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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바빌론에 오다 ㅣ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40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황혜인 옮김 / 책세상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천사가 있었다. 주로 하는 일은 안드로메다 성운을 중심으로 적색 별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업무였는데, 하루는 주님께서 가운뎃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비비더니 손등에서 꼬물거리는 인간 여성 모습의 생명체를 하나 만들어 이름을 쿠루비라고 하며 천사에게 주면서, 인간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건네라는 지시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이 유프라테스 강변의 바빌론. 바빌론은 바빌론인데 누가 지배하고 있었는가 하면, 바로 얼마 전에 쿠데타에 성공해 정권을 장악하고 이제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기로 결심을 한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치하 원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기가 아는 좁은 지식 안에서 말하자면, 전 세상을 통일한 유일한 국가의 왕이란 것. 이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면서 유일하게 노동하지 않고 밥을 먹는 거지라는 계급을 박멸하기 위해 바빌론의 모든 거지를 협박, 체포, 고문 등을 통해 다 노동자로 만들었는바,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바빌론의 천재적인 거지 ‘아키’는 여태까지 전향을 거부하면서 자기가 동냥해온 돈으로 바빌론의 숱한 시인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국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신경질이 날 수밖에.
국왕이 수상에게 묻는다. “고문은 했는가?”
수상이 답하기를, “그의 몸 어느 한 구석도 뜨겁게 달군 쇠로 지지지 않은 곳이 없고, 어떤 뼈도 엄청난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는 대국의 국왕답게 사형보다는 직접 만나 설득을 해서 내일부터 공무원 자리를 주어 일을 하게 만들겠다고 결심을 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천재적인 거지 아키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국왕 역시 누더기를 걸치고 붉은 가발을 쓴 채 나타나는 장소에, 하필이면 똑같이 누더기에 붉은 가발을 한 천사 역시 짙은 베일을 한 쿠루비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바람에, 거지 아키,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그리고 천사가 비슷한 모양을 하고 만나게 된다. 이렇게 1막은 시작한다.
여기서 절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이건 얘기해도 스포일러는 아닐 것이라 소개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아키를 설득하기 위해 거지대결을 벌이기로 한다. 누가 더 구걸을 잘 할 수 있는가를 내기하는 건데, 천하의 네부카드네자르, 일찍이 아라비아반도 전체를 통일하고 거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완성했으며, 유대문명까지 몽땅 자기 노예로 만든 위대한 왕이라서 자신은 절대 지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서만 살지 않았을까. 그래 겁도 없이 프로페셔널 거지 아키에게 구걸 도전을 했으니 그걸 이겨낼 수 있나. 거기다가 명색이 왕이라 주변에 숨어 있는 측근들의 훈수나 도움도 깨끗하게 거절을 해버리니 말이지. 여기서 구경꾼으로 관람석에 앉아 있던 천사와 쿠루비는 세상에서 딱 둘 남은 거지 가운데 구걸도 제대로 못하는 거지가 가장 비참한 인간이라고 결론을 내려 시합에 지는 거지에게 쿠루비를 넘겨주기로 결정을 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구걸을 한다 해도 선걸仙乞, 걸인의 신선 수준에 도달한 아키를 이길 수 없어 총점 99대 1로 패배하면서, 일은 우습게 꼬인다. 졸지에 거대왕국의 군주 네부카드네자르가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천사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어여쁜 정도를 넘어 모든 남자가 단 한 번의 눈길로 넋이 나갈 정도의 미모를 지닌 쿠루비를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국왕의 손길로 넘겨주니, 국왕이 제일 비참한 인간인가, 천사도 실수를 하는가, 긴가민가해지고 만다. 어떠셔, 이 정도 가지고는 스포일러라고 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맛보기로 여기까지만 써놓아도 되겠지?
뒤렌마트는 하여튼 재미있는 극작가다. <노부인의 방문>도 그렇고, <물리학자>도 그렇더니, 여기서도 뭐 이것저것 막 떠오르는 대로 변주를 해버린다. 자세한 건 진짜 스포일러가 될까봐 더 이상은 얘기하지 못하겠는데, 비록 지금 신분은 국왕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비참한 인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신적? 제일 우스운 것이 법의 그물에서 살짝 벗어난 잘못을 저질러놓고 “도의적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삽질하는 인간들. 그걸 다른 표현으로 하면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하고 뭐가 달라? 아, 또 삼천포. 다시 네부카드네자르로 돌아와서, 국왕이란 자리보다 더 정치적인 위치는 없을 것이다. 그래 정치적으로 국왕 네부카드네자르는 어떠신데? 이런 물음을 던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키를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하지만 결코 노동자로 전향하지 않으면 가로등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다는 신념. “동냥질은 반사회적”이라서. 그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기어이 아라비아 반도에서부터 소아시아 지방까지 다 먹고 입 싹 닦은 자신은? 이래저래 연극은 복잡한 골목으로 접어 들어가고 이에 비례해 읽는 재미는 점점 더 고양되는데, 더 이상은 짧은 희곡을 너무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거 같아 이쯤에서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으니 바로,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