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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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나는 ‘장석남’을 1955년에 충청도 논산에서 난 ‘장석주’로 잘못 알고 시집을 골랐다. 그랬더니 1965년 인천 덕적도에서 나서, 서울예대와 인하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하고 지금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를 하고 있는 장석남이었던 거다. 거 참 이름은 한끗 차이건만. 근데 좀 웃기네. 지금 뒤져보니 내가 이이인 줄 알았던 장석주는 약관 스무살 때 등단했구먼. 그러면 시인 노릇을 51년 했네?

  장석남은 스물두 살에 신춘문예를 통과한 시 재주꾼으로, 서울예대 다닐 때부터 알아주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뭐 아나? 이번 시집이 처음 읽는 장석남일 정도인데. 해설을 쓴 평론가 신형철과 동문수학한 거 같다. 그가 해설 초입에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다. 신형절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당시의 내게는 장석남의 문장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한 발명품의 하나로 보였다.”

  장석남은 떡잎 시절부터 돋보이는 자질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람 여러 분야에 있지? 탁월한 한 명. 2등이 아무리 기를 쓰고 쫓아가도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 있는 인간. 그래서 좀 재수없기는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부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고, 그림도, 음악도, 농사, 분재, 화훼, 정원, 요리, 기계조립, 설계, 조명, 수리, 하다못해 내가 해보니 설거지도 그렇더라. 문제는 한 학교, 한 과에서 한 명이 있는데, 그 인간들을 다 모아 놓으면 그 속에서 또 특별한 한 명이 등장한다는 것이지. 뭐 사는 게 다 그래.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시집에서 시 자체에 대한 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별로 없다. 장석남도 마찬가지다. 그것부터 읽어보자. 이 시인이 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불멸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전문. p.11)



  그러니까 장석남은 시인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시를 쓰겠다는 선언이다. 요즘엔 죽으면 거의 예외 없이 화장을 하지만 자신은 죽은 다음에 찬 땅에 몸을 뉘는 한이 있어도 꼭 묘비를 세우겠는데, 이때 비문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겠다는 거지. 자못 비장하다. 비장은 갈수록 도를 더한다. 사나운 눈보라조차 비문 읽느라 지쳐 비스듬해지게 만들겠다니. 사나운 눈보라? 세세년년 끊임없이 몰려올 매운 평론가, 독자의 시선으로 읽어도 괜찮을까? 뭐 괜찮으면 말고.

  요즘 사람들 한자어 안 배워서 헛갈릴 지 몰라 한 수 훈수를 두자면 다섯번째 행에 나오는 행장行狀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이라고 나온다. 흔히 행장行裝, “여행할 때 쓰는 물건과 차림”으로 잘못 읽을까봐 알려드린다. 죽어 없어지는 것도 여행의 한 가지라서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시에서 ‘행장’은 1행의 “비문”과 같은 의미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유적지 가서 비석 뒷면을 보면 작은 글자로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듯이, 자기도 자기 행장을 비문에 적어 두겠다는데 이이의 직업이 시인이니 당연히 시를 그렇게 쓰겠다는 거겠지. 그렇게 가장 단단한 돌에 새겨 내가 나를 기린단다. 거 참. 이 시집이 2017년에 냈으니 쉰두 살 때인데, 그렇게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을까?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그래,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지 별 수 있간디?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 노래하는 삶의 기록이니, 너희는 이 시집을 읽음으로 나를 기념하라. 아멘.


  아, 근데, 지금 이이의 시 작품이 별 볼일 없다는 말을 하는 거 아니다. 그냥 포부가 커서 좀 웃겼다는 것일 뿐. 돌을 쪼아서 쓴 시는 죽어도 안 지워지는 거 알지? 아무쪼록 잘 쓰다 가기 바란다.

  평론가이자 동문수학한 것처럼 보이는 평론가 신형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아니, 내가) 생각하는 산뜻한 시가 있다. 읽어보자.



  소나기 오는 날



  날이 뜨겁던 이유를 서로 풀어놓으니

  스물 안팎 친구에게 그런 이유란 없다 하고

  노인은 비가 오려 그랬다 하네


  나비는 꽃을 부지런히 순회하던가?

  꽃은 나비를 야단쳐서 보내던가?


  비는 여러가지 얘기를 한꺼번에 쏟다가

  아무 귀담아들을 얘기는 없다고

  웃고는 가네


  뉘우침 후처럼

  맑고 서늘한 길가 바위

  놓여 있네   (전문. p.22)



  이 시의 결은 또 <불멸>하고 전혀 다르다. 뜨거운 스물의 청춘은 비가 오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뜨거운 스물의 청춘을 보내 본 노인이 말한다. 결국 한 번 씩, 웃고 갈 소낙비가. 그러고 나서야 맑고 서늘한 시절이 놓여 있겠네. 그제서야 이제 정으로 쪼아 시 또는 비문을 쓸 길가의 바위가 놓여 있구나. 근데 살아보면 그게 그리 가까이 있지는 않을 걸?

  이 시가 시집의 22쪽 왼쪽에 실려 있고, 오른편 23쪽엔 이런 시가 올라와 있다.



  꽃집에서



  나는 꽃이 되어서 꽃집으로 들어가 꽃들 속에 섞여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고 오가는 사람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빛이 되어서 어둠으로 들어가 어둠속에 숨어서 오가는 숨결들을 비추고 오가는 숨결들로 시들어, 시들어


  나는 노래가 되어서 빛나는 입술로 들어가 가슴에 잠겨서 피어나는 꿈들을 적시다가 오가는 꿈들로 시들어, 시들어


  꽃집이여

  꽃집이여

  혀와 입술을 파는 집이여

  마른 혀와 마른 입술을 파는 집이여

  나의 육체를 사다오

  나의 육체를 팔아다오   (전문. p.23)



  1연과 2연은 참 괜찮은 대구. 대구? 대가리 큰 생선? 경상북도 도청 소재지였다가 지금은 직할시가 된 도시? 그거 말고 댓구. ‘댓구’라고 쓰니까 잘못된 글자라고 글씨 밑에 붉은 줄이 우글쭈글하게 그어진다. 그래서 ‘대구對句’라고 쓰니 괜찮네.

  이런 대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할 것도 없이 저 당나라의 이백이 대빵이다. 근데 이 시의 대구도 괜찮은 정도를 살짝 넘어 삼삼하다. 3연은 여기에 붙인 시인의 수작. 수작? 수작질? 뭐 나쁜 뜻으로 굳이 읽겠다면 그것도 맞지만 나는 전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수작手作이라 한 거다. 수작? 시인이 시 쓰는 수작 말고 뭘 해야 좋겠어? 그러니 이 시의 ‘꽃집’은, 시인이 꽃집에 한 번 가서 숱한 꽃을 보고 지었을 수 있지만서도 꽃에 이어 빛과 노래, 즉 시가 나오는 걸로 보아 사람 사는 판 가운데 그래도 좀 사람처럼 보이는 터를 연상하는 것 같다. 이 가운데 핵심은 결국 노래. 빛과 어둠 속에서도 오가는 건 그저 숨결, 노래할 수 있는 숨결이다. 시들어, 시들어 은근한 비장?

  시인이 시에 관해 노래하는 걸 뭐라 할 수 없다. 시가 쉽게 써지는 게 아니라서. 독자인 나도 그런데, 하물며 시를 쓰는 시인한테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하고 나무 상자 속에 누워야 하는 것이, 도대체 시가 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섯켤레의 양말> 3연에 재미있는 게 있다.


  그러나 오, 다섯켤레의 혀들

  나는 내 혀가 지은 죄 때문에 내 혀를 끊을 용기는 없었다

  내 혀는 나를 말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혀는 자주 나의 것이 아닌 것

  내 손이 써나가는 문장을 차라리 내 혀라 말하고 싶지만

  세상은 혀끝에서만 머문다   (<다섯켤레의 양말> 3연. p.44)


  그래, 시인이라고 다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지. 저 앞에 소개한 시 <불멸>에서는 대차게 자기 묘비문을 쓰는 마음으로, 돌을 쪼아 시를 쓰겠다고 하더니, 여기 와서는 자기가 시를 쓰기는 했지만 그게 허위, 거짓이었다는, 늘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거짓 시를 쓰기도 했다는 고백이잖아. 뭐 그럴 수 있지. 차라리 이렇게 고백을 해버리는 게 시인이나 독자의 정신건강에 더 좋을 지도 모르지.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좌우간, 아이고, 이 ‘좌우간’ 써 놓고 보니까 또 정여사, 그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생각나네. 정여사 살아생전 좌우간, 좌우지간, 코미디언은 TV 나와서 웃기려고 간혹 ‘좌우당간’ 이라고 했던 말이 나오면 키득키득 웃고는 하셨지. 좌우의 사이 좌우간左右間,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 뭐가 있느냐는 말씀이셨다. 뭐가 있다고 꼭 말씀을 드릴까? 그거, 놀이동산.

  덕분에 시집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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