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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1
홍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아마 조정래의 <태백산맥> 초판이 나오기도 전이었을 거다. 정확하게 몇 년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6월의 한 월간 문학잡지 특집으로 한국의 전쟁소설을 다루었다. 당시 난 한 방 맞은 거 같았다. 1920년대에서 40년대 초반에 태어난 작가들이 숱하게 한국전쟁을 소재로 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전체를 구성해서, 따져보고, 의미를 부여하고, 정의를 내리는 작품을 읽은 적이 없어서였다. 지금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평론가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한국 최고의 전쟁소설을 선택해서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 특집이었던 것 같다. 누구는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꼽았고, 어떤 이는 유명한 <광장>을 들었는데, 누군가가 홍성원의 <남과 북>을 지목하며 이 작품이야말로 한국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대작이라 이야기할 때부터 <남과 북>에 관심을 두었었다. 잡지를 읽고 곧바로 찾아간 도서관 개가실에서 이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기억하기로 무척 두꺼운 양장본 몇 권으로 구성된 것에,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일단 분량에 쫄아서, 일독을 다음으로 미루었었다. 그리고는 당연히, 다른 재미난 책들도 얼마든지 많았기 때문에, 제목만 기억한 채로 무한정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새 머리엔 흰 눈이 쌓였고, 눈은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세월, 정말 별 거 아니다. 별 거 아닌 세월을 쓰며 정작 내가 읽은 <남과 북>은 엘리자베스 클래그헌 개스켈이 빅토리아 시대에 쓴 영국 소설이었으니 생각해도 좀 우습고 약간 쪽팔리기도 했다. 그래 당시에 늦게나마 홍성원의 <남과 북>을 읽어보려 했지만 책은 품절이 되고 말았다. 이제 늦게나마 초판이 아니라 2000년에 작가가 대폭 고쳐 쓴 개정 중판 <남과 북>을 헌책방에서 찾아 읽었다. 만시지탄이 있기는 하나 아예 읽지 않은 것에 비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모두 2,500쪽이 넘는 대하드라마. 길기만 해서 “대하”란 접두사를 붙여주지 않는다. 이 타이틀을 얻으려면 한 가지 큰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조망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관통해 그려내야 한다. 이 책 덕분에 즐겁고도 살처럼 빠른 한 주일을 보냈다. 작가는 재판을 내면서, 처음 출간할 1977년 당시에는 엄혹한 파시즘, 유신체제의 박정희 시대라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왜곡할 수밖에 없었고, 상당부분 편향된 시각으로 소설을 써야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틀림없이 이 작품을 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한국문학, 특히 소설 쪽에서 가장 각광을 받았던 분야가 이른바 호스테스 소설이란 건, 이미 세월이 너무 흘러 기억하는 독자가 별로 없을 것이다. 문화적 암흑시대. 무수한 유행가가 건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방송금지가 됐던 시기. 시인, 작가들이 쓸 수 있었던 소재는 사실 거의 없었다. 착한 마음씨의 아가씨가 가족 돌보느라 어쩔 수 없이 술자리 접대부의 길을 선택해 자기 인생 종치는 이야기 말고는. 이런 시대에 한국전쟁에 관한 소설을 썼으니 국군은 무조건 선하고, 인민군은 악의 화신으로 그려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작가가 1937년생이니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치룬 전쟁의 여러 모습은, 같은 시대를 경험한 조금 윗세대의 경험담까지 보태 다양한 진실을 알고 있었을 테다. 실제로 주인공들 가운데 한 그룹인 우씨(禹氏) 가문은 여지없이 작가 홍성원의 고향인 수원 부근의 한 농촌마을로 보이기도 한다.
다시 세월을 좀 거슬러 월간 문예지의 전쟁소설을 인용, 기억하면, 잡지의 편집인이 왜 한국에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나 앙드레 말로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는가, 라고 탄식했던 것 같다. 물론 비단 이들 뿐이랴. 이제 늦게나마 책을 좀 읽어보니, 생각보다 많은 작가들이 전쟁을 소재로 해서 무수한 작품을 만들었고,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동시에 적어도 문제의 그 월간 문예지가 나왔을 무렵까지는 대한민국에선 아예 기본적으로 전쟁소설이나 반전문학을 움틔울 여건이 되지 못했다는 것도 이해하게 됐다. 지금이야 자연스럽게 스스로 양심의 자유라는 범위에서 작가들이 거의 모든 분야를 소재로 글을 쓰지만, 박정희의 유신보다 더 살벌한 파시스트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시절에는 “지배”의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의 ‘전쟁의 공포’를 강제로 주입시켜왔기 때문에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자신의 직접 보거나 이야기를 들은 대로 전쟁의 추악한 면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2000년에 개작해 다시 나온 <남과 북>에서 제일 먼저 돋보이는 것은 주인공들이 남한 사람에 국한하는 게 아니라 이북 사람들도 주인공의 일원으로 등장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사명감을 갖고 목숨을 거는 장면이었다. 여인네들을 집단 윤간 혹은 그냥 능욕하는 군대는 물론 우연이겠지만 국군과 미군으로 추정되는 외국군이다. 중공 오랑캐는 꽹과리를 두드리며 인해전술로 무지막지하게 쳐들어온 야만인이 아니라, 불과 몇 년 전 전 중국인민들의 전적인 비호와 도움을 받으며 혁명에 성공한 인민의 군대답게 통치지역에서 추호의 약탈과 학살을 허락하지 않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군대로 등장한다. 수만리를 걸어 대륙을 관통했던 중국 붉은 군대의 대장정을 떠올리면 정말로 그랬을 것 같다. 중공군 고위 장교는 이북의 인텔리 장교와 함께 이동하면서, 거동이 불편한 늙은이들을 제외한 인민들은 모두 인민군들의 남하를 피해 도주하느라 정복지마다 아무도 없이 텅텅 비어있는 상황을 보며, 해방전쟁의 실패를 지적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또한 미국의 언론사 특파원과 정보기관에 소속한 영관급 장교를 등장시켜 한국전쟁이 당시 세계 정치판에 미친 영향, 특히 미국의 국내 정치가 어떻게 한국전쟁을 변질시키는지 다른 어떤 작품보다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건 내 오래된 의구심, 어떻게 휴전선이 전쟁 전의 38선과 거의 유사하게 그어졌는지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힌트를 준다. 이상하지 않은가. 전선이 처음엔 남쪽으로 초음속의 속도로 내려가다가 순식간에 또 비슷한 속도로 압록강변까지 치닫는데, 다시 한 번 순식간에 서울이 떨어지는 롤러코스터 비슷한 전쟁. 그러다가 그 후 2년 4~5개월동안 고착되는 전선. 미친 듯이 내려오거나 올라가지는 못했을지언정 어찌 그리 힘의 균형이 잡혀 38선 부근에 그대로 정체할 수 있었을까. 세계 전쟁사에 이런 경우가 있었나 싶다. 오래된 궁금증이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풀렸다. 그리고 그걸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 굳이 가르쳐드리고 싶지 않다. 지금은 품절이지만 책이 시장에 나오면 직접 읽어 아시라는 뜻에서.
레마르크나 말로의 작품을 그래도 제법 읽어봤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헤밍웨이, 조지프 헬러를 포함한 그들과 홍성원을 비교하자면, 서양 작가들의 경우, 전쟁이나 혁명의 규모가 한국전쟁보다 월등하게 커서 그런지 소설의 시공간적 무대인 전쟁, 혁명의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 한 개인이나 사건에 국한한 작품을 쓴 반면, 홍성원은 한국전쟁 전체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점. 전쟁의 의의와 전쟁을 치룬 한국, 한국인들의 특징과 성격을 확실한 톤으로 말하고 있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의 작품보다 더 윗길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왜 2000년 판 홍성원의 <남과 북>이 품절일까. 어느새 시절이 한국전쟁에 관해 논의하는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세월로 변했을까? 이건 확실하게 하자. 한국전쟁과 전쟁의 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을 통치의 한 방편으로 삼는 일을 반대할지언정, 지난 세기 한가운데 벌어진 불행한 전쟁의 진정한 모습을 정확하게 진단해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을. 이런 의미에서 홍성원의 기념비적인 작품 <남과 북>은 언제나 품절 상태에 있으면 안 될 우리의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