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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화전설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
위앤커 지음, 전인초.김선자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그리스,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유럽인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 인용, 변용하는 것을 전혀 어색하지 않듯, 아시아 사람이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일화, 인물, 신의 행적을 예를 들어서 말하고, 글을 쓰고, 읽어온 세월이 유구하다. 물론 이제 젊은 작가들이 쓰는 작품에선 이런 경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고, 몇 십 년이 더 흐르면 이나마도 거의 없어지리라 생각하지만, 종아리를 맞아가며 한문을 배운 장년세대로 살기 위해서는, 즉 제대로 된 꼰대로 남은 생을 마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미리 읽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중국의 몇 천 년에 이르는 역사 가운데, 전한 시대 사마천은 삼황오제와 하, 은, 서주 시대까지를 진정한 역사기록으로 인정하지 않은 듯했지만, 우주의 탄생, 인간의 기원, 농사와 의약의 발전, 외침과 황하의 치수를 기록한 이 시대의 매력적인 이야기는 다시 읽어봐도 흥미진진하다. 기본적으로 중국 전설시대는 천제天帝들,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천제 가운데 주로 중앙 천제인 황제黃帝(한문 안 배운 세대를 위해 부언하자면, ‘emperor’가 아니라 서양 신 가운데 ‘유피테르’ 같은 하늘의 주신主神)와 남방 상제인 염제炎帝(서양 신과 비교해 유피테르와 비슷한 힘을 가진 포세이돈이나 하데스 정도)와의 대립이 주를 이룬다. 싸움에서 염제와 염제의 후손, 염제의 부하 신이자 불의 신火神인 축융祝融(삼국지연의에서 남만의 왕 맹획의 처와 이름이 같다) 등이 수시로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로 황제에게 건건히 얻어터지기만 하지만. 이 염제가 누구냐 하면 신농神農이다. 농사짓는 법을 깨달아 인류에게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약초를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직접 먹어봄으로 해서 숱하게 죽을 고생을 해 의약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신. 염제의 후손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한 명이 싸움대장이자 안개를 피우는 법술로 당대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던 치우蚩尤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응원단의 이름이 ‘붉은 악마’. 그런데 남중국 출신의 치우천왕이 어떻게 하다 보니 북동 지역 대한민국의 축구대표팀 간판이 되어버린 것. 물론 전설, 신화는 비슷한 내용의 이본異本이 많아서, 지금 ‘내가 옳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중국의 신화 전설에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신화학자 위앤커의 저작에 의하면 그렇다는 거다.
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하나라 걸왕, 은나라 주왕, 서주시대를 끝내는 주 유왕에겐 공통점이 있으니, 경국지색의 처첩. 하나라 걸왕한테는 말희妺喜. 걸왕이 말희를 왕비의 자리에 앉힌 것까진 좋았는데, 도무지 어여쁜 말희가 웃지를 않는 거다. 그러다가 우연히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앵도櫻桃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본 걸왕의 마음이 하이고, 너무 기뻐 눈물이 앞을 가리는지라 비단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마구 찢어댄다. 이러니 고대국가에서 국고가 거덜이 나는 건 시간문제인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치스런 별궁을 지어놓고 연못에 술을 채워 넣어 배를 띄운 것도 모자라 고기 덩이를 나무에 주렁주렁 달아놓아 아무나 먹을 수 있게 만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까지 만들었으니 나라 하나 결딴나는 건 시간문제였을 터. 주지육림에 관해선 다른 해석을 하는 책도 있다. 연못을 술로 채워놓고 그 속에 숱한 동남동녀를 발가벗겨 놀게 했다는 내용. 이런 거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런가보다, 하자. 은나라 주왕紂王에겐 <봉신연의>에서 백여우로 등장하는 달기가 있어 백성을 폭력으로 학대하고 높이 대臺를 쌓아 국고를 낭비한 것은 물론 당대 최고의 토호였던 희姬씨 집안의 서백(후에 문왕文王)을 유리(박상륭의 작품 <죽음의 한 연구> 첫 문장에서 등장하는 ‘유리’가 바로 여기다)에 유폐시켜놓고 맏아들을 죽여 시신으로 곰탕을 끓여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등(서백은 다 알면서도 그걸 꾸역꾸역 몽땅 먹어치운다) 스스로 경쟁세력에게 단합하여 대항할 빌미를 가져다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서주의 유왕에겐 몇 백 년 전에 용의 정액을 저장해둔 괘가 열려 배리배리한 냄새가 나는 도마뱀으로 변하더니 쪼르르 달려가 소녀의 몸속에 들어가서 생긴 ‘포사’란 경국지색이 태어난다. 포사 역시 앞의 말희처럼 전혀 웃음이 없어 유왕의 애간장을 태우기만 하는데, 어느 날 하루 봉화가 오작동을 해서 제후국의 공들이 군대를 이끌고 도읍으로 헛되이 모이는 걸 보고는 깔깔거리며 웃는 일이 벌어진다. 그게 얼마나 어여쁜지 유왕은 이후 몇 번이나 일부터 봉화 시스템에 오작동을 발생시켜 그때마다 수도로 군대를 몰고 온 제후들의 염장을 제대로 긁어버린다. 그리하여 봉화 장치가 '늑대가 나타났다!' 신세로 전락하는 것. 딱 이때를 맞추어 북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와 이번엔 정말 꼭 필요해 봉화를 올렸건만 지원하러 온 제후가 한 명도 없어 수도를 내주고 동쪽 낙읍으로 천도를 해야 했으니, 이때부터 주나라는 명목상 왕국의 이름만 갖추었을 뿐 전국이 진의 시황에 의해 통일이 될 때까지 빈껍데기에 불과하게 된다.
책 표지에 나오는 물고기는 커다란 몸집에 닭의 다리가 달려 있는 생선으로 ‘초어’라고 한다. 이 생선 이름 ‘초’는 564,290 개의 한자가 들어 있는 네이버 한자사전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희귀 한자어로 고기어魚 변에 오른쪽에 깃들 소巢가 있는 글자다. 당연히 기억해봤자 사는 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되니 그런가보다, 하시라. 이 초어는 그러나 항생제 성분이 있어 종양 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지녔다고 한다. 이 초어를 필두로 무수한, 보도 듣도 못한 괴 생명체가 등장해서 가히 중국판 영화 <신비한 동물 사전>을 보는 듯하다. 과하게 허풍이 심해 완전히 상상에 의한 생명체인 것이 뻔해 감동을 느끼게 되진 않지만.
이런 신화나 전설은 서주 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기록 역사 시대인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다양성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역사는 <사기>를 쓴 사마천 등 당대의 사가들의 저작이 이후 계속해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신화와 전설 같은 주로 구비문학적 기록들 역시 누군가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다시 해석하여 쓰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중국신화전설>을 읽어보면 <사기 본기>와 <사기 세가>, <사기 열전> 등과 겹치는 것들도 발견할 수 있다. <열전>과 비교해도 ‘백이열전’, ‘오자서열전’, ‘중니제자열전’, ‘소진열전’, ‘장이열전’, ‘자객열전’ 등을 발견할 수 있고, <사기 세가>에선 <월 구천 세가>가 겹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다. 역사와 인류학 책들은 읽을 때마다 흥미진진하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사실 이번엔 백아와 종자기에 관해 들어본 적은 있으나 활자를 통해 직접 읽어본 경험이 없어 책의 목록에 ‘백아와 종자기’가 들어 있는 걸 보고 단박에 읽은 거였다. 나는 즐겁게 읽었지만 취향의 문제라서 추천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듯. 역사, 신화, 전설, 인류학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 되리란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