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르브 연락 없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0
에두아르도 멘도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한 마디로 말하자면 멘도사다운 작품. 그의 전작 <경이로운 도시>를 보면 1882년과 1929년에 개최한 바르셀로나 엑스포, 그러니까 만국박람회를 배경으로 돈도 빽도 없는 산골 깡촌놈 오노프레가 사기 치는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최고의 악당이 되는 과정을 그렸고, <구르브 연락 없다>에선 1992년 올림픽을 앞둔 바르셀로나 각지에서 벌어지는 온갖 모습을 애정 어린 희화를 그렸으니 조금은 비슷하잖아? 작품의 내용은 <경이로운 도시>나 <사볼타 사건의 진실>처럼 조금은 살벌한 범죄소설이 아니다. 놀라지 마시라. 제목에 나온 ‘구르브’란 이름의 생명체는 외계인이다.
안타레스 성좌의 한 별에서 탐사 목적으로 지구 바르셀로나 외곽지역에 떨어진 ‘나’와 구르브. 구르브는 상부의 지시대로 지구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우주선 밖으로 나가 베야테라 자치 대학의 전임교수인 ‘유크 푸익 이 로익’이란 남자를 만났으나 직업이 교수일 뿐, ‘나’의 분석에 의하면 인성 지수가 낮은 편이란다. 어쨌든 신장 170cm, 두개골 크기 57cm, 눈 두 개, 꼬리 길이는 0.00cm(꼬리 없음)의 암컷 지구인으로 모습을 바꾼 구르브는 수컷 지구인을 만나, 구조는 참 간단하지만 조작이 매우 불편한 기계(자동차) 포드 피에스타를 타고 간 다음에 그만 연락이 없는 거다. 그래서 제목이, ‘구르브 연락 없다’가 되는 것.
‘나’는 기계에 관해 거의 무식해서 조금 이상이 있는 우주선에 계속 머물 수 없다. 그리하여 우주선을 건물 비슷하게 모습을 바꿔 방치해놓고 바르셀로나 시내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당연히 구르부를 찾기 위해. 그냥 도시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으면 언젠가는 찾게 되겠지만 어느 세월에. 어느 세월? 뭐 사실은 순간이다. 구르부와 ‘나’는 모성母星에서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800년을 우주선에서 함께 살았고, 지구를 떠나 문명을 가진 생명체가 있는 다음 목적지인 켄타우로스 자리의 한 위성 BWR143으로 가기 위해 또다시 784년 동안 비행해야 하니, 그냥 대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한 자리에 앉아 구르브가 자기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야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근데, 그렇게 한 자리에 앉아 죽치고 있으면 그게 소설이 되겠어?
그리하여 나는 지구인들 사이에 섞여 이들과 어울리면서 인간의 언어를 순식간에 기호로 바꿔 그걸 제대로 인식하고, 자신도 인간의 언어를 쓰며 행위와 행위가 의미하는 것을 빠르게 습득한다. 그러면 뭐가 제일 필요할까? 당연하지! 예, 맞습니다. 돈. 인류의 유일한 친구, 돈. 눈치를 챈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이었던 피오 12세의 모습으로 변신을 하고 은행에 들어가 25페세타의 잔돈으로 예금 계좌를 개설한 다음, 그날 업무 마감 일 초 전에 초절 과학의 힘으로 자신의 예금 25페세타에 ‘0’을 열네 개 붙여버린다. 얼마냐고? 나도 이렇게 큰 숫자는 천 단위로 콤마를 붙여봐야 안다. 한 번 해보지 뭐. Pts2,500,000,000,000,000, 즉 2,500조 페세타. 가장 최근의 환율인 2002년 환율로 적용하면 15조 유로. 한 번 더 강조하면, “현금” 15조 유로.
이 소설 속에 바르셀로나 각 지역에 대한 소소한 설명과, 과거의 예술인, 종교인, 학자, 작가, 장군, 프랑코 개자식은 빼고, 하다못해 소매치기까지 등장시켜 올림픽을 앞에 둔 바르셀로나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도시에 대한 멘도사의 애정을 과시한 측면만 온통 말들을 하는데, 기껏해야 딜레탕트인 내 의견으로 말하자면 이건 정말 잘 쓴 무협소설, 무협지다. 여기서 말한 ‘무협’의 협객은 당연히 외계인. 그중에서도 제목에 나오는 구르브가 아니라 화자인 ‘나’. 이 외계 생명체 ‘나’는 지구별에 떨어져 제대로 적응하기도 전에 여기서 얻어터지고, 저기서 걷어차이는 것도 모자라, 술, 즉 알콜의 위력을 제대로 알지 못해 인간종이 주는 대로 벌컥벌컥 들이키는 바람에 아주 죽을 똥을 싸고, 근육 빵빵한 건달한테 자신이 가라데 유단자라고 구라를 쳤다가 뼈가 함몰될 정도로 두드려 맞기도 한다. 심지어 처음 외출 때엔 큰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한 번 보시라.
08:00 나는 디아고날 대로와 파세오 데 그라시아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본래의 나로 변신한다. 실수다. 나는 곧바로 바르셀로네타와 발 데브론 사이를 운행하는 17번 노선버스에 치이고, 그 충격으로 내 몸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이어지는 차량 행렬 때문에 도로에 나뒹구는 머리를 수습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08:01 나는 노선버스에 이어 오펠 코르사에 치인다.
08:02 오펠 코르사에 이어 배달용 승합차에 치인다.
08:03 배달용 승합차에 이어 택시에 치인다.
08:04 나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분수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씻는다. 덕분에 분수대의 물을 분석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주요 성분은 수소와 산소, 나머지 대부분은 똥이다.
아침 여덟 시에 벌어진 노선버스와의 충돌에 의해 머리통이 떨어져나갈 때까진 으 끔찍해, 이런 반응을 예상할 수 있지만 여덟 시 일 분, 이 분, 삼 분에 이르면 어째 조금 비극의 장면에 웃음기가 돌기 시작하고 사 분에 이르면 드디어 유쾌한 무협소설의 시작을 알게 된다. 무협 소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무공을 연마하는 초절정 신공인데, 이 책의 주인공 ‘나’는 현대 문명의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과학이기도 하고, 그걸 이용해 자기 통장에 현금으로 보유하게 된 2,500조 페세타의 돈일 수도 있고, 모습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변신술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무식하고 몽매한 지구인한테 얻어터지기만 하는 외계인. 그를 보면서 불쌍하다는 생각보다 어째 좀 피식거리는 웃음이 먼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볍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