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브 연락 없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0
에두아르도 멘도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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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말하자면 멘도사다운 작품. 그의 전작 <경이로운 도시>를 보면 1882년과 1929년에 개최한 바르셀로나 엑스포, 그러니까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돈도 빽도 없는 산골 깡촌놈 오노프레가 사기 치는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최고의 악당이 되는 과정을 그렸고, <구르브 연락 없다>에선 1992년 올림픽을 앞둔 바르셀로나 각지에서 벌어지는 온갖 모습을 애정 어린 희화를 그렸으니 조금은 비슷하잖아? 작품의 내용은 <경이로운 도시>나 <사볼타 사건의 진실>처럼 조금은 살벌한 범죄소설이 아니다. 놀라지 마시라. 제목에 나온 ‘구르브’란 이름의 생명체는 외계인이다.
 안타레스 성좌의 한 별에서 탐사 목적으로 지구 바르셀로나 외곽지역에 떨어진 ‘나’와 구르브. 구르브는 상부의 지시대로 지구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우주선 밖으로 나가 베야테라 자치 대학의 전임교수인 ‘유크 푸익 이 로익’이란 남자를 만났으나 직업이 교수일 뿐, ‘나’의 분석에 의하면 인성 지수가 낮은 편이란다. 어쨌든 신장 170cm, 두개골 크기 57cm, 눈 두 개, 꼬리 길이는 0.00cm(꼬리 없음)의 암컷 지구인으로 모습을 바꾼 구르브는 수컷 지구인을 만나, 구조는 참 간단하지만 조작이 매우 불편한 기계(자동차) 포드 피에스타를 타고 간 다음에 그만 연락이 없는 거다. 그래서 제목이, ‘구르브 연락 없다’가 되는 것.
 ‘나’는 기계에 관해 거의 무식해서 조금 이상이 있는 우주선에 계속 머물 수 없다. 그리하여 우주선을 건물 비슷하게 모습을 바꿔 방치해놓고 바르셀로나 시내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당연히 구르부를 찾기 위해. 그냥 도시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으면 언젠가는 찾게 되겠지만 어느 세월에. 어느 세월? 뭐 사실은 순간이다. 구르부와 ‘나’는 모성母星에서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800년을 우주선에서 함께 살았고, 지구를 떠나 문명을 가진 생명체가 있는 다음 목적지인 켄타우로스 자리의 한 위성 BWR143으로 가기 위해 또다시 784년 동안 비행해야 하니, 그냥 대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한 자리에 앉아 구르브가 자기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야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근데, 그렇게 한 자리에 앉아 죽치고 있으면 그게 소설이 되겠어?
 그리하여 나는 지구인들 사이에 섞여 이들과 어울리면서 인간의 언어를 순식간에 기호로 바꿔 그걸 제대로 인식하고, 자신도 인간의 언어를 쓰며 행위와 행위가 의미하는 것을 빠르게 습득한다. 그러면 뭐가 제일 필요할까? 당연하지! 예, 맞습니다. 돈. 인류의 유일한 친구, 돈. 눈치를 챈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이었던 피오 12세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은행에 들어가 25페세타의 잔돈으로 예금 계좌를 개설한 다음, 그날 업무 마감 일 초 전에 초절 과학의 힘으로 자신의 예금 25페세타에 ‘0’을 열네 개 붙여버린다. 얼마냐고? 나도 이렇게 큰 숫자는 천 단위로 콤마를 붙여봐야 안다. 한 번 해보지 뭐. Pts2,500,000,000,000,000, 즉 2,500조 페세타. 가장 최근의 환율인 2002년 환율로 적용하면 15조 유로. 한 번 더 강조하면, “현금” 15조 유로.
 이 소설 속에 바르셀로나 각 지역에 대한 소소한 설명과, 과거의 예술인, 종교인, 학자, 작가, 장군, 프랑코 개자식은 빼고, 하다못해 소매치기까지 등장시켜 올림픽을 앞에 둔 바르셀로나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도시에 대한 멘도사의 애정을 과시한 측면만 온통 말들을 하는데, 기껏해야 딜레탕트인 내 의견으로 말하자면 이건 정말 잘 쓴 무협소설, 무협지다. 여기서 말한 ‘무협’의 협객은 당연히 외계인. 그중에서도 제목에 나오는 구르브가 아니라 화자인 ‘나’. 이 외계 생명체 ‘나’는 지구별에 떨어져 제대로 적응하기도 전에 여기서 얻어터지고, 저기서 걷어차이는 것도 모자라, 술, 즉 알콜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인간종이 주는 대로 벌컥벌컥 들이키는 바람에 아주 죽을 똥을 싸고, 근육 빵빵한 건달한테 자신이 가라데 유단자라고 구라를 쳤다가 뼈가 함몰될 정도로 두드려 맞기도 한다. 심지어 처음 외출 때엔 큰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한 번 보시라.

 

 08:00 나는 디아고날 대로와 파세오 데 그라시아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본래의 나로 변신한다. 실수다. 나는 곧바로 바르셀로네타와 발 데브론 사이를 운행하는 17번 노선버스에 치이고, 그 충격으로 내 몸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이어지는 차량 행렬 때문에 도로에 나뒹구는 머리를 수습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08:01 나는 노선버스에 이어 오펠 코르사에 치인다.

 

 08:02 오펠 코르사에 이어 배달용 승합차에 치인다.

 

 08:03 배달용 승합차에 이어 택시에 치인다.

 

 08:04 나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분수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씻는다. 덕분에 분수대의 물을 분석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주요 성분은 수소와 산소, 나머지 대부분은 똥이다.


 아침 여덟 시에 벌어진 노선버스와의 충돌에 의해 머리통이 떨어져나갈 때까진 으 끔찍해, 이런 반응을 예상할 수 있지만 여덟 시 일 분, 이 분, 삼 분에 이르면 어째 조금 비극의 장면에 웃음기가 돌기 시작하고 사 분에 이르면 드디어 유쾌한 무협소설의 시작을 알게 된다. 무협 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무공을 연마하는 초절정 신공인데, 이 책의 주인공 ‘나’는 현대 문명의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과학이기도 하고, 그걸 이용해 자기 통장에 현금으로 보유하게 된 2,500조 페세타의 돈일 수도 있고, 모습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변신술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무식하고 몽매한 지구인한테 얻어터지기만 하는 외계인. 그를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보다 어째 좀 피식거리는 웃음이 먼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볍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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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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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독신녀와 유부남의 불륜. 파리에 거주하는 작가와 외국인 남자. 소설의 사실상 첫 문장은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로 시작한다. 1940년생인 아니 에르노가 199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이 책에서의 상대 불륜남 A는 1990년에 발표한 <탐닉>이란 작품의 S와 동일인이라고 하며, 둘의 사이에 활활 사랑의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한 시기가 1988년이란다. 1988년이면 에르노의 나이 만 48세. 아이들도 웬만큼 커서 이젠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 A가 아르노의 집에 오기로 한 날엔 아이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엄마에게 들르는 것을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단다.
 그건 그렇고, 만 48세의 완숙한 여인. 성적인 측면에서의 몸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남자나 여자나 인생의 황금기다. 이젠 자신의 감정을 나름대로 추스를 줄도 아는 나이라고 오해하기 시작하고, 가끔은 흉내까지 내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감정은 추슬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끔찍하게 이해하게 되는 나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고통 말고, 오장육부를 쥐어짜듯 한 인간을 갈증에 타게 하고 일상의 질서를 무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불행하고, 기다림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불행하다. 20대 초중반에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다림의 고통 같은 감정은 점차 희박해지는 또는 희석되는 것이라 여기고 여태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책 속 주인공 ‘나’의 인생은 온통 A로 채워져 있다. TV 드라마도, 생전 처음 본 유선방송에서의 포르노 프로도, 지나가는 여자가 입은 원피스의 모습과 속옷도, PER(파리와 외곽을 잇는 고속 전철) 역의 거지에게 던져주는 동전도(오늘 A에게 전화가 온다면 맹세컨대 처음 마주치는 거지에게 10프랑을 주겠어!), 소파 위에 함부로 던져놓은 브래지어도, 지나가는 생면부지 남자의 얼굴 한 부분에서도 그녀를 지배하는 건 오직 하나, A가 아니라, A를 기다리고 그와의 정열을 불사를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바람이며, 최초의 시도로 전화벨이 울리느냐 마느냐, 울리면 과연 언제 울릴 것인가, 하는 일. 그게 청년이 아니라 완숙한 시기의 중년에게도 유효한 것인지 나는 정말로 몰랐다. 어쩌면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비슷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아예 제거해버렸던 것인지도.
 우스개로 인생에서 가장 꼴불견인 것이 40대 후반, 50대 이후에 “나는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네” 어쩌네 하고 꼴값을 떠는 일이라 말해왔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중년, 노년의 사랑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와 윤소정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지 실제로도 그런지, 궁금하지도 않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이제 와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만일 내 주위에 그런 커플들이 생기면 이해는 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불행을 선택하겠다. 내 속의 고목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불행을, 또다시 누구를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애가 타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방으로 착각하는 환시와, 끊임없이 머릿속에 부유하는 환상과, 몸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이제 정말로 포기하는 불행을, 그 불행을 선택하는 것을 조금쯤 이해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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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트린 이야기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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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은 이렇게 생겼다. 그러나 절판.

 

 

 

 

이것이 개정판 표지이지만 역시 품절


 

 지은이가 ‘빠트릭’ 제목에 ‘까트린’ 어딘지 뭔가 빠뜨리고 까버리는 수준을 넘어 까서 깨뜨린 듯한 느낌의 이름들.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찍은 책이다. 놀라지 마시라. 본문 107쪽. 삽화가 반. 헐렁헐렁한 편집. 읽는데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지은이가 201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 삽화는 유명한 장 자끄 상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도라 부르더>, <까트린 이야기> 이 세 작품으로 난 위대한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책은 누가 읽어도 단편소설이다. 전후 프랑스에서 3년 동안 부녀가 살다가 뉴욕으로 건너가 살고 있던 아내, 엄마와 합칠 때까지를 안경 쓴 소녀의 시각으로 그린 작품. 인간의 허위에 대한 따뜻하고 귀여운 해석도 있고 뭐 그런데 이 정도의 단편소설 딱 한 편을 ‘단편소설의 나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읽히기 위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열린책들’한테도 푸짐하게 욕 한 바탕 썼다가 방금 지우고 다시 쓰는 중이다. 명예훼손이니 뭐니 지랄들 할까 싶어서. 요즘 나 엄청나게 소심해졌다.
 이 책이 1996년 초판이고 절판이다. 지금 검색해보니까 <발레소녀 카트린>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2003년에 다시 찍었는데 그건 품절이다. 역자 이세욱이 1962년생. 내가 정작 진짜 놀란 것은 이세욱의 단어 쓰는 거였다.


 “내가 안경을 벗으면 아빠도 나를 따라했다. 우리 주위가 온통 부드럽고 오련했다. 시간마저 흐름을 멈춘 듯했다.” (14쪽)


 “오련하다”라니. 참 안 쓰는 단어인데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① 형태가 조금 나타나 보일 정도로 희미하다, ② 빛깔이 엷고 곱다, ③ 기억 따위가 또렷하지 않고 희미하다”고 나온다. 안경을 벗었다니 여기선 ①번 사항일 것이다. 대개 ②번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단어지만.
 또 “그는 내숭스럽고 우악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20쪽)
 “우악하다” 역시 대개 우악스럽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전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쓰는 것도 맞다. 이거 말고도 잘 쓰지 않는 단어를 찾아 사용했는데, 작품의 시대가 전후 복구시대의 프랑스여서 오히려 작품의 분위기를 더 살려주는 기재로 작용한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정말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빠트릭 모디아노의 책은 나하고 맞지 않아서, 절대 그의 작품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하나, 나하고 맞지 않아서, 앞으로 읽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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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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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가 쓴 <남자의 자리>라는 소설은 아빠가 죽고, 장사를 치룬 다음, 아빠와 작가가 맺었던 관계를 정리하는 짧은 소설이었다. <한 여자>에서 ‘한 여자’는 자신의 엄마를 일컫는 말로, 이번엔 엄마가 노인요양원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망신고를 하고, 장사를 지내고, 매장을 한 다음, 일찍부터 알츠하이머에 시달려 와 새삼스럽지는 않은 엄마가 진짜 죽었구나, 라는 실감을 하고, 펑펑 울고 나서(있을 때 잘할 걸!), 엄마의 탄생부터 결혼, 출산, 맏이의 죽음, 작가의 탄생과 한 가족을 중심으로 엄마가 평생 살아온 내력을 쓴 작품이다.
 아빠가 죽은 다음에 쓴 <남자의 자리>는 좀 건조한 문장으로 만든 반면, 엄마의 죽음을 다룬 <한 여자>는 같은 여자여서 그랬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감성을 충분히 담아 엄마와 딸, 넓게 얘기해서 부모와 자식 간의 복잡한 소통과 헌신 등을 깔아 놨다.
 나 이런 소설 읽고 감동하지 않는다. 세상에 안 죽는 부모 있으면 딱 두 명만 대봐. 간혹 가다 그렇지 않은 부모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이 뼈가 빠지게 고생을 하며 자식새끼들을 위해 헌신을 한다. 그 헌신으로 인해 자식들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번히 알면서도 도무지 멈추지 못하는 인간들이다. 기어코 부모가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 옛 생각하면서 내 부모는 그랬지, 우거지 궁상을 떨어봐라. 너네 부모만 그랬니? 이런 지청구나 실컷 얻어 자실 것이리라.
 나 이런 소설 읽고 감동하지도 않고, 공감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한 여자>가 내가 읽는 아니 에르노의 마지막 작품일 것이다. (라고 써놓고 보니까 윽, 벌써 사 둔 책이 한 권 있다.) 출판사 ‘열린책들’ 얘네들도 참 맘에 안 든다. <남자의 자리>도 간신히 100쪽 넘고, <한 여자>도 간신히 100쪽 넘는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의 친아빠와 친엄마 이야기다. 두 짧디 짧은 소설을 한 권에 묶어 찍으면 어디 덧나? 꼭 욕 못하는 사람 욕하게 만들고 지랄이다. 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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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네 명의 미국 출신 흑인 여류작가들을 읽어보았을 따름입니다. 수백년간 피부색 때문에 노예로 살았고, 내전을 거쳐 신분의 해방을 맞았지만 여전히 차별을 당해온 흑인들. 또 그 가운데 여성들. 이들이 쓴 소설이라면 그냥 얼핏 생각해보기만 해도 뭔가 슬픈, 아니면 적어도 아린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고요. 왜 비오는 봄날의 휴일에 그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라 닐 허스턴

 

 1891년 생입니다. 1960년에 죽을 때까지 극심한 차별을 당한 세대이며, 모르긴 몰라도 문학행위를 한 1세대 흑인 여성 아닐까 합니다. 만년에 빈민 구제소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하니 그리 행복한 일생은 아니었을 거 같습니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조라 허스턴의 피부색만 밝히지 않으면 굳이 흑인 여성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질기고 독한 사랑, 주인공 커플 제니와 티 케이크가 만들어가는 맹목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고 사랑하고, 싸우고, 악담하고 다시 사랑하고 또다시 물어 뜯었던 과거의 사랑을 오늘 떠올리는 일, 그것이 행복이라는 우울한 진실. 아름다운 건 자주, 슬프기도 합니다.

 

 

 토니 모리슨

 토니 모리슨한테 조라 닐 허드슨은 큰 이모뻘입니다. 40년 차이가 나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모리슨 부터 진짜 "흑인"에다가 "여성" 문학이 나오지 않느냐, 라는 의견입니다만 제 의견을 믿지는 마세요. 완전 딜레탕트 수준입니다.

 

<빌러비드>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읽어보신 분 꽤 많을 겁니다. 저도 사실 이 책을 시작으로 흑인여성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아주 일천한 경험으로 겁없이 이리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환상소설 적인 면도 보이는데, 그걸 아프리카 취향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아프리카 흑인 문학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곧잘 등장하니 말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탈출에 성공한 노예들의 생존기라고 짧게 얘기해도 좋겠습니다. 심금을 울리더군요.

 

<재즈>

 

 남자 흑인과 여자 백인 간의 혼혈은, 백인들 입장에서 가장 극렬하게 꺼리는 경우랍니다. 백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 아이는 자신이 백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다 자란 후 피의 반이 흑인의 것임을 알고는 흑인 아버지를 살해한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거 다른 작가에서도 봤습니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로스는 여기에다가 유대인의 정체성도 덧붙여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짓궂음을 보여주긴 합니다만. 세월이 흘러 제이디 스미스의 <온 뷰티>에선 흑백 혼혈의 두 가정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묘사되니 이 <재즈>와 견주면 뽕나무 밭이 빨리도 망망대해로 변한 느낌입니다(오늘은 제이디 스미스 얘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그러나 기본적으로 독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도 질투해야 하는 맹렬한 사랑 이야기.

 

 

 엘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과 13년 차이가 납니다. 작은 이모뻘인가요? 백인 인권운동가와 결혼해서 유럽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합니다. 이이가 쓴 <어머니의 정원>은 사서 읽어보려고 했더니 수필집이더라고요. 전 에세이는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의 대표작입니다.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어 1982년이던가 하여간 그 즈음에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후보로 올랐다가 영광의 준우승을 먹었던 작품입니다. 서간체 소설입니다. 서간체 소설이 생각보다 재미 없는데,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흑백문제 뿐 아니라, 여성문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제3 세계들의 소외도 잠깐 언급합니다. 이런 책을 "양서"라고 하는데 아쉽게 품절입니다. 다른 출판사에서라도 빨리 간행해주기 바랍니다.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192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소작농에 관한 책입니다. 말이 해방이지 백 년 전 흑인 소작인 신분이란 건 노예와 거의 다르지 않는 질곡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계급에 키 크고 잘 생긴 흑인이 하나 등장하니 바로 그레인지 코플랜드입니다. 당시 빈부, 남녀, 인종 간 겪을 수 있는 모든 차별과 벽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키 크고 잘 생겼지만 못 배워먹은 인간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1920년대에 말입니다) 마누라 두드려 패고, 바람 피우면서 집구석 기둥뿌리 뽑는 일이었다네요.

 

 

 글로리아 네일러

 

 1950년 범띠 아줌마네요. 구글 검색해보니까 에휴, 재작년 2016년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답니다. 이이의 작품은 딱 하나만 읽어봤을 뿐입니다.아직 얼마든지 활동한 나이인데 참 아깝습니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이제 드디어 무대가 미국 남부에서 북동부 공업지대로 옮겼습니다. 그래봤자 흑인들이 살 수 있는 곳은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시의 가장 험악한 지역일 뿐입니다. 백인들은 한때는 자유롭게 왕래했던 곳에다 높은 벽을 둘러쳐 흑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지역을 페쇄시켜버린 곳에 브루스터플레이스가 있습니다. 이 극빈의 지역에 모인 여자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그리는 매우 훌륭한 소설입니다. 흑백, 여성, 동성애 등을 소재로 화해 불가능한 폭력에 노출된 흑인 여성들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글로리아 네일러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입니다. <바람과...>에서 착한 남자 주인공 애슐리를 KKK단에 가입시켜 살아있는 흑인의 신체를 절단한 다음에 불에 태워 죽이게 한, 그러니까 KKK단의 테러를 지지할 정도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로 위의 네 여인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인종주의자까지 포용하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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