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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ㅣ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평점 :
일본 큐우슈우에 사꾸라지마라는 온천 지역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 여관집에 따님이 한 분 있었다. 그 동네 습관이 외지 사람하고는 혼인을 맺지 않는 거였는데, 이 따님이 하루는 고향이 시코쿠 ‘이요’인 광목 행상하고 눈이 맞아 덜컥 혼인을 해버렸다. 관습법에 입각한 여관집 주인 내외는 가차 없이 따님을 내쳐버려 이 외로운 신혼부부는 야마쿠치 현의 시모노세키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남편은 광목 행상을 다니며 틈틈이 아이를 만들어 딸을 둘 두었다. 행상 다니느라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아이 만들 시간은 있는 법이라서. 없는 집에 이거면 됐을 터이지만, 남자는 포목장사로 돈을 제법 모으자마자 그만 기생첩을 하나 얻어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열을 받은 여자는, 내가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까지 무릅쓰고 자기하고 혼인을 했으면 지랄을 하시더라도 적당히 해야지 말이야, 눈이 폴폴 날리는 음력 정월에 여덟 살 먹은 작은 딸 후미꼬의 손목을 잡고 드런 집구석을 뛰쳐나오기에 이른다. 이 때를 굳이 서기력으로 꼽는다면 1911년 아니면 1912년. 요새 같으면 정식으로 이혼 소송해서 재산의 절반 이상을 분할 받고, 자식들 양육권에다가 다달이 교육비도 청구할 수 있겠지만 그때야 못 견디겠으면 기생첩에 안방을 물려주고 맨입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아이 딸린 여자 혼자 험한 세상 살 수 있었겠나. 그래 오까야마 출신으로 행상에 잔뼈가 굵은 젊은 남자를 얻으니 이름은 뭐 중요하지 않고 그저 ‘후미꼬의 새아버지’라 하고 말자. 다른 소설에서 등장하는 새아버지는 흔히 엄마와 딸의 노동력과 몸을 동시에 착취하는 괴물로 그리고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후미꼬의 새아버지는 원래 소심한 성격에다가, 고스톱, 도리짓고땡, 섰다 등등의 화투 게임을 즐기는 습관에 푹 절어 있으면서도 의붓딸한테 늘 잔정을 베풀었으나 언제 한 번 주머니가 두둑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 아무리 살풀이굿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지라 한 곳에 느긋하게 주질러 앉아 살지를 못했다. 이리하여 후미꼬는 여덟 살에 방랑을 시작해 이십 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일본 곳곳을 전전하며 세계적 불경기를 당한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스스로 돈을 벌어 사는 와중에 고독과 굶주림과 약간의 부적응 적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시와 동화와 소설 작업을 멈추지 못한다.
역마살 낀 부모와 함께 방방곡곡을 다니며 행상을 했는데 어떻게 시와 동화, 소설을 쓰느냐고? 열세 살이 되자 후미꼬는 여공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정기적으로 돈을 벌면서 고등여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책에서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정에 관해서 자세하게 기술해놓지 않았다. 원래 이야기책 읽기를 좋아하던 후미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책을 섭렵한 것 같다. 독서의 즐거움이란 것이 사실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라, 이후 (작가 말고 책의 주인공으로서의) 후미꼬가 지독하게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도중에도 틈틈이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책을 사고팔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 읽은, 노르웨이의 국가대표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십여 년이 지나면 ‘바이킹의 후예들이여, 나치 군대에 입대하여 성전에 목숨을 바치자!’ 라고 침을 튀며 부역을 한 죄를 죽을 때까지 씻지 못할 크누트 함순이 쓴 <굶주림>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작중 수시로 등장하는 소설이 바로 <굶주림>. 근데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사흘 굶어 담장 넘지 않는 인간 없고, 칼 안 빼는 인간 없다는 진리. 함순의 소설 <굶주림>에서, 계속되는 결식으로 영양실조가 극심해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는 와중에도 우연히 들어온 현금을 자신보다 더 불쌍해 보이는 노파에게 줘버리는, 지극히 위선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장면이 결코 고결하거나 우아하거나 명예스럽게 읽히지 않았다. 작가 자신으로 짐작되는 <방랑기>의 주인공 하야시 후미코는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의 주인공 ‘나’보다 훨씬, 훨씬 인간답다. 후미꼬는 물론 지극한 쪽팔림을 무릅쓰고, 조금의 안면만 있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어 일단 뱃속에서 굶어죽을 판인 회충을 기아선상에서 구해주고, 단 한 번도 빈 돈을 갚았다는 걸 보지 못했다. 밥을 벌기 위하여 별의 별 직업을 전전하며 나중엔 카페 여급으로까지 전락하여 손님들이 사는 저질 위스키를 단번에 열 잔을 들이키는 쇼를 시전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끝까지 가는 거다. 몸 파는 일만 빼놓고. (몸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술해놓지 않았을 뿐.) 이게 정상 아냐?
일기 형식의 소설. 그런데 고독과 굶주림에 관한 많은 소설 가운데 사실 별 스토리가 없는 이 책을 읽는 건, 어쩌면 특이한 문장들 때문일 수도 있다. 문장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들이 뭉쳐 한 인격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참으로 쓸쓸하게 표현하는 것. 작가가 소설가이기 전에 시인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독자의 염통이 뚝 떨어지는 듯한 감성의 지뢰를 묻어 놓았다. 아름다운 책이지만,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독자에 따라 좀 궁상맞게 느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