 <바츠먼의 변호사>에 잘 드러난다. 여기에 더해서 1938년이라면 일본이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아 내지內地, 그러니까 일본 섬사람들이 이주해 타이완의 지배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독차지하고 있었을 당시. 소위 내지인들은 조선에서 그러했듯이 타이완 본섬 사람들, 혼도진本島人을 아래로 착 내려봤겠지. 그러면서 말로만 내지인과 혼도진, 그리고 조센징 모두 천황의 자식들이니 어쩌니 떠들어댄 건 안 보고도 비디오 아냐?

  위키피디아에도 나오지 않은 내용을 책을 읽고 짐작하건데 양솽쯔 역시 타이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푸젠성 출신의 한족 집안의 따님일 듯하다.

  그런데 타이완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조금 달리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그렇게 많이 열 받지 않는다. 아 정말이라니까! 타이완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본 사람들보다 더 싫어한다니까! 경제 수준이 우습게도 자기들 한참 아래였다가, 비슷했다가, 우리가 추월했다가, 다시 비슷해지는 것도 기분 나쁘고, 특별히 1991년에 우리나라하고 국교를 끊을 때 되게 기분 나쁜 방식으로 당했다고 여긴 듯하다. 사실 그때 좀 심하긴 했지.

  여기에 타이완 섬이 사실상 수백년 이상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터라, 식민지라고 해봐야 그저 지배계급이 바뀌었다고 여길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고 내 생각이니 믿지 마시라. 하여튼 식민 지배에 관해서 우리만큼 자만심 상해하지 않는 건 정말인 듯하다. 작품 속에 자꾸 타이완 식민지 사람들 이야기를 일제강점기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을 섞는 장면이 나오면 속이 편하지 않다.

  양솽쯔도 일본에 우호적인 것처럼 보인다. 타이완 사람이면서 ‘솽쯔’의 한자어 표기를 대만 표준에 입각해 ‘雙子’ 대신 일본식 약자인 ‘双子’를 쓴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러하다.

  위키피디아 되게 웃겨.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건 나오지 않고, 몰라도 전혀 상관없는 사생활 정보는 쓰여 있다.

  “Yang is married to her wife Lai Ting-ho.”

  양솽쯔가 와이프 팅호와 결혼했다고? 그러면 양이 허즈번드, 남편이야? 아니다. 양도 와이프. 와이프만 둘 있는 결혼방식. 이건 독자가 굳이 알 필요 없잖아? 알건 모르건 상관은 없지만.


  작품의 주인공은 화자 ‘나’, 1938년 5월에 25세인 엄청 키가 큰 일본 소설가 아오야마 치즈코. 여행을 좋아해 사실상 일본이 아니었던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특히 오키나와에서 남국 특유의 정취에 반해 언젠가는 타이완에도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바 있다. 특히 올해가 적기다. 아오야마가 쓴 소설 <청춘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거금의 고료가 들어왔던 거다. 게다가 잡지사 한 군데에서 남양南洋을 배경으로 연재소설을 써주는 조건으로 여행비용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제시한 바 있다. 다만 소설이 일본의 남진南進에 협조하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아오야마 입장에서 일장기를 흔들며 제국을 선양하는 어용 작가가 될 수 없어 이를 싹 거절했다. 그래도 가보고 싶은 치즈코.

  아오야마 치즈코는 165cm로 키가 엄청 크다. 웬만한 남자보다 더 크다. 몸집에 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골격도 만만하지 않아 엄마가 치즈코를 낳다가 세상 떴다. 아빠도 일찌감치 갈 곳으로 갔다. 숙부집에서 살게 됐는데, 기쿠코 숙모가 친딸처럼 키워 정이 돈독하다. 그래서 숙모한테 돈을 좀 한 5백엔 달라고 했다가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여행은 무슨. 스물다섯? 우리 때는 그때까지 시집 못 가면 목 매달아 죽었다 이것아! 숙부가 선 자리 알아보고 있으니 하나 골라라. 사실 혼기를 놓쳐 이제 중매가 와도 중년 홀아비 밖에 안 들어온다. 치즈코는 결혼할 생각이 별로 없다. 그러니 이런 말이 지겨울 수밖에. 9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뭐.

  어린 시절에 트라우마가 좀 있다. 잠깐 작은 절집에서 혼자 등이 꺼지지 않게 지켜야 할 때가 있었다. 한 열흘에 한 번 말라 비틀어진 중이 등에 쓸 기름을 가지고 올 때 음식도 조금 들고 와 그걸 먹으며 다음에 다시 올 때까지 버텨야 했던 기억. 뭔 일이 있었던지 하여간 그렇게 몇 달을 지냈는데, 그때 너무 배를 곯아 절에서 내려올 때 심각한 각기병에 걸린 적이 있다. 이후에 키 큰 아오야마 치즈코는 식탐 많은 먹보 밉상이 되고 말았다. 밉상은 하도 먹을 생각만 해서, 1938년이면 일본은 물론이고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 사람들 모두 굶주릴 때인데, 더군다나 1930년대 중반이라면 세계적인 기근이 휩쓸 당시인데도 그저 먹는 거만 밝힌다는 뜻이다. 책에서는 한 번도 밉상이라고 나오지 않는다. 반대다. 쾌활하고 화통한 장부의 모습이라고만 나온다. 내 눈에 그렇다는 거다.

  그리하여 아오야마 치즈코는 등장할 때부터 일본 찹쌀떡인 모찌를 한 입에 두 개나 쑤셔넣고 우물우물. 아오, 정말 밉상이라니까.


  딱 이때 타이완 총독부 타이중 주청州廳에서 아오야마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영화로 만든 <청춘기>가 1년이 지나 타이중에 개봉됐고, 이를 본 현지의 부인단체 ‘닛산카이’ 여사님들이 감동감화 받은 바 너무 커서 작가를 초청해 타이완 각지를 돌며 순회 강연을 해달라는 거였다. 사례금은 물론이고 뱃삯을 비롯한 모든 교통비, 숙박비, 식비, 기타 비용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거다. 이게 웬 떡이냐 싶은 아오야마가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엄마 같은 숙모가 마련한 맞선은 한 번도 안 보고 그 길로, 1938년 초여름에 규슈 북쪽 끝의 모지항에서 출발, 타이완 북쪽 끝 지룽항에 도착한다.

  지룽항에서 타이베이로 가 일박을 하고, 기차로 타이중으로 향한다. 이때부터 아오야마는 먹는 타령이다. 먹고, 먹고, 먹고, 또 먹는다. 하도 많이, 자주 먹어서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들이민 것이 어린 시절 등불 꺼지지 않게 지키라고 꼬마 여자 아이 혼자 절에 몇 달 동안 틀어박혀 있게 만든 거다. 하여튼 지독하게, 지겹게 먹는 타령이다. 타이중과 부인회 닛산카이에서 준비한 거의 최상급 일본 요리에는 별 관심 없고, 로마에 갔으면 로마 음식 맛을 봐야 하는 것처럼, 타이완에 왔으니 혼도진, 본지 사람들이 먹는 걸 자기도 먹어야겠다는 이미 불이 붙은 신념만 굳세진다.

  여기에 등장한 인물이 왕첸허王千鶴. 이름 첸허千鶴가 아오야마 ‘치즈코’와 우.연.히. 같다. 21세 여성. 아오야마를 위하여 닛산케이 부인회가 고용한 통역사다. 그런데 음식 장만도 하는 식모이기도 하고, 여행 가이드이기도 하고, 비서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또 뭐 있어? 하여간 뭐든 다 하는, 말로만 친구, 사실상 하녀, 이 정도면 하녀 가운데도 몸종 아닌가? 전직 공학교 국어교사. 공학교?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소학교. 혼도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공학교. 따라서 공학교 여선생은 내지인 눈으로 보면 인간도 아니다. 당연히 내지 본토에서 온 아오야마 치즈코 눈에는 자기 자매처럼 친근하지만 식민지 땅에서 사는 일본 여자들한테는 그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짐작하시겠지? 전직 공학교 국어 교사. 국어 교사라면 일본어 교사라는 말. 일본말 잘 하고, 내지인과 다름없을 정도로 잘하고, 타이완 내 각종 언어도 당연히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프랑스어도 소통 가능할 정도. 언어 귀신.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때려 치웠다. 학교 교사도 그만 뒀다. 왜? 결혼 준비. 인텔리 남편감은 일본에서 일하고 있단다. 타이중의 유수한 왕씨 가문 첩실이 낳은 딸. 똑똑하지 않았으면 학교도 보내지 않았을 터. 교사를 할 정도니까 거의 영재 수준이다. 음식도 잘하고, 음식에 관해 많이 안다. 더 이상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안다. 그래 본격적으로 지금부터 타이완 음식 기행이 펼쳐지는데….


  머리 속에서 팍 떠오르는 이름 하나. 일본 작가 무라이 겐사이. 그가 쓴 사부작 <식도락>.

  양솽쯔가 일본에 친숙하니 틀림없이 무라이를 읽었을 터. <식도락>을 보고 타이완에도 일본과 비견할 만한 다양한 음식이 있으니 나도 한 번 써볼까? 더구나 무라이의 음식은 거의 다 서양에서 들어온 것을 일본식으로 다시 만든 것에 불과하니, 타이완의 유구한 세월을 버틴 음식 이야기를 하면 적어도 <식도락>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셈량도 했을 수 있다. 여기에 시대가 다르니까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남진정책과 전쟁 등에 반대하고 양념처럼 페미니즘을 좀 뿌려주면 어떨까?

  이런 생각은 정말 하나도 안 했을까?

  그런데 말입니다, 음악을 문자로 설명하기 쉽지 않듯이, 음식도 문자로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 독자가 알지도 못하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글로만 읽어 감흥이 오겠느냐고? 양솽쯔도 무라이한테 배울 것이 하나는 있었다. 문자로 설득하기 쉽지 않은 것을 짐작했다면, 무라이처럼 삽화라도 그려놓았어야지.

  게다가 양선생의 글 자체가 가볍다. 좋은 말로 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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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즐거움 대산세계문학총서 197
나카가미 겐지 지음, 이정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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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가미 겐지. 1946년에 일본 와카야마 현에 있는 피차별 주거지, 옛날 우리 말로 하자면 향, 소, 부곡 같은 곳, 카스트적 게토를 일컫는 ‘로지’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친부도 다른 지역의 카스트 게토, 부락 출신으로 주로 암시장에서 기생하는 깡패, 폭력배 비슷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나카가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거야 뭐 우리가 알 필요 없지.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아이를 건설업자한테 데려가 양아들로 입적시켰는데, 이 양아버지가 부락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해 벌인 사업이 성공, 덕분에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 괜찮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부락(위키피디아 용어), 즉 로지(부락의 부분 네트워크) 학생을 위해 중등교육 인센티브를 주었는데 이 인센티브를 제대로 활용한 첫번째 로지 아이였다고 한다.

  와카야마 현의 부락에 자신의 이복형제가 많이 살고 있는 조상 대대로 천대를 받던 곳이라 그곳 소년들은 너무 일찍부터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았고, 이어서 외면받을 짓을 골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도 없고, 그래봤자 학생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받을 터이니 기껏해야 글을 읽고 쓰는 수준에 머물렀겠지. 작품을 읽어봐도 열다섯 살 정도가 되면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댐 건설 막일을 하거나 벌목공을 하거나, 도둑질 혹은 지역 깡패로 장사하는 소상공인으로부터 소위 보호비를 뜯어 술과 여성을 사고, 근근이 먹고 산다.


  소설집 《천년의 즐거움》의 ‘천년’은 당연히 정확하게 1,000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카스트적 게토인 피차별 지역 ‘부락’이 생긴 것이 천년 정도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향과 부곡이 삼국시대에, 소가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었다. 향, 소, 부곡이 일본으로 넘어가 부락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알고 있는데, 정확한 기억이 아니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주로 소가죽 무두질과 가죽 신발을 만들어 파는 (우리말로)갖바치, 그리고 고리버들 작업을 하는 (역시 우리말로)고리백정들의 모임으로 시작한 부락은 메이지 유신 당시 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하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메이지 일왕도 몰랐을 것이다. 차별 철폐에 열을 잔뜩 받은 사람들이 생겼다는 걸. 바로 보통의 농민들. 이들이 칼과 낫, 그리고 죽창을 들고 부락에 침입해 중인환시리에 부락 사람들의 배를 꿰어 죽이는 일이 전국에서 벌어질 것은. 부락 사람들은 그리하여 더 깊은 곳을 찾아 움막을 짓고 살게 되었는데, 이렇게 사건을 피해 작은 움막이 모은 골목을 ‘로지’라고 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향, 소, 부곡이 조선시대 초기에 없어졌다지만, 아마도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라진 것으로 추리하는 바, 그럼에도 짐승을 잡고 짐승의 머리와 발, 내장 등 부속물을 얻어 그것을 일반 농민들에게 팔아먹고 사는 백정, 백정에게 가죽을 얻어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나무껍질로 광주리를 만들어 파는 고리백정들은 큰 마을의 변두리 지역에서 옹기종기 움막을 짓고 그들끼리 따로 살았으니 그걸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명희가 쓴 미완성 명작 <혼불>에 잘 나와 있다.


  이 로지에 터줏대감이랄 수 있는 부부가 있으니 레이조와 오류. 작품은 전부 전쟁이 끝난 후인 194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때 부부는 벌써 늙을 만큼 늙은 상태이다. 아마도 메이지 유신 당시 농민들이 저지른 학살을 피해 이 로지로 피해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한 1세대나 2세대의 후손 정도 되는 듯싶다. 남편 레이조가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로 먹고 살았다. 그러다 세 돌까지 키운 아들이 차에 쌀을 넣고 팔팔 끓인 죽粥, 자가유를 머리부터 뒤집어쓰는 바람에 크게 화상을 입고 죽는 모습을 보고, 다음해 교토의 절로 중이 되기 위해 수행을 떠나버렸다. 그래서 스물세살의 오류는 동네의 유일한 산파를 하고 살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로지의 거의 모든 아이를 받았다.

  로지에서는 생식 능력을 잃은 완숙한 여성을 ‘오바’라고 칭했지만, 유일하게 아이를 받는 오류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건만 탄생에 관계하는 일종의 삼신할매 역을 해서 그랬는지 오류에게도 오바의 칭호를 붙여 “오류노 오바”라 부르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쿄토에서 수행을 끝내고 돌아온 남편 레이조는, 로지로 돌아와 게보즈, 정식 중은 아니지만 절과 중이 없는 지역에서 중을 대신해 죽은 자의 명복을 빌고, 제사를 바치는 대리 중 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아내는 거의 모든 로지 사람들의 탄생에 직접 간여하고, 남편은 모든 로지 사람의 죽음에 관여하니, 원래부터 터줏대감 부부의 로지 내 신망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이야기를 주로 오류노 오바를 중심으로 이 로지에서 가장 오랜 가문인 나카모토 집안 출신의 남자들을 기억하는 이야기로 전개한다.

  나카모토 남자들은 원래부터 씨가 좀 남달랐다. 키가 크든지 몸이 단단하다. 피부가 맑다. 로지 출신만 아니라면, 그래서 더 잘 배웠더라면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할 수도 있는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오류노 오바는 생각한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 고귀한 핏줄 속에 또한 더러운 피가 섞여 흐르고 있으니, 여자를 가리지 않고, 악한 일도 가리지 않는 것. 사실은 여자를 가리지 않는 게 아니라, 살면서 주위를 보니까, 꽃이 아름다우면 벌과 나비가 꿰는 법인 것처럼, 벌 나비가 아름다우면 꽃도 꿰는 게 인생살이라서, 여성들이 잘 생긴 나카모토 남자만 보면 눈알이 커지고 콧구멍이 넓어지며 아랫배에서 찌르르르 전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거다. 하다못해 오류노 오바마저 자기가 직접 받은 다쓰오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놈의 전류가 짜릿짜릿하게 흘러 직접 다쓰오를 자빠뜨린 적이 있었다는 거 아니냐. 동정인 줄 알았더니 오류 아줌마가 세번째 여자였다고 해서 김이 좀 빠지긴 했지만.

  고귀한 피와 엉겨 흐르는 더러운 피는, 먹고 사는 일에도 영향을 주어, 폭력과 살인, 도둑질, 주로 히로뽕인데 마약복용까지 망라한다. 오류노 오바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일을 하는 사람 답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이든 기형이든, 아니면 지체장애든, 범죄자가 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아야 좋은 것이고 씨를 더 많이 퍼뜨리는 것이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카모토 집안의 남자들이 이런 일을 하고 다니니 제 명에 죽는 사람이 드물거나 없다. 그래 거의 전부 20대 중반의 나이에 요절을 하는데, 그때마다 오류노 오바는 고귀하고 더러운 피가 스러졌음을 기념하는 것으로 연작 단편들의 결말을 장식한다.


  부락과 로지라는 특수한 장소. 특수한 사람들이 특별한 삶의 모습을 그려낸 작업이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 문제가 있다.

  나카모토 남자들은 성적으로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아무래도 DNA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다. 손끝만 대도 여자들은 곧바로 엑스터시의 황홀경으로 빨려간다. 소설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픽션이고 조금의 과장일 터이니 웬만하면 독자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도 나카가미 겐지의 성애 장면은 과하다. 나카모토 남자들의 방중 광경은, 표현의 노골성은 다음으로 하고 지독한 가학/피학이 넘쳐 변태 포르노의 혐의를 받아 마땅하다. 여성/남성을 끈으로 묶고 애무나 삽입을 하거나, 여성의 전신을 바늘 쌈지로 찔러 온몸에 흐르는 피를 탐하다가, 비록 여성이 그렇게 해달라고 피학적 성애를 원했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 같은 것, 시신을 자신이 어렸을 때 산속 정령을 목격한 소나무 밑에 땅을 파고 유기하며 마치 라틴아메리카의 환상문학 장면과 비슷하게 처리하려는 거, 이건 뭥미?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를 슬쩍 넘어버리고 시침 뚝 떼는 듯해서 눈살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 지고 말았다. 에로틱한 장면, 야한 묘사 좋아하는 나도 그럴 정도이니 점잖은 독자들이야 어땠겠느냐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 문장이 좀 서걱거린다는 거. 역자 이정미는 2022년에 대산문화재단으로부터 외국문학 번역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어 이 책을 번역했다. 이때 같이 선정된 작가들이 엘리자베스 캐스켈의 <메리 바튼>을 번역한 김정연, 그라치아 델레다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번역한 김효정이었다. 이 정도면 믿고 읽을 수 있는 역자라고 생각했건만, 놓친 것이 하나 있다. 이정미의 역서를 보니까 이 책을 포함해 모두 스물세 권인데, 《천년의 즐거움》이 유일한 문학 책이다. 즉 이정미는 《천년의 즐거움》으로 문학 번역 데뷔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는 주식, 스포츠, 자기계발서 등등. 처음 번역하는 텍스트로 만연체의 정수를 보여주는 길고 긴 문장의 작가를 고른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이를 지원대상자로 선정한 인천대 남상욱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라고 했을까? 뭐 그랬을 수도 있고. 나는 번역도 습작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는 독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어순은 비슷하지만 같은 문장 속에 우리말 단어를 어떻게 배치할까, 하는 것을 조금 더 신경썼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자주 들었다. 단어 배치까지 일본어 순서를 따른 것처럼 읽힌다. 내가 뭘 아나, 그렇게 우리말 문장이 서걱거리니까 혹시 그런 거 아닐까 짐작해보는 것이지.

  결론. 과한 베드씬 묘사와 서걱거리는 우리말 문장. 이것들 때문에 나름 독특한, 독특해도 많이 독특한 작품이 좀 바랬다. 그래도 외면할 필요 까지는 없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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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5-0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노골적일 필요가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 과하다 과해!

Falstaff 2026-05-09 15:35   좋아요 0 | URL
뭐 일본이니까요. 아무리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못 따라가는 장르가 그쪽이잖아요.
 
반가운 손님 김지숙 희곡집 3
김지숙 지음 / 연극과인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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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숙이 좀 흔한 이름이라 혹시 헛갈릴 지 모른다. <장수상회>, <바냐 아저씨>, <졸업>을 공연한 유명 연극, 영화배우 1956년생 김지숙이 아니다. 아마 올해 나이 쉰여섯일 듯한 부산 출신 연극배우였던 이다. 단편영화를 하다가 마흔의 나이에 다시 부산으로 귀향해 연극 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것도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다. 딱 하나, 부산에 터를 잡고 가장 활발하게 연극판을 꾸리고 있단다. 원래 시, 소설 같은 것도 습작을 해, 부산 극작가 김문홍 문하에서 극작을 배우면서도 그렇게 어렵지 않게 희곡을 쓸 수 있었다고.

  《반가운 손님》이 이이의 세번째 희곡집이다. 모두 다섯 편의 희곡을 실었다. 제일 앞에 “작가의 글”을 놓았다. 작가는 말한다.

  “이 책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이걸 읽자마자 곧장 책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책을 읽으면 얼마나 더 읽는다고 아팠던 기억을 일컫는 문학적 ‘상처’를 파헤치겠는가 싶어서.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아픈 것도 싫고, 상처도 싫다. 거대한 비극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도 별로 기껍지 않다. 뒷방으로 찌그러졌으면 그저 세상 모른 척하며 조용히, 도서관에나 출근하면서 잔잔하게 숨쉬다가 그냥 그렇게 저물고 싶다. 


  실린 작품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매미가 운다> ㅆㄴㄹ 드라마

  <구워 먹을까요?> 그로테스크 살인극

  <반가운 손님> ㅆㄴㄹ 드라마

  <변신(變身), 변심(變心)> 카프카 클리셰

  <후두둑, 빗소리> 그로테스크한 상처, 어쩌면 ㅆㄴㄹ


  아마추어 독자에 불과한 내 기호에 의해 말하자면, 즉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관계없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읽은 감상을 소개하면, 정말 안 맞는다.

  표제 작품이며 소극장 이상의 무대를 전제로 쓴 것이 아마도 확실한 <반가운 손님>만 이야기해보자.


  1944년에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사치코. 화장을 해 분골을, 일본인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유골함에 담아 집에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후 80년의 세월이 지난 202X년 현재, 해방전에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달동네 산복마을의 노인 영숙의 집에 어쩐지 이 사치코의 하얀 유골함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일곱 살에서 한 살도 더 먹지 않은 어린 사치코가 연극의 첫 대사를 한다.

  “집 앞에 별이 한가득이다.”

  달동네 산복마을. 하도 산비탈이라 영숙네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항구에 정박했거나 예인을 기다리는 선박들의 불빛이 마치 별들처럼 빼곡하게 깜박거린다. 맞다. 사치코, 얘가 귀신이다. 그러니 첫 대사부터 ㅆㄴㄹ,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산복마을도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 황폐화하기 시작한 곳. 거주민들은 거의 영숙처럼 늙은이들이거나 싼 맛에 잠깐 머리 뉠 곳을 찾는 떠돌이 젊은이들뿐. 지금 산복마을에 관광객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같은 것들로 빈집을 개조하거나 비슷하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일본인의 투자를 유치하려 해쓰고 있다. 그래서 등장하는 사람이 담당 공무원인 주무관과 일본인 투자자 히로시.

  히로시는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할아버지가 식민지 조선에 와서 토지 사업을 벌여 성공을 했다. 아버지 소년 시절에 아주 귀여워했던 동생, 그러니까 히로시한테는 고모뻘인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그만 일찍 죽어버렸다. 고모 죽은 다음 해에 일본이 패전을 해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채 귀국하게 됐다. 이때 아버지는 동생의 유골을 이 산복마을 어딘가에 두고 갔던 모양이다. 이후 일본에서 사업을 벌여 성공을 했으나 결국 동생의 유골을 찾지 못했고, 죽어가면서 자기 아들 히로시한테 동생의 유골을 찾아 자기 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해버렸다. 이런 몹쓸 늙은이같으니라고. 자기가 못했으면 말아야지 애먼 아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래서 히로시가 아빠 죽어 장사 지내자마자 부산으로 날아와 옛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산복마을까지 기어올라와서 80년 전에 죽은 자기 고모의 유골을 찾으러 왔으니, 그 정성을 봐서라도 찾아주기는 해야겠지? 근데 등장인물이 바라는 걸 다 들어주면 현대 연극이 좀 덜 된 것 같기도 하고.

  독자는 딱 안다. 어려서 죽은 히로시의 고모가 사치코인 것을.

  사치코 귀신은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영숙이나 기춘처럼 곧 죽을 늙은 사람들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다. 딱 한 명 등장하는 젊은 바리스타, 근데 웬 바리스타? 좀 난데없는 직업이기는 한데 뭐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하여간 한 방에 거금을 벌어 곧 늘 바라던 대로 산복마을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남게 되는 철우도 사치코 귀신이 눈에 보인다.

  그저 그렇다. 모두 좋은 게 좋은 결말. 에필로그로 가면 귀신이 하나 더 늘어 둘이 된다. 누군지는 아시겠지? 강릉에서 왔지만 50년 동안 산복마을에서 살았으니 결국 부산 산복마을 토박이 귀신이 되는 영숙. 그리하여 마지막 씬은 감동이 이렇게 몸부림친다.

  “어둠 속에서 영숙(귀신)의 눈물 한 방울이 반짝인다.”


  다시 말씀드리는 바이오니,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내 취향에 입각해 마구잡이로 쓴 독후감에 불과하다. 극작가 김지숙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쓴 것이니 절대 믿지 마시라. 그로테스크한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즐겁게 읽을 수 있고, 관람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라는 것이 세평이다. 이런 독후감밖에 남기지 못해 극작가에게 미안한 바도 크다. 김지숙은 앞서 이야기한 “작가의 말”을 이렇게 끝낸다.

  “저 역시 희곡을 쓰며 묵묵히 정진해 나아가겠습니다.”

  나도 김지숙의 건필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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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램프 - 2025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바누 무슈타크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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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부커 인터내셔널을 받은 책. 대개 “수상작”이라 하지 “상 받은 책”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데, 굳이 이렇게 말하는 건, 이 책이 부커 인터내셔널이 선정한 최초의 소설집, 즉 단편소설을 엮은 책이기 때문이다.

  1948년에 인도 남부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인텔리 여성. 지금 78세니까 이이가 젊었을 당시에 대개의 인도 또는 무슬림 여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즉각 결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라고 《하트 램프》에 여러 번 나온다. 간혹 결혼 대신 대학에 입학시키는 가정도 있었는데, 이 책의 작가 바뉴 무슈타크의 집안이 그러했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행간에 무슈타크라고 대학 진학을 쉽게 한 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집안 내에서 나름대로 다툼을 겪었으리라.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 라디오 방송국을 거쳐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1970년대 후반 인도 남서부 지역에서 시작한 저항문학 운동 ‘반다야 사히티야’에 참여했다. 반다야 사히티야는 인도의 하급 카스트, 여성, 노동 계급의 삶을 문학으로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무슈타크가 비교적 부유하고 진보적인 가정 출신이라 하지만 남아시아의 무슬림 커뮤니티 안에서 여성으로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을 터, 평소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판이 제대로 깔린 것이었으리라.

  48년생 작가는 당시 관습으로 보면 거의 할머니가 될 나이인 26세에 자유 연애를 통해 결혼을 했다. 스물여덟 살에 아이를 낳고 지독한 산후우울증에 걸린 다음에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단편소설집 여섯 권, 장편소설 한 편, 시집 한 권, 에세이 한 권을 냈다. 인도는 땅도 넓고 사람도 많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다양한데, 무슈타크는 작품을 칸나다 어로 써서 인도의 여러 지역 언어, 우르두어, 힌디어, 타밀어, 말라얄람어 등으로 알려졌다.

  2020년대 들어와 무슈타크의 새까만 고향 후배 디파 바스티Deepa Bhasthi가 근 반세기에 걸친 무슈타크의 단편소설집 여섯 권 가운데 마음에 드는 작품 열두 편을 골라 영어로 번역했고, 이것이 저 먼 잉글랜드의 책가게까지 알려져 2025년에 부커-인터내셔널을 먹게 된 거다.


  이 책이 다분히 페미니즘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무슈타크가 처음부터 페미니즘에 입각해 작품을 썼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내가 읽기로 바누 무슈타크는 여성 소설가로서 같은 세대를 사는 여성들의 여러 모습을 소설로 그려냈다. 시간이 지나 다음 세대의 독자가 읽으니 사회와 종교, 문화가 여성을 어떻게 억압했는지가 드러나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게 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작품들을 읽어보면 아마도 1970~80년대 남 인도, 그리고 무슬림 커뮤니티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독자마저 갑갑한 느낌이 든다. 정말 그런 촉감으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목을 콱 조르는 듯한 압박감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한 순간의 빛도 발견하지 못하는 질식 상태.

  그러나 이런 것들만 들어 있지는 않다. 앞에서 말했듯 무슈타크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한 시절을 집중한 작품을 모은 것이 아니라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쓴 것 가운데 수작이라고 판정한 것들을 골라 실었으니. 그러니 여성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스토리가 다양하고 모두 나름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노작가의 평생 작업 가운데 좋은 것들만 골라 실은 소설집에 세계 유수의 상을 주는 건 반칙 아냐? 예를 들어, 아직 박완서 선생이 생존해 있다면, 그이의 작품 중 빼어난 것들만 골라 번역해 책을 만들면, 솔직히 우리끼리 얘긴데, 《하트 램프》는 게임도 안 될 거 같은데 말씀이지. 그렇다고 《하트 램프》가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재미도 있고 앞에서 말했듯이 수작秀作이지만 아무래도 시대적, 문화적, 지역적, 종교적 거리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읽어보시라 추천하기는 애매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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