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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공인 미남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5
박상률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7월
평점 :
책의 제일 마지막 차례가 “시인의 말”이다. 인용한다.
나는 늘 / 시 한 줄로 감동을 못 주기 때문에 / 소설과 동화를 여러 권 쓰고 있다고 말한다. / 그러면서도 / 소설과 동화에 안 맞는 이야기는 어찌해야 할지 늘 고민했다. / 여기 묶은 시편들은 / 소설과 동화로 쓰기엔 ‘쪼깐 거시기’했던 이야기들이다. / 음식은 그 음식에 맞는 그릇이 있다. / 간장을 접시에 담지 않고 / 국이나 밥을 간장 종지에 욱여놓지 않는다. / 그래서 / 이야기가 나를 찾아오면 / 그 이야기에 맞는 장르를 택해 이야기를 담아냈다. // 그간 이야기 속에서 살았고 / 앞으로도 이야기 속에서 살 것이다 / 산다는 건 이야기를 만나는 것 아닐까? /// 2016년 여름 무산서재(無山書齋)에서 / 박상률
‘시인의 말’을 진심으로 썼다면, 시 한 줄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시인일까? 이이가 쓴 책을 검색해봤더니 105권의 책이 나온다. 105권 가운데 절판이나 품절 품목 빼고 당장 살 수 있는 책이 74권. 74권 중에서 시집은 실천문학사의 <국가 공인 미남>과 지만지에서 나온 <꽃동냥치>만 보인다. 이이의 대표 시집은 <진도 아리랑>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게 기억이 나 <국가 공인 미남>을 선택해 읽었다. 정작 <진도 아리랑>은 절판이라 구할 수가 없다. 시집을 다 읽고 ‘시인의 말’을 보는 순간, 나는 초두에서처럼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 한 줄로 감동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시인일까?”
시로는 감동을 주지 못해서 소설과 동화를 무려 백 권 가까이 낸 사람. 심지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우리말로 옮겼다고 주장하는 이. 시공주니어에서 찍은 열 권짜리 <우리말로 쉽게 풀어 쓴 완역 삼국지>, “지은이 나관중, 그림 백XX, 옮긴이 박상률” 이렇게 쓰여 있으면, 역자 박상률이 당연히 나관중이 쓴 표의문자를 한글로 옮겼다는 뜻이다. 맞지? 내 상식으로는 맞다. 근데 믿지는 못하겠다. 심각한 비극이다. 독자인 나는 절대로 박상률이 나관중의 원문을 보고 직접 옥편을 찾아가며 번역했다고는 믿지 않는다는 거. (아, 정말 이이가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다. 내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로 손수 번역했으면 송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개 출판사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의 미덕은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 책도 그렇다. 쓸데없이 사용한 난감한 비유법이나 기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시 읽기를 마치는 순간, 시가 주장하는 바를 즉각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뭔가를 착각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시집에서 내가 읽을 수 있기 바라는 건 절대적으로 “시” 자체다. 하지만 흥미로운 제목을 단 이 시집은, 말이 시집이지, 읽는 기분을 그대로 얘기하자면, 종이 위에 인쇄한 ‘트윗’들이다. 한 트윗에 올리기엔 글자 수가 좀 많은 것들을 종이에 인쇄한 것. 시인의 말대로 소설과 동화에 쓰기에는 ‘쪼깐 거시기’한 것들을 골라 시로 써서 시집으로 만들었다고? 그러면 본업은 소설가 또는 동화, 또는 청소년 문학전공 작가인데 ‘쪼깐 거시기’한 것들, 산문에는 어울리지 않겠다고 여겨지는 것들만 골라 시의 틀을 입혔다는 얘긴가? 그래, 내용이야 어쨌건 간에 시인이 시라고 주장하면 그건 시다. 일찍이 (좀 사납기로 이름난 미모의 인기 시인)김XX에게 누군가가 “이게 시냐?”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김XX 시인이 “그래 시다, 씨발놈아!”라 답글을 쓰려다가 열을 삭히고 그냥 메시지만 지워버렸다는 내용의, 트윗을 했단 얘기도 들었다. 그러니 이것들도 틀림없이 시일 것이다.
가장 최근의 현대사에 보수당 출신 대통령이 둘 있었다. 이들에 대해 많은 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두 개만 소개한다.
변태(變態)
애초에
오렌지가 어린 쥐로 바뀌는 걸 보여주더니
나중엔
도둑 정권과 도덕 정권의 차이도 없애버렸나니!
얼핏 보면
영장류 닮은 동물인데
실은
설치류를 대표하는 동물이라네
그래서
지랄도 쥐랄이 되얐디야 (53쪽, 전문)
별호
소주가 ‘쏘주’로 톡 쏘지 않는 술자리
어느 작가 말하길, 내 별호를 ‘이새’에서 ‘씹새’로 바꿨어!
옆 사람들 뭔 소리인가 싶어, 왜?
책 내면 2쇄가 어디야라고 해서 ‘이새’라고 했는데,
이젠 10쇄를 염원해야 될 것 같아.
그러자면 ‘씹새’라 해야지……
모두들(옆자리 사람들까지), 하하하!
18년 동안 독재한 자칭 불행한 군인의 18년,
18년의 발음이 묘하게 거시기하네, ‘씹팔년!’
그 ‘씹팔년’을 우려먹고 사는 어떤 상속인 있고……
그 ‘씹팔년’이 좋다는 지지자도 있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52쪽, 전문)
이것들이 시다. 이걸 읽고, 이게 시냐? 라고 묻지 마라. 대답은, 그래 시다, 씨발놈아! 이기 십상이니. 읽기를 끝마치자마자 한 번에 누구를 희화화한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쉬운 시. 명쾌하다. 명쾌해서 좋다. 근데 너무 명쾌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불쾌하다. 내가 위에서 종이 위에 인쇄한 트윗이라고 했던 이유다. 이 씨와 박 씨를 향한 거의 욕설과 비등한 수준의 위와 같은 희화화가 이것 하나씩만이 아니다. 시집을 마칠 때까지 과장해서 퐁당퐁당, 하나 건너 한 개씩이다. 물론 과장을 좀 하자면 그렇다는 뜻. 이 씨와 박 씨가 없었으면 어떻게 시의 소재를 구할 수 있었을까 궁금할 정도. 뒤에 해설을 보면 초기 시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세월이 흘러 이렇게 변했을 수 있다. 변했거나 말거나 나는 이 시들을 읽으며, 군중 속에 섞여 다중의 무리가 외치는 선동적인 욕설을 그냥 따라하는 시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이 씨 정부 초기 촛불 집회가 한창인 어느 날, 광화문 거리에 있었것다. 그때 마침 무거운 방송용 카메라를 어깨에 들쳐 멘 사내 둘이 다가와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보매, 두어 달 전 책 읽기 방송 일로 만난 적이 있는 ‘구면’들이었다. 본시 카메라를 보면 살짝 ‘울렁증’이 있는 인종이라 ‘이크’ 잘못 걸렸구나 싶어 수풀 속 꿩처럼 머리만이라도 들이박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인산인해 지경이라 달아나지 못하고 카메라 낚시에 딱 걸리고 말았으니, 일수가 몹시 사나웠던 것이라 자위하고 말았다.” (<나, 어떡해?> 부분, 44쪽)
현직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이며, 공중파 방송에 책읽기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카메라를 보면 울렁증이 생긴다는 말도 미덥지 않을뿐더러, 카메라를 보는 순간 인산인해, 사람들의 틈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던 건 왜 그랬을까. 이 씨 정부 초기면 과거 노 전대통령이 추진해온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일 것이다. 당시 사촌 동생이 가톨릭 농민회던가 하여간 카농에서 한 자리 했던지라 잘 기억한다. 시인이라고 이런 집회에 나가 군중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지 말라는 법, 없다. 잘 했다. 집회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건 절대적으로 본인의 자유의사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구호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쓸 수 있는 마땅한 자리는 원고지가 아니다. 어딘가 하면, 트윗이다. 한 번 정도면 원고지도 좋겠지. ‘퐁당퐁당’이면 적당한 자리는 역시 트윗이고.
시를 읽어가며 나는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시인이 58년 개띠. 시집을 내기 위해 최종적으로 시를 검토한 시기가 2016년. 그의 나이 쉰아홉. “팔만대장경 구석구석 다 뒤져봐도 / 누울 와(臥)자보다 더 좋은 글자 없고 / 사서삼경 위아래로 다 훑어봐도 / 먹을 식(食)자보다 더 좋은 글자 없”는 속을 알 만한 나이(<낱말 찾기> 14쪽)에 이른 시인은 전직, 현직 대통령들에게 “설치류를 대표하는 동물”이라고도 하고, “‘씹팔년’을 우려먹고 사는 어떤 상속인”이라고도 한다. 시인은 쉰아홉 살의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대학교수는 대표적인 인텔리 계급으로 치는 것이 보통. 근데 이 시인이 아주아주 팔팔했던 20세기가 궁금한 건 왜 그렇지? 특별하게 콕 집어서,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시절엔 어떤 시를 썼을까? 시집의 제목 <국가 공인 미남>이 무슨 뜻인가 하면, 소설가 송기숙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이에게 전국으로 지명수배령이 내려 송기숙, 이문구 등의 컬러 사진이 시골 차부에도 걸려 있었는데, 송선생의 사진 아래 선생의 외모를 두고 “이 자는 호남好男형으로…” 운운했다는 거다. 국가가 송선생을 일컬어 미남이라고 했으니 국가 공인 미남 아니겠느냐는 뜻. 그것도 송선생과 이선생이 술잔을 나누며 서로 주고받던 농담에 섞여 나온 말이다. 시인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나도 알고, 시인도 알 듯, 송선생이나 이선생은 시국사범으로 몇 번이나 걸려 곤욕을 치룬 투사형에다가 타고난 반골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두 깡패한테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혹시 시인 박상률, 그는 폭압적인 전두환 집권 시절엔 찍 소리도 못하다가 세월 좋아지니 이리도 험한 욕설을 마음껏 퍼붓는 거 아닌지가 매우 궁금했다. 시가, (송기숙 선생이나 이문구 선생의 글들과는 달리) 불의에 항거하는 장부丈夫의 노래라고 읽히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뭐 하긴, 특정한 역할을 했건 안 했건 정부에 대고 욕하는 건 민주시민의 권리이기는 하다. 나이 든 중늙은이가 입이 좀 험한 게 ‘쥐랄’이긴 하지만.
시인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던 이유. 시인이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이 제발 아니길 바라는 충정 때문이라고 치자. 그렇게 생각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