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여주인 프랑스 현대문학선 24
레몽 장 지음, 이재룡 옮김 / 세계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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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주인이면 주인이지 왜 여주인이라고 쓰느냐. 이렇게 주장할 만한 등장인물이 이 책 속에 한 명 있다. 초등학교 교사이자 페미니스트 클라리스. 우리말에는 없지만 서양말엔 거의 성의 구분이 있어서 굳이 ‘여주인’이라 제목을 단 것 같으니 이해해주시라. 심지어 독일에선 정원사도 여자일 경우엔 “Die Gartnerin"이라고 쓰니까. 클라리스도 비슷한 발언을 한다. 남성명사와 여성명사가 합해서 복수가 될 때 왜 남성의 복수형으로 써야 하는지 따박따박 따지는 장면. 클라리스는 이이가 책의 남녀 주인공, 소설가 쟈송과 아름답고 농염한 카페 주인 아멜리를 물 먹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얘기해드리지.
 때는 1961년 초반 약 100대 1의 프랑화 평가절하가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니까 그냥 60년대 초라고 해두자. 프랑스 남부 아비뇽 근처에 거의 완전한 시골 동네 ‘생플로렝’이라고 있었는데 ‘메일 광장’ 앞에 있는 카페의 유부녀 사장 아멜리가 무척이나 아름답고 관능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멜리 스스로도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생플로렝의 모든 남자가 쉼 없이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있는 것을 일찌감치 즐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녀에겐 단 한 가지, 남편 뤼시엥이 아비뇽에서 사업상 금전적 곤란에 처해 있다는 것만 빼놓고 뭐 하나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 단, 시골의 소박한 경제를 감안해서 그렇다는 말씀.
 이런 찰라, 마을과 좀 떨어진 외딴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일 년에 반 정도를 묵으면서 작품도 쓰고, 전원생활도 즐기고, 체력보강도 하는 소설가 쟈송이 등장한다. 이이는 좀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 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실 것. 뭐 변태, 이런 따위가 아니다. 인도나 중국, 그것도 아니면 티베트 정도에서 도나 기를 닦는 것과 비슷하게, 사진이나 초상화, 아니면 심지어 수시로 등장하는 TV 화면에 정신을 집중하면 해당 여성들과 성적 교감을 ‘홀로’ 느낄 수 있는 신비의 상태에 이른 인물이다. 이이가 하루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카페에 들게 됐고,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해 아멜리로부터 한 잔 건네 마신 적도 있다. 물론 한 눈에 아멜리의 얼굴과 관능이 넘치는 육체까지 몽땅 훑었음은 당연하고, 아멜리는 모든 남자가 보내는 시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쟈송의 눈길을 받은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리 도가 튼 인간이라도 눈빛 하나는 별 볼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쟈송은 그녀의 초상화나 사진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해 그의 특기인 건식 섹스, 즉, 드라이 섹스를 즐길 수 없어 전전긍긍, 소설의 초장에 아멜리한테 네 문장으로 된 편지를 보내고 만다. 요약해서, 하룻밤 동침해주면 10만 프랑을 내겠소.
 편지를 받고 기겁을 한 아멜리. 길 건너 어려서부터 친구인 필로멘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편지를 보여주니까, 필로멘이 하는 말. “겨우 10만 프랑?” 아멜리가 다시 꽥 소리를 지르는데, “신화폐로 10만 프랑이야, 신프랑으로.” “뭐라? 그럼 몇 달 전의 1,000만 프랑?” 필로멘, 뒤집어진다. 지금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신프랑으로 10만이면 절하 전엔 1,193만 프랑이다. 지금 우리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한 5억~10억? 2002년 기준 환율로 유로로 바꾸고, 40년간 이자율을 4%로 봐서 환율 1,300원으로 계산하니 약 1억 원이 나오는데, 40년간 인플레와 구매능력을 생각하면 아무리 적어도 5억 이상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것도 시골 깡촌에서. 뭐라? 로버트 레드포드와 데미 무어 나오는 <은밀한 유혹>이 생각난다고? 그때 레드포드가 무어에게 하룻밤 동침의 대가로 제시한 돈이 1백만 달러. (IMF 이전이던)당시 환율로 약 8억 원. 비슷한 수준이겠다.
 하여간 아멜리가 필로멘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필로멘과 아멜리는 편지 보낸 작자가 누군지 알기 위해 또 우체국에서 일하는 친구 이르마에게 편지를 보여주고, 이번엔 정작 당사자인 아멜리를 빼고 필로멘과 이르마 둘이서 페미니스트 친구 클라리스와 상의하기에 이르는데, 클라리스가 생플로랭의 이장, 신문기자, 방송국 등등 모든 곳에 다른 것도 아니고 “너만 알고 있어”를 퍼뜨리고 만다. 다 그런 거지.
 김화영이 번역한 <책 읽어주는 여자>를 재미있게 읽고 딱 한 작품만 더 읽어보고 나서 장의 작품을 계속 읽을 것인지 정하겠다고 했는데, 앞으로는 눈에 띄면 사서 읽게 될 거 같다. 우리나라의 대표 불문학자인 김치수, 김화영, 최현무 등이 레몽 장을 사사했을 정도로 소설뿐만 아니라 제3세계에 프랑스 언어와 문학을 널리 알리는데 공헌한 불문학자이기도 하단다. 좀 근엄할 거 같이 생긴 외모지만 그가 쓴 소설(이래봐야 겨우 이제 두 편이지만)을 읽어보니 참 재미있다. 곳곳에 웃음 코드가 숨어 있다. 근데 이게 서양 사람들(특히 잉글랜드 인간들)이 쓴 희극을 읽으면서 느껴야 했던 어색함과 달리 책을 읽으며 킥킥거리는데 불편함이 없게 자연스레 웃긴다.
 이 책은 분명히 소설가 쟈송이 10만 프랑으로 아멜리의 섹스를 사려 제안을 한 것을 다루고 있으나, 이 행위를 매매춘으로 이해하는 건 명백하게 잘못이다. 그럼 이게 몸을 팔라는 제안이지 뭐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동침해주면 10만 프랑을 주겠다는 건 맞지만, 누구도 몸 파는 여인에게 하룻밤에 10만 프랑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 뭐냐고? 내가 그걸 가르쳐드리면 벌써 인간 됐게? 헌책방에 가시면 구할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라. 시대 비평적이기도 하고, 궤변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레몽 장의 익살일 수도 있으며, 특히 지금 하는 내 말이 몽땅 거짓일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는 게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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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5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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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면 책 제목을 <윌리엄 트레버>라고 달았다. 원래 제목은 2015년에 간행한 <SELECTION OF STORIES by William Trevor>, 즉 <윌리엄 트레버 단편선>. 현대문학에서 찍은 세계문학단편선 시리즈의 15번째 책이다. 단편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시리즈를 주목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눈에 들어오는 작가들만 보더라도 헤밍웨이, 포크너, 만, 해밋, 트레버, 멜빌, 겐자부로, 챈들러, 그린 등이 눈에 띈다. 흠. 외국 단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포크너와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집이라니. 생각 좀 해봐야겠다.
 같은 사람의 단편집을 두 권 연달아 읽는 일. 바로 전에 트레버의 열두 단편을 엮은 <비온 뒤>를 읽고, 곧바로 스물세 편이 실린 <윌리엄 트레버>를 마쳤다. 같은 사람이 쓴 작품이란 것은 물론 단박에 알 수 있다. 트레버의 문체와 서술방식과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성향과, 주인공들의 행동방식과 주제 같은 것에 공통적인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 이것, 즉 작품 속에 일관하게 이어지는 특징 때문에 어떤 작가들(사실상 많고 많은 소설가들)의 단편집을 읽는 일이 지겨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트레버는 아니다. 연달아 서른다섯 편의 단편 소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로운 흥미를 이끌어내곤 한다. 아무나 이렇게 쓸 수 있는 거 아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대부분 많은 세월을 살아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세계관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작품 속 시간은 쉽사리 과거에서 현재로 수십 년을 건너뛰고, 과거에는 많이 중요한 것들이 이젠 하잘 것 없는 일이 되기도 하며, 어려서는 모든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던 소년이 오늘,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위험한 중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노인과 몇몇 약자는, 대중과 상대적으로, 권력이 됐건 육체적인 힘이 됐건 간에 힘 있는 타인에 의하여, 비록 그것이 악의로 무장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선의와 천진에 의거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세계. 작가가 1928년생으로 대개 1920년대 중후반쯤에 출생한 인물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은 건 인지상정이라 여길 수 있으며, 간혹 그들의 (조)부모나 자녀들의 시선으로 작품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윌리엄 트레버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에 쓰는 독후감을 이리 건조하게 서술해도 되는 걸까? 문학과 관련한 강좌 한 번 들어보지 못했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은지 모르지만, (내가 읽은)트레버의 단편집들, <비온 뒤>와 <윌리엄 트레버>에 실린 작품들 하나하나를 보면서, 만일 단편소설 교과서가 있다면 바로 이것들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현대 우리나라 작가들의 감각적인 단편들과는 많이 차이가 나기는 한다. 그리하여 내가 느낀 교과서 운운은 정말로 단편소설을 쓰는 사람들, 소설 공부를 하는 이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만하겠다. 그러나 대상을 관찰하고, 취재해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진행과정이 어디 하나 넘치는 곳도 없고 모자란 곳도 없이 꽉 짜여 있으면서도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이야기의 쓸쓸함’이 매혹적이었다. 책 속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뭔가 하나가 결핍된 인물들의 이야기. 그건 바로 당신일 수도 있다.
 대단히 위대했던 여름이 드디어 갔다. 아직은 남은 태양의 여열에 숨이 막힐지언정 누가 뭐라 해도 이제는 가을이다. 만일 이 누추한 독후감을 보고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을 선택하시려 하면, 한 달쯤 더 흘러 가을이 깊어갈 때 더욱 어울릴 수 있을 거란 힌트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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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7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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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편집자님, 역자 유기환 씨, 책 앞 날개에 졸라의 생몰 연대가 틀렸는뎁쇼. 졸라가 죽은 해는 1902년입니다. (뭐 이런 거 까지 얘기하느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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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에선풍적수 2024-09-07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말씀하셨네요 그것도 재밋게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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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세 때 펴낸 단편집. 12편을 실었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은 여태 두 권을 읽었다. 둘 다 장편으로 <루시 골트 이야기>와 <여름의 끝>. 두 편 모두 참 아리아리하게 심장을 적시는 바람에 단박에 트레버의 팬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 좀 더 알아보니, 트레버의 정수精髓는 장편이라기보다 단편이라 하여, 그의 단편집을 두 권 샀다. 먼저 읽은 책이 바로 이 <비 온 뒤>. 나는 여간해서 외국 단편은 읽지 않는다. 번역한 시는 아예 가까이 하지 않으려했다가 움베르토 에코가 너무도 찬란한 찬사를 보내기에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다른 사람도 아닌 김현의 번역으로 읽었고, 똥 밟았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번역 시는 없다. 단편도 비슷한 이유로 번역물은 잘 읽지 않는데, 단편은 장편에 비해서 문장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서로 얽혀서 만들어가는 조형미 또는 세련미, 혹은 감각적 화학작용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효과적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 솔직히 그런 면이 있었다.
 그런데 트레버의 <비 온 뒤>를 읽으며 확 다가오는 건, 원 작품이 정말 좋을 거 같다는 느낌. 알라딘의 빅 데이터를 보면, 내가 2017년에 가장 많이 읽은 책이 정영목 씨의 번역서였단다. 책을 많이 번역했다고 좋은 역자란 뜻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정 씨의 문체에 좀 익숙해지지 않았겠는가, 싶지? 아님. 일단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즉, 역자가 한국말로 다시 쓴 우리문장이 가슴에 삼삼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아일랜드 풍경화가 내 마음을 울렸다는 거. 딱 <여름의 끝>이 그랬듯이.
 첫 번째 작품이 <조율사의 아내들>이다. 조율사가 두 번 결혼했다는 뜻. 상처한 후 재혼을 했다. 60대 중후반의 맹인 피아노 조율사. 지금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무릎 한쪽이 관절염에 걸려 눅눅한 겨울이면 고생깨나 하지만 한 때는 늘씬한 매력남이었다. 그때도 시력이 거의 없어 다섯 살이나 젊고 훨씬 더 아름다운 벨을 선택하지 않고 못생기고 뚱뚱하고 옷맵시도 전혀 없고, 집안일도 지저분한 바이얼릿을 선택해 삼십년을 너머 살다, 아내가 먼저 갔다. 두 해를 홀아비로 지내다가, 수십 년 전 조율사와 맺어지지 못한 다음에 결혼하지 않고 여태 혼자 산 벨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러니 조율사의 아내들이란 전처와 후처, 두 명의 정식 아내를 일컫는 것.
 이 작품집이 트레버가 67세 때 나온 것이니, 최종적으로 다시 고쳐 쓴 시기의 작가 나이가 노년이었다. 책을 읽어보면, 늙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면 절대 쓰지 못할 작품들이다. 하나같이. 1928년생이니 동시대인의 67세면 호호 할아버지. 그러면서도 이리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참 놀랍다. 죽은 전처가 조율사와 살아온 시절. 그 시절 속에 어느 날 갑자기 편입해온 후처. 남편은 맹인. 마음 같으면 집안의 모든 것을 바꿔버리고 싶은데, 그러자니 늙은 맹인 남편이 자기 집에 관해서 처음부터 다시 익숙해져야 하고, 참고 살자니 참 속이 아픈 상태. 짐작하시지? 이런 걸 얼마나 찬찬하게 써놓았는지 첫 작품부터 사람을 아리아리하게 만든다.



 근데 2017년에 내가 읽은 것들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만든 정영목 씨. 그의 문장 하나 보자. <조율사의 아내들>에 나온다.


 “그 시절 조율사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구호금을 받았으며, 이따금씩 일이 들어오는 대로 등받이 없는 의자나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을 배운 기술로 수리하거나, 이런저런 행사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나, 이거 적어도, 그러니까 최소한 20번은 읽었다. 그냥 읽으면, 읽는 대로 진도는 죽 나갈 수 있다. 근데 눈에 좀 힘을 주니까 문제가 생기더라. 앞에 구호금 받은 얘기, 뒤에 바이올린 연주한 얘기는 빼고, 쉼표와 쉼표 사이에 있는 것만 보자. 즉,


 “등받이 없는 의자나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을 배운 기술로 수리하다.”


 문제:  위 문장의 (생략된) 주어는 조율사. 술어는 ‘수리하다.’이다 다음 중 조율사가 수리한 것(문장의 목적어)은?


 ① 등받이 없는 의자와,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
 ② 등받이가 있거나 없거나 종류 불문하고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
 ③ 등받이 없는 의자와, 해초를 엮은 좌판이 있는 일반 의자
 ④ 등받이 없는 의자와, 일반 의자에 붙어 있는 해초
 ⑤ 일반 의자 다음의 조사 ‘의’가 ‘를’의 오기typological error임. 따라서 등받이 없는 의자와 일반의자.


 여러분의 선택은? 나? 모르니까 묻습니다. 오죽하면 이 지랄을 허겄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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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8-08-3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번 같기는 한데... 수능이 이렇게 나오면 촛불켤지도?

Falstaff 2018-08-31 09:51   좋아요 0 | URL
저는.... 3번은 아닐 거 같습니다. 그거 말고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이번엔 저도 촛불을 켜겠습니다. ^^

잠자냥 2018-08-31 10: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국내에 번역된 윌리엄 트레버 작품 가운데 이 책이 가장 잘 안 읽히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저 문장, 예전에 읽을 때 조율사가 수리한 건 ‘의자‘가 아니라 어떤 악기(피아노)라고 생각했어요(그러니까 여기서 목적어는 숨겨진 것???ㅋㅋㅋ) 근데, 그 조율하는 기술을 정규 방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 ‘등받이 없는 의자나 일반 의자의 해초를 엮은 좌판을 배운 기술‘로 이해했습니다. ㅋㅋㅋ 이로써 문제는 더 어려워지는 것인가???

Falstaff 2018-08-31 10:22   좋아요 0 | URL
아, 잠자냥 님 의견을 읽으니 눈이 좀 밝아오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해초를 엮어 좌판을 만든 기술‘로 피아노 조율하는 방식을 배웠다, 이런 말씀이지요? 그럴 듯합니다.
‘이따금씩 들어오는 일‘이 의자 수리하는 것이 아니고 피아노 조율이라는....
하하하... 문장 하나 읽으며 꼭 이렇게 집단 스터디를 해야한다니, 참 재미있습니다.

세상틈에 2018-08-31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장 정말 정영목씨가 한게 맞나요?;;; 그냥 읽으면 1번으로 읽히는데... 자꾸 다른 해석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네요.ㅋ 5번은 초판이라면 그럴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Falstaff 2018-08-31 11:06   좋아요 0 | URL
옙. 정말로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교수로 재임중인 정영목 씨가 번역했다고 책 앞에 쓰여있습니다.
검색해보면 이이가 번역한 책이 수백권에 달하는 인기, 유명 역자입니다. 다만 이 양반도 사람인지라 가끔 삽질도 하는 것이겠지요. ^^;

세상틈에 2018-08-3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저도 번역 관련서 몇 권 읽고 외국시 번역본은 읽지 않기로 했습니다.ㅎ 과장 좀 보태서 완전 새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Falstaff 2018-08-31 11:03   좋아요 0 | URL
시의 번역은 반역이다.
라는 교훈을 잊고 랭보를 읽은 것이 2018년에 가장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ㅠㅠ

2018-08-31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31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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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 내 또래 사람들에겐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일종의 아우라, 또는 동경어린 존경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150cm 정도 작은 체구의 절름발이 유대인.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한 군대와 사회민주당이 야합한 무리에 의하여 소총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강타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머리통에 확인 사살을 받고는, 시신마저 국경의 운하에 던져져버린 비운의 혁명가. 프랑스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역사학자, 문필가, 정치가였던 막스 갈로가 서기 2000년, 20세기를 마감하며 새 세기를 여는 시점에 지난 세기의 대부분을 관통했던 공산주의를 조망하면서 새삼스레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을 썼다.

 

 

로자 룩셈부르크

 

 1871년 3월 로자 룩셈부르크의 탄생에서 1919년 1월에 암살당하기까지 갈로는 그녀의 일생을 일곱 부분으로 잘라 전 과정을 묘사한다. 부르주아는 아니지만 폴란드 국경도시 자모시치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로자.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골수 결핵에 걸려 평생 다리를 절어야 하는 장애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독서와 글쓰기에 입문한다. 독서와 사색과 글쓰기. 거기다가 유난히 총명한 두뇌. 로자가 속한 유대인 가정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교육열이라고 한다. 그래 부모는 로자를 스위스 취리히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고, 로자는 그곳에서 사회주의에 눈을 뜨며, 공부도 열심히 해 얼마 되지 않아 법학박사 학위를 딴다. 이어 첫 남자이자 평생의 혁명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의 인도로 사회주의 운동에 전념하면서 경제학 박사 학위마저 받아낸다.

 

 

레오 요기헤스


 이어 스물일곱 살 때 구스타프 레뷔크라는 남자와 혼인을 해 독일인이 되는데, 레뷔크하고 혼인신고를 마친 다음 시청현관 앞에서 곧바로 헤어지고 5년이 흘러 다시 이혼을 할 때까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다. 독일인이 되기 위한 위장결혼이었던 것. 그러나 지금도 구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검색하면 남편으로 이이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글로 쓰인 서류가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기관지를 통해 수정주의자이자 사민당의 거물 이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통박하면서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룩셈부르크. 이후 이이는 특별한 통찰력과 강력한 단어를 동원한 글쓰기로 독일 혁명의 기틀을 잡고 행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거침없이 혁명을 주장하는 글쓰기와 천부적인 웅변 능력으로 국제 인터내셔널에서도 스타덤에 오른 이이는 레닌, 스탈린과도 안면을 트며 (스탈린을 별개로 하고) 레닌과 기묘한 동지의식을 쌓기도 한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은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개진, 동의, 협력하는 한편 자주 서로를 공박하기도 서슴지 않는다. 레닌이 혁명에 성공하자 당시 독일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룩셈부르크는 감옥 안에서 한정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정보만 가지고도 소비에트에서 향후 벌어질 독재와 집단숙청, 공포정치 등을 예견하며, 비록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지만, 결정적으로 노선을 달리한다. 레닌이 권력을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한 반면,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체제 역시 보통선거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상적 혁명관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 독자가 읽기에 룩셈부르크의 특징이자 한계가 바로 이런 낭만적 혁명가 기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는 아는 게 짧아 그냥 ‘낭만적 혁명가 기질’이라고밖에 하지 못했지만, 막스 갈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룩셈부르크는) 정치 문제에서는 ‘현재’에 자리잡지 못하고 항상 다른 곳에, 더 멀리, 일반적인 역사적 전망 속으로 자신을 던지곤 했다. 그건 이론이나 지식 측면에서는 높이 살 만한 미덕이지만, 전술을 결정해야 할 때는, 다시 말해 손에 총을 거머쥐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쓸모가 없다. 아니, 최악의 경우에는,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된다.”  (579쪽)


 위 인용은 독일 공산당,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중심으로 하는 스파르타쿠스 단 입장에서 약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혁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1919년 1월 5일에 있었던 노동자, 귀향군인들로 이루어진 8만 명의 시위에서, 기어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하고 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역사가 늘 그렇다. 아이디얼리스트는 보기는 좋아도 실속이 없는 거. 로자 룩셈부르크도,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그들의 뇌 속에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상의 틀에 사로잡혀 있었다. 손 안에 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로자는 폭동 후의 결과, 1871년 파리 코뮌의 후속 모델로 베를린 코뮌, 즉 한시적 성공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못했고,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일초가 급한 군중을 앞에 놓고 수뇌부 회의를 무한정 늘려 혁명의 동력이 될 노동자, 귀향군인들의 맥을 뺀 것과 동시에, 사회민주당과 군부세력에게 반전을 꾀할 시간을 벌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독일 공산당과 레닌의 차이점이었다.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룩셈부르크가 일찍이 예견했던 것과 한 치 다름없이, 레닌에 의해 소비에트에서 벌어지고 있던 공포정치와 대량학살의 공포가 독일 혁명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든 가장 큰 위협이었다. (혁명이 끝나면 너나 나나 다 죽는 거야!)
 여태까지 쓴 것이 다는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러면서도 천생 여자였고,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였다. 자신의 묘비에 “츠비-츠비”란 두 음절을 새겨주길 바란 룩셈부르크. “그건 검은 박새들의 울음소리예요. 내가 그 소리를 그럴듯하게 흉내 내면 새들은 금방 날아오곤 하지요.” (199쪽) 혁명가 말고도 우애 좋은 유대인 가정의 막내딸로, 첫 남자 레오 요기헤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파란 젊은이들과 사랑을 나누었던 자유연애가의 모습도 그리고 있다. 혁명가이기 전에 인간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것을 그리려 애쓴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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