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신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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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전에 읽은 페란테의 “나폴리 사부작” 가운데 1책 <나의 눈부신 친구>는 미국 뉴욕타임스 선정 “21세기 백대 소설” 중에서 제일 윗자리를 차지한 작품이다. 내가 나폴리 사부작을 읽은 감상은, 걸작이나 명작이란 찬사를 가져다 바치지는 못할지언정 참 재미있는 소설, 이라고 당시 독후감에 썼는데, 이후 아쉽게 생각하는 건, 시간이 별로 많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작품에 대한 기억이 별로 뚜렷하지 않다는 점, 한 방에 휘리릭 사라졌다는 거였다.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나 같은 섬 지역 말고 아직도 벤데타 문화가 사라지지 않은 지역. 내 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을 나폴리로 간다 해서, 거기 가면 당연히 소매치기 조심하고, 행여나 코 흘리는 아이들 귀엽다고 건드리지 말고, 예쁜 아가씨 훔쳐보지 말라고 훈수를 둔 곳이다. <성가신 사랑>에서도 나온다. 집 앞 벤치에 앉은 다 늙은 할배가 주인공 화자에게 아이들을 가리키며, 저 아이들 한테 손을 대기만 하면 그건 죽은 목숨이라오.

  하여간 페란테의 사부작은 다 읽었고, 근데 사부작, 하면 내 마음 속 사부작은, 가시는 길 뿌려준 진달래꽃잎을 사부작, 사부작 밟고 가는 님 발자국 소리밖에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폴리 사부작을 읽은 기념으로 페란테라는 이름은 내 기억에 콱 박혀 있었던 바, 그의 새로운 삼부작, 이번엔 제목을 “나쁜 사랑 삼부작”으로 한 삼부작이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나폴리 이야기를 무척 재미나게 읽고나서 기억이 금세 휘발되고 만 것이 생각나, 나중에 읽지 뭐, 하고 내버려둔 것이 어영부영 6년이 넘었다.


  “나쁜 사랑 삼부작” 가운데 1권 <성가신 사랑>. 첫 작품부터 기대 이하이다. 뭐, “나쁜 사랑”에 관한 소설 세 편을 썼는데 그 가운데 제일 나쁜 사랑일 수 있으니 읽은 소감도 제일 나쁜 독후감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책은 주인공 화자 ‘나’ 델리아의 시각으로 쓰였으나 독후감은 3인칭으로 쓰겠다.

  델리아는 43~44세의 만화가로 로마에 산다. 나폴리에서 시골 화가와 재봉사 사이의 세 딸 가운데 맏이로 이제 나폴리에는 부모가 각각 다른 집에서 살고 아이들은 모두 객지에 터를 잡았다. 자매는 일년에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고, 그나마 가족 일원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하여 아주 가끔 서로 전화를 한 번씩 하는 걸로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한다. 모두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 사는 건 꿈에도 바라지 않는다. 말투에서도 어느새 나폴리 사투리는 거의 사라졌다. 할 수 없이 나폴리에 가야 할 경우에도 갑작스런 상황이 아니라면 또박또박 로마 또는 각자 살고 있는 곳의 이탈리아어로 말한다. 그만큼 나폴리에 정이 뚝 떨어졌다는 뜻이다. 심지어 두 동생의 이름은 나오지도 않는다. 남은 아니지만 남보다 못해 웬수가 되지 않으려 마지막 발돋움을 하느라 종종거리는 모습.


  막이 올라가면 델리아의 생일인 5월 23일 밤에 어머니가, 예전에 가족들이 여름에 농가 한 채를 빌어 해수욕을 가곤 하던 스파카벤토 해변 인근에서, 평소에 입던 누더기 같이 다 헤진 브래지어 대신에, 섬세한 레이스 처리를 한, 나폴리의 부잣집 사모님들이 즐겨 찾는 ‘보시’ 고급 속옷가게 제품을 착용하고, 다른 옷은 스타킹 하나 걸친 것이 없는 시신 상태로 발견되었다.

  엄마는 죽기 전 몇 달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델리아의 아파트를 찾아와 며칠씩 묵어 갔다. 하도 오래 떨어져 살던 모녀 사이라 지내다 보면 조금 불편한 것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데, 델리아가 엄마 때문에 힘든 기색을 보이면 바로 나폴리로 돌아갔다. 그러니 얼마 동안 머물겠다는 언질을 주었던 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죽어, 아무리 유럽이라도 여러가지 방면으로 발전이 늦은 지역이라 온갖 관청에 뒷돈을 주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서류처리를 한 다음에 장례식을 할 수 있었는데, 장례식에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반쯤 가슴을 노출한 집시 여인을 그린 그림을 건장한 흑인청년 네 명이 들고 성당의 복도를 걷게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좀 이상하지?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신경정신과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오래 전, 아버지는 아내와 세 딸을 집에서 쫓아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유부남이기도 한 훤칠하고 잘 생긴 카세르타 씨와 정분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를 두드려 팬 다음, 처남, 델리아의 외삼촌 필리포와 함께 카세르타의 집에 가서 카세르타 역시 자근자근 밟아주고 돌아와, 아내를 쫓아냈는데, 가톨릭 사회에서 서류작업을 끝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혼을 기어이 해버린 건지, 법적 가족분할은 하지 않고, 즉 혼인 상태는 유지한 채 서로 보지 않겠다는 졸혼을 한 건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지만 이렇게 갈라졌고, 이때 세 딸 모두 어머니를 선택했다.


  책을 넘기면 “어머니에게”라는 헌사가 나오고 한 장 더 넘기면 이런 경구가 씌어 있다.

  “유년 시절은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이다.”


  이 책에서 사실인 것은,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성격이라는 것 말고는 없다. 아버지가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편집증적인 증세가 심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한 상태였다는 거. 아버지가 어머니를 의심할 때 처음부터 아내를 두드려 팼겠느냐만, 일단 손찌검을 시작하게 된 후에, 그 심각함이 날로 더해졌겠지. 많은 이탈리아 남자가 가지고 있던 주취폭행 성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작중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온전히 편집증, 신경정신과적 증상이다. 작중 시점이 휴대폰도 나오지 않았을 때이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드려 팬 시기는 작중 시점부터 30년 이상을 더 과거로 밀어내야 하니까 1960년대쯤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아무리 이탈리아가 G7 가입국이라도 의처증이라는 이름의 편집증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편집증은 누구나 갖고 있는 질환이기는 하지만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의 중증은 당연히 병원에 가야 하고, 심하면 입원도 해야 할 질병이다. 이런 상태를 환자라고 생각해야지, 나쁜 인간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다. 편집증 증세가 있는 여성에게 시달림을 받는 남성도 많다. 폭력 같은 가시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 뿐이지.

  델리아가 나폴리의 한 골목에서 살 때, 델리아도 틀림없이 어머니가 카세르타와 함께 있는 것을 봤다고 믿는다. 이때 델리아가 네 살. 이 기억이 틀림없을까?

  확실한 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드려 팼고, 코피를 터뜨렸으며 옆구리를 발로 찼다는 거. 아버지와 필리포 삼촌이 카세르타를 찾아가 곤죽이 되도록 엎어치고 메쳤다는 거. 이제는 늙어서 많았던 검은 머리카락이 거의 빠져 뾰족한 머리통을 하고 있는 늙은 아버지가 이야기해주듯, 카세르타가 집으로 어머니 선물로 장미꽃다발, 나폴리식 맛난 쿠키 같은 걸 자주 선물했다는 거. 그때마다 편집증이 유별난 아버지는 발광을 했다는 거. 카세르타도 미친놈이지 남의 아내한테 장미꽃다발 선물을 왜 하니?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필리포 삼촌과 카세르타 씨의 시절까지는 하여간 자기들이 저질렀거나 기질로 가지고 있는, 당시엔 ‘성격’이라고 불리던 의처증 또는 편집증 때문에 인생을 조졌다고 치고, 그 인생이 어떤 방식으로 조진 것인지, 어머니의 자살을 계기로 로마에서 고향 나폴리로 돌아온 화자 ‘나’, 만화가 델리아 선생은, 어머니의 빈 옷장과 고급 남자 셔츠 한 장, 그리고 어머니가 입던 누더기 속옷을, (조금 후 알게 되겠지만 어머니가 델리아의 생일선물로 주려고 가져간) 옷가방을 교환하자고 제의하는 카세르타 등등을 감안하여 과거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보탤 다른 기재는 자신의 기억. 만 네 살짜리 어린 아이의 기억.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책의 결말 가운데 70~80퍼센트는 가정hyposesis이다.

  ‘가정’보다 더 허구적인 건 없다. 이 작품 속 작가의 기억은 그래서 완전히 거짓말이다. 하다못해 폭력의 장면도 그러하다.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발로 차이는 바람에 어머니는 침실 장롱까지 날아갔다. 어머니는 일어서서 벽에 걸린 그림을 모조리 찢어버렸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머리채를 붙잡고 장롱 거울에 머리를 박아 거울을 깨뜨렸다.” (p.228)

  네 살 유아의 기억. 자라면서 TV를 많이 봤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거울을 박아 깨뜨렸으면, TV/영화처럼 깨진 거울이 중력에 의하여 한 번에 와장창 쏟아졌을 터이고, 깨진 거울면은 생각 외로 날카로워 TV/영화와 달리 아버지의 손등과 팔뚝, 어머니의 뒤통수와 불운했다면 목의 혈관까지 다 절개해버렸을 터이다. 어머니의 머리는 인체에서 가장 두꺼운 두개골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었겠지만 혈관이 유별나게 조밀한 머리피부도 다양한 열상으로 말도 못할 만큼의 피가 터졌을 것인데, 무엇보다도 기억에 사무칠 엄청난 피칠갑에 대한 묘사는 없다. 유리가 깨져 사람이 다친 현장을 본 경험이 있는 독자는 이 장면도 진실이 아니라 네 살 먹은 유아의 상상이 만든 그림이라고 여겨 마땅하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증거로 엘레나 페란테는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남성들을 창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이것도 페미니즘이라면 뭐 할 말은 없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이런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혹시 페란테의 유년시절에 델리아가 자신이 당했다고 상상하는/믿는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역자 김지우가 쓴 해설을 보면 결론이라서 내가 여기서 대놓고 말할 수 없지만 델리아가 결말부에서 “기억속에 묻혀 있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p.290)고 했다. 나는 이 “충격적인 진실” 역시 정확한 사실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저 작품의 결말에 어울릴 만한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픽션” 장면 하나를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그래서 작가도 “유년시절은 거짓말의 공장”이라고 제일 앞에서 말했던 것이라고. 독자는 가끔 자신이 지금 픽션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잊는다.

  나쁜 사랑 삼부작? 나는 이걸로 삼부작은 그만 읽기로 했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이젠 독한 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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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O. Z. 리반엘리 지음, 고영범 옮김 / 가쎄(GASSE)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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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생 오메르 줄퓌 리바넬리가 56세인 2002년에 발표한 책. 리바넬리는 1971년 군사 쿠데타 당시 체포, 투옥 등을 겪다가 망명을 떠난 튀르키예의 작가, 음악인 등이다. 그래서 이이의 작품엔 주로 튀르키예의 정치상황과 독재자, 오트만 제국 말기의 혁명 상황 같은 것을 풍자한 작품이 많다.


  하급 중산층 가정의 시골 소년이 전액 장학금을 받고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얻어, 그곳에서 만난 튀르키예 최고의 부르주아 여성을 만났다. 이후 하버드 교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조금 수정해 아내와 함께 튀르키예로 돌아온 이르판 쿠르달 교수. 이르판은 뉴욕과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한 이스탄불에서 가장 교육을 잘 받고, 존경받고, 성공한 그룹의 일원에 속한다. TV 주간 토크쇼에 정기 출연하는 훤칠하고 체격 좋은 44세의 사내. 아내 아이젤 역시 미국에서 유학하다 이르판을 만나 그를 튀르키예의 최상급 부르주아들이 미국의 뉴욕, 보스턴 등 대도시에 짜 놓은 네트워크의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하급 중산계급 출신의 이르판은 상상도 하지 못하게 화려한 미국내 튀르키예 소사이어티에 처음엔 놀랐지만, 몸에 익히고, 즐기는 상황을 거쳐 이제는 결혼 후에 장소만 뉴욕에서 이스탄불로 바뀌기만 했지 초 상류 부르주아 사회에 푹 잠겨 있었다. 아내 아이젤이 워낙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르판은 자기가 돈을 벌 필요도 없었으니, 교수 급여에 높은 TV 출연료, 기타 수입을 합친 것이 자금 운용 시스템 안에서 몇 년을 돌아 튀르키예의 경제 위기 속에서도 어마어마하게 몸집이 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계속 하다보니 이르판의 가슴 속에는 불운한 검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치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을 키웠다. 검은 새. 이것은 두려움의 한 상징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이르판 쿠르달 교수는 무엇을 두려워할까? 앞부분에서는 그의 방황만 계속 묘사하고, 두려움의 정체는 283쪽에 가서야 실토한다.

  “바다로 나선 이후, 이르판은 그가 이스탄불에서 겪으면서 고통을 받았던 두려움과 위기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당장이라도 삶을 바꿔야 한다는 욕구를 부여해 준 죽음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살면서 중요한 것을 생산해내지도 못했고 아주 사소한 은적조차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p.282~3)

  앞 세대의 위대한 학자, 작가들처럼 불멸의 저작 한 편을 쓰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데 그걸 쓰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아서, TV에 하도 자주 출연하는 바람에 튀르키예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최고 인기 교수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세우면서, 한밤중에 욕실 욕조에 걸터앉아 “난 행복해.” 조금 있다가 “나는 정말 행복해.”를 두 번 반복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다.

  우울증 아닌가? 하여간 작심한 바 있어, 이 철없는 교수는 아름답지만 남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으면서 살도록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은 아내 아이젤에게 사랑한다는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자기 계좌의 잔액을 몽땅 현금으로 인출해, 먼저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 집에 가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하루를 보낸 다음, 에게 해변에서 침실이 세 개 있는 요트를 장기 대여해 와인빛 바다 에게해로 나간다. 에잇, 팔자 좋다!


  그런데 작품이 이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어리광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지는 않다. 미쳤지, 자기가 뭐라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 해. 난 나 죽은 다음에 내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인간이라서 이르판의 심정이 더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O.Z.리바넬리가 짚고 싶었던 튀르키예의 문제는 이런 부르주아들의 엄살이 아니라, 동부 튀르키예의 한정된 고장에서 자신들의 나쁜 문화로 유지하다가 쿠르드족과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난민들이 튀르키예 전역, 이 가운데서도 이스탄불 주변으로 몰려들어, 이제는 전 튀르키예 지역과 심지어 해외로 빠져나간 일부 무슬림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명예살인’에 관한 것이다.

  튀르키예 동부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는 커다란 반 호수 근처 반 마을에 타신 아그하라는 남자가 살았다. 대가족 가운데 ‘둘째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 이 완고한 무슬림에서 둘째는 별로 의미가 없다. 오직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집안의 모든 일은 하는 일 없는 ‘큰 아버지’의 결정에 따른다. 하여간 타신 아그하라의 첫 아내는 딸 메리엠을 낳다가 죽었다. 둘째 아내는 아이를 낳지 못해 셋째 아내 ‘되네’를 들여 아이 둘을 낳았다. 큰아버지는 첫 아내와의 사이에 건강한 아들 둘을 두었다. 이 가운데 하나 ‘제말’이 훗날 튀르키예 북동쪽 가바산맥 경사면 초소에서 특공대에 근무하며 해방 쿠르트족 PKK와 죽음을 불사하는 전투를 2년 동안 치룬 다음에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정신을 가진, 육체적으로 거친 사내가 되어 귀가한다.

  제말이 메리엠의 서너댓 살 많은 사촌 오빠. 제말의 아버지이자 메리엠의 큰아버지는 농사와 집안 일은 전부 동생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포도농장 인근 오두막에 자리를 잡고 이 지역 종교의 지도자 역할에 전념한다. 엄격하고 다혈질적이고 위압적인 성격에다 쿠란과 예언자 무하마드의 어록을 수시로 인용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 불행하게, 정말 불행하게, 이슬람 원리주의자이며 종교 지도자인 큰아버지한테도 두 다리 사이에 끄트머리의 껍데기를 면도칼로 벗긴, 할례 받은 생식기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으며 그게 아무 때나 가동을 하고 싶어했다는 거였다. 여기서 ‘불행하게’라는 부사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타인을 불행하게,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행을 던져주는 행위를 말한다.

  <행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열다섯 살 먹은 메리엠이 포도원 오두막으로 큰아버지 드시라고 식사를 가져다 드렸는데, 큰 아버지가 메리엠의 손목을 잡고 오두막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강간해버렸다. 다리 아래로 피를 흘리며 뛰쳐나간 메리엠은 가시덤불 위에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되고 혼절한 상태에서 지나가던 두 명의 청년에 의하여 발견된다. 청년들은 메리엠의 상태를 짐작하고 그를 들쳐 매고 메리엠의 집에 데려다 주었다.

  여자들이 보니, 어떤 일을 당했는지 한 번에 딱 알겠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메리엠을 집안에 들이지 않고 그길로 주로 벌을 줄 때 사용하는 헛간에 쳐 넣고 밖에서 문을 닫았다. 여자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특히 셋째 어머니 되네가 독했다. 먹을 것 약간을 들고 들어온 되네가 메리엠에게 말한다.

  “너는 이스탄불에 가게 될 거야.”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 밧줄이 놓여 있었다.

  “스스로 목을 매는 아이들은 이스탄불에 보내지 않지. 어떤 애들은 밧줄을 찾아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거든.”

  되네가 말하는 이스탄불은 지리적으로 튀르키예의 거대도시 이스탄불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 메리엠은 아직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알아듣는다. 아무도 찾지 않는 헛간에서 온갖 불길한 생각에 시달리는 메리엠. 태어날 때부터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와 신으로부터 아무 사랑도 받지 못하는 아이. 소년기가 지난 후에 정말로 메리엠에게 다정하게 구는 친구도 없었다. 신의 미움을 받아 엄마 잡아먹은 년이라서. 그나마 어렸을 때는 메리엠과 함께 온갖 개구진 놀이도 마다하지 않은 제말 오빠와 쿠르트족 출신 메모 오빠. 이들은 그러지 않았지만.


  날이 가고, 쿠르드족과의 전투에서 지뢰를 밟아 몸이 터져 죽은 동료, 머리통에 총구멍이 난 동료를 보고, 치명적으로 자신의 기총소사와 수류탄 투척으로 산산조각이 난 인물이 적군 병사가 아니라 열살짜리 염소치기 소년이었다는 걸 알고 PTSD가 제대로 작동되기 시작한 제말이 만기 제대해 집에 오면서 메리엠의 일은 급속도로 진행된다. 두 번 올가미에 목을 넣었다 다시 뺐을 뿐 아직 목을 매지 않았으니 이제 메리엠을 정말로 이스탄불로 보내야 한다고 강간범 큰아버지가 판결했다.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이 특공대원 출신 제말. 동네에서 메리엠을 죽이면 옛날과 달라서 누군가의 진술로 결국 제말의 짓임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제말도 현행 튀르키예 법에 따라 아주 길지는 않지만 제법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제말은 메리엠과 함께 이스탄불까지 여행을 해야 하며, 여행 도중에, 아니면 1천4백만 명이 사는 거대도시 이스탄불의 으슥한 골목에서 메리엠을 끝장내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이렇게 메리엠과 제말은 떠난다. 제말은 예전 제말이 아니다. 아직 여자의 피부를 만져본 적도 없고, 놀랍게도 접촉은커녕 자위를 해본 적도 없다. 꿈속에 관능적인 무구한 여성이 등장할 때마다 몽정을 했는데, 몽정을 하기만 하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밖에 나가 반쯤 언 통 속의 물을 머리부터 거꾸로 뒤집어써 스스로를 정화해야 했다. 이것이 다 엄격한 이슬람주의자이자 이슬람 지도자이며 메리엠을 강간한 아버지한테 배운 절차였다.


  드라마는 이 세 명이 우연히 만나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한다. 큰 요트를 교수 혼자 운용하려니 힘드는 건 두 번째고 사고의 위협을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만 근처에 있는 농어, 도미 양식장에서 (제말이 어떻게 메리엠을 죽이지 않고 함께 이곳까지 왔느냐는 생략하겠지만) 세 명이 만나 이르판이 둘을 고용하면서, 책의 저 앞에 거의 모든 독자가 예상했듯 셋이 상봉한다.

  무리를 이루면 반드시 무리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법.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깬 자와 깨지 못한 자, 현명한 자와 조금 막힌 자. 이런 갈등은 못 배운 자, 깨지 못한 자, 조금 막힌 자의 열등감을 유발하고, 열등감을 갖게 된 이가 완력이나 금력 등 하여간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 있으면 결국 그 권력을 사납게 사용하게 된다. 그게 사회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는 간혹 결과, 결말이다.

  어떻게 어쩔 수 없이 결말에 이르게 되는 지는 말하지 않겠다. 썩 괜찮은 소설가 O.Z. 리바넬리가 이 책에서 절정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이번엔 너무 상투적이라 조금 실망했다는 말을 보태며 독후감을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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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아이야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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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말부터 매년 가을만 되면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도 숱한 매체에서 노벨문학상 후보 리스트에 올려놓아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던 작가 가운데 한 명이 케냐의 키쿠유어(語) 소설가 응구기 와 시옹오였다. 1938년생이니 87년을 살다가 갔다. 우리나라에도 온 적 있다. 박경리 문학상을 받았다.

  케냐의 나이로비 북부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 시옹오 와 응구기는 아내가 네 명, 자녀가 스물여덟이 있었는데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세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n번째 자식이었다. 불운이 이 가정을 덮친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이 자기들 마음대로 정한 “제국 토지법”에 따라 시옹오 집안 소유의 토지가 전부 압류되어 영국에서 배 타고 식민지로 온 백인의 소유로 넘어간 일이었다. 많기도 한 이복 형제 가운데 한 명은 2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해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죽었고, 다른 형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1952~1960년에 있었던 마우마우 봉기 당시 “영국 군인들의 정지하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 영국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다른 형은 당시 마우마우 단에 들어가 영국 및 식민지 정부와 투쟁하다 죽었으며 응구기 와 시옹오의 친엄마 역시 당시에 영국인과 이들에 협조하는 케냐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이 모두 <울지 마, 아이야>에 나온다.

  케냐 원주민들의 일부다처제 식구들은 어머니가 달라도 형제 간의 정은 친 동기간의 정보다 전혀 못하지 않아서, 이런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어리지만 공부 잘하는 응구기 와 시옹오만큼은 끝까지 공부를 시키려고 모든 형제들이 나서서 도왔단다. 내전 기간 동안 죽임과 고문을 당하는 순간에도 기숙학교에 다니던 응구기 와 시옹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학교를 그만두지 말라고 할 정도로 이복형제들이 이이의 교육에 집착했다고 한다.


  <울지 마, 아이야>에 이런 정황들이 모두 나온다. 아버지 응고토는 1차 세계대전에 소년병 신분의 영국군으로 참전해 백인병사를 위해 군수품을 나르고, 도로를 닦는 등의 일을 하고 돌아왔지만 이 사이에 집안의 토지 전부가 “영국 제국 토지법”에 따라 영국인 하울랜즈의 소유로 넘어가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하울랜즈에게 고용되어 농장 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애초부터 비극을 품고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응고토의 두 아들, 첫번째 아내 은제리의 장남 보로와, 주인공 은조로게의 친어머니 뇨카비가 낳은 첫아들 므왕가가 역시 영국군으로 참전해 이집트, 예루살렘, 미얀마 전투에 투입되어 므왕가는 돌아오지 못했고, 이야기(구술문학)하기 좋아하던 보로는 우울한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이들 가족이 사는 집은 ‘자코보’라는 이름의 케냐 원주민의 땅 위에 지은 것으로 당연히 땅 임대료를 지불해야 했다. 자코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당시 원주민들의 눈으로 보기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살면서 아들은 나이로비에 있는 고등학교를 거쳐 런던으로 유학으로 보내고, 주인공 은조로게보다 한두 살 덜 먹었지만 정상적으로 학교에 입학해 후에 같은 반이 되는 딸 므위하키도 나이로비에 있는 여자 기숙학교에 다닌다. 흑인 자코보가 땅을 소유하고 있고 하울랜즈의 농장에 비하면 그리 볼품없지만 그래도 제법 큰 농장을 가지고 있다면, 식민지 시절에 이런 인간은 백이면 백 친영국파라고 보면 된다.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동족을 고발하고, 사적인 감정으로 없는 일을 있다고 해서 곤욕을 치루게 하는 인간. 어디에도 있다. 식민지 조선에 있었듯 식민지 케냐에서도 이하동문이다. 그리하여 은조로게의 바로 위 이복형 카마우가 말한다.

  “백인은 백인일 뿐이야. 하지만 백인이 되려는 흑인은 고약하고 잔인하지.”

  외국인투자법인의 외국인 사장은 뭐 그런대로 사장질을 한다. 자기도 낯선 고장에 와서 사장질 하려면 현지인들 눈치를 안 볼 수 없거든. 그러나 한국인 사장은? 눈 뜨고 보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요즘에야 시대가 달라져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지, 여전할 지도. 아마 조금은 그럴 걸? 주인 마님보다 더 무서운 게 그 집구석 청지기라잖아.


  이 작품은 응구기 와 시옹오가 스물네 살에,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에 적을 두었을 때 쓴 아주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소년 은조로게를 주인공으로 하고, 이 아이가 열여덟 살의 청년이 될 때까지를 그린 일종의 성장소설을 썼다. 불운하게 이 시기가 케냐의 마우마우 봉기 기간과 겹쳤고, 작가 자신이 고스란히 이 때를 겪은 만큼 젊은이 답게 식민 모국인 백인 영국인과 부영附英 흑인의 원주민에 대한 학살과 고문을 고발한다. 하지만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그들의 만행이 아니라 케냐 사람들의 저항이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케냐 흑인 가정이 어떻게 무너지고 말았는가, 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당시가 식민 시절이었으니 등장인물을 극단적 선악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던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선한 쪽은 당연히 약자인 케냐 사람들과 특히 응고토 가족 구성원이고, 악한 쪽의 극단은 백인이자 응고토의 토지를 모두 흡수해버린 영국인 뜨내기, 그러나 지금은 지역의 최고 권력자인 하울랜즈와, 이의 악마적인 흑인 하수인 자코보.

  작게 보면 응고토 가족, 크게 보면 케냐 사람들의 최초 불만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긴 것부터 시작한다. 전쟁에 나가 영국을 위하여 싸웠건만 돌아온 건 토지 몰수였다. 이제 자기 땅이었던 곳에 고용되어 농장 일을 해야 하는 현지인. 그럼에도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에 대하여 항의라도 하면 곧바로 해고되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이들이 선택한 것은 집단 파업이었다. 작중에서도 나이든 응고토는 파업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가, 파업 현장에 나와 이들을 해산시키려 위협하는 자코보에게 정면으로 나서 맞서는 바람에, 자코보 땅 위에 지은 집에서 쫓겨나고, 그것보다 더 험한 건, 자코보로하여금 앙심을 품게 만든다. 그러니까 총 파업이 두번째 전환점이 되는 셈.


  세번째이자 결정적 파국은 위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마우마우 봉기이다.

  응고토의 첫번째 아내 은제리는 차례로 보로, 코리, 카마우 세 아들이 있고, 두번째 아내 뇨카비는 전쟁 나가서 죽은 므왕기와 주인공 은조로게, 이렇게 두 아들, 합해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이 가운데 보로와 코리가 마우마우 단에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입단해 영국인과 케냐 하수인으로 구성된 시민군과 싸운다. 싸우긴 싸우는데, 주인공의 친형들이니 그냥 싸우는 정도가 아니다. 그동안 자기 딸 므위하키와 은조로게가 은근히 은은한 사랑을 꽃피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양한 방법으로 응고토를 위시하여 이이의 아들들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던 자코보를 죽여버린다.

  한 가족의 가장의 의무 가운데 제일 무거운 의무는 가족을 지키는 일. 이 암살이 자기 아들 중에서 카마우가 한 일일 것이라고 오해한 응고토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시민군 총사령관으로 변신한 전 직장이자 오래 전에 자기 땅이던 “하울랜즈 농장”의 주인 하울랜즈에게 자기가 한 일이라고 자수해버린다. 이미 파업할 때 응고토를 해고해버린 하울랜즈는 이것이 거짓 자수인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응고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다. 죽기 바로 전까지. 그리고 먼 곳의 기숙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은조로게까지 학교에서 체포해 펜치로 고환을 조이는 등의 극한 고문을 해 감히 주인공이 반 정도 넋이 나가게 만들었으니, 하울랜즈, 무사하게 소설을 끝내기는 글렀다.

  아니나 다를까, 고문으로 몸이 엉망진창이 된 채 집에 실려온 지 며칠 만에 아버지 응고토가 죽어버리고, 공부 잘하는 막내 은조로게는 반쯤 정신이 나가버렸으며, 성실한 카마우는 감옥에 갇혀 언제 나올지, 벌써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야밤을 틈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응고토의 침상에 그림자처럼 나타난 맏아들 보로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귀신처럼 사라져 영국 백인, 하얀 귀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해버린다. 작품 중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둘째 아들 코리는 일찌감치 마우마우 단에 들어가버려 소식도 없다. 이제 이 집안에 남은 유일한 남자는 은조로게.

  응구기 와 시옹오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은 케냐 사람들. 흑인들은 화해를 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어떻게? 스물네 살의 작가, 훗날 매해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 목록에 들 “아프리카 문학의 거인”으로 빛나지만 아직 구상유취한 신삥 작가는 별로 세련되지 못한,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서, 뻔한 방식을 선택해 “가능하지 않은 화합”을 주장한다. 역자 황가한은 이 방식을 아프리카 문학의 최고 거봉이자 후대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의 롤 모델 치누아 아체베의 대표작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오콩고와 비교하며 이들의 앞에 그나마 희망이 남아 있음을 강조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근데 “화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건가? 짧은 작품이니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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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0-08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번 노벨상 후보에만 올라가는데,,, 이번에도 안되겠지요?!
왠지...!
내일 발표네요

Falstaff 2025-10-08 15:11   좋아요 1 | URL
ㅎㅎ 갔어요, 올해.
나머지 휴일 편하게 보내셔요.

감은빛 2025-10-10 0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녀가 스물여덟명이라면, 저는 아이들 이름도 다 못 외우고 얼굴도 바로 못 알아볼 것 같아요. 길에서 만났을 때 화장한 엄마와 동생을 못알아본 적이 있었거든요. 이 많은 아이들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줬을지도 궁금하네요. 저는 둘 밖에 없는 아이들 이름 짓느라 매번 출생신고 마감일까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어요. ㅎㅎㅎㅎ

좋은 글에 쓸데없는 댓글을 주저리 달았네요. 아까 올해 노벨상 수상자의 단편집에 남긴 글도 읽었어요. 헝가리와 케냐 작가들(뿐만이 아니겠지만)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궁금하네요.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5-10-10 07:01   좋아요 1 | URL
만일 n번째 자녀 응구기를 부르려 하면, 응구기의 아버지 시옹오는 1번 부터 n번까지 아이들 이름을 다 불렀을 겁니다. ㅎㅎㅎ 전에도 식구 많은 집안에 항용 그랬듯이요.
이이의 작품 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피의 꽃잎들>이 제일 좋았다고 기억합니다.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네요. ^^
 
엄마의 크리스마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3
쥬느비에브 브리작 지음, 조현실 옮김 / 열림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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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이번 세기 초, 출판사 열림원에서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시리즈의 11번으로 출간한 것을 약 20년 후에 중판, 소위 개정판을 찍은 것이다. 거의 완전히 똑같다. 본문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까지 다 같은데, 시절에 맞게 편집이 읽기 편한 큰 활자체로 널럴해 페이지 수가 좀 늘었다. 당시 열림원 프랑스 여성작가 시리즈는 1번과 2번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알렉시>와 <세 사람>이, 3번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고통>, 4번 나탈리 사로트의 <황금열매> 등 당시엔 명함만 내밀면 세상 어디에서도 말빨 좀 되는 작가들의 ‘길지 않은’ 소설을 망라해, 나도 4번까지 사서 읽으면서 주위를 기울였는데, 그간 숱하게 얘기했듯이, 봉급쟁이 생활 핑계 대면서 인생을 낭비하느라 책 따위를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니 도서관 개가실 뒤지며 시리즈 11번 최초 번역판과 개정판을 동시에 발견한 찰나, 어찌 덥석 쥐어들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쥬느비에브 브리삭은 1951년에 파리에서 태어나 “좌익 영국 지식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유소년 시절에 정규학교 대신 사립학교 또는 홈스쿨링을 했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엄마 이름이 Helene Miserly. 이름만 본다면 굳이 많은 돈 들여 사교육을 시킬 것 같지 않잖아? 브리삭은 여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 외곽에 있는 샌생드니 학교에서 6년 동안 교사로 지내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오래 거식증에 시달리기도 한 모양이다. 교사시절 이후에는 작가, 편집자, 국경 없는 도서관 프로젝트 같은 것에 참여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고. 프랑스의 유명한 사서 빠뜨 여사도 이 “국경 없는 도서관” 프로젝트 참여자다.

  <엄마의 크리스마스>는 이이의 그리 많지 않은 소설작품 가운데 한 편으로 1996년에 페미나 상을 받았다. 교사생활과 거식증은 이이의 다른 작품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판매하고 있는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올가는 학교가 싫다>, <올가는 괴로워> 등 청소년 문학에 영향을 끼친 듯.


  <엄마의 크리스마스>는 영어판 제목이 <으제니오를 잃다 Losing Eugenio>, 원어판은 <Week-end de chasse à la mère> 이건 도무지 우리말로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주인공은 어린 아들 으제니오와 둘이 사는 이혼녀.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가 갑자기 이제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단칼에 붓을 꺾고 여태 그린 그림까지 몽땅, 한 점도 남김없이 다 헐값에 팔아버렸다. 다시 붓을 잡으라고 권하는 유일한 친구 마르타의 권유를 여전히 물리치고 있다. 극장에서 일하다가 해고당한 후 잠깐 실업상태로 있다가 지금은 규모가 크고, 이용객 대부분이 학자, 학자의 조교, 고급 공무원, 하이 클래스 직장인 등인 도서관에서 편한 일을 한다.

  세상 사람이 다 그렇듯이 일부 사람한테는 “정상적으로 살 줄 모른다. 조금 미쳤다.”라는 평판을 듣기도 하지만, 이제는 유일한 가족이자 자기 혈육인 아들 으제니오에게 모든 것을 집중해 살고 있다. 이것 역시 사람들은 으제니오로하여금 뭐든 엄마한테 일임/의존하게 만들어 둘만 생활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심지어 이제 자기 생각을 제법 하면서 그걸 표현하기 시작한 어린 으제니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뭐 다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 싶은데,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굳이 문제점을 뽑아 이를 크게 부풀려 사건을 만들고 펑 터뜨려버리는 인간들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지극히 평범한 이 홀어멈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작품은 12월 23일에서 26일까지 4일 동안 생긴 일이다. 주인공은 화자 ‘나’이지만 편의상 ‘나’ 대신 그의 이름인 누크, 즉 3인칭으로 쓰겠다. 일일이 작은 따옴표 치기가 귀찮아서.

  시작하면 옹색한 아파트 안의 모자, 누크와 으제니오. 이들이 남편, 아빠와 헤어진 이후 2년 동안 살고 있는 곳이다. 당시에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계단을 누크는 으제니오를 주로 안고 올라왔는데 이제는 제법 다 컸다고 자기 주장이 보통을 넘는다. 으제니오가 묻는다.

  “엄마, 엘리자베스 여왕은 행복하게 살았을까?”

  웬 엘리자베스 여왕? 근데 이 여왕이 이들의 우상이자 밥이고 수수께끼이며 속죄양이란다. 이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누크는 여왕이 그만하면 행복하게 산 셈이라고 대답한다. 자식한테 좀 실망을 해서 그럴 뿐이라고. 아들 둘 낳고 이혼한 왕세자 부부를 얘기하는 건가?

  이들의 대화가 재미있어서 조금 변형해보자.

  겨울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돌의자에 앉았는데 (카를 슈테른하임의 희곡 <속바지> 장면처럼) 딱 이때를 맞추어 팬티 고무줄이 끊어졌다면? 돌의자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팬티가 드레스 밑으로 툭 떨어진다는 것이 전제사항. 만조백관과 상궁, 무수리가 보고 있는 앞에서 여왕의 빨간 빤쓰가 떨어지면 무지하게 무안한 일이겠지?

  엄마: 품위를 지키느라 돌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앉아 버티다가 얼어 죽는다.

  아들: 건장한 호위병 20명을 불러 여왕이 앉은 채 돌의자를 번쩍 들어 내실까지 옮긴다.

  이래서 여왕은 또한 이 가정의 밥이고 수수께끼이고 속죄양이라는 뜻인가보다.


  이제 사소한 사는 이야기들. 으제니오가 맥도널드를 먹고 싶다 해서 엄마가 햄버거, 튀긴 감자 한 봉지, 중국 소스와 빨대를 가져와 먹고, 햄버거를 사러 가는 길에 만난, 앞으로 작품에 다시 출연할 일 없는 이웃들, 이런 것들이 자잘하게 깔려 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으제니오를 향한 누크의 배려와, 이를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게 생각하며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일종의 천부 권리라고 여기는 아들 사이의 갈등이 나열된다. 엄마가 아무리 열심히 새끼 바라지를 해봐라, 불만 없는 새끼들 하나라도 있는지. 누크도 이것을 안다. 자기도 하느라고 하지만 가끔 소리도 빽 지르고, 눈도 흘기며, 손이 번쩍 올라갔다가 슬그머니 내려오기도 하니까.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아픔을 주지 않는 엄마, 한없이 자애롭기만 한 엄마, 완벽한 엄마는 오로지 죽은 엄마밖엔 없다?


  며칠 있으면 크리스마스. 아직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지 않았고, 명절을 어떻게 보낼 생각인지 계획한 것도 없으며, 심지어 어떤 선물을 해줄지 묻지도 않았다. 으제니오는 이번 크리스마스도 작년, 재작년처럼 좁은 아파트에서 엄마하고 둘이서 조촐하게 지낼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누크도 아들의 심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건만 그렇다고 연락할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은 다 친구들 나름대로 계획이 있을 것인데, 생각해보니 마르타 말고는 친구다운 친구도 없다. 마르타 집에는 15년 전에 한 번 가봤을 뿐이다. 마르타는 괜찮은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나 젊은 시절의 계획 대로 무자식 상팔자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편과도 나쁘지 않지만 따로 만나는 남자, 그러니까 샛서방과의 섹스는 할 때마다 숨이 넘어갈 만큼 좋다. 그러니 이 가족한테 신경 쓸 틈이 없을 것. 가까운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것도 괜찮은 일.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모자 둘이 따뜻한 방 안에서 맛있는 거 먹고 즐거운 이야기하며 지내면 그게 장땡이지 뭐가 부러울꼬?

  이건 엄마 생각일 뿐. 아이는 전혀 아니다. 그리하여 시리얼을 먹으면서 일단 요구하기를, 나, 새 한 마리 사줘.

  그래서 모자는 추운 겨울날 외출을 감행한다. 도핀가의 밀집한 장난감 가게 가운데 한 곳을 들렀다가, 샤틀레 광장을 지나니까 애완동물 가게가 또 나란히 서 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마침 눈에 띄는 간판이 있다. “파파게노.” 가게 이름이 ‘새잡이’라서 새 하나는 믿고 살 수 있겠다 싶어 시뻘건 얼굴의 식인귀처럼 보이는 여주인한테 카나리아 한 쌍을 산다. 아담과 이브. 암수 구성이겠지? 식인귀 여사님이 그렇단다. 결론적으로, 아니다. 둘 다 수컷이었고, 몸집이 작은 이브는 바로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를 만나러 천국으로 날아간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한 아름 들고 온 새 두 마리, 새장, 각종 사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작은 장난감 등은 몰라라 하고 소파로 튀어 올라가더니 TV를 켜고 오락 프로그램을 보는 으제니오. 아이가 사온 것을 정리하느라 옷도 벗지 못하는 누크한테 대로 외친다.

  “나 배고파!”


  크리스마스 전날에도 출근한 누크. 어제는 해가 서쪽에서 떴는지 친구 마르타가 전화해서 같이 밥 먹자고 하더니, 식당에서 이번 크리스마스, 내일 자기 집으로 오란다. 방사선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치과의사이자 무자식상팔자주의자. 자기만 보면 요즘 만나는 남자가 얼마나 섹스를 잘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려는 마르타. 마르타한테도 자기 마음을 까발린 친구는 누크 한 명밖에 없을 터이다. 탁 보면 알지.

  때마침 으제니오가 직장에 전화해 엄살을 피우는 바람에 반차를 내고 집에 돌아와, 마르타가 예약해놓은 기차를 타고 브루타뉴의 집에 도착해, 무려 열다섯 명에 이르는, 아니지 모자를 빼면 열세명의 식구와 함께 크리스마스 밤을 보내는 으제니오와 누크. 뭐 행복한 크리스마스였다면 소설이 안 되겠지? 그렇기는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다음날, 그러니까 12월 26일 아침에 벌어진다. 무슨 이야기?

  아이고, 그게 결말인데, 당연히 안 알려드리지.

  그저 이 책의 세 가지 언어로 된 제목으로 추리를 해보시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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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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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쿠네오 지방의 산토스테파노벨보(Santo Stefano Belbo)에서 1908년에 태어난 소설가, 시인, 역자, 문학평론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이후 교육은 서부 알프스 남부를 면한 토리노의 마시모 다젤리오 고등학교에서 받았는데, 특히 영문학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월터 휘트먼의 시에 관한 논문을 써서 토리노 대학을 졸업한다.

  1908년생이 20대를 맞으면 1930년대. 이탈리아는 일 두체, 무솔리니가 집권하여 반도 전체에 검은 티셔츠를 입은 파시스트들이 창궐한다. 파베세 주변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비정치적인 성향의 파베세도 반파시즘 서클에 가입했을 지경인데, 1935년에 정치범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죄목으로 체포당해 잠깐 형무소 구경을 하고 남쪽으로 유배 비슷한 confine(유배, 추방) 당하기도 했다. 이후 파시스트 군대에 소집되었으나 천생 약골인 파베세는 마침 천식이 도져 군병원에서 반년 동안 천식만 다스리고 돌아온 꼴이 되었으니, 이걸 뭐라 그래? 맞다. 새옹지마塞翁之馬. 다시 토리노에 돌아오니 그곳엔 벌써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친구들 대부분은 항 독일 파르티잔을 꾸려 산으로 들어갔다. 파베세는 마음은 굴뚝이지만 차마 파르티잔까지는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토리노에 남아 있으면서 독일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니 북부 이탈리아 시골의 한 언덕에 몸을 숨긴다.

  전쟁이 끝난 후에 파베세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입당해 당의 신문인 <루니타>에서 일했다. 종전이 1945년이고 파베세의 몰년이 1950년이니 이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신문사에 근무하던 때가 그가 가장 활발하게 글을 쓰고, 책을 발간한 시기였단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자신의 고향인 피에몬테의 랑게 지방을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당연히 출생지인 산토스테파노벨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달과 불>을 감안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가족이 다 고향을 떠 대도시에 살았으면서도 해마다 파베세와 파베세의 아버지가 태어난 산토스테파노벨보에서 여름을 지내는 걸 행사처럼 했던 모양이니.

  이후 파베세는 여배우 콘스탄스 다울링과 짧지만 격렬한 연애를 시도했다가 장렬하게 걷어 채이고, 그래서 우울증이 조금 도졌나 싶은데, 정치적 환멸까지 덮치는 바람에 엣다 모르겠다 싶어 안정제, 바르브투르산염을 한 주먹 꿀떡 삼키고 그 길로 천국의 안녕을 찾아갔으니 그의 나이 마흔둘, 한반도에선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1950년 8월이었다.


  <달과 불>의 무대는 파베세가 태를 묻은 땅 산토스테파노벨보 마을이다. 화자는 이곳에서 태어나 세상을 둘러보고 재산을 불린 상태로 일년에 한 번 정도 고향에 돌아와 여름을 지내는 ‘나’. 얼핏 생각하면 ‘나’가 작가 체사레 파베세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아니다. 이 책은 픽션. 그래도 작가가 외부에서 얻은 경험이 없었더라면 작품을 이렇게 쓸 수 없었을 터이니 당연히 작가의 흔적이 여기저기 드러난다.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지어 어머니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 당연히 산토스테파노벨보, 즉 살토 마을에 집도 없다. ‘나’는 살토 마을의 알바 성당 계단에 버려졌다. 서양에서는 사생아를 낳기는 했는데 키울 자신이 없으면 대개 성당이나 교회 계단 앞에 바구니에 넣어 버리는 모양이다. 우중충한 소설 <리틀 라이프>에서도 주인공 주드 역시 교회인가 성당 옆 쓰레기더미 위에 발가벗겨진 상태로 발견된 거 기억하시지? 이런 아이들이 크면 다 주인공 한다니까?

  알바 성당의 주임신부는 ‘나’를 바르질리아와 파르디노에게 키우라고 했는데, 이 부부는 벌써 두 딸 안졸리나와 줄리아를 둔 지독하게 가난한 농부였다. 훗날 생각해보니 혹시 ‘나’를 거둔 이유가 내 덕분에 빈민구제원에서 매달 5리라씩 나오는 양육비 지원금을 받기 위해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기는 했다. 당시 맡겨진 사생아를 기르는 유일한 사람/계급은 가난한 (주로)농부 부부로 그나마 현금을 만져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농부 파르디노는 ‘나’가 좀 더 자라면 여기 ‘가미넬라 오두막’을 떠서 더 큰 농가로 이사해 ‘나’와 함께 일하면서 더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 키우려 했던 듯하다. 바르질리아와 파르디노는 결코 ‘나’에게 티가 날 만큼 못되게 굴지 않았고, 두 딸 역시 친형제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면 합리적인 남매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지낸 듯하다.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일 뿐, ‘나’가 열두서너 살에 이르자 바르질리아가 병들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르디노는 가미넬라 집을 팔아 두 딸을 데리고 코사노로 이사했다. 나는 가미넬라 오두막에 비해 무척 큰 모라 농장의 하인으로 보내 버리고. 알고보니 파르디노 역시 코사노의 농장 하인으로 들어간 거였다. 나중에 나오는데, 두 딸 모두 결혼했지만, 동생 줄리아는 결혼하자마자 들판에서 일하다 번개를 맞아 즉사했으며, 안졸리나는 아이를 일곱인가 줄줄이 낳고 없는 살림에 엉망으로 살았던 모양이다. 파르디노는 사위들한테 핍박을 받으면서 나중에는 코사노 마을의 성당 부근에서 동냥을 하다가 거리에서 죽었나? 하여간 비슷하게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나’는 모라 농장에 하인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당당한 성인으로 자라 관리인도 함부로 소리치거나 채찍을 들지 못하는 지위를 얻는다. 농장 주인 마테오 씨는 먼저 세상을 뜬 첫 아내와의 사이에 다 큰 두 딸, 이레네와 실비아를 두었고, 두번째 결혼하여 얻은 계모 사이에 작고 예쁜 딸 산티나를 낳았다. 이곳에서 온전하게 사춘기를 보낸 ‘나’는 당연히 농장주의 두 딸 이레네와 실비아에게 상당한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보기에 이런 과정을 지극히 무난하게 거쳤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공부를 했더라면 잘 했을 거 같다. 사춘기의 폭격을 잘 다스리기가 쉬운 게 아니거든. 특히 어린 수컷들 말이지. 근데 이레네와 실비아는 지금이 딱 십대 말부터 이십대 초기이니 어찌 혼담과 연애담이 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라 농장에 피어난 두 꽃을 따기 위해 탐욕스런 벌과 나비들이 몰려들고, 꽃송이 둘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꽃 모가지가 부러질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불행한 생각은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 좀 더 분방한 실비아는, 동네에서 1번은 아니더라도 꽤 있는 집의 음전한 처녀지만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뱄고, 자기 딸이 이런 신세가 됐다는 걸 안 마테오 씨가 충격을 받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재수없게 딱 시기가 맞아서 그랬는지, 이 사실을 알자마자 뇌졸중이 발생해 반신불수가 되어 버린다. 실비아는 자기 일이니 자기가 처리한다고 독한 마음을 먹고 당연히 무면허 산파를 찾아가 중절수술을 해버렸는데, 다음 날 돌아와 매트를 피범벅으로 만들더니 그 길로 죽어버렸다.

  이레네는 집안이 이렇게 어지러워지자 어쩔 수 없이 동네에 좀 사는 집 건달 아르투로와 결혼했다. 집 재산의 절반을 뚝 잘라 지참금으로 만들어서. 결혼하자마자 아르투로는 농장으로 들이닥쳐 이레네 소유의 모든 부동산을 팔아버리고 토리노로 이사한다. 워낙 술과 도박에 일가견이 있는 사위 아르투로는 금세, 정말 눈 깜빡 할 새에 이레네의 지참금을 날려 버리고, 이제 이레네를 들들 볶기 시작한다. 아무리 볶아도 이젠 평소 얌전하고 착한 심성에 피아노까지 잘 치는 이레네를 눈에 가시처럼 싫어한 계모한테 5리라짜리 지폐 한 장 얻어내지 못하자, 아르투로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숨이 넘어가지 않는 이레네를 때리기 시작한다. 이레네, 조금만 참아라. 세월은 빨리 갈 것이고, 술 처먹고 도박하는 네 남편이 너보다 훨씬 먼저 약해질 터이니 그 때가 오면 마음 단단히 먹고 복수할지어다.


  한편, 젊은 시절의 동네 악사이자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누토. 행사나 축제, 무도회가 있으면 그곳이 벨보강 인근의 지역사회이기만 하면 악단을 꾸려 달려가 밤새도록 몇 날 며칠 동안 클라리넷 불고, 트럼펫 불고, 술 한 잔 마시고, 또 연주하고, 술과 고기 먹고, 다시 연주하고, 춤추고, 포도주 마시고, 연주하고, 술과 고기 먹고, 새벽놀이 지고, 춤꾼들이 전부 뻗어버리는 것을 보고난 다음에, 식당 옆 아무 곳에서나 악단들과 찌그러져 자다가 변변치 않은 수고료를 받으면 단원들끼리 또다시 포도주와 걸진 고기를 먹고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지상 최대의 낙으로 삼았다.

  그래도 머리가 깨어 일찍 글자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배워, 하여간 활자가 찍힌 종이가 눈에 띄었다면 무조건 읽고 보는 성격이라 아는 게 많았다. 특히 유산자와 무산자, 재산의 생성과 분배, 그리고 계급에 관해서는 아주 빠삭해 훗날 공산주의자가 될 충분한 자질을 쌓았다.

  음악을 연주하면 신나고 좋기는 하지만 집에 가져가는 것이 거의 없는 걸 깨달았다.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다. 이제 인생을 탕진하는 것이 지겨워졌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가업인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손재주가 여간 좋은 게 아니라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음악이 좋기는 하지만 음악은 자기를 지배하는 나쁜 주인이란다. 인생을 탕진하는 악습만 붙여주는 주인. 누토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음악 대신 차라리 여자한테 빠지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고는 했다.

  누토는 ‘나’에게 달과 불에 관한 미신을 말해준다. 예컨대 보름달이 떴을 때 소나무를 자르면 벌레들이 다 먹어버릴 것이라는. 나무통은 초승달이 떴을 때 씻어야 하고, 접붙이기도 초승달 무렵에 하지 않으면 잘 붙지 않는다는 미신. “만약 달과 불이라는 미신을 이용해 농부들을 강탈하고 무시 속에 머물게 한다면, 바로 그가 무지한 자이며, 그를 광장에서 쏘아 죽여야 한다.”고 즉 미신을 퍼뜨려 가난한 농부나 생산자를 강탈하는 계급, 부르주아 계급을 척결해야 한다는 누토의 공산주의적 생각이다. 이 작품은 공산주의자며 공산당 기관신문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작가가 쓴 작품인 것을 읽는 내내 감안하는 것이 좋다.


  ‘나’는 전쟁 전에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밀라노에서 일을 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전쟁 기간 중에 제법 돈을 만진 다음,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 큰 돈을 일구었다. 작가 체사레 파베세가 그랬듯이 작품 속 주인공 ‘나’는 작년부터 8월 중에 그래도 ‘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고장 산토스테파노벨보에 와, 광장에 있는 안젤로 여관에서 두 주일 정도 묵었다. 이 기간 동안 성모승천대축일, 8월 15일도 끼어 있어 옛 생각을 하며 가톨릭 축제와 무도회에 참석하지는 않지만 구경할 수는 있다. 예전 친구 누토가 미친듯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가톨릭 믿는 사람들은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시가행진, 축구시합, 가면무도회 등 시끌벅적한 축제를 벌인다. 성모승천대축일. 성모가 승천했다니까 죽었다는 얘긴데 성모 마리아가 죽은 게 그리 기뻐서 축제를 연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우리가 아는 죽음이 아니라, 성모니까 성자 즉 그리스도와 성부聖父이자 성부聖夫인 하느님 가까이 곁으로 가는 길이니 축하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올해도 ‘나’는 고향에 왔다. 마흔이 넘었고, 떠나기 전보다 더 커진 몸을 가진 건장한 사내. 사람들은 ‘나’가 집을 사러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아메리카노’라고 부르면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자일 것이라 여겨 자기 딸들을 인사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나’는 고향을 둘러보기 원한다. 벽돌 하나, 나무 하나하나, 포도밭과 염소, 개울, 수풀, 밀밭 등등. 다 자신의 흔적이 묻은 곳. 그리고 가미넬리 오두막과 모라 농장의 변한 모습과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을 향한 일종의 그리움과 회한과 이젠 흐려져 없어지고 만 언짢음. 특히 당시 자기보다 조금 더 위, 그리고 또래나 약간 작은 나이의 아가씨들은 어떻게 됐을까?

  공산주의자 친구 누토와 함께 ‘나’는 고향 살토 마을 인근을 걸으며 만나고, 보고, 듣는다. 이탈리아 작가들의 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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