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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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독신녀와 유부남의 불륜. 파리에 거주하는 작가와 외국인 남자. 소설의 사실상 첫 문장은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로 시작한다. 1940년생인 아니 에르노가 199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이 책에서의 상대 불륜남 A는 1990년에 발표한 <탐닉>이란 작품의 S와 동일인이라고 하며, 둘의 사이에 활활 사랑의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한 시기가 1988년이란다. 1988년이면 에르노의 나이 만 48세. 아이들도 웬만큼 커서 이젠 그리 유쾌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 A가 아르노의 집에 오기로 한 날엔 아이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엄마에게 들르는 것을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단다.
 그건 그렇고, 만 48세의 완숙한 여인. 성적인 측면에서의 몸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남자나 여자나 인생의 황금기다. 이젠 자신의 감정을 나름대로 추스를 줄도 아는 나이라고 오해하기 시작하고, 가끔은 흉내까지 내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감정은 추슬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끔찍하게 이해하게 되는 나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적 고통 말고, 오장육부를 쥐어짜듯 한 인간을 갈증에 타게 하고 일상의 질서를 무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불행하고, 기다림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불행하다. 20대 초중반에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다림의 고통 같은 감정은 점차 희박해지는 또는 희석되는 것이라 여기고 여태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책 속 주인공 ‘나’의 인생은 온통 A로 채워져 있다. TV 드라마도, 생전 처음 본 유선방송에서의 포르노 프로도, 지나가는 여자가 입은 원피스의 모습과 속옷도, PER(파리와 외곽을 잇는 고속 전철) 역의 거지에게 던져주는 동전도(오늘 A에게 전화가 온다면 맹세컨대 처음 마주치는 거지에게 10프랑을 주겠어!), 소파 위에 함부로 던져놓은 브래지어도, 지나가는 생면부지 남자의 얼굴 한 부분에서도 그녀를 지배하는 건 오직 하나, A가 아니라, A를 기다리고 그와의 정열을 불사를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바람이며, 최초의 시도로 전화벨이 울리느냐 마느냐, 울리면 과연 언제 울릴 것인가, 하는 일. 그게 청년이 아니라 완숙한 시기의 중년에게도 유효한 것인지 나는 정말로 몰랐다. 어쩌면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비슷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아예 제거해버렸던 것인지도.
 우스개로 인생에서 가장 꼴불견인 것이 40대 후반, 50대 이후에 “나는 이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네” 어쩌네 하고 꼴값을 떠는 일이라 말해왔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중년, 노년의 사랑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와 윤소정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지 실제로도 그런지, 궁금하지도 않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이제 와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만일 내 주위에 그런 커플들이 생기면 이해는 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불행을 선택하겠다. 내 속의 고목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불행을, 또다시 누구를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애가 타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방으로 착각하는 환시와, 끊임없이 머릿속에 부유하는 환상과, 몸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 이제 정말로 포기하는 불행을, 그 불행을 선택하는 것을 조금쯤 이해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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