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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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0쪽에 모두 53편의 단편 소설을 실었다. 나는 그린의 책과 상당히 늦게 만났다. 당연히 <권력과 영광>을 제일 먼저 읽었는데, 번역에 관해 논란이 많아 그렇게 됐다. 유명 소설가가 한 번역이었다. 난 소설가의 번역을 될 수 있으면 피하는 편이다. 우리말을 과하게 잘해 원문을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을 수도 있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는 대신 문맥만 파악해 옮겨놓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것들 모두 소설가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윤문으로 무마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더는 미룰 수 없어 읽어봤더니 그렇게 재미날 수 없더라는 거. 그렇다고 <권력과 영광>을 추천하지는 않겠다. 오역 여부에 관한 논란이 여전하고, 중쇄를 찍었음에도 (확인한 바는 없지만) 개전의 정이 없다고 한다. 읽으실 분만 읽어보시라.
 하여간 그래서 그레이엄 그린을 알게 됐다가, 이제 지난 주 월, 화, 수요일, 삼일에 걸쳐 930쪽에 달하는 53편의 단편집을 읽었다. 네 권의 단편선집과 미발표 단편 네 편을 묶어 2005년 펭귄북스에서 발매한 <그레이엄 그린 단편 전집>을 번역했다고 한다. 지난달에 읽은 캐서린 앤 포터의 단편집은 여성 아니면 쓸 수 없는 아릿한 작품들로 구성됐다고 하면, 이 책은 남성만 쓸 수 있는 선 굵은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1부 “21가지 이야기”는 1929년부터 54년까지 작품을 쓴 역순으로 꾸며져 있다. 글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준은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린 역시 첫 작품부터 빼어나지는 않았다. 아,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그레이엄 그린이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이야기 하려고 한다. 작품마다 명작을 뽑아내면 그게 어디 인간이겠는가. 소수의 범작, 졸작도 있는 게 정상이지.
 책을 펼치면 54년에 최초 출간한 책 “21가지 이야기”의 첫 작품 ‘파괴자들’이 나오는데 처음 두 문장이 이렇다.
 “가장 최근에 입단한 신참이 ‘윔즐리코먼 갱단’의 우두머리가 된 것을 8월 공휴일 전날 밤이었다. 마이크 말고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 문장 뒤에 같은 문단이지만 딱 맞춰 줄이 바뀌며 이어지는 문장이,
 “그러나 아홉 살인 마이크는 무슨 일에나 놀랐다.”
 흠. 그레이엄 그린이 누군가. 영화 <제3의 사나이>로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먹고, <오리엔트 특급>의 원작도 쓴 장르문학의 큰 별이다. 위의 처음 두 문장으로 비슷한 추리, 첩보, 범죄 등을 기대했다가 아이고, 아홉 살? 동네 악동들이 만든 갱단이 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조금 속은 기분. 정말? 정말. 그러다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조금씩 독자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열 살 내외의 악동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집단 폭력성과 파괴성. 그러면서 늙어 거의 완벽하게 무력한 피해자에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하는 말이 이렇다.
 “죄송해요. 웃음이 터져 나오는걸 참을 수 없어요, 토머스 씨.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하지만 이건 우스운 일이라는 걸 인정하셔야 해요.”
 몇 명의 소년들이 완전히 ‘재미삼아’ 약자인 동네 노인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이렇게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그린은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는 범죄성향을 신랄하게 그려낸다. 이것으로 소년들에 의한 폭력을 다룬 단편 <파괴자들>은 5년 전에 쓴 <제3의 사나이>의 주인공 해리 라임이 관람차 위에 올라 까마득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무수한 점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다고 도대체 뭐가 달라지겠나.”라는 대사와 연결이 되는 거 아닐까. 약한 것을 보면 괴롭히는 장난. 다들 어릴 때 해보셨을 거다. 파리를 잡아 날개를 떼고 놔주는 행위. 이게 사람의 본성이고, 그걸 문자를 통해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작가란 사람의 직업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심리소설이다. 유럽인 부부가 더운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뭔가 새로운 자극을 찾는 이들. 어떻게 하다 보니 포르노 영화를 틀어주는 조그만 집에 들어가게 됐다. 1950년대 중반이니 외설영화도 구경하기 쉽지는 않았을 터. 영화가 시작하고 여자가 남자의 옷을 벗기는데 어깨의 특별한 점을 발견한 남편. 그는 아내에게 그만 자리를 뜨자고 재촉하고, 여태까지 지루하다고 불평하던 아내는 남편이 그럴수록 오히려 더 보자고 고집을 피우다, 포르노의 주인공 남자가 바로 옆에 앉은 남편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는 걸 알고 경악한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가르쳐드리지 않겠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의 거의 대부분은 심리소설이다. 심리는 심리인데 남자의 시각에서 본 인간의 심리. 그래서 혹시 여성이 읽으면 남성에 의하여 왜곡된 여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쉰 세 편의 단편소설을 읽어 제목과 내용이 막 섞여 떠오른다. 그럼에도 좋았던 작품 세 개만 대보라면, <정원 아래서>, <남편 좀 빌려도 돼요?>와 <8월에는 저렴하다>를 꼽겠다. <정원 아래서>는 문예출판사에서 찍은 『제3의 사나이』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이 책에도 있다는 걸 알고 당시엔 읽지 않았었다. 단편소설들이라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무려 쉰 세 편에서 고른 딱 세 작품에 관해서라면.
 내가 책 읽는 방법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랴, 난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어치워야 속이 개운해지는 스타일인 걸. 그럼에도, 역시 단편집은, 특별히 현대문학에서 내고 있는 ‘세계문학 단편선’ 같은 두꺼운 단편집은 넉넉하게 날짜를 잡고 한 번에 한두 편씩 꼭꼭 씹어가며 읽는 편이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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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바빌론에 오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40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황혜인 옮김 / 책세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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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가 있었다. 주로 하는 일은 안드로메다 성운을 중심으로 적색 별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업무였는데, 하루는 주님께서 가운뎃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비비더니 손등에서 꼬물거리는 인간 여성 모습의 생명체를 하나 만들어 이름을 쿠루비라고 하며 천사에게 주면서, 인간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건네라는 지시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유프라테스 강변의 바빌론. 바빌론은 바빌론인데 누가 지배하고 있었는가 하면, 바로 얼마 전에 쿠데타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하고 이제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기로 결심을 한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치하 원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기가 아는 좁은 지식 안에서 말하자면, 전 세상을 통일한 유일한 국가의 왕이란 것. 이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면서 유일하게 노동하지 않고 밥을 먹는 거지라는 계급을 박멸하기 위해 바빌론의 모든 거지를 협박, 체포, 고문 등을 통해 다 노동자로 만들었는바,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바빌론의 천재적인 거지 ‘아키’는 여태까지 전향을 거부하면서 자기가 동냥해온 돈으로 바빌론의 숱한 시인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국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신경질이 날 수밖에.
 국왕이 수상에게 묻는다. “고문은 했는가?”
 수상이 답하기를, “그의 몸 어느 한 구석도 뜨겁게 달군 쇠로 지지지 않은 곳이 없고, 어떤 뼈도 엄청난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는 대국의 국왕답게 사형보다는 직접 만나 설득을 해서 내일부터 공무원 자리를 주어 일을 하게 만들겠다고 결심을 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천재적인 거지 아키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국왕 역시 누더기를 걸치고 붉은 가발을 쓴 채 나타나는 장소에, 하필이면 똑같이 누더기에 붉은 가발을 한 천사 역시 짙은 베일을 한 쿠루비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거지 아키,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그리고 천사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만나게 된다. 이렇게 1막은 시작한다.
 여기서 절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이건 얘기해도 스포일러는 아닐 것이라 소개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아키를 설득하기 위해 거지대결을 벌이기로 한다. 누가 더 구걸을 잘 할 수 있는가를 내기하는 건데, 천하의 네부카드네자르, 일찍이 아라비아반도 전체를 통일하고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완성했으며, 유대문명까지 몽땅 자기 노예로 만든 위대한 왕이라서 자신은 절대 지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서만 살지 않았을까. 그래 겁도 없이 프로페셔널 거지 아키에게 구걸 도전을 했으니 그걸 이겨낼 수 있나. 거기다가 명색이 왕이라 주변에 숨어 있는 측근들의 훈수나 도움도 깨끗하게 거절을 해버리니 말이지. 여기서 구경꾼으로 관람석에 앉아 있던 천사와 쿠루비는 세상에서 딱 둘 남은 거지 가운데 구걸도 제대로 못하는 거지가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결론을 내려 시합에 지는 거지에게 쿠루비를 넘겨주기로 결정을 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구걸을 한다 해도 선걸仙乞, 걸인의 신선 수준에 도달한 아키를 이길 수 없어 총점 99대 1로 패배하면서, 일은 우습게 꼬인다. 졸지에 거대왕국의 군주 네부카드네자르가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천사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어여쁜 정도를 넘어 모든 남자가 단 한 번의 눈길로 넋이 나갈 정도의 미모를 지닌 쿠루비를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국왕의 손길로 넘겨주니, 국왕이 제일 비참한 인간인가, 천사도 실수를 하는가, 긴가민가해지고 만다. 어떠셔, 이 정도 가지고는 스포일러라고 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맛보기로 여기까지만 써놓아도 되겠지?
 뒤렌마트는 하여튼 재미있는 극작가다. <노부인의 방문>도 그렇고, <물리학자>도 그렇더니, 여기서도 뭐 이것저것 막 떠오르는 대로 변주를 해버린다. 자세한 건 진짜 스포일러가 될까봐 더 이상은 얘기하지 못하겠는데, 비록 지금 신분은 국왕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인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신적? 제일 우스운 것이 법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난 잘못을 저질러놓고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삽질하는 인간들. 그걸 다른 표현으로 하면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하고 뭐가 달라? 아, 또 삼천포. 다시 네부카드네자르로 돌아와서, 국왕이란 자리보다 더 정치적인 위치는 없을 것이다. 그래 정치적으로 국왕 네부카드네자르는 어떠신데? 이런 물음을 던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키를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하지만 결코 노동자로 전향하지 않으면 가로등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다는 신념. “동냥질은 반사회적”이라서. 그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기어이 아라비아 반도에서부터 소아시아 지방까지 다 먹고 입 싹 닦은 자신은? 이래저래 연극은 복잡한 골목으로 접어 들어가고 이에 비례해 읽는 재미는 점점 더 고양되는데, 더 이상은 짧은 희곡을 너무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거 같아 이쯤에서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으니 바로,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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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화전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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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 인용, 변용하는 것을 전혀 어색하지 않듯, 아시아 사람이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일화, 인물, 신의 행적을 예를 들어서 말하고, 글을 쓰고, 읽어온 세월이 유구하다. 물론 이제 젊은 작가들이 쓰는 작품에선 이런 경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고, 몇 십 년이 더 흐르면 이나마도 거의 없어지리라 생각하지만, 종아리를 맞아가며 한문을 배운 장년세대로 살기 위해서는, 즉 제대로 된 꼰대로 남은 생을 마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미리 읽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중국의 몇 천 년에 이르는 역사 가운데, 전한 시대 사마천은 삼황오제와 하, 은, 서주 시대까지를 진정한 역사기록으로 인정하지 않은 듯했지만, 우주의 탄생, 인간의 기원, 농사와 의약의 발전, 외침과 황하의 치수를 기록한 이 시대의 매력적인 이야기는 다시 읽어봐도 흥미진진하다. 기본적으로 중국 전설시대는 천제天帝들,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천제 가운데 주로 중앙 천제인 황제黃帝(한문 안 배운 세대를 위해 부언하자면, ‘emperor’가 아니라 서양 신 가운데 ‘유피테르’ 같은 하늘의 주신主神)와 남방 상제인 염제炎帝(서양 신과 비교해 유피테르와 비슷한 힘을 가진 포세이돈이나 하데스 정도)와의 대립이 주를 이룬다. 싸움에서 염제와 염제의 후손, 염제의 부하 신이자 불의 신火神인 축융祝融(삼국지연의에서 남만의 왕 맹획의 처와 이름이 같다) 등이 수시로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로 황제에게 건건히 얻어터지기만 하지만. 이 염제가 누구냐 하면 신농神農이다. 농사짓는 법을 깨달아 인류에게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약초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 먹어봄으로 해서 숱하게 죽을 고생을 해 의약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신. 염제의 후손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한 명이 싸움대장이자 안개를 피우는 법술로 당대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치우蚩尤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응원단의 이름이 ‘붉은 악마’. 그런데 남중국 출신의 치우천왕이 어떻게 하다 보니 북동 지역 대한민국의 축구대표팀 간판이 되어버린 것. 물론 전설, 신화는 비슷한 내용의 이본異本이 많아서, 지금 ‘내가 옳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중국의 신화 전설에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화학자 위앤커의 저작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다.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하나라 걸왕, 은나라 주왕, 서주시대를 끝내는 주 유왕에겐 공통점이 있으니, 경국지색의 처첩. 하나라 걸왕한테는 말희妺喜. 걸왕이 말희를 왕비의 자리에 앉힌 것까진 좋았는데, 도무지 어여쁜 말희가 웃지를 않는 거다. 그러다가 우연히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앵도櫻桃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본 걸왕의 마음이 하이고, 너무 기뻐 눈물이 앞을 가리는지라 비단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마구 찢어댄다. 이러니 고대국가에서 국고가 거덜이 나는 건 시간문제인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치스런 별궁을 지어놓고 연못에 술을 채워 넣어 배를 띄운 것도 모자라 고기 덩이를 나무에 주렁주렁 달아놓아 아무나 먹을 수 있게 만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까지 만들었으니 나라 하나 결딴나는 건 시간문제였을 터. 주지육림에 관해선 다른 해석을 하는 책도 있다. 연못을 술로 채워놓고 그 속에 숱한 동남동녀를 발가벗겨 놀게 했다는 내용. 이런 거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가보다, 하자. 은나라 주왕紂王에겐 <봉신연의>에서 백여우로 등장하는 달기가 있어 백성을 폭력으로 학대하고 높이 대臺를 쌓아 국고를 낭비한 것은 물론 당대 최고의 토호였던 희姬씨 집안의 서백(후에 문왕文王)을 유리(박상륭의 작품 <죽음의 한 연구> 첫 문장에서 등장하는 ‘유리’가 바로 여기다)에 유폐시켜놓고 맏아들을 죽여 시신으로 곰탕을 끓여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등(서백은 다 알면서도 그걸 꾸역꾸역 몽땅 먹어치운다) 스스로 경쟁세력에게 단합하여 대항할 빌미를 가져다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서주의 유왕에겐 몇 백 년 전에 용의 정액을 저장해둔 괘가 열려 배리배리한 냄새가 나는 도마뱀으로 변하더니 쪼르르 달려가 소녀의 몸속에 들어가서 생긴 ‘포사’란 경국지색이 태어난다. 포사 역시 앞의 말희처럼 전혀 웃음이 없어 유왕의 애간장을 태우기만 하는데, 어느 날 하루 봉화가 오작동을 해서 제후국의 공들이 군대를 이끌고 도읍으로 헛되이 모이는 걸 보고는 깔깔거리며 웃는 일이 벌어진다. 그게 얼마나 어여쁜지 유왕은 이후 몇 번이나 일부터 봉화 시스템에 오작동을 발생시켜 그때마다 수도로 군대를 몰고 온 제후들의 염장을 제대로 긁어버린다. 그리하여 봉화 장치가 '늑대가 나타났다!' 신세로 전락하는 것. 딱 이때를 맞추어 북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이번엔 정말 꼭 필요해 봉화를 올렸건만 지원하러 온 제후가 한 명도 없어 수도를 내주고 동쪽 낙읍으로 천도를 해야 했으니, 이때부터 주나라는 명목상 왕국의 이름만 갖추었을 뿐 전국이 진의 시황에 의해 통일이 될 때까지 빈껍데기에 불과하게 된다.
 책 표지에 나오는 물고기는 커다란 몸집에 닭의 다리가 달려 있는 생선으로 ‘초어’라고 한다. 이 생선 이름 ‘초’는 564,290 개의 한자가 들어 있는 네이버 한자사전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희귀 한자어로 고기어魚 변에 오른쪽에 깃들 소巢가 있는 글자다. 당연히 기억해봤자 사는 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되니 그런가보다, 하시라. 이 초어는 그러나 항생제 성분이 있어 종양 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고 한다. 이 초어를 필두로 무수한, 보도 듣도 못한 괴 생명체가 등장해서 가히 중국판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을 보는 듯하다. 과하게 허풍이 심해 완전히 상상에 의한 생명체인 것이 뻔해 감동을 느끼게 되진 않지만.
 이런 신화나 전설은 서주 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기록 역사 시대인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다양성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역사는 <사기>를 쓴 사마천 등 당대의 사가들의 저작이 이후 계속해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신화와 전설 같은 주로 구비문학적 기록들 역시 누군가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다시 해석하여 쓰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중국신화전설>을 읽어보면 <사기 본기>와 <사기 세가>, <사기 열전> 등과 겹치는 것들도 발견할 수 있다. <열전>과 비교해도 ‘백이열전’, ‘오자서열전’, ‘중니제자열전’, ‘소진열전’, ‘장이열전’, ‘자객열전’ 등을 발견할 수 있고, <사기 세가>에선 <월 구천 세가>가 겹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다. 역사와 인류학 책들은 읽을 때마다 흥미진진하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사실 이번엔 백아와 종자기에 관해 들어본 적은 있으나 활자를 통해 직접 읽어본 경험이 없어 책의 목록에 ‘백아와 종자기’가 들어 있는 걸 보고 단박에 읽은 거였다. 나는 즐겁게 읽었지만 취향의 문제라서 추천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듯. 역사, 신화, 전설, 인류학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 되리란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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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나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7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흥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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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 KBS 명화극장을 통해 본 흑백영화 <제3의 사나이>. 캐롤 리드 감독이 만든 불멸의 엔딩 씬. 이것이 기억나서 내가 아직도 밥 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지난 세기인지 이번 세기 초인지에 기고를 했던 적이 있다. 이제 독후감을 쓰려다 이 생각이 나서 파일을 뒤져보니 아쉽게도 보관하고 있지 않다. 흔히 허니문 카로 불리는 대관람차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 주인공 롤로 마틴스(영화에선 Holly Martins)와 자그마치 오손 웰스에게 배역을 맡긴 해리 라임Harry Lime의 대화가 인상 깊었었다.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간 관람차 안에서 악당 해리가 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검은 파리 떼처럼 오밀조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하고 죽마고우 롤로에게 말한다.

 

 

 

 “자네는 저 점들 중 어느 하나가 동작을 멈춘다면, 영원히 멈춘다면 진정으로 동정심을 느낄 셈인가? 동작을 멈추는 점 한 개당 2만 파운드씩을 벌 수 있다고 해도 자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돈을 갖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점들을 보유할 수 있을까 하고 계산해보겠는가? 소득세도 없는 돈일세, 이 친구야. 소득세도 없는 돈이라구.”
 이건 책 속에 쓰인 것을 옮긴 것이고 내가 기억하는 건, “저 많은 점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이 정도였다. 해리라고 하는 악당은 그토록 많은 점들 가운데 몇 백만의 점을 소멸시킨 나치에 승전을 거둔 영국인이다. 그가 다시, 이번에는 자본주의, 즉 돈을 위해 수많은 점들 가운데 불행하게 선택된 몇 개의 점을 삭제하는 대신 점 하나에 2만 파운드의 세금 안 내는 돈을 벌려고 한다. 젊은 시절, 이 영화가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건지 모른 채 그저 이 대사와 엔딩 씬에 매료되어버렸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장 안 되는 영화 DVD 목록에 <제3의 사나이>가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책을 다 읽고 확 깨는 건, 엔딩이 소설의 결말과 다르다는 것. 어떻게 다른지는 당연히 가르쳐드리지 않겠다.
 고전 스릴러로 일독할 만하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영화를 더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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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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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큐우슈우에 사꾸라지마라는 온천 지역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 여관집에 따님이 한 분 있었다. 그 동네 습관이 외지 사람하고는 혼인을 맺지 않는 거였는데, 이 따님이 하루는 고향이 시코쿠 ‘이요’인 광목 행상하고 눈이 맞아 덜컥 혼인을 해버렸다. 관습법에 입각한 여관집 주인 내외는 가차 없이 따님을 내쳐버려 이 외로운 신혼부부는 야마쿠치 현의 시모노세키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남편은 광목 행상을 다니며 틈틈이 아이를 만들어 딸을 둘 두었다. 행상 다니느라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아이 만들 시간은 있는 법이라서. 없는 집에 이거면 됐을 터이지만, 남자는 포목장사로 돈을 제법 모으자마자 그만 기생첩을 하나 얻어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열을 받은 여자는, 내가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까지 무릅쓰고 자기하고 혼인을 했으면 지랄을 하시더라도 적당히 해야지 말이야, 눈이 폴폴 날리는 음력 정월에 여덟 살 먹은 작은 딸 후미꼬의 손목을 잡고 드런 집구석을 뛰쳐나오기에 이른다. 이 때를 굳이 서기력으로 꼽는다면 1911년 아니면 1912년. 요새 같으면 정식으로 이혼 소송해서 재산의 절반 이상을 분할 받고, 자식들 양육권에다가 다달이 교육비도 청구할 수 있겠지만 그때야 못 견디겠으면 기생첩에 안방을 물려주고 맨입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아이 딸린 여자 혼자 험한 세상 살 수 있었겠나. 그래 오까야마 출신으로 행상에 잔뼈가 굵은 젊은 남자를 얻으니 이름은 뭐 중요하지 않고 그저 ‘후미꼬의 새아버지’라 하고 말자. 다른 소설에서 등장하는 새아버지는 흔히 엄마와 딸의 노동력과 몸을 동시에 착취하는 괴물로 그리고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후미꼬의 새아버지는 원래 소심한 성격에다가, 고스톱, 도리짓고땡, 섰다 등등의 화투 게임을 즐기는 습관에 푹 절어 있으면서도 의붓딸한테 늘 잔정을 베풀었으나 언제 한 번 주머니가 두둑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 아무리 살풀이굿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지라 한 곳에 느긋하게 주질러 앉아 살지를 못했다. 이리하여 후미꼬는 여덟 살에 방랑을 시작해 이십 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일본 곳곳을 전전하며 세계적 불경기를 당한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스스로 돈을 벌어 사는 와중에 고독과 굶주림과 약간의 부적응 적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시와 동화와 소설 작업을 멈추지 못한다.
 역마살 낀 부모와 함께 방방곡곡을 다니며 행상을 했는데 어떻게 시와 동화, 소설을 쓰느냐고? 열세 살이 되자 후미꼬는 여공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정기적으로 돈을 벌면서 고등여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책에서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정에 관해서 자세하게 기술해놓지 않았다. 원래 이야기책 읽기를 좋아하던 후미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책을 섭렵한 것 같다. 독서의 즐거움이란 것이 사실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라, 이후 (작가 말고 책의 주인공으로서의) 후미꼬가 지독하게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도중에도 틈틈이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책을 사고팔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 읽은, 노르웨이의 국가대표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십여 년이 지나면 ‘바이킹의 후예들이여, 나치 군대에 입대하여 성전에 목숨을 바치자!’ 라고 침을 튀며 부역을 한 죄를 죽을 때까지 씻지 못할 크누트 함순이 쓴 <굶주림>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작중 수시로 등장하는 소설이 바로 <굶주림>. 근데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사흘 굶어 담장 넘지 않는 인간 없고, 칼 안 빼는 인간 없다는 진리. 함순의 소설 <굶주림>에서, 계속되는 결식으로 영양실조가 극심해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는 와중에도 우연히 들어온 현금을 자신보다 더 불쌍해 보이는 노파에게 줘버리는, 지극히 위선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장면이 결코 고결하거나 우아하거나 명예스럽게 읽히지 않았다. 작가 자신으로 짐작되는 <방랑기>의 주인공 하야시 후미코는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의 주인공 ‘나’보다 훨씬, 훨씬 인간답다. 후미꼬는 물론 지극한 쪽팔림을 무릅쓰고, 조금의 안면만 있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어 일단 뱃속에서 굶어죽을 판인 회충을 기아선상에서 구해주고, 단 한 번도 빈 돈을 갚았다는 걸 보지 못했다. 밥을 벌기 위하여 별의 별 직업을 전전하며 나중엔 카페 여급으로까지 전락하여 손님들이 사는 저질 위스키를 단번에 열 잔을 들이키는 쇼를 시전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끝까지 가는 거다. 몸 파는 일만 빼놓고. (몸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술해놓지 않았을 뿐.) 이게 정상 아냐?
 일기 형식의 소설. 그런데 고독과 굶주림에 관한 많은 소설 가운데 사실 별 스토리가 없는 이 책을 읽는 건, 어쩌면 특이한 문장들 때문일 수도 있다. 문장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들이 뭉쳐 한 인격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참으로 쓸쓸하게 표현하는 것. 작가가 소설가이기 전에 시인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독자의 염통이 뚝 떨어지는 듯한 감성의 지뢰를 묻어 놓았다. 아름다운 책이지만,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독자에 따라 좀 궁상맞게 느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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