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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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나는 ‘장석남’을 1955년에 충청도 논산에서 난 ‘장석주’로 잘못 알고 시집을 골랐다. 그랬더니 1965년 인천 덕적도에서 나서, 서울예대와 인하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하고 지금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를 하고 있는 장석남이었던 거다. 거 참 이름은 한끗 차이건만. 근데 좀 웃기네. 지금 뒤져보니 내가 이이인 줄 알았던 장석주는 약관 스무살 때 등단했구먼. 그러면 시인 노릇을 51년 했네?

  장석남은 스물두 살에 신춘문예를 통과한 시 재주꾼으로, 서울예대 다닐 때부터 알아주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뭐 아나? 이번 시집이 처음 읽는 장석남일 정도인데. 해설을 쓴 평론가 신형철과 동문수학한 거 같다. 그가 해설 초입에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다. 신형절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당시의 내게는 장석남의 문장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한 발명품의 하나로 보였다.”

  장석남은 떡잎 시절부터 돋보이는 자질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 여러 분야에 있지? 탁월한 한 명. 2등이 아무리 기를 쓰고 쫓아가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는 인간. 그래서 좀 재수없기는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그림도, 음악도, 농사, 분재, 화훼, 정원, 요리, 기계조립, 설계, 조명, 수리, 하다못해 내가 해보니 설거지도 그렇더라. 문제는 한 학교, 한 과에서 한 명이 있는데, 그 인간들을 다 모아 놓으면 그 속에서 또 특별한 한 명이 등장한다는 것이지. 뭐 사는 게 다 그래.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시집에서 시 자체에 대한 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다. 장석남도 마찬가지다. 그것부터 읽어보자. 이 시인이 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불멸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전문. p.11)



  그러니까 장석남은 시인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시를 쓰겠다는 선언이다. 요즘엔 죽으면 거의 예외 없이 화장을 하지만 자신은 죽은 다음에 찬 땅에 몸을 뉘는 한이 있어도 꼭 묘비를 세우겠는데, 이때 비문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겠다는 거지. 자못 비장하다. 비장은 갈수록 도를 더한다. 사나운 눈보라조차 비문 읽느라 지쳐 비스듬해지게 만들겠다니. 사나운 눈보라? 세세년년 끊임없이 몰려올 매운 평론가, 독자의 시선으로 읽어도 괜찮을까? 뭐 괜찮으면 말고.

  요즘 사람들 한자어 안 배워서 헛갈릴 지 몰라 한 수 훈수를 두자면 다섯번째 행에 나오는 행장行狀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이라고 나온다. 흔히 행장行裝, “여행할 때 쓰는 물건과 차림”으로 잘못 읽을까봐 알려드린다. 죽어 없어지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라서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시에서 ‘행장’은 1행의 “비문”과 같은 의미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유적지 가서 비석 뒷면을 보면 작은 글자로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듯이, 자기도 자기 행장을 비문에 적어 두겠다는데 이이의 직업이 시인이니 당연히 시를 그렇게 쓰겠다는 거겠지. 그렇게 가장 단단한 돌에 새겨 내가 나를 기린단다. 거 참. 이 시집이 2017년에 냈으니 쉰두 살 때인데, 그렇게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을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지 별 수 있간디?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노래하는 삶의 기록이니, 너희는 이 시집을 읽음으로 나를 기념하라. 아멘.


  아, 근데, 지금 이이의 시 작품이 별 볼일 없다는 말을 하는 거 아니다. 그냥 포부가 커서 좀 웃겼다는 것일 뿐. 돌을 쪼아서 쓴 시는 죽어도 안 지워지는 거 알지? 아무쪼록 잘 쓰다 가기 바란다.

  평론가이자 동문수학한 것처럼 보이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아니, 내가) 생각하는 산뜻한 시가 있다. 읽어보자.



  소나기 오는 날



  날이 뜨겁던 이유를 서로 풀어놓으니

  스물 안팎 친구에게 그런 이유란 없다 하고

  노인은 비가 오려 그랬다 하네


  나비는 꽃을 부지런히 순회하던가?

  꽃은 나비를 야단쳐서 보내던가?


  비는 여러가지 얘기를 한꺼번에 쏟다가

  아무 귀담아들을 얘기는 없다고

  웃고는 가네


  뉘우침 후처럼

  맑고 서늘한 길가 바위

  놓여 있네   (전문. p.22)



  이 시의 결은 또 <불멸>하고 전혀 다르다. 뜨거운 스물의 청춘은 비가 오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뜨거운 스물의 청춘을 보내 본 노인이 말한다. 결국 한 번 씩, 웃고 갈 소낙비가. 그러고 나서야 맑고 서늘한 시절이 놓여 있겠네. 그제서야 이제 정으로 쪼아 시 또는 비문을 쓸 길가의 바위가 놓여 있구나. 근데 살아보면 그게 그리 가까이 있지는 않을 걸?

  이 시가 시집의 22쪽 왼쪽에 실려 있고, 오른편 23쪽엔 이런 시가 올라와 있다.



  꽃집에서



  나는 꽃이 되어서 꽃집으로 들어가 꽃들 속에 섞여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오가는 사람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빛이 되어서 어둠으로 들어가 어둠속에 숨어서 오가는 숨결들을 비추고 오가는 숨결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노래가 되어서 빛나는 입술로 들어가 가슴에 잠겨서 피어나는 꿈들을 적시다가 오가는 꿈들로 시들어, 시들어


  꽃집이여

  꽃집이여

  혀와 입술을 파는 집이여

  마른 혀와 마른 입술을 파는 집이여

  나의 육체를 사다오

  나의 육체를 팔아다오   (전문. p.23)



  1연과 2연은 참 괜찮은 대구. 대구? 대가리 큰 생선? 경상북도 도청 소재지였다가 지금은 직할시가 된 도시? 그거 말고 댓구. ‘댓구’라고 쓰니까 잘못된 글자라고 글씨 밑에 붉은 줄이 우글쭈글하게 그어진다. 그래서 ‘대구對句’라고 쓰니 괜찮네.

  이런 대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할 것도 없이 저 당나라의 이백이 대빵이다. 근데 이 시의 대구도 괜찮은 정도를 살짝 넘어 삼삼하다. 3연은 여기에 붙인 시인의 수작. 수작? 수작질? 뭐 나쁜 뜻으로 굳이 읽겠다면 그것도 맞지만 나는 전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수작手作이라 한 거다. 수작? 시인이 시 쓰는 수작 말고 뭘 해야 좋겠어? 그러니 이 시의 ‘꽃집’은, 시인이 꽃집에 한 번 가서 숱한 꽃을 보고 지었을 수 있지만서도 꽃에 이어 빛과 노래, 즉 시가 나오는 걸로 보아 사람 사는 판 가운데 그래도 좀 사람처럼 보이는 터를 연상하는 것 같다. 이 가운데 핵심은 결국 노래. 빛과 어둠 속에서도 오가는 건 그저 숨결, 노래할 수 있는 숨결이다. 시들어, 시들어 은근한 비장?

  시인이 시에 관해 노래하는 걸 뭐라 할 수 없다. 시가 쉽게 써지는 게 아니라서. 독자인 나도 그런데, 하물며 시를 쓰는 시인한테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하고 나무 상자 속에 누워야 하는 것이, 도대체 시가 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섯켤레의 양말> 3연에 재미있는 게 있다.


  그러나 오, 다섯켤레의 혀들

  나는 내 혀가 지은 죄 때문에 내 혀를 끊을 용기는 없었다

  내 혀는 나를 말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혀는 자주 나의 것이 아닌 것

  내 손이 써나가는 문장을 차라리 내 혀라 말하고 싶지만

  세상은 혀끝에서만 머문다   (<다섯켤레의 양말> 3연. p.44)


  그래, 시인이라고 다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지. 저 앞에 소개한 시 <불멸>에서는 대차게 자기 묘비문을 쓰는 마음으로, 돌을 쪼아 시를 쓰겠다고 하더니, 여기 와서는 자기가 시를 쓰기는 했지만 그게 허위, 거짓이었다는, 늘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거짓 시를 쓰기도 했다는 고백이잖아. 뭐 그럴 수 있지. 차라리 이렇게 고백을 해버리는 게 시인이나 독자의 정신건강에 더 좋을 지도 모르지.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좌우간, 아이고, 이 ‘좌우간’ 써 놓고 보니까 또 정여사, 그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생각나네. 정여사 살아생전 좌우간, 좌우지간, 코미디언은 TV 나와서 웃기려고 간혹 ‘좌우당간’ 이라고 했던 말이 나오면 키득키득 웃고는 하셨지. 좌우의 사이 좌우간左右間,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 뭐가 있느냐는 말씀이셨다. 뭐가 있다고 꼭 말씀을 드릴까? 그거, 놀이동산.

  덕분에 시집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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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시선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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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부터 2017년 봄까지 쓴 작품을 모은 소설집. 작년 초여름에도 이이의 소설집을 읽었다. 문학과지성 소설명작선 시리즈로 나온 《완전한 영혼》. 그때는 민주화투쟁 당시 공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유구한 전통, 고문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작품들이 눈을 끌었다. 이번엔 그 이후, 1986년에 소위 “가투”를 벌이다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여 분신 자살한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진호 사건, 2009년 용산참사에 이어 드디어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 모두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책을 쓸 당시에도 동아일보 기자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이로 봐서 그럴 것 같지는 않아도, 우리나라 현대사의 장면 곳곳에 일반인들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자세한 정보에 근접할 수 있었을 터이다.


  김세진, 이진호의 분신과 용산참사를 동시에 이야기한 것이 표제 작품인 <새의 시선>이다. 새의 시선? 그렇다. 화자가 만일 새라면, 새가 되어 새의 눈으로 본 것을 이야기한다는 뜻. 굳이 검색해 찾아내 소개하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비롯해서 고흐가 동료화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은 언덕 위에서 새가 바라보는 눈으로 풍경화를 그린다고 했단다. 정찬은 이 새의 이미지를 <새의 시선> 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 숱하게 새 이야기를 한다. 하나 더 있는데 고래의 눈. 순하고 빛이 닫지 않는 심해 깊이 잠수하는 고래의 눈. 70년을 사는 향유고래가 새끼 한 마리 한테 10년 동안이나 젖을 먹인다는 이야기.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향유고래가 어떻게 젖을 먹이는 줄 아나? 젖꼭지에 입을 대고 육지 동물처럼 쪽쪽 빨아먹을까? 아니다. 고래의 젖은 모든 포유류의 젖 가운데 제일 진한 농도를 가지고 있어서 새끼가 유공乳空 아래 부분에서 입을 벌리고 있으면 어미가 젖을 바다로 쏘아 보낸다. 그럼 짙은 농도의 고래 젖이 바다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물론 쏘아 보낸 젖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분량이 새끼의 입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특별한 모성 본능을 지닌 고래의 눈도 정찬의 관심 안에 있어서, 새와 더불어 고래의 이미지를 소설집에서 자주 발견한다. 내 경우엔, 또 새, 고래야? 볼멘 소리를 하고 싶었을 정도로. 아, 향유고래 젖 먹이는 것도 이 소설집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냥 농도가 짙다는 정도로.


  새. 새가 연상시키는 것은? 노래, 자유, 희망, 평화, 홍수의 진정(노아가 보낸 비둘기), 그리고 사후세계의 매개금禽. 사후세계까지? 그렇다. 저 몽골과 티베트 지역에서의 장례 관습인 조장을 생각해보라. 조장은 티베트에서 ‘천장’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이번에 처음 들었다. 소설도 읽으면 많이 배운다니까) 죽은 사람을 새가 먹을 수 있는 크기로 토막내는 사람을 ‘천장사 天葬士’라고 한다면, 천장사는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상당한 수준의 도를 닦은 큰 법사가 맡는단다. 이이의 칼질에 따라 망자가 새의 몸이 되어 훨훨 날아갈 수 있으니.

  고래의 길고 긴 여행은 티베트 사람들의 카일라스 순례에 비교할 수 있다. 산 하나에 오르지 않고 산 둘레를 따라 오체투지를 하며 고행하는 사람들. 52킬로미터. 보통 사람들이 그냥 걷는다면 꼬박 3일이 걸리고, 만일 오체투지를 하며 걸으면 한 달 남짓이 필요하다는 길. 그걸 한 바퀴 돌면 자기 죄의 하나가 지워진다고.

  이러니 새나 고래나 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이번에 정찬은 소설집 속 일곱 작품에서 모두, 한 작품도 빼지 않고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책을 펼 때부터 덮을 때까지 독자는 한 순간도 어긋남 없이 우울해진다. 이 책을 돈 주고 안 사서 다행이지, 정찬의 글이 좋다고 덥석 사서 읽었더라면 책값이 겁나게 아까웠을 법하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역시 정찬의 글이 좋네, 마네 가비야운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아시다시피 내가 우울한 거 싫어해서 그렇다. 그래도 글이 좋아 별점은 셋 반.


  첫 작품 <양의 냄새>의 화자는 종합병원의 심리학 박사. 병원의 협조 요청에 따라 카지노가 딸린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 무료(또는 무료 비슷하게) 장기 숙박하면서 카지노에 모인 도박꾼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다. 도박장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저번에도 말했듯이, 만일 인생을 도박의 반 만이라도 집중해서 산다면 실패하는 인간은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현대인은 살면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자의 그리고 타의에 의하여 훈련받으며 성장하는데, 속여야 하는 상대방이 있는 포커 게임 같은 것 말고, 카지노나 주사위 같은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고, 표정 역시 마찬가지.

  화자가 카지노를 둘러보다가 이상한 사람을 발견한다. 흥분도, 기대도, 절망도 아니고 슬픈 표정을 한 20대 후반의 잘 생긴 사나이. 에니스. 그는 자신의 칩 열세 개를 몽땅 홀수에 배팅해 스물여섯 개가 되었다. 스물여섯 개에서 하나를 빼고 스물다섯 개를 또 홀수에 걸어 쉰 개가 되고, 또 홀수에 걸어 아흔여덟 개가 되더니, 손에 잡고 만지작거리던 칩 두 개를 뺀 아흔여섯 개의 칩을 몽땅 숫자 8에 걸더니 화르륵, 한 순간에 날려버린다.

  그의 표정이 인상깊어 함께 바로 향해 맥주를 병째 마시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가 말한다.

  “칩이 작은 물고기처럼 따뜻하더군요. 전 이 물고기를 룰렛 테이블에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놓고 싶은 곳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적시는 강물입니다. 어느 해 여름 그와 함께 지냈던,”

  나는 즉각 애니 프로가 쓴 기막힌 책 《브로크백 마운틴》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정찬은 어쩌자고 이미 알려진 작품 속 등장인물을 출연시켰을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까? 궁금해졌다. 리얼리스트가 포스트모던 작품을 쓰겠다고 나선 셈이라서. 궁금했겠지? 말 하면 뭐해.

  아니다. 정찬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기사 윌리엄>에서 윌리엄으로 나왔고, <브로크백 마운틴> 그리고 <다크 나이트>의 주인공을 연기한 영화배우 히스 레저를 자기 작품 속으로 불러왔던 거였다. 영화를 할 때마다 작중 자신이 맡은 배역에 완전히 몰두한 배우. 그리하여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주인공의 이미지에서 도무지 벗어나기 힘들어하던 배우.

  조커 이야기가 나온 순간, <양의 냄새>는 결국 히스 레저의 죽음으로 끝장을 보겠구나,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화자 ‘나’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룰렛에서 히스 레저를 만난 날짜가 2008년 1월 20일 저녁이었으니 그의 실제 죽음을 겨우 이틀 남긴 날이었다.


  죽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연달아 죽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은 별로 읽고 싶지도 않고, 다른 이한테 읽어보라 권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기자 출신 글 좋은 작가가 썼으며, 취향이란 것이 진짜 다양한 거니까 마음이 동하시면 굳이 멀리할 이유가 없다.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 자기가 쓰는 소설 속 등장인물에 몰두하는 작가. 그리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 속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는 화가 또는 사진가. 이런 사람들도 등장한다. 물론 비극적이다. 화가 가운데 클로드라는 이름도 있다. 누구냐 하면, 당신도 아는 제르베즈 아줌마의 첫째 아들. 자기가 그린 대작 앞에서 대롱대롱 혀를 빼물고 자살해버린 인간 말이지.

  그거 말고도 병에 걸려 죽고, 자동차 사고로 죽고, 42층 건물에서 스스로 자유낙하해서 죽고, 배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다가 한꺼번에 침몰해 죽고, 동네 철거에 항의하다 불에 타 죽고, 마약은 아니지만 약물 과다 복용으로 히스 레저도 죽고, 죽고, 죽고, 또 죽는다.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그래서 이제 남은 사람의 슬픔은 어쩌라고. 나는 죽는 것보다 이 남은 사람의 비극을 더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책 더 안 읽고 싶은데, 그게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이것 참.

  엊그제, 또래 가운데 제일 어린 조카딸이 차사고로 죽었다. 이름을 내가 지어주었는데. 마음 아프다. 결혼 2년 반. 아이는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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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브루클린
제임스 맥브라이드 저자, 민지현 역자 / 미래지향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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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맥브라이드. 1957년생 작가, 작곡가 겸 색소폰 연주자. 흑인(유색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유대인. 아빠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고, 엄마가 유대계 폴란드 이민의 따님. 맥브라이가 쓴 <하늘과 땅 식료품점>이 뉴욕 타임스가 뽑은 21세기의 1/4세기, 그러니까 2001년부터 2025년까지 대표작(책) 100권으로 뽑는 바람에 이름도 처음 들은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하늘 땅…>이 뭐 그리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서가에서 이이의 이름이 눈에 띄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오른팔을 뻗었다. 웃겼어. 책이 500페이지. 이렇게 딱 떨어지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 참.

  독후감 시작하기 전에 미리 김을 좀 빼야겠다.


  매우 재미있다. 뉴욕 브루클린 유색인 지구 커즈웨이 빈민주택 단지. 파이브엔즈 교회가 있고 잡초만 넘실거리는 공휴지 건너 이탈리아 패밀리의 일원인 엘레판테 가족의 컨테이너 사무실. 그 너머 자유의 여신이 보이는 동네. 때는 1969년. 바야흐로 전통적인 이탈리아 마피아에 의한 밀수, 도박, 건축하청 같은 종목은 시대 저편으로 흘러가고 빈 자리를 급속하게 헤로인 같은 마약이 잠식하고 있던 시기. 약의 공급은 여전히 백인이 차지하고 유색인은 기껏해야 딜러밖에 하지 못하던 시절. 약이 비싸지는 않지만 그것도 살 돈이 없어 돈을 구하기 위하여 아무 한테나 폭력을 동반한 강도행위를 하기 시작했던 시기. 탁 보면 대단히 우울한 풍경이 그러지는데, 천만의 말씀, 이미 <하늘 땅…>에서 경험했다시피 작가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될 수 있는 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내 작품에 유머와 말장난을 섞어야 한다는 강박에 싸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쨌느냐 하면, 소설을 읽는다기 보다 차라리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하니까 책의 분량이 적지 않음에도 제한속도를 훌쩍 넘어 팍팍 읽힌다. 쉴 새 없이 키득거리면서. 정말 웃긴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읽기 민망할 수준이다. 등장인물 역시 마약과 마약 조직에 의한 폭력에 시달리고, 커즈웨이 공동체 흑인들도 하이틴 시기만 되면 각종 범죄로 인해 교도소를 들락날락 하는 걸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곳임에도 이들은 한결같이 서로를 보호하고, 밝고, 사소한 다툼 속에서 질투 날만큼 질긴 애정으로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게 다 작가의 현란한 입심 때문에 그렇게 읽히는 건데, 내가 살아보니까 인정이란 것도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라 당장 내 배가 고픈데 과연 이 유색인들처럼 살 수 있을까, 이걸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즉, 맥브라이드가 과하게 대중 코드로 작품을 쓴 거 같다는 말이다. 그게 오히려 작품을 실감나지 않게 한다. 뭐든지 너무 과하면 안 좋은 건데, 이 작품이 딱 그렇다. 물론 내 허접한 수준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다.


  너무 김을 뺐나? 말이 그렇지 무지 재미있다. 1/4세기 동안 1백대 작품이라는 <하늘 땅…>보다 더 재미있으니 읽기를 머뭇거리지 마시라.

  오래 전, 전쟁이 끝난 후인 1940년대. 커즈웨이 주택단지는 원래 이탈리아에서 하역일을 하려고 몰려든 이민자들을 위하여 지은 거였다. 이탈리아 사람들 말고도 아일랜드, 폴란드,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사람들도 빼곡하게 들어왔다가 어느새 이런 힘을 쓰는 일은 남쪽에서 소작을 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치고 올라온 유색인종들이 대신하기 시작했고, 일종의 터줏대감이라고 생각했던 이탈리아 이민자들도 커즈웨이에서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때도 커즈에 인접한 부두는 귀도 엘레판테가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근데 아뿔싸, 이 귀도는 뇌졸중 후유증에 시달렸다. 범죄에 연루된 건 맞지만 남의 범죄사실까지 덮어쓰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짜 행위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12년 형을 받고 복역중에 뇌졸중이 발병, (이런 게 있다면 하는 말씀이지만) 의병석방 되었어도 아픈 몸을 끌고 여전히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귀도 엘레판테가 이탈리아 출신이기는 했지만 패밀리의 최상단인 시칠리아-나폴리 라인이 아니고 북서부 제노아 출신이라 항상 신중하게 행동했다. 이게 쉽게 되는 거야? 천만의 말씀. 원래 사람 생겨 먹기가 진중한 성격이고, 말을 하기 보다 듣는 쪽이었으며, 남을 신뢰하는 사람만 신뢰하고, 약속을 하면 지키는, 쉬운 얘기로 의리의 사나이였기 때문이다.

  40년대 말에 뉴욕 경찰이 누구로부터 제보를 받았는지 엘레판테의 컨테이너 사무실을 급습했다. 하지만 곳곳에 귀도의 정보원이 있어서 미리 경찰의 습격을 알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평소 같으면 접안을 했거나 정박한 배로부터 밀수품을 하역할 시간이었지만 이날은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때 신참이었던 청렴한 아일랜드 출신 경찰 포트도 출동하였는데, 현장이 비어 철수 명령을 받고 복귀하려다 숨어 있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쫓기 시작했다. 거의 다 잡았을 무렵 그림자가 갑자기 뒤로 돌더니 권총을 겨누었다. 이제 포트는 죽은 목숨이지? 그런데 포트가 20여 년이 지나 중늙은이가 되면 <어메이징 브루클린>이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출연할 예정이라서, 바로 죽음 직전에 커다란 트럭이 냅다 시속 40마일로 달려오더니 그림자를 깔아버렸던 거다. 현장에서 즉사.

  이렇게 포트 경찰을 살려준 인물이 누구냐 하면 귀도 엘레판테.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톰 엘레판테의 아버지.


  하지만 귀도 역시 경찰을 만났으니 얼른 도망가야 할 터. 앞에서 뭐라 했느냐 하면, 교도소에서 나오기 전에 벌써 뇌졸중이 발병한 상태. 한쪽 다리와 팔이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형트럭의 운전대에서 뛰어내리다 한쪽 팔이 아마도 크게 삐거나 부러진 거 같았다. 이때가 새벽 세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에 떨어진 귀도.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마침 백인 집에 하녀 비슷한 도우미로 일하던, 폴이라는 남자 이름을 쓰는 아프리카계 여성이 그날 집주인 집에서 크게 파티를 벌이는 바람에 늦게 걸어서 퇴근하던 차에 귀도를 발견했던 것. 귀도가 폴 자매, 왜 ‘자매’냐 하면 남편이 목사라서 하느님을 믿는 남자는 무조건 형제, 여자는 무조건 자매인데, 하여간 운전 면허증도 없는 폴 자매에게 자기 대신 트럭을 운전해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청을 했다. 폴 자매는 당연히 남의 험한 일에 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당시엔 정말로 거금이었던 사례금 백달러도 거절했지만, 저 밤하늘 구름 위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손바닥 안에 보호할 것이다.” 그래서 그를 부축했고, 그의 옆에 앉아 기어는 귀도가 넣고 페달은 폴 자매가 밟으며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러니 의리의 사나이 귀도 엘레판테가 얼마나 폴 자매가 고마웠겠어? 사례비로 주겠다는 백달러도 끝까지 받지 않았으니 이 여성도 남을 신뢰하는 사람이고 그러니 자신도 폴 자매를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그래서, 대신, 폴의 남편이자 목사가 교회 터를 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땅을 거의 거저 수준으로 팔고, 교회 건물도 무료 비슷하게 지어주었던 거다. 그것 참, 깡패 두목이긴 하지만 정말 의리의 사나이일세.

  그런데 귀도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알게 된 낭만적 아일랜드 범죄자가 있었다. 이 아일랜드 남자 거버너도 남을 신뢰하는 자라서 귀도 역시 신뢰했다는 걸 거버너도 알아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 수천년 전에 조각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보관해달라고 청했다. 나중에 보관료는 따로 계산하자며. 짧게 말하자. 그리하여 귀도 엘레판테는 교회를 건설하면서 폴 자매에게 이 보물을 숨긴 곳을 알려주는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 말하자면, 이후 20년이 지난 1969년 현재가치로 1,500만 달러를 받고 유럽의 수집가에게 팔 수 있는 그야말로 국가 보물급 유물이었던 것.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귀도 엘레판테는 벌써 죽고, 이제 톰 엘레판테 역시 부두 일에 싫증을 느낄 무렵, 다 늙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버너가 귀도의 아들을 찾아와, 네 아빠가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잘 생각해보라 했거든. 근데 마흔살이 넘어도 모태 솔로였던 톰 눈에는 보물과 동시에 거버너의 나이든 딸 멜리사가 눈에 팍 꽃혀버렸다는 거 아냐.


  여태 말한 것들, <어메이징 브루클린>의 주요 이야기라고 하기 힘들다. 근데 왜 헛심 빠지게 이리 길게 썼느냐 하면, 주인공인 스포츠코트, 본명 쿠피 램킨의 길고 긴 이야기를 끝마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귀도의 아들 톰 엘레판테와 “내가 너를 손바닥 안에 보호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 좋은 우리가 이해하자. 제임스 맥브라이드가 목사의 아들이잖아. 그러니까 초장에 스포츠코트가 1969년 9월의 흐린 오후에 그의 야구 제자이자 현 마약딜러인 19세 먹은 딤즈 클레멘스의 얼굴을 향해 구식 38구경 콜트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 이야기는 아예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는 거다. 그건 다른 이들이 쓴 독후감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으니까. 재미있겠지?

  그래서 읽을래, 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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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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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바로 앞 페이지에 “작가의 말”이 실려 있다. 그걸 먼저 읽어보자.


  “이 책은 불면을 위한 책이면서 또한 여행의 책이다. 불면은 이 책을 쓴 사람의 것이고, 여행은 여행한 사람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행한 장소들을 나도 가본 적이 있기에, 이런저런 장소들을 간단하게 안내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지형 일람표 같은 것이 현실이 소유하는 힘과 합쳐져 ‘그림자’를 찾아나서는 이 ‘야상곡’에 어느 정도 빛을 비춰줄 수도 있다는 희망에서, 얼핏 그런 환상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여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언젠가 길잡이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추측에서 여행지의 일람표를 만들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불면을 위한 책.” 이건 책을 쓴 안토니오 타부키의 것이다. “여행을 위한 책.” 이건 작품 속 인도에서 사라진 한 시절의 절친 사비에르 자나다 핀투를 찾아 인도 뭄바이, 옛 이름 봄베이에 도착한 화자 ‘나’ 별명 ‘호스’의 것이지만, 작가도 책에 나오는 장소들을 가본 적이 있다니 작가의 것이기도 하다. ‘호스’는 나이팅게일의 포르투갈 말 “호시뇰”의 발음 앞 부분에서 가져온 별명이다. 서양인에게 이름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는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생략하자. 그리하여 타부키 자신이 호스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더 디디면 ‘호스’는 인도에서 호스가 갔던 곳을 가본 적 있는 모든 세상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즉 호스는 타부키도 될 수 있고, 심지어 호스가 찾아 나선, 지금도 절친한 친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지난 시절에 가장 친했던 친구 사비에르도 될 수 있다. 더불어, 유럽이나 아메리카 사람으로 인도의 곳곳을 다녀본 미스터 나이팅게일일 수도 있고. 문제는 화자 ‘나’ 호스가 갔던 곳을 가본 적이 있느냐, 없느냐로 이 “여행을 위한 책”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 그러니 세상(의 서양) 사람 가운데 이 책의 열두 장章의 무대가 되는 열두 장소 모두 가본 사람은 픽션의 등장인물을 포함해 호스와 안토니오 타부키와 사비에르 자나다 핀투를 뺀다면,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서양 사람으로 국한시키는 이유는 호스, 호시뇰, 나이팅게일, 타부키, 사비에르라는 이름 때문이다.


  화자 ‘나’는 처음부터 잠이 쏟아진다. 여덟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인도 봄베이. 지금은 뭄바이라고 불리는 대도시이다. ‘나’ 그러니까 호스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봄베이의 수클라지 거리에 있는 카주라호 호텔과 그 인근의 어린 매춘부 ‘비말라 사르’로부터. 비말라 사르가 사비에르와 친하게 지냈는데, 사비에르가 병에 결려 이상하게 변했다고. 호스의 이름과 주소는 사비에르의 수첩에 적혀 있었고, 그가 가끔 제일 친한 친구로 호스 이야기를 해 편지를 보냈다는 거였다.

  호스의 직업은 타부키와 마찬가지로 소설가. 전작 <레퀴엠>에서도 스스로 밝혔듯이 ‘소설가, 혹은 작가’는 그냥 직업일 뿐이고 태생적으로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사람 호스는 지금 살고 있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젊은 시절의 친구 사비에르를 구출하기 위하여 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봄베이로 날아올 수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피사가 아니라 리스본에서 사는 이유 역시 <레퀴엠>에 나온다. 그러니 암만해도 이 책을 읽기에 앞서 <레퀴엠>을 먼저 읽는 편이 좋을 듯싶다.


  봄베이 국제공항에 도착한 호스. 택시를 타고 행선지를 밝힌다. “수클라지 거리 카주라호 호텔로 갑시다.” 이렇게 말했겠지. 터번을 쓰고 흰 리본으로 묶은 짧은 말총머리를 한 걸 보니 힌두교 시크교도인 걸로 보이는 운전수는 복잡한 공항 근방 도심에서 무지막지한 난폭운전을 하더니 정작 길이 말끔하게 닦인 해변도로에 접어들어서는 여유롭게 바다 구경도 해가며 이런 저런 말을 나누려 한다. 호스가 항의한다. 가지고 있는 안내책자에 의하면 해안도로가 나타날 이유가 없다. 운전수가 말한다.

  “카주라호 호텔은 아주 지저분한 동네에 있습니다. 점잖은 분께 어울리는 숙소로 모시고 있는 중입니다.”

  열 받은 호스는 자동차만 쌩쌩 달리는 해안도로에서 그냥 내려달라고 해, 정말 내려버린다. 마침 해변에서 무슨 축제를 하는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부랑자, 잡동사니를 파는 아이, 거지들이 우글우글하다. 늘어선 인력거도 마찬가지. 그래서 모터가 달린 인력거를 타고 도착한 카주라호 호텔 인근 케이지 지구地區. 호스는 이곳을 유명 작가의 사진에서 본 적 있다. 그 덕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케이지 지구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었다.

  사진에서 보고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했다고? 사진은 한 피사체를 장방형 프레임 안에 가둬둔 것이다. 딱 한 장면. 시각에 호소할 뿐. 그것도 이 장방형 프레임에서 단 1밀리미터 벗어나 “있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게다가 피사체에 들어 있다고 해도 피사체의 질감과 냄새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한다. 호스도 마찬가지였다. 인력거에서 내리기도 전에 닥쳐오는 너무도 지독한 냄새. 너무나 많은 냄새.

  냄새? 냄새를 거론하는 건 위험하다. 냄새를 나게 하는 당사자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한다. 그래서 송강호가 이선균을 죽일 수도 있고, 그 장면이 타당하다고 관객이 동감하며 편안한 의자에 앉아 감상할 수 있는 거다. 맹인 알 파치노가 가브리엘 앤워와 탱고를 추는 영화 제목이 <여인의 향기>이지 <여인의 냄새>가 아니잖아. 당신은 함부로 타인의 냄새를 거론하지 말라. 그러나 호스, 혹은 안토니오 타부키, 아니면 미스터 나이팅게일은 과감하게 냄새를 거론한다. 그것도 “너무 지독하다”고. 카주라호 호텔이 있는 케이지 지구가 어떤 곳인지 이것보다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어서.


  케이지 지구의 몇 안 되는 벽돌 건물인 호텔에 들어가니 ‘어두침침한 방’이라 쓴 카운터가 있고, 카운터 뒤에 그리 늙지 않은 여성이 서 있다. 방의 키를 주더니 호스에게 말한다.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는 3백루피, 열다섯 위로는 55루피예요.”

  호스는 비말라 사르를 데려다 달라고 하지만 이제 그 아이는 여기서 일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20달러 지폐 두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계단으로 향했다. 동네가 아무래도 너무 험한 거 같고, 자기가 돈 건네는 모습을 현관 근처 소파에 앉은 두 명의 나팔바지 청년이 본 것 같아 한 마디를 남긴다.

  “내 거처는 대사관에다 알려 두었습니다.”

  여덟 시간의 비행. 공항에서 도심을 빠져나오는데 세 시간. 잠이 쏟아지는 호스. 비말라 사르가 왔다. 그 아이가 전해준 말에 따르면, 자기는 누군지 모르는 고아 지방 사람들하고 봄베이에 와서 장사를 했는데 무슨 장사인지도 모르겠다. 마드라스에서 온 편지에만 조금 관심이 있어서 몇 시간 동안이나 답장을 쓰고는 했다. 아마도 연구 단체였던 거 같은데 자세히 모르긴 해도 신지학神智學협회로 보낸 것이지 싶다. 좋은 사람이었다. 마음 씀씀이가 좋았지만 원래 팔자가 사나웠던 모양이다. 수많은 글을 썼으나 어느 날 이 호텔의 구리 그릇에 넣고 다 태워버렸다. 병에 걸렸거든요.

  비말리 사르가 해준 말에 이 책의 다음 행선지가 전부 나왔다. 병에 걸렸다니까 봄베이의 브리치캔디 병원에 가보아야 하고, 후진 카주라호 호텔에서 묶었으니 다음날은 최고급인 타지마할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자야겠으며, 마드라스로 가는 기차역 숙소와 마드라스의 호텔, 신지학협회, 그리고 마지막 행선지 고아.

  성姓이 ‘자나다 핀투’인 사비에르는 조상을 거슬러 오르면 먼 인도 핏줄도 하나 있는데, 이 조상이 인도의 고아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호스는 인도의 관청을 다니며 성姓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려 하지만, 이곳은 봄베이. 유럽식 분류법은 오만한 사치에 불과하니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충고만 듣는다. 그러면 고아에 가 보아야지.

  그런데 고아에 가면 사비에르에 관한, 아니면 적어도 사비에르의 한 조각을 찾을 수 있을까? 과연 그에 관한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을까? 저 장방형 프레임 밖의 또다른 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을까? 그럴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겨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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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4-02 1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타부키 책들은 꽤 좋더라구요. 특히 문고판 이 시리즈는 전부 컬렉션 했습니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와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를 읽고 나서 타부키 책들을 모았습니다. 물론 인문서가에 꽂힌 시리즈 중에서 <플라톤의 위염>과 같이 약간 별루인 책도 있긴 합니다만 평균적으로 매우 좋더군요. 그래서 컬렉션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작가중 한명입니다..ㅎㅎ

뽈님의 서재에서 타부키 독후감을 보니 매우 기쁘네요..^^

Falstaff 2026-04-02 15:26   좋아요 0 | URL
옙. 저도 타부키 책은 아직 한 권도 실망해본 적 없습니다.
아쉬운 건 이제 동네 도서관에 안 읽은 타부키가 없다는 거.... ㅎㅎㅎ
 
뫼르소, 살인 사건 -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
카멜 다우드 지음, 조현실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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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첫 독후감 <후리>를 쓴 작가 카멜 다우드. 그가 쓴 첫번째 장편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이 4월의 첫 독후감이 된다. 이런 걸 우연이라고 하나? 2015년에 공쿠르상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후리>로 2024년 공쿠르상을 받았으니 10년 전부터 싹수가 보였던 셈이라고 할까?

  사람이 참 웃긴 것이, 전에는 아무리 개가실을 돌아다녀 봐도, 바로 눈 높이에 이 책이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카뮈의 <이방인>을 다른 시각으로 본 작품이겠거니, 그냥 그렇게 치부하고 지나쳤는데, 이번에 딱 보니까 책을 쓴 이가 카멜 다우드, 바로 <후리>의 작가였던 거다. <후리>를 재미나게 읽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 그러면서 속으로 미셸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들하고 비슷한 내용이겠거니.

  근데 문제가 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이 저 까마득한 옛 일이라서. 거의 반세기 전 고등학교 다닐 때 읽고 이후에 다시 읽어본 적 없으니 제대로 연결을 하기 어려울 것. 게다가 <이방인>과 나 사이에는 시절이 끼어 있다. 백기완 선생의 일갈. 식민국인 프랑스 청년이 아무 이유 없이 식민지 국민인 알제리 청년을 쏴 죽인 이야기에 왜 열광하느냐, 어찌 감동할 수 있느냐는 민족주의적 꾸짖음이 시절의 경종처럼 두개골 공간을 난타했다. 에세이집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에 나오는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나 역시 전혀 익지 않고 피만 끓을 때라, 그간 <이방인>과 뫼르소에 경도하던 청년으로 이게 대단히 부끄러웠다는 말이지. 그땐 그랬다. 오직 리얼리즘만 거리를 휩쓸고 모더니즘 작품을 읽으려면 집구석에 박혀 읽고는, 읽었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염병할 시절.

  핑계가 길다. 긴 핑계는 변명이다. 쉽게 얘기해, <뫼르소, 살인 사건>을 똑 부러지게 읽을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읽었다는 말이다.


  첫 문장부터 죽여준다.

  “오늘, 엄마는 아직 살아 있네.”

  카뮈, <이방인>의 가장 유명한 우리말 번역은 아마도 민음사 세계문학에서 나온 김화영 번역일 듯한데, 그 책의 첫 문장이 이렇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방인>에 진짜 열광하는 독자는 이 첫 문장이 번역하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다른 지 그 이야기만 해도 밥도 안 먹고 2박 3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 별로 관심 없다. 근데 카멜 다우드의 첫 문장은 확실히 죽여준다. “오늘”, 한 박자 쉬고, “엄마는 살아 있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이:

  “엄마는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지만, 해줄 수 있는 얘기가 많을 걸세.”

  초장부터 화끈하게 알려드린다. 이 작품은 일흔살이 넘은 알제리의 늙은 남자 하룬이 카뮈 또는 <이방인>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하여 일부러 하룬을 찾아온 프랑스 대학생과 바에 앉아 술잔을 홀짝이며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2인칭 소설로도 읽힌다. 프랑스 대학생이 왜 하룬을 찾아왔느냐 하면, 하룬의 형이 1942년 여름에 프랑스 국적의 청년 뫼르소가 해변에서 쏴 죽인 “아랍인”이기 때문이다.

  <이방인>하고 다른 점은, 뫼르소가 살인죄가 아니라, 엄마가 죽었어도 제대로 상도 치루지 않고 애인 마리와 동침을 하고, 술도 마시고, 대낮에 돌아다니다가 햇볕을 너무 쫴 일사병인지 열사병인지 하여간 가볍게 어지럼증이 일어,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이 너무 심심해서, 아무 이유 없이 한 “아랍인”을 쏴 죽여 비윤리적이라는 죄목으로, 살인이 아니라 “비윤리”라는 죄의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집행은 되지 않아 몇 년 후에 감방에서 나와 당시의 일을 소설로 썼다. 그런데 책을 읽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벽한 언어 앞에서 살인자의 고독에 공감했다면 한껏 멋부린 언사로 위로를 보내”기에 바빴다고 주장한다. 즉 살인에 대하여는 처음부터 무죄를 얻고 시작했으며, 세계인들조차 그의 살인이 아니라 고독에 공감을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뭐가?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벽한 언어, 즉 기막힌 문장이. 문장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니까? 저 어둠의 시절에 폭포처럼 쏟아지던 백기완 선생의 문장처럼. 웃기지? 뫼르소의 문장은 살인을 지워버렸고, 백기완의 문장은 뫼르소를 지워 버렸으니. 그럼 독자는? 그저 책을 읽으며 이쪽으로 흔들, 저쪽으로 흔들, 쇠부랄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 뭐 아니면 말고.


  뫼르소가 죽인 건 알제리 청년이 아니라 “아랍인”이었다. 그런 뫼르소더러 유럽인이라고 하면 듣는 프랑스 인종들은 기분 좋겠어?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이슬람의 전통인 누구의 자식인지도 말하지 못했고,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몰랐다. 그냥 없어졌다. 그저 아랍인 하나가 없어진 일이다.

  1942년의 일로 죽은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무식쟁이였다. 이름 하나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익명의 존재, 작품 속에서도 기껏해야 두 시간밖에 못 살고 불분명한 장례를 치루고 70년이 넘게 계속 죽은 상태로 있어야 했지만, 살인자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것도 아주 뛰어나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 말고 다른 모든 것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무싸와 하룬. 이 형제를 만든 아버지는 형제가 어렸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이들의 이름에 부칭은 없다. 무싸빈OO. 하룬빈OO. 하이틴 때부터 집에서 아버지 역할을 하던 무싸가 하루 아침에 죽고, 시신도 찾지 못한 어머니는 무싸를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해서 빈 관을 매장하고 알제를 떴다. 바다와 물은 꼴을 보기 싫어 내륙으로 가 프랑스 지주의 하녀로 일했다. 1962년까지. 독립전쟁에서 알제리가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자 프랑스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엄마는 하녀로 일하던 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후에 화자 ‘나’ 하룬은 공부를 시작했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라서 형의 흔적을 형 대신 프랑스, 적의 언어로 떠들기 위하여. 국유재산관리국의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는 틈틈이 무싸가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부조리. 그것을 등에 지거나 땅 속 깊숙이 품고 있는 건 무싸 형제들이지 결코 뫼르소와 그의 동조자일 수 없다는 주장. 하룬은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형을 애도하는 것도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지기 바라는 것이라 하는데, 여기까지 읽으면 이제 다분히 반식민적 희생에 대한 소설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룬의 1962년. 프랑스가 패전해 물러갈 때. 알제리의 혁명군 병사들이 임의로 프랑스인 두 명을 살해한 죄목으로 총살당한 일이 있었을 때, 하룬은 프랑스인의 집이었다가 자기 집으로 바뀐 곳에 밤중에 숨어든 프랑스인에게 권총 두 방을 쏴 죽여버린다. 그냥 그가 밤중에 집에 들어와서. 자기 등 뒤에서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죽여, 죽여버려,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국에 의하여 체포당한 하룬. 그의 죄목은 당연히 살인이다. 알제리 독립투쟁 기간이었다면 살인은커녕 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었으나, 독립하고 이틀 지난 후라서 살인은 그냥 살인이라는 범죄일 뿐이다. 세상은 하룬의 살인을 어떻게 판정할까? 정말 독립 전과 후의 살인은 다른 것일까?

  뫼르소의 살인과 하룬의 살인의 차이. 이것이 결론일 것 같은데, 책은 <후리>처럼 잘 읽히지 않고 쉽지도 않다. 확실한 건 민족주의적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거. 하긴 카멜 다우드가 그럴 인간이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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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6-04-01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작품이 쉽지 않군요. 저는 카뮈의 작품은 모셔만 두고 있습니다. 좀 쉬우면서도 의미있게 쓰는 작가는 없을까요? ㅋㅋ 매일 책을 읽으시고 독후감을 쓰시는 폴님 그저 존경할뿐입니다!

Falstaff 2026-04-01 15:41   좋아요 2 | URL
호, 아닙니다. 읽기 어렵지도 않아요. 걍 파박 읽으면 암토랑도 안혀요.
ㅎㅎㅎ 저야 이제 스스로 뒷방에 물러앉은 신선 아닙니까. 좀 기다려셔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