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공인 미남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5
박상률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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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일 마지막 차례가 “시인의 말”이다. 인용한다.


 나는 늘 / 시 한 줄로 감동을 못 주기 때문에 / 소설과 동화를 여러 권 쓰고 있다고 말한다. / 그러면서도 / 소설과 동화에 안 맞는 이야기는 어찌해야 할지 늘 고민했다. / 여기 묶은 시편들은 / 소설과 동화로 쓰기엔 ‘쪼깐 거시기’했던 이야기들이다. / 음식은 그 음식에 맞는 그릇이 있다. / 간장을 접시에 담지 않고 / 국이나 밥을 간장 종지에 욱여놓지 않는다. / 그래서 / 이야기가 나를 찾아오면 / 그 이야기에 맞는 장르를 택해 이야기를 담아냈다. // 그간 이야기 속에서 살았고 / 앞으로도 이야기 속에서 살 것이다 / 산다는 건 이야기를 만나는 것 아닐까? /// 2016년 여름 무산서재(無山書齋)에서 / 박상률


 ‘시인의 말’을 진심으로 썼다면, 시 한 줄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시인일까? 이이가 쓴 책을 검색해봤더니 105권의 책이 나온다. 105권 가운데 절판이나 품절 품목 빼고 당장 살 수 있는 책이 74권. 74권 중에서 시집은 실천문학사의 <국가 공인 미남>과 지만지에서 나온 <꽃동냥치>만 보인다. 이이의 대표 시집은 <진도 아리랑>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게 기억이 나 <국가 공인 미남>을 선택해 읽었다. 정작 <진도 아리랑>은 절판이라 구할 수가 없다. 시집을 다 읽고 ‘시인의 말’을 보는 순간, 나는 초두에서처럼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 한 줄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시인일까?”
 시로는 감동을 주지 못해서 소설과 동화를 무려 백 권 가까이 낸 사람. 심지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우리말로 옮겼다고 주장하는 이. 시공주니어에서 찍은 열 권짜리 <우리말로 쉽게 풀어 쓴 완역 삼국지>, “지은이 나관중, 그림 백XX, 옮긴이 박상률” 이렇게 쓰여 있으면, 역자 박상률이 당연히 나관중이 쓴 표의문자를 한글로 옮겼다는 뜻이다. 맞지? 내 상식으로는 맞다. 근데 믿지는 못하겠다. 심각한 비극이다. 독자인 나는 절대로 박상률이 나관중의 원문을 보고 직접 옥편을 찾아가며 번역했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거. (아, 정말 이이가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다. 내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로 손수 번역했으면 송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개 출판사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의 미덕은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 책도 그렇다. 쓸데없이 사용한 난감한 비유법이나 기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시 읽기를 마치는 순간, 시가 주장하는 바를 즉각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뭔가를 착각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시집에서 내가 읽을 수 있기 바라는 건 절대적으로 “시” 자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제목을 단 이 시집은, 말이 시집이지, 읽는 기분을 그대로 얘기하자면, 종이 위에 인쇄한 ‘트윗’들이다. 한 트윗에 올리기엔 글자 수가 좀 많은 것들을 종이에 인쇄한 것. 시인의 말대로 소설과 동화에 쓰기에는 ‘쪼깐 거시기’한 것들을 골라 시로 써서 시집으로 만들었다고? 그러면 본업은 소설가 또는 동화, 또는 청소년 문학전공 작가인데 ‘쪼깐 거시기’한 것들, 산문에는 어울리지 않겠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골라 시의 틀을 입혔다는 얘긴가? 그래, 내용이야 어쨌건 간에 시인이 시라고 주장하면 그건 시다. 일찍이 (좀 사납기로 이름난 미모의 인기 시인)김XX에게 누군가가 “이게 시냐?”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김XX 시인이  “그래 시다, 씨발놈아!”라 답글을 쓰려다가 열을 삭히고 그냥 메시지만 지워버렸다는 내용의, 트윗을 했단 얘기도 들었다. 그러니 이것들도 틀림없이 시일 것이다.
 가장 최근의 현대사에 보수당 출신 대통령이 둘 있었다. 이들에 대해 많은 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두 개만 소개한다.



 변태(變態)



 애초에
 오렌지가 어린 쥐로 바뀌는 걸 보여주더니
 나중엔
 도둑 정권과 도덕 정권의 차이도 없애버렸나니!


 얼핏 보면
 영장류 닮은 동물인데
 실은
 설치류를 대표하는 동물이라네
 그래서


 지랄도 쥐랄이 되얐디야  (53쪽, 전문)




 별호



 소주가 ‘쏘주’로 톡 쏘지 않는 술자리
 어느 작가 말하길, 내 별호를 ‘이새’에서 ‘씹새’로 바꿨어!
 옆 사람들 뭔 소리인가 싶어, 왜?
 책 내면 2쇄가 어디야라고 해서 ‘이새’라고 했는데,
 이젠 10쇄를 염원해야 될 것 같아.
 그러자면 ‘씹새’라 해야지……
 모두들(옆자리 사람들까지), 하하하!


 18년 동안 독재한 자칭 불행한 군인의 18년,
 18년의 발음이 묘하게 거시기하네, ‘씹팔년!’
 그 ‘씹팔년’을 우려먹고 사는 어떤 상속인 있고……
 그 ‘씹팔년’이 좋다는 지지자도 있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52쪽, 전문)


 

 이것들이 시다. 이걸 읽고, 이게 시냐? 라고 묻지 마라. 대답은, 그래 시다, 씨발놈아! 이기 십상이니. 읽기를 끝마치자마자 한 번에 누구를 희화화한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쉬운 시. 명쾌하다. 명쾌해서 좋다. 근데 너무 명쾌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불쾌하다. 내가 위에서 종이 위에 인쇄한 트윗이라고 했던 이유다. 이 씨와 박 씨를 향한 거의 욕설과 비등한 수준의 위와 같은 희화화가 이것 하나씩만이 아니다. 시집을 마칠 때까지 과장해서 퐁당퐁당, 하나 건너 한 개씩이다. 물론 과장을 좀 하자면 그렇다는 뜻. 이 씨와 박 씨가 없었으면 어떻게 시의 소재를 구할 수 있었을까 궁금할 정도. 뒤에 해설을 보면 초기 시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세월이 흘러 이렇게 변했을 수 있다. 변했거나 말거나 나는 이 시들을 읽으며, 군중 속에 섞여 다중의 무리가 외치는 선동적인 욕설을 그냥 따라하는 시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이 씨 정부 초기 촛불 집회가 한창인 어느 날, 광화문 거리에 있었것다. 그때 마침 무거운 방송용 카메라를 어깨에 들쳐 멘 사내 둘이 다가와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보매, 두어 달 전 책 읽기 방송 일로 만난 적이 있는 ‘구면’들이었다. 본시 카메라를 보면 살짝 ‘울렁증’이 있는 인종이라 ‘이크’ 잘못 걸렸구나 싶어 수풀 속 꿩처럼 머리만이라도 들이박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인산인해 지경이라 달아나지 못하고 카메라 낚시에 딱 걸리고 말았으니, 일수가 몹시 사나웠던 것이라 자위하고 말았다.”  (<나, 어떡해?> 부분,  44쪽)


 현직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이며, 공중파 방송에 책읽기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카메라를 보면 울렁증이 생긴다는 말도 미덥지 않을뿐더러, 카메라를 보는 순간 인산인해, 사람들의 틈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던 건 왜 그랬을까. 이 씨 정부 초기면 과거 노 전대통령이 추진해온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일 것이다. 당시 사촌 동생이 가톨릭 농민회던가 하여간 카농에서 한 자리 했던지라 잘 기억한다. 시인이라고 이런 집회에 나가 군중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지 말라는 법, 없다. 잘 했다. 집회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건 절대적으로 본인의 자유의사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구호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쓸 수 있는 마땅한 자리는 원고지가 아니다. 어딘가 하면, 트윗이다. 한 번 정도면 원고지도 좋겠지. ‘퐁당퐁당’이면 적당한 자리는 역시 트윗이고.
 시를 읽어가며 나는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시인이 58년 개띠. 시집을 내기 위해 최종적으로 시를 검토한 시기가 2016년. 그의 나이 쉰아홉. “팔만대장경 구석구석 다 뒤져봐도 / 누울 와(臥)자보다 더 좋은 글자 없고 / 사서삼경 위아래로 다 훑어봐도 / 먹을 식(食)자보다 더 좋은 글자 없”는 속을 알 만한 나이(<낱말 찾기> 14쪽)에 이른 시인은 전직, 현직 대통령들에게 “설치류를 대표하는 동물”이라고도 하고, “‘씹팔년’을 우려먹고 사는 어떤 상속인”이라고도 한다. 시인은 쉰아홉 살의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대학교수는 대표적인 인텔리 계급으로 치는 것이 보통. 근데 이 시인이 아주아주 팔팔했던 20세기가 궁금한 건 왜 그렇지? 특별하게 콕 집어서,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시절엔 어떤 시를 썼을까? 시집의 제목 <국가 공인 미남>이 무슨 뜻인가 하면, 소설가 송기숙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이에게 전국으로 지명수배령이 내려 송기숙, 이문구 등의 컬러 사진이 시골 차부에도 걸려 있었는데, 송선생의 사진 아래 선생의 외모를 두고 “이 자는 호남好男형으로…” 운운했다는 거다. 국가가 송선생을 일컬어 미남이라고 했으니 국가 공인 미남 아니겠느냐는 뜻. 그것도 송선생과 이선생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주고받던 농담에 섞여 나온 말이다. 시인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나도 알고, 시인도 알 듯, 송선생이나 이선생은 시국사범으로 몇 번이나 걸려 곤욕을 치룬 투사형에다가 타고난 반골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두 깡패한테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혹시 시인 박상률, 그는 폭압적인 전두환 집권 시절엔 찍 소리도 못하다가 세월 좋아지니 이리도 험한 욕설을 마음껏 퍼붓는 거 아닌지가 매우 궁금했다. 시가, (송기숙 선생이나 이문구 선생의 글들과는 달리) 불의에 항거하는 장부丈夫의 노래라고 읽히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뭐 하긴, 특정한 역할을 했건 안 했건 정부에 대고 욕하는 건 민주시민의 권리이기는 하다. 나이 든 중늙은이가 입이 좀 험한 게 ‘쥐랄’이긴 하지만.
 시인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던 이유. 시인이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제발 아니길 바라는 충정 때문이라고 치자. 그렇게 생각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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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1
홍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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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조정래의 <태백산맥> 초판이 나오기도 전이었을 거다. 정확하게 몇 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6월의 한 월간 문학잡지 특집으로 한국의 전쟁소설을 다루었다. 당시 난 한 방 맞은 거 같았다. 1920년대에서 40년대 초반에 태어난 작가들이 숱하게 한국전쟁을 소재로 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전체를 구성해서, 따져보고, 의미를 부여하고, 정의를 내리는 작품을 읽은 적이 없어서였다. 지금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평론가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한국 최고의 전쟁소설을 선택해서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 특집이었던 것 같다. 누구는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꼽았고, 어떤 이는 유명한 <광장>을 들었는데, 누군가가 홍성원의 <남과 북>을 지목하며 이 작품이야말로 한국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대작이라 이야기할 때부터 <남과 북>에 관심을 두었었다. 잡지를 읽고 곧바로 찾아간 도서관 개가실에서 이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기억하기로 무척 두꺼운 양장본 몇 권으로 구성된 것에,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일단 분량에 쫄아서, 일독을 다음으로 미루었었다. 그리고는 당연히, 다른 재미난 책들도 얼마든지 많았기 때문에, 제목만 기억한 채로 무한정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새 머리엔 흰 눈이 쌓였고, 눈은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세월, 정말 별 거 아니다. 별 거 아닌 세월을 쓰며 정작 내가 읽은 <남과 북>은 엘리자베스 클래그헌 개스켈이 빅토리아 시대에 쓴 영국 소설이었으니 생각해도 좀 우습고 약간 쪽팔리기도 했다. 그래 당시에 늦게나마 홍성원의 <남과 북>을 읽어보려 했지만 책은 품절이 되고 말았다. 이제 늦게나마 초판이 아니라 2000년에 작가가 대폭 고쳐 쓴 개정 중판 <남과 북>을 헌책방에서 찾아 읽었다. 만시지탄이 있기는 하나 아예 읽지 않은 것에 비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모두 2,500쪽이 넘는 대하드라마. 길기만 해서 “대하”란 접두사를 붙여주지 않는다. 이 타이틀을 얻으려면 한 가지 큰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조망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관통해 그려내야 한다. 이 책 덕분에 즐겁고도 살처럼 빠른 한 주일을 보냈다. 작가는 재판을 내면서, 처음 출간할 1977년 당시에는 엄혹한 파시즘, 유신체제의 박정희 시대라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왜곡할 수밖에 없었고, 상당부분 편향된 시각으로 소설을 써야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틀림없이 이 작품을 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한국문학, 특히 소설 쪽에서 가장 각광을 받았던 분야가 이른바 호스테스 소설이란 건, 이미 세월이 너무 흘러 기억하는 독자가 별로 없을 것이다. 문화적 암흑시대. 무수한 유행가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됐던 시기. 시인, 작가들이 쓸 수 있었던 소재는 사실 거의 없었다. 착한 마음씨의 아가씨가 가족 돌보느라 어쩔 수 없이 술자리 접대부의 길을 선택해 자기 인생 종치는 이야기 말고는. 이런 시대에 한국전쟁에 관한 소설을 썼으니 국군은 무조건 선하고, 인민군은 악의 화신으로 그려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작가가 1937년생이니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치룬 전쟁의 여러 모습은, 같은 시대를 경험한 조금 윗세대의 경험담까지 보태 다양한 진실을 알고 있었을 테다. 실제로 주인공들 가운데 한 그룹인 우씨(禹氏) 가문은 여지없이 작가 홍성원의 고향인 수원 부근의 한 농촌마을로 보이기도 한다.
 다시 세월을 좀 거슬러 월간 문예지의 전쟁소설을 인용, 기억하면, 잡지의 편집인이 왜 한국에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나 앙드레 말로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는가, 라고 탄식했던 것 같다. 물론 비단 이들 뿐이랴. 이제 늦게나마 책을 좀 읽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전쟁을 소재로 해서 무수한 작품을 만들었고,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동시에 적어도 문제의 그 월간 문예지가 나왔을 무렵까지는 대한민국에선 아예 기본적으로 전쟁소설이나 반전문학을 움틔울 여건이 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하게 됐다. 지금이야 자연스럽게 스스로 양심의 자유라는 범위에서 작가들이 거의 모든 분야를 소재로 글을 쓰지만, 박정희의 유신보다 더 살벌한 파시스트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지배”의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의 ‘전쟁의 공포’를 강제로 주입시켜왔기 때문에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자신의 직접 보거나 이야기를 들은 대로 전쟁의 추악한 면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2000년에 개작해 다시 나온 <남과 북>에서 제일 먼저 돋보이는 것은 주인공들이 남한 사람에 국한하는 게 아니라 이북 사람들도 주인공의 일원으로 등장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사명감을 갖고 목숨을 거는 장면이었다. 여인네들을 집단 윤간 혹은 그냥 능욕하는 군대는 물론 우연이겠지만 국군과 미군으로 추정되는 외국군이다. 중공 오랑캐는 꽹과리를 두드리며 인해전술로 무지막지하게 쳐들어온 야만인이 아니라, 불과 몇 년 전 전 중국인민들의 전적인 비호와 도움을 받으며 혁명에 성공한 인민의 군대답게 통치지역에서 추호의 약탈과 학살을 허락하지 않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군대로 등장한다. 수만리를 걸어 대륙을 관통했던 중국 붉은 군대의 대장정을 떠올리면 정말로 그랬을 것 같다. 중공군 고위 장교는 이북의 인텔리 장교와 함께 이동하면서, 거동이 불편한 늙은이들을 제외한 인민들은 모두 인민군들의 남하를 피해 도주하느라 정복지마다 아무도 없이 텅텅 비어있는 상황을 보며, 해방전쟁의 실패를 지적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또한 미국의 언론사 특파원과 정보기관에 소속한 영관급 장교를 등장시켜 한국전쟁이 당시 세계 정치판에 미친 영향, 특히 미국의 국내 정치가 어떻게 한국전쟁을 변질시키는지 다른 어떤 작품보다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건 내 오래된 의구심, 어떻게 휴전선이 전쟁 전의 38선과 거의 유사하게 그어졌는지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힌트를 준다. 이상하지 않은가. 전선이 처음엔 남쪽으로 초음속의 속도로 내려가다가 순식간에 또 비슷한 속도로 압록강변까지 치닫는데, 다시 한 번 순식간에 서울이 떨어지는 롤러코스터 비슷한 전쟁. 그러다가 그 후 2년 4~5개월동안 고착되는 전선. 미친 듯이 내려오거나 올라가지는 못했을지언정 어찌 그리 힘의 균형이 잡혀 38선 부근에 그대로 정체할 수 있었을까. 세계 전쟁사에 이런 경우가 있었나 싶다. 오래된 궁금증이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풀렸다. 그리고 그걸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 굳이 가르쳐드리고 싶지 않다. 지금은 품절이지만 책이 시장에 나오면 직접 읽어 아시라는 뜻에서.
 레마르크나 말로의 작품을 그래도 제법 읽어봤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헤밍웨이, 조지프 헬러를 포함한 그들과 홍성원을 비교하자면, 서양 작가들의 경우, 전쟁이나 혁명의 규모가 한국전쟁보다 월등하게 커서 그런지 소설의 시공간적 무대인 전쟁, 혁명의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 한 개인이나 사건에 국한한 작품을 쓴 반면, 홍성원은 한국전쟁 전체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점. 전쟁의 의의와 전쟁을 치룬 한국, 한국인들의 특징과 성격을 확실한 톤으로 말하고 있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의 작품보다 더 윗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왜 2000년 판 홍성원의 <남과 북>이 품절일까. 어느새 시절이 한국전쟁에 관해 논의하는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세월로 변했을까? 이건 확실하게 하자. 한국전쟁과 전쟁의 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을 통치의 한 방편으로 삼는 일을 반대할지언정, 지난 세기 한가운데 벌어진 불행한 전쟁의 진정한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해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을. 이런 의미에서 홍성원의 기념비적인 작품 <남과 북>은 언제나 품절 상태에 있으면 안 될 우리의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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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장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5
샤오홍 지음, 오수경 옮김, 티엔친신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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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한 티엔친신. 한문으로 쓰면, 전심흠田沁鑫. 옥편 찾았다. 심沁. 스며든다는 뜻. 흠鑫은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 동네의 중국음식점 이름에 같은 한자가 있어 벌써 전에 옥편 찾아본 글자. 기쁘다는 뜻. 그래 ‘전심흠’은 기쁨이 스며든다는 이름이다. 발음은 모르겠고 뜻이 참 좋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다.
 제목부터 생사장. 나고 죽는 마당이다. 1930년대 초, 흑룡강성 하얼빈 인근의 농촌을 무대로 해서 지주와 소작인, 소작인끼리의 서열과 충돌, 거기다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의 기치를 올린 일본군과 앞잡이, 이들이 만들어내는 생로병사의 한 판 마당이다. 원작소설의 번역본은 <생사의 장>이란 제목으로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에서 벌써 간행했으며 독자들의 평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조삼과 억척네 (자오싼과 왕씨), 그리고 어여쁜 딸 금지(진즈) 가족은 동네에 딱 한 마리 있는 소를 가진 집으로, 그 덕에 형님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푼이(얼리반)와 곰보댁, 건장한 아들 성업(청예) 가족은 부모의 정신상태와 외모로 가장 낮은 서열의 소작인(괄호 안은 샤오홍의 작품을 번역한 책에서의 이름이다). 성업은 금지를 자빠뜨리는 데만 열심을 쏟아 드디어 딱 두 번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덜컥 애가 들어선 상황. 조삼과 억척네한테 얘기했다간 금지의 다리몽둥이가 부러져나가고, 잘못했다간 성업이 골로 갈 수도 있어서 진퇴양난의 벼랑에 서 있다.
 별개로 지주 ‘둘째나리’가 소작료를 심하게 올리려 눈알을 벌겋게 물들이고, 결코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소작인들을 대표해, 조삼이 둘째나리를 죽여 버리려 낫을 들고 침입해 그를 향해 내리쳤건만, 죽은 건 둘째나리가 아니라 때마침 담을 넘은 도둑. 다시 등장한 나리 하시는 말씀이, 내 집 담을 넘은 도둑을 때려죽인 건 참으로 장한 일이지만 사람을 죽인 것 또한 사실이니 너도 죄를 목숨으로 갚아야 하리라. 이에 처음엔 나리를 죽이려 했건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걸 알게 된 조삼이 나리에게 무릎을 꿇더니 당국에 선처를 빌어달라고 싹싹 빈다. 남편의 못난 모습을 보고 가슴에 천불이 난 억척네는 농약 한 사발을 벌컥벌컥 마시고 죽어버린다.
 와중에 태를 품은 금지와 성업은 타지에 나가 돈을 벌기로 하고 가출을 해버렸지만 토굴 속에서 몇 밤을 지내지도 못한 채, 성업은 항일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금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산을 한다. 여기에 또 일본군이 마을로 들어와 밥을 얻어먹고 곰보댁을 윤간하는 등 정신없이 돌아가는 중국 현대사, 그것도 일본군의 가장 앞에 섰던 만주국 일원의 한 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이다.
 각색자는 제목처럼 생사, 낳고 죽음. 여기에 늙어감과 병듦은 포함해 생로병사를 곳곳에 배치했다. 생로병사, 어느 하나 쉽고 가벼운 것이 있겠는가만, 작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생. 하느님이 밀가루 반죽 주물러서, 켜켜이 부풀린 찐빵처럼 한 시루 두 시루 쪄서 세상에 내보내는 거지.
 로. 뻣뻣한 밀가루떡 같고, 늙은 황소 힘줄 같아, 염라대왕 외엔 아무도 씹어 먹을 수가 없다는 거지.
 병. 몸뚱이는 망가져 가는데, 마음만 살아가지구, 짐은 남한테 떠넘기구 이부자리만 지고 있는 거지.
 사. 눈 허옇게 뒤집고 다리 벌렁 들고 나자빠지는 거지, 저승에 가면 아무것도 들추지 마셔, 허 참, 확실히 죽었지?

 

 극의 전반은 이런 생로병사의 한 평생을 중심으로 하다, 후반엔 적극적으로 일본군과 싸워 죽고 죽이는 것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초토화된 중국 북방의 한 모습.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대륙의 만주족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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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 시집선 2
조인선 지음 / 삼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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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의 앞날개에 시인의 약력이 쓰여 있다. 딱 세 줄. 짧으니 그냥 옮긴다.


 196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93년 첫 시집 『사랑살이』를 시작으로 시집 다섯 권을 냈다.
 안성에서 소를 키워 팔고 있다.


 약력을 읽은 독자는 이이가 소 축산업자로 일하고 있어서 다분히 직업과 관련한 시를 쓸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송아지, 어미 소, 구제역, 집단 살처분, 형장으로의 행렬 등등. 그럼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전문이다.



 청춘



 책 살 돈으로 그 짓을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쳤다
 간신히 졸업하고 폐인이 됐다
 시를 쓰고 또 썼다
 소도 키웠다
 마흔이 가까워
 아내를 만나기 전 배운 베트남 첫 말은
 안녕이었다



 그림이 그려진다. 시인이 1966년생. 운동권 출신. 그러나 스물네 살 한참 자유와 해방을 외치고 있는데 난데없이 베를린 장벽과 소비에트가 무너지는 걸 눈뜨고 번히 바라본 세대. 부모가 안성에서 소를 팔아 등록금과 용돈을 부쳐주면 시인은 책을 사는 대신 단골 색시집을 일차 왕림하던 민주투사. 어찌어찌 간신히 졸업을 하고 시를 썼다. 당시 남자들 제대하고 졸업하면 대략 스물일곱 살. 시인지망생 즉 폐인으로 일 년 동안 열라 시를 쓰고 바로 다음 해, 스물여덟 살 때 첫 번째 시집을 낸다. 이만하면 시인으로는 성공한 경우. 하지만 시인이면 뭐하나. 배고파 죽겠는데. 그래 아버지 어머니가 소 키우는 안성 고향집으로 귀향해 조금씩 소 키우는 일을 떠맡은 거, 아냐? 잘했다. 근데 늙은 농촌 총각한테 시집오려는 아가씨가 있어야 말이지.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에 걸쳐져 있는 현수막,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전화 123-4567"을 보고 거의 1기 다문화가정을 이루어 딸 둘을 두고 오순도순 잘 살고 있다. 처음엔 부모에게 비벼 살기 위해 내려왔다가 이젠 부모가 시인한테 비벼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찍이 내가 말했잖아. 시를 쓰며 평생을 살고 싶으면 부모한테 비비든지, 돈 잘 버는 배우자를 만나든지, 아니면 배우자를 최저시급 주는 알바로라도 보내버리라고. 이 시인은 제대로 시인의 첫 발을 뗀 거다(이 말, 즐거워서 하는 거 절대 아니다).
 시인이 소를 키워 팔아 사니 시집 속에도 당연히 시인의 삶으로서 직업이 드러나긴 한다. 그러나 시인의 유일한 직업은 “시를 쓰는 일.” 그의 가장 중요한 숙명은 “시”가 과연 무엇인지, 시를 쓰는 행위가 진짜 구원을 위한 것이지, 그렇다면 누구의 구원을 위한 것인지, 뭐 이 비슷한 것 아닐까. 이 질문은 비단 조인선 혼자의 것이 아니어서 숱한 시인들이 끝까지 부여안고 삶을 마감한 거대 화두였다. 그리하여 이 시집 《시》에서도 작품 <시> 다섯 편을 실었다. 무작위로 한 편을 읽어보자. 아니, 제일 앞에 실린 <시>를 읽어보자. 전문이다.



 그대 눈동자에 구리 나팔이 들어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린 여자가 가르쳐 준 하비오란 말이 아름다웠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지
 돌아선 모습에 그림자 한 줄 새겨져 있다



 “하비오”를 검색해봤다. 서울 송파에 있는 아파트 이름. 하비오 워터파크, 파크 하비오, 하비오 쿠팡 등등. 사전검색해보니 그런 단어는 없다. 하비오가 무슨 뜻일까? 베트남 말 아닐까? 눈동자에 들어 있는 구리 나팔은? 흠. 모르겠다. 그럼! 무슨 수로 시인이 ‘시’라는 걸 몇 마디 말로 정의할 수 있었겠나. 이 시를 이해하는 거, 포기했다. 예컨대,



 녹는 물고기

  ― 앙드레 브르통에게



 수음하는 남자의 손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거울 속 책장에는 피 묻은 해골이 빼곡히 쌓여 있고
 선풍기가 구석에 둥지를 틀어 알을 낳았다
 빛은 사방에서 오는데 주인은 쉴 곳이 없어 참혹하게 웃고 있다
 벌거벗은 여자가 길게 누운 소파가 절벽 쪽으로 기울어져 웃음소리에 타들어간다
 오월이었던가 물고기 비늘이 눈처럼 날리던
 잘려 있던 남자의 손이 구두 속으로 급하게 걸어갔다  (전문)



 제목 ‘녹는 물고기’는 브르통의 산문시란다. 앙드레 브르통이 누군가. 초현실주의 문학의 세계 대표선수. 이 시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려주시는 분께 만원 드림. 시인은 책 살 돈으로 여자의 몸 일부를 사고 자유와 해방을 외칠 때부터 시를 썼던 사람이다. 그러니 소 키우는 남자로 시인을 국한하여 이 시집 <시>를 읽으면 좀 난감할 것.
 그렇다고 이런 쪽의 시들만으로 채워진 건 아니다. 삶의 형태이니 당연히 소 키우는 일, 소 죽이는 일, 병든 소를 땅에 묻는 일, 묻으면서도 머리를 굴려 조금이라도 더 보상금을 받으려 하는 일, 어린 딸들, 노부모들 같은 삶의 모습도 등장하고, 심지어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경건한 묵념도 올리며, 21세기 거대한 자본주의의 질주 속에 찌든 현대인의 그림도 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새bird.” 그리고 혁명, 자본, 그짓 등. 다양한 시가 실려 있다. 고백하거니와 난 시를 잘 모른다. 그래서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시가 더 좋다. 가령, 이런 거.



 장날


 

팥 서 말 팔러 어머니와 장호원 장에 갔습니다. 한 말에 3만에서 4천 원을 준다기에 그냥 왔습니다. 어제는 막내 딸 아이가 장난감 사달라고 하도 조르기에 큰 맘 먹고 사줬습니다. 10만 원이 조금 넘었지요. 아버지가 얼마냐고 하도 묻기에 딸들에게 방안으로 들어가 놀라고 했습니다. 머리 허연 아버지 어머니 밥상 위에 신문지 깔고 메주콩, 검은콩 나누시고 작은 돌멩이 고르시고 아이들은 엄마 기다리며 멋진 집과 배를 만들다 잠들었습니다. 5천 원으로 순대 한 접시와 선지국물을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넉넉한 하루였습니다. (전문)



 그림이 팍 그려진다. 막내 딸 아이한테 사준 장난감이 장호원 장에 내다 팔려고 가져간 팥 서 말 값하고 비슷하다. 하필이면 늙은 아버지가 장난감이 얼마냐고 묻는 바람에 대답도 못하고 딸들에게 방 안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노부모 둘이 상을 펴고 다시 장호원 장에 내다 팔려는지 아니면 메주를 쑤거나 밥에 두어 자식들 먹이려고 콩을 고르고 있는 하루. 시인은 싸게 순대를 먹은 날의 모습. 그러나 읽기 좋다는 것일 뿐.
 시집을 한 권 사면, 적어도 한 편의 시는, 이거 통째로 외워버릴까, 하는 약한 충동, 그런 시, 독자하고 궁합이 딱 맞는 시 하나는 발견해야 본전 뽑은 거 같은 기분. 이해하셔? <장날>은 그런 시까지는 아니다. 그럼 이 시집에서는 없었느냐. 아니다. 있었다. 웬만하면 그런 시는 소개하지 않는데 오늘은 큰마음 먹고 한 번 올려본다. 짧기까지 하니 정말 한 번 외워봐?



 묵화



 죽산 칠장사
 법당은 닫혀 있고
 감나무마다 얼어붙은 수많은 감들 너머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검은 개 한 마리 밥그릇 앞에 놓고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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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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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사용법>,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에 이어 네 번째 읽은 페렉. 여태까지 읽은 페렉과 조금 다르다. 2인창 소설이며, 소통하지 않는 현대 젊은이의 미분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 1960년대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 누보로망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조재룡이 쓴 해설을 대충 훑어보니 첫 마디 비슷한 자리에다, “조르주 페렉은 필경 사르트르와 누보로망, 이렇게 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 썼다. 사르트르는 모르겠고, 다만 하여튼 글의 여러 부분이 로그브리예나 뷔토스의 것들과 “문장 간 유사성”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포스트’를 누보로망 앞에 붙인 것은 페렉이 <잠자는 남자>를 쓴 시기가 누보로망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1967년이라서 이었을 뿐이다. 괜히 잘난 척 더 하다가 나중에 코피날 거 같다. 난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있지도 않고 그냥 주워들었을 뿐이며, 몇 작품을 읽다보니 페렉의 선배작가들과 유사성을 느낀 수준, 즉 진정한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설 하나를 읽는데 지식이 뭐가 중헌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일단 내 주장대로 이 작품을 누보로망(비슷한 것)이라 가정하면, 그것도 소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상을 잘게 쪼개 현미경을 통해 본 것을 기록했다면, 일단 지독하게 드라이한 작품이란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은 또한 타당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서간체가 아닌 2인칭 소설이란, 화자가 ‘다중의 독자’가 아니라 오직 ‘너’에게만 전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화자가 관찰한 ‘너’의 행동 또는 행위를 묘사하는데 국한한다. 화자는 결코 ‘너’의 대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까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런지 책의 처음 두 문장을 인용해보자.


 “네가 눈을 감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방의 저 익숙한 박명薄明에, 세세하게 나뉜 어두운 체적이, 네가 수천 번을 지나다녔기에, 힘들이지 않고서도 네 기억만으로 길을 알아낼 수 있는 그곳에서, 불투명한 사각 창으로부터 그 길들을 되짚어내고, 반사광으로부터 세면대를, 조금 더 명료한 책 한 권의 그림자로부터, 선반을 되살려내면서, 이보다 더 검은, 걸려 있는 옷가지의 뭉텅이가 또렷이 확인되는 그곳에서 이어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네 콧등 위로, 온전한 직각은 아닌 것 같은, 네 두 눈의 두덩 위로 아주 작은 일각一角을 드리울, 또렷한 테두리도 없는 어떤 그림 한 점과도 같은, 얼핏 보아 일률적으로 회색이거나, 색깔도 형태도 없어, 네게는 오히려 무채색으로 보일 수도 있을, 그러나, 재빠르게 형성될 것이 또한 분명한 그런 그림과도 같이, 이차원의 공간 하나가, 최소한 두 가지 특징을 지니면서 나타난다: 첫째는, 네가 다소 힘을 주어 네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정도에 따라, 보다 정확히 말해, 네가 눈을 감을 때 네 눈썹 위에서 행해지는 근육의 수축이 네 몸 전반에 평면의 기울기를 변형시키는 것 같은 효과를, 마치 네 눈썹이 네 몸에서 접점을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같이,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니, 이 귀결이 자명하다는 것 말고는 증명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네가 지각할 어둠의, 밀도 혹은 특질을 변형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공간이 다소 흐려진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하 하략. 아직 반도 안 썼다)”


 파리에서 “하녀의 골방”이라 일컫는 방. 대개 건물의 꼭대기에 있으며 20세기 초반까지 주로 하녀들이 기거하던 작은 방. <라 보엠>의 미미가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을 수놓으며 살았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드니즈 보뒤 양이 숱한 백화점 점원 아가씨와 함께 산 곳. 이제 하녀들이 없어져 방은 가난한 빈민들의 차지가 됐고, 파자마 하의만 입고 침대로 사용하는 장의자長椅子 위에 앉아 112쪽이 펼쳐진 책 <산업사회 강론>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너’는 오늘도 누구와의 소통을 스스로 거부한 채, 옆방의 누군가가 기침을 내뱉고, 발을 질질 끌고, 가구를 옮기고, 서랍을 열고, 층계참의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는 소음이 들린다. ‘너’가 세계의 다른 인간으로부터 받는 신호이며 책의 결말부로 가면 자신의 신호 역시 옆방의 기숙인이 느끼고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소통의 가능성’으로의 소음이 될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이다. ‘너’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하게 무시하고, 아무 때나 파리의 모든 곳을 탐색하고, 하루에 15프랑을 사용하는 것만 허용하는 삶을 산다. 매일 똑같이. 골루아즈 담배 한 갑, 성냥 한 통, 식사 한 끼, 영화 한 편, 영화관 안내인한테 주는 돈, <르 몽드>신문, 커피 한 잔. 나머지 돈으로 건포도 빵 하나 또는 바게트 반 조각으로 때울 두 번째 끼니와 두 번째 커피 한 잔, 교통비, 치약, 세탁비 등등.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누보 로망으로도 읽을 수 있는 현미경적 묘사와 이에 따른 건조한 문장. 소통을 거부하며 사는 젊은이의 행위 묘사로만 채워지고, 나중엔 옆방 남자와의 신호로 소통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란 가능성. 심지어, 세상과의 화해? 그건 직접 읽어보시고 해결하시기 바람.
 나는 이런 작품을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는데, 이 의견을 덜컥 믿고 쉽게 구입하지는 마시라. 고백하거니와, 쇤네는 20대 초반부터 잘난 척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읽히지도 않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품을 읽었으며, 읽다가보니 20대 초반이라는 시절이 특별히 풍부하게 갖추고 있는 감수성 또는 흡수력이 있는 시대여서 그랬는지, 별 내용 없는 건조한 책들을 매우 심각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였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이퍼 레알리즘 적인 묘사로 일관한 이런 책에 여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 페렉은 조금 덜하긴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경우일 뿐이라는 걸 딱 꼬집어 미리 말씀을 드리는 바, 정말 책을 사서 읽고 후회하신다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책 뒤의 “역자 해설”마저 읽어보시면, 내가 지금 쓴 독후감이 얼마나 엉터리인줄 단박에 알아채실 수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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