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계약 을유세계문학전집 136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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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치산>: 오노레 드 발자크. 이 진정한 골통 보수 꼰대가 노래하는 뽕짝에서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낭만주의가 싹을 트는 것이렸다? 당대에 누가 있어 인간의 마음에 도사린 본성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느냐는 말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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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부터 멀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7
피터 케리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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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 케리는 부커 상을 두 번 받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 작가이다. 나도 이이의 책은 <오스카와 루신다>,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 이렇게 두 작품을 읽어봤다. 장편 속의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참 재미있게 묘사해 읽는 맛이 있으나 아쉽게도 나하고는 별로 맞지 않았다. <오스카와 루신다> 독후감에도 썼다시피, 무수하게 많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다 합친 ‘작품’으로는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작가와 독자의 합이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다.

  미리 이야기해버리면 김이 조금 빠지겠지만 이왕 말 나온 김에 계속 이어가자면, <집으로부터 멀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흥미로운 두 가지 이야기를 두 명의 화자를 통해 꾸려가는데, 잘 나가다가 난데없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나, 싶은 마음이 들어 그만 김이 새버렸다. 그 우연이 뭐냐고? 뜸 좀 들인 다음 차차 이야기하겠다.


  멜버른에서 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배커스마시 토박이 아이린이 첫번째 화자이다. 아이린은 아버지의 귀여운 새앙쥐로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촌동네 수준에서 유복한 집안의 둘째이자 막내딸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이제 어엿한 그러나 눈에 띌 정도로 미인은 아닌 자그마한 여성으로 컸을 때, 아이린은 16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작고 사랑스러운 청년한테 청혼을 해 아버지가 기함을 하게 만들었다. 1940년대 기준으로 보통 수준의 키인 159센티미터였던 언니 베벌리는 유명 호주풋볼(미식축구보다 더 거친 오스트레일리아만의 스포츠) 선수, 근육질 거구의 남자와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다가 결국 서른 시간의 진통 끝에 큰 아이를 출산했지만, 두고두고 동생 아이린한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존재였다.

  작고 사랑스러운 청년이 어떻게 아이린의 짝이 됐느냐 하면, 청년의 이름이 티치 봅스였는데, 이제 아이린의 집안 사정이 좋아지자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포드를 사달라고 이야기했고, 아버지도 속으로 은근히 바라는 바였는지 흔쾌하게 허락을 해, 차 세일즈맨 와일드 댄, 댄 봅스를 불러 구매협상을 했던 것이 연분의 시작이었다. 댄 봅스는, 우리나라에서 차 사면 세일즈맨이 바닥 깔개 해주고, 유리 필름 해주듯이, 당시에 포드를 사면 면허를 딸 때까지 운전 교습을 해주겠다고 일종의 끼워팔기를 했고, 이 조건으로 운전교습을 해줄 자기 아들 티치 봅스를 빅토리아주 절롱에서 배커스마시로 오게 했던 거였다. 그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티치가 아이린의 집에 하숙을 하기 시작했으나, 정작 차를 사달라고 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포드 구입은 갑자기 어영부영하기 시작했고, 티치도 이 와중에 슬그머니 짐을 싸 절롱으로 돌아가기도 좀 야박한 거 같고, 이 집에 그냥 머물자니 그것도 좀 어색해, 가족 가운데 그나마 운전을 배울 여유가 있는 유일한 사람인 아이린한테 교습을 해주면서 찌리릿 또는 파바박, 다들 아시지? 전기가 통했던 거다. 그런데 아이린이 운전에 소질이 있어도 보통 소질이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운전은 앉아서 버티는 힘이 있어야 하는 거란다. 이건 땅덩이가 워낙 큰 오스트레일리아 기준이다. 이에 맞게 딱 바라진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아이린은 여기에 놀라운 순간 판단력까지 지녀 티치도 감탄할 정도였다나? 하여간 이들은 아이린이 운전면허증을 딴 날 결혼을 했고, 160킬로미터 떨어진 워러걸까지 아이린이 직접 운전을 해 첫날밤을 치룬 다음, 베언즈데일로 이사를 갔다.

  시아버지짜리 댄 봅스가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인데, 댄 봅스, ‘위험한 댄’이 아이린한테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린은, 결혼 전이겠지, 배커스마시 친정집 현관에 있는 코트걸이 앞에서 위험한 댄, 존경하는 시아버지 댄 봅스 씨한테 오지게 따귀를 날린 적도 있다. 이후 아이린은 시아버지 댄이 남도 아닌데 남보다 못한, 남도 아니면서 남보다 더 못하면 뭐야? 웬수로 여기기 시작했다. 댄은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게, 아들 며느리가 신혼살림을 시작한 하숙집이나 셋방에 쳐들어와 침실 바로 옆방에 침대를 깔고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기도 했으니 며느리 입장에서 웬수 맞지? 티치가 베언즈데일에서 차 세일즈맨을 하며 근근이 모은 돈으로 처가가 있는 베커스마시로 돌아가 자기가 직접 포드 딜러를 해보고자 했을 때도 위험한 댄은 온갖 것을 고물 차에 싣고 와 그걸 아들에게 떠 안기고 몇 푼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쩌면 아들 하는 일에 사사건건 그렇게 어깃장을 놓기만 하는지 읽는 독자도 참 얄미울 정도다. 그러다가 혹시 나중에 아버지가 며느리 아이린이 모르는, 이들을 위한 큰 뒷바라지를 준비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찰나, 결코 이 비슷한 미덕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댄은, 몇 년 전 사부인이 그랬듯이 갑자기 급사해버리면서 저 세상으로 가면서까지 부부의 앞길을 콱 막아버린다. 진짜 이런 웬수도 없다 싶다.

  무슨 일이냐 하면, 이때는 아이린과 티치 봅스 사이에서 딸 이디스와 아들 로리가 제법 자랐을 1954년이었는데, 베커스마시의 딜러 상점을 위하여, 또는 상점을 시작하면서 광고 비슷한 효과를 내려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은 자동차 랠리, 사실은 랠리도 아니면서 혹독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일주하는 대회 “레덱스 테스트”에 참가했을 때였는데, 시아버지, 위험한 댄도 같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다양한 사달을 만들었던 거다. 작가 피터 캐리가 아이린과 티치의 체구를 작게 설정한 건, 다른 참가 차량은 메인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 두 명이 탑승하지만, 이들의 제너럴 모터스 차에는 운전을 할 부부와 지도를 읽을 네비게이터 윌리 박후버, 이렇게 세 명이 탈 것이기 때문이었다. 셋이 타긴 하는데 중량으로 치면 다른 차의 두 명과 비슷해서 연비와 차의 부담에 차이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새로이 등장하는 윌리 박후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리라. 어려서부터 스릴을 느끼기 위해 경솔한 짓을 했던 것 같다. 우스운 짓을 하다가 2층에서 떨어져 어깨에 큰 흉터가 생기기도 했을 정도로.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지만 좀 분방하게 성장해 육체적으로 애덜리나 캐이니그에게 끌린 것도 이런 욕망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둘은 십대 시절에 연애를 시작해, 당연히 섹스를 했고, 그때만 해도 적당한 성교육이 미흡했던 시절이라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이 시절 윌리는 더없이 만족한 직장인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함께 일하던 지도 전문가 사서인 서배스천이 도움, 쉽게 말하자면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알선도 해주어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임신은 한 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서, 애덜리나는 다시 아이를 갖게 됐고, 윌리 역시 적법한 나이가 됐으니 목사 아버지한테 이실직고하고 결혼서류에 인감도장을 눌러 찍었다. 여기까지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이들 부부에게는 매디슨이라는 이름의 남자 간호사 흑인 친구가 있었다. 미국인이었다. 나중엔 의사 공부를 해서 정식으로 의사가 된다. 그건 나중 일이고, 이제 애덜리나가 진통을 하기 시작해 분만실에 들어가 아들을 낳았는데, 마음이 급한 윌리가 의사를 만나는 순간, 의사는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애덜리나와 아이를 보여주었고, 아이는 누가 봐도, 흑인이었다. 대경실색한 윌리. 그는 그 길로 고향 애들레이드에서 도망쳐버렸다. 세상에. 죽도록 사랑했던 아내 에덜리나가 나의 둘도 없는 절친 매디슨의 아이를 낳다니. 그는 완벽하게 타지인 배커스마시로 와 나름대로 정착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맬버른의 라디오 방송 “디지의 라디오 퀴즈쇼”에 출연해 소소하게 출연료도 받았다. 그러나 아이의 양육비, 아내의 생활비 같은 건 물론이고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고, 모든 우편물도 거부하며 틀어박혀 살고 있었다. 아이린과 티치 봅스 가족이 옆집에 이사오기 전까지는.

  윌리가 봅스 부부를 만났을 때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웃이니까 안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유난히 말썽을 부리는 베넷 에지의 발목을 잡고 2층 교실의 창문 밖으로 대롱대롱 매다는 바람에 정직을 당해 처벌 심사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엔 유급 정직이었으나 나중에 무급으로 떨어지다가 결국엔 해고를 당하고 말지만. 하여간 봅스 부부와 친해지면서 윌리의 지도 읽는 재주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유심히 관찰한 티치 봅스가 그를 위대한 랠리인 레덱스 테스트에 네비게이터로 초대하면서 윌리는 소설의 두번째 화자가 될 자격을 얻었다.

  좋다. 확 말해버리겠다. 윌리는 박후버 목사의 적자, 독일인의 후예, 즉 백인이 아니었다. 잉글랜드 목장주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여성을 강간해 나은 아이로 백호주의를 외쳤던 정부가 강제로 선주민한테 빼앗아 가 목사에게 보낸 거였다. 반 흑인, 반 백인이며 흰 쪽을 많이 탁한 아이를 굳이 흑인이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정말 라인강변에서 이민 온 백인으로 키워진 흑백. 그러면? 뭐긴 뭐야, 애덜리나가 낳은 흑인 아이도 윌리의 아들이었던 것이지.

  여기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 약탈과 학살, 즉 다른 형태의 식민지배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문제가 소설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하여 작가 피터 캐리는 윌리를 자신의 진짜 고향, 저 중서부 지역의 황량하기 그지없는 목장지대로 보내야 했고, 그 방법으로 레덱스 테스트의 네비게이터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여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결과 드디어 윌리는 자신의 원래 터전을 찾아가는 기적을 만드는데, 이거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은 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말이지. 차라리 대천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와이셔츠 단추를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이거 하나만 아니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작고 아름답고 착한 티치 봅스? 이 남자가 위험한 댄의 아들이잖은가. 작고 착한 티치 봅스의 변신을 보는 것도 작은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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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24 06: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원주민/이민자 갈등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작으로 패트릭 화이트 작품 <전차를 모는 기수들>을 권한다. 패트릭 화이트는 작품의 품질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안 읽히는 작가, 작품 아닐까 싶어 아쉽다. 심지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데도.
 
테베랜드
세르히오 블랑코 지음, 김선욱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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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세르히오 블랑코는 1971년에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보내고 하여간 어딘가 있는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배운 후에 프랑스 코메디아 프랑세즈에서 연출을 공부했다. 이후 계속 연출과 스페인어(라틴 아메리카 어)로 극작을 하고 있다. <테베랜드>에 등장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S’가 자신의 도플갱어라 할 수 있는데 S가 하는 말로 미루어 부계가 프랑스라서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을 듯하다. 하긴 우루과이보다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것이 이름을 날리는 데 훨씬 유리하겠지. 실제로 이이는 2017년에 <테베랜드>, 20년에 <나르키소스의 분노>를 극작, 연출, 공연해 런던에서 “어워드오브웨스트엔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는다고 해설에 쓰여 있다. <테베랜드>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연했고, 이때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는데, 요새 외국 작가가 한국에 오는 일이 뭐 특별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라서 뭐.


  세르히오 블랑코가 “국제적 유명세”를 얻은 작품이 <테베랜드>와 <나르키소스의 분노>인데 둘 다 그리스 비극과 신화에서 주제를 따왔다. 고전 문학을 공부했다더니 기어이 본전을 뽑네 그려. “테베랜드”는 말 그대로 그리스 “테베 땅”, 테베에서 일어난 일을 뜻한다. 테베 이야기라면 당연히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숱하게 많이 변주하여 이젠 별로 색다를 것도 없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존속살인과 스핑크스, 근친상간, 스스로 눈을 찌르는 자해, 그리고 두 아들의 다툼, 일곱 성문에서의 전투, 테베 함락, 안티고네 이야기 등은 계속해서 변주되고 있다.

  <테베랜드>의 무대는 펜스가 쳐진 교도소 안의 반코트 농구장이다. 등장인물은 앞에서 이야기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S와 재소자 마르틴, 마르틴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공연할 페데리코, 이렇게 세 명이다. 마르틴과 페데리코는 1인 2역이니 실제 등장하는 배우는 두 명이다.

  종신형을 복역중인 마르틴의 죄명이 “존속살인.” 테베 땅에서 일어난 존속살인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오이디푸스는 마차 위에서 버벅거리고 있는 라이오스 왕이 자기 친아버지인 줄 모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지만, 마르틴은 자기 친아버지인 줄 뻔히 알면서 부엌 싱크대 앞에서 밥 먹는 포크로 처음엔 목, 이어서 가슴과 복부를 스물한 번 찔러 죽였다.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발등을 뚫고 산에 내다 버렸고, 마르틴의 아버지는 마르틴이 어렸을 때부터 바보 같은 놈, 세상에 필요 없는 놈 뭐 이런 식으로 부르며 두드려 패는 데 조금의 게으름이 없었다가, 마르틴의 대가리가 커져 힘도 세지면서 매 타작만 멈춘다. 그러나 입은 더 거칠어져 갖은 욕설을 퍼부었고, 이젠 지긋지긋해진 아버지한테 기어이 식탁 포크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에서 비롯했는지 확실하게 가르쳐주기에 이르렀다.

  등장인물 S가 스스로 말하듯이 테베에서의 부친살해가 정말 부친살해인가, 아버지인 줄 모르고 당시 윤리 기준으로 보아 죽일 만해서 죽였는데 그것도 그리 큰 죄인가? 선왕의 왕비 이오카스테가 자기를 낳은 엄마인 줄 모른 상태에서 결혼해 아들 둘, 딸 둘을 낳은 것도? 그래서 스스로 브로치 바늘로 두 눈을 콕콕 찔러 세상의 빛을 외면하게 만든 채 추방을 당하는 게 옳은 일이었는지도 묻고 있다.

  어쨌거나 아버지를 때려 죽인 일, 부친살해를 언급하면 이젠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그런데 어쩌면 세상의 모든 아들이 한 번쯤 아버지 살해를 꿈꾼다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유대인 의사가 주장하지 않았나? 프로이트 자신이 반쯤 변태이긴 했지만 온 세상이 그의 주장을 신주단지처럼 믿어온 세월이 몇 년인가 말이지. 아냐, 반이 뭐야, 반이. 틀림없이 프로이트는 변태였을 것이다. 프로이트, 섹스, 생식기 오리엔티드 사고방식.

  나는 아이들한테 내가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사내새끼들이 “제일 존경하는 분이 부모님(또는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줄창 이야기해왔다. 부모 또는 아들의 경우 (나도 프로이트 영향을 받은 거야?) 아버지라는 존재는 존경의 대상이 아닌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그래야 세상은 진화, 진보하는 거다. 그잖여?

  근데 마르틴의 아버지한테는 사실 큰 결함이 있긴 했다. 이런 자는 아버지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쉽나 어디. 이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둔 마르틴은 어려서부터 하도 핍박이랄까 구박, 하여간 자신감이나 자존감 없이 자라는 바람에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적응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마르틴하고 비슷한 인물이 하나 있지? 도스토옙스키의 걸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아들 가운데 막내 스메르자코프. 이 이야기도 S와 배우 페데리코 사이에서 나온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는 페데리코한테 S가 자기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S는 마르틴과 대화한 내용은 극작품으로 쓰고, 이것을 공연하고, 적어도 리허설 때에는 마르틴이 외출을 해서 어떤 공연인지 직접 보게 해주려 했지만 결국 그렇지 못한다. 대신 영상물을 보여준 후 S는 우루과이를 떠나 파리로 가는 것으로 끝난다. 주로 프랑스에서 무대에 올렸던 극단적 부조리극과 비교하면 무척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렇다고 2만원이 넘는 비싼 책을 사서 읽어보시라 권하기는 힘들 터. 하여간 지만지드라마에서 나오는 책이 비싸다. 할인도 안 해주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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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기계들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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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반 정도 읽다가 도서관 사물함에 책을 두고 왔었다. 그리고는 추석 연휴가 휙 지나갔다. 닷새만에 중간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니까 좀 헛갈렸다. 이게 별점을 조금 깎아 먹었을 수도 있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의 이름은 찰리 프렌드. ‘나’는 서른두 살에 완전히 빈털터리였다. 남부 런던의 따분하고 황폐한 거리에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의 습기 찬 일층에 산다. 아빠는 재즈 콰르텟을 이끄는 관악 주자로 대부분 연주여행을 다니며 아름다운 여성과 지나가는 바람을 피우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 같다. 어머니가 공중보건 간호사로 일하며 외동아들인 ‘나’를 키우는데 전념해 ‘나’의 유소년 시절엔 문화적 영양을 섭취하지 못했다. 책과 예술, 심지어 음악을 접할 시간과 공간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중부지방 남쪽의 삼각지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했고, 좀 더 잘 먹고 살기 위하여 법학으로 편입해 한때는 정식 세법 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세무 문제로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자마자 해고를 당하고, 길지 않을 교도소 신세를 질 뻔했지만 대신 백 시간 사회봉사 명령에 따라야 했다. 이후 다시는 정규직 직업을 얻지 못했다. 이후 경제적, 직업적, 개인적 실패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해야 했으며, 지금은 온라인으로 주식과 외환거래를 해먹고 사는 중이다. 따는 날도 있고 잃는 날도 있어서 1년 동안 평균을 계산해보면 발품을 파는 우체부만큼의 소득은 올리는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가 죽었다. 잘 살지 못한 어머니는 대신 집이 있었다. 그동안 땅값이 비싼 개발지역으로 변하는 바람에 집을 팔아 ‘나’ 찰리 프레드는 가만히 앉아서 뜻밖의 거금이 생겼다. 없는 사람한테 갑자기 큰 돈이 생기면 사달이 나는 경우가 많으니 ‘나’도 그랬다.

  인간의 기술은 어디까지 발전해야 하나? 희망이 허락한 종교적 열망이자 과학의 성배는 창조신화를 인간의 손으로 실현하기 위해 기괴한 자기 대적행위를 향해 전력을 다해 뜀박질했다. 그리하여 결과가 어떻든 창조의 욕망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건 인조인간이 세상에 나오기 오래 전부터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 있었으나, 1982년에 드디어 전기 에너지로 움직이는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이 가능한 스물다섯 대의 인조인간을 정말로 만들었다. 열두 개의 아담과 열세 개의 이브. 일찍이 전자공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사회봉사명령을 수행한 다음에 인공지능에 관한 책을 써 약간의 수입을 올린 적도 있는 ‘나’는 어머니가 죽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돈 가운데 8만6천 파운드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최초의 제조인간을 시판한 시제품 가운데 아담 하나를 사서, 초라한 아파트로 귀가한다.


  1982년이라 해도, 인조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지적 능력을 가진 기계였다. 이미 컴퓨터는 체스 세계챔피언을 가볍게 이기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는 2016년에야 바둑 세계챔피언을 여러 번 지낸 이세돌을 걲었지만 작품 속에서는 1982년에 벌써 바둑의 무한 경우도 스스로 학습을 통해 인간을 능가한 수준이 되었다. 물론 <제5원소>에 나오는 밀라 요보비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건 애초 가능하지 않은 역사를 새로 썼다는 건데, 이언 매큐언은 스토리에 개연성을 주기 위하여 영국 현대사에서 한 수학자를 호출한다. 앨런 메시스 튜링. 이이는 수학자이면서 컴퓨터 과학자로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린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나치 독일군의 애니그마 암호를 풀어달라고 부탁했고, 튜링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전쟁기간도 상당히 단축할 수 있었으며 1,400만 명의 생명을 구한 효과를 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민간인으로 복귀한 후 1952년에 당시엔 엄격하게 범죄로 처벌받던 동성애자로 체포당해 화학적 거세형을 받아야 했는데, 정말로 거세형을 받았는지 형 집행 전인지 모르겠지만 2년 후인 1954년에 시안화칼륨(청산가리) 중독으로 생을 마쳤다. 이 튜링이 남긴 업적은 컴퓨터 중에서도 인공지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매큐언은 1982년에 자기가 말하고 싶은 인조인간이 출현할 수 있는 근거로, 앨런 튜링 박사는 1952년에 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 화학 거세 전에 형 집행이 취소되었고, 따라서 시안화칼륨을 마실 이유도 없어서 1982년에도 생존해 있으면서 70세의 노인임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전제를 깔았다. 나는 70세의 노인이 모발도 풍성하고, 이도 건강하고 피부 트러블도 없다는 설명을 듣고 혹시 튜링 박사 자신도 벌써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인조인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튜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구성과에 특허를 걸지 않았다. 연구결과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능력이 있는 누구라도 일부 인류의 꿈인 인간 창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는 지도 모른다.


  애초에 ‘나’는 아담 말고 이브를 사기를 원했다. 그런데 아랍의 부호가 한 방에 이브 몇 개를 사가는 바람에 먼저 이브가 품절이 되고 만다. 여우와 포도. 그랬더니 당장 이렇게 바뀐다. “아담이라도 상관없어.” 20세기의 가을이라 할 수 있는 1982년. 12개의 아담과 13개의 이브는 각기 다른 민족적 특징을 지니게 고안되었다. ‘나’가 가져온 아담은 투르키예나 그리스인과 비슷한 외모에 몸무게가 80킬로그램쯤 나간다. 그런 기계가 담긴 박스를 혼자 옮기기 쉽지 않아 위층에 사는 스물두 살 먹은 대학생 미란다를 불러 ‘나’의 집에 들여놓았다.

  섹스 토이는 아니지만 섹스도 가능하다. 실제로 기능하는 점막도 보유한다. 점막의 습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루에 반 리터의 물을 마셔주어야 한다. 아담한테는 포경수술을 하지 않은 꽤 큰 성기와 풍성한 검은 음모가 나 있다. 이걸 본 미란다는 보스푸루스 해협의 어느 부두노동자를 닮았다는 의견을 내기도. 광고전단에는 아담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설거지와 침대정리를 하고 ‘생각’도 할 수 있는 동반자이자 지적 논쟁 상대. 친구이자 잡역부. 단 운전, 수영, 샤워,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외출, 사람의 감독 없이 전기톱 사용은 불가능하며 허락 받지 못함. 두 시간에 17km 달리기 가능. 12일 동안 쉬지 않고 대화할 수 있으며 수명은 20년임.”

  책 좀 읽는 독자가 이 전단을 보면, 저 뒤에 가면 전기톱으로 사고 한 번 치겠구나. 그러다가 수영장이나 강물 같은 데 빠져 죽겠구나. 이러고저런 짐작을 할 수도 있으리라. 여기서 말한다. 아니다. 전기톱은 나오지도 않고,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가도 크게 손상입지 않는다. 아담은 궁극의 장난감이자 모든 시대의 꿈, 인본주의의 승리 혹은 그 죽음의 천사라고도 썼는데,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이 책을 읽는 재미다. 그래서 알려드릴 수 없다.

  그런데 독자의 바람대로 되는 것이 하나 있으니, 아담을 계기로 여태까지는 친절한 이웃관계로 만족하고 있던 ‘나’ 찰리 프렌드와 위층 학생 미란다 블랙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

  아담의 사용설명서를 보면 성격의 특성을 정해야 한다고 나와있다. 친화성, 외향성, 경험에 대한 개방성, 성실성, 정서적 안정성이란 5대 성격 요인 모델에 각 1에서 10까지 선택이 가능하다. 나는 아담이 친구이자 손님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다가 아담이 ‘나’ 주변에 등장함에 따라 미란다와의 관계가 멀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성격 업데이트 다운로드를 할 때 ‘나’가 절반, 미란다가 나머지 절반을 입력해 마치 아담이 둘의 아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고, 함께 생활하기로 결정을 본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나’는 미란다와 자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와 미란다의 사이가 약간 서걱거리는 일도 당연히 발생했는데, 미란다는 아담을 불러 아담과 섹스를 했고, 여태까지 느꼈던 가장 강렬한 쾌감보다 79배 더 강력한 오르가슴 맛을 본다. 아래층에서 미란다의 침대가 요동치는 소리를 들으며 애꿎은 자기 연장만 굳세게 쥐고 벌겋게 밤을 세운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무생물 컴퓨터를 질투한 게 되고, 그런 ‘나’를 미란다가 비웃는다. 근데 아담의 정서적 민감성 항목이 어떻게 처리가 됐는지, 아담도 미란다를 사랑한다니 이걸 워쩌? ‘나’는 아담에게 다시는 미란다의 위에 올라가지 말라고 명령하는 걸로 그친다. 그랬더니 훗날, 많이 시간이 지나서 아담은 사랑하는 미란다 앞에 가서, “섹스를 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고요, 대신 당신 앞에서 자위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미란다는, 좋아. 대신 단 한 번이야.


  일흔 살의 튜링 박사도 아담 또는 이브를 한 개 이상 소유하고 있다. 급기야 결혼까지 약속한 ‘나’와 미란다가 그걸 기념하기 위해 레스토랑에 들렀다가 남자 애인과 데이트를 즐기러 온 앨런 튜링 박사를 우연히 만난다. ‘나’가 조심스럽게 ‘나’도 아담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인 튜링이 관심을 표했고, 며칠 후에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는 내용의 통지가 온다. 그렇게 만나 세상에 퍼진 아담과 이브들의 한정된 소식을 듣는다. 아랍으로 간 두 이브는 스스로 인공지능을 포기해 인간으로 치면 자살한 수준으로 됐고, 어떤 아담은 사라져버렸으며, 또 몇 아담들도 지능을 거의 포기한 수준이란다.

  진짜 인간의 세계. 때로는 좋기도 하고 선하기도 한 거짓말을 적절하게 생활에 섞을 줄 아는 인간을 아담과 이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사람 속에서 선하고 악한 양면을 발견할 때도 회로가 꼬일 수 있었나보다. 그렇게 구성이 된 아담과 이브가 스스로 회로멈춤,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아담의 뒤통수 가운데 작은 단추가 있어서 그걸 누르면 전원이 멈춘다.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 번 눌렀고, 일을 처리했고, 다시 켜서 재생시켰다. 아담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두번째 시도할 때 아담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고, 그래도 ‘나’가 하려고 하자 기꺼이 ‘나’의 오른손을 강하게 쥐고 놓아주지 않아 손목의 주상골을 부러뜨려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시스템을 통해 전원 차단 장치를 삭제한다. 이제 아담은 다시는 잠깐 사라지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이고, 모든 방면에서 ‘나’와 미란다를 능가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나’의 돈벌이인 주식과 환율을 아담이 대신하니까 수십만 파운드를 벌어들이니 이제 집안에서 위계가 어떻게 되겠어? 이런 아담한테 설거지를 시키고, 빗자루질, 미란다가 외로울 때 위무용으로? 그러나 아담은 스스로 학습을 계속한다. 사람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럼 좋겠다고? 혹시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이언 매큐언은 학습능력이 있는 인공지능 탑재 인조인간을 왜 인간으로, 인격으로 상대하지 않는지, 인간의 탐욕을 비판하는 데 이 작품을 쓰고 있으나, 재미있게 다 읽은 나는, 급기야 인공지능 인조인간을 만들어낸 인간의 무모한 과학기술의 발달을 탄하고 싶다. 제발 과학기술은 이쯤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아니라고? 과학이 조금 더 발전하면 더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그래봐야, 길어야 3만년이다. 과학이 발전하면 더 짧아질 수도 있다.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주구장천 인간이 살 수 있을 거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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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21 05: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족. p.301 첫 문장.
“찰리. 나는 그 평범한 목소리와 무신적無神的 초월의 순간이 대단히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역자 민승남이 이런 문장을 구사했었나 싶어서, 혹시 다른 사람이 잠깐? 아니겠지. 나 같으면 주어가 ˝나는˝이니까:
“나는 초월의 순간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깁니다!”
또는
“나는 초월의 순간이 대단히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또는 ‘여깁니다‘)!”
라고 했을 거 같은데. 하긴 역자 마음이다. 그게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독자인 내 맘이고.

hnine 2024-10-21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튜링 테스트‘의 튜링이 저 사람 이름에서 온 것인가 보네요.
이제 인조인간이라는 말이 아주 오래 전에 쓰이던 말 같은 느낌까지 들어요.
이 책, 재밌겠어요 ^^

Falstaff 2024-10-21 19:29   좋아요 0 | URL
옙. 튜링 테스트의 그 튜링입니다. 이 책 재미있습니다. 인조인간하면 이젠 뻔한 이야기 같은데 여전히 흥미를 돋더라고요. ^^

케이 2024-10-21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의 모든 SF 소설 영화에 등장하는 섹스 가능 인조인간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걸까요.
이렇게 전 인류가 앙망하는데 말이죠 ㅋㅋㅋ
하도 동일 소재로 여러 영화 소설을 봐서 그런지 저는 섹스 가능 인조인간? 이라고 하면 보기도 전에 흥미가 뚝 떨어지는데 이 소설은 어떨지 조금 궁금합니다.
제가 졸업한 대학교는 인문계도 무조건 컴퓨터 관련 수업 한 개를 이수해야만 했는데 당시 교수님이 앨런 튜링 이야기를 해주셔서 알게 되었네요. 컴퓨터 전공자들에게는 거의 신과 같이 모셔지고 있는 존재 같더라고요.
앨런 튜링 같은 사람을 보면 경외감도 들지만 어떤 한 사람이 전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거구나... 란 생각이 들어 조금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오늘도 재밌는 리뷰 감사했어요! 건강하세요!

Falstaff 2024-10-21 19:3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섹스까지 가능하면 그게 기계겠습니까. 그래도 또 모릅니다. 앞으로 불가능한 게 거의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사람이 2백살까지 살까봐 그게 제일 걱정스럽습니다. ㅎㅎㅎ
튜링은 어쩌면 외계인인 거 같더라고요. 그 시절에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이 책 역시 튜링이 없었으면 쓰지 못했을 거고, 그래서 시간적 배경도 튜링이 살아 있다는 전제로 여전히 활동할 수 있는 70세 정도인 1982년으로 맞췄을 겁니다. 맨인블랙들이 1954년에 청산가리를 이용해 암살하지 않았을까요? ㅋㅋㅋ
 
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비시선 347
김중일 지음 / 창비 / 201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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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나 단국대 공대를 졸업하고 단국대 문예창작과에서 박사를 받은 것으로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다. 2008년에 쓴 어느 블로그 글에서 단국대 공학부를 졸업했고, 현재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며 2002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가문비냉장고>가 당선해 등단했다고 써 있으나 나는 블로그 글을 별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1977년생 김중일이 1996년에 단국대 공학부를 졸업했다니 이때 나이 만 19세. 이게 사실이면 적어도 이 양반, 영재 아냐? 하여간 블로그에 이렇게 나와 있다니까 글쎄. 근데 문예창작과 박사학위는 얻은 거 같다. 지금 광주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있는 걸 봐서. 우리나라가 학위 없으면 강사도 하기 힘든 학벌 국가잖아. 아무튼 잘 했다. 시만 써서 어디 목구멍에 풀칠이나 제대로 하느냐는 말이지. 교수 명함 가진 시인이 시인 모임에 나가면 술 마시던 보통의 시인들이 전부 일어난다잖아. 술값 낼 교수님 오셨다고. 그 “교수 시인”이 쓴 시에서 읽었다.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지만. 하긴 요즘에 갤러리아 백화점 옥상에서 돌 던지면 시인 아니면 화가가 맞는 세상이긴 하다.


김중일


  나는 김중일의 시가 어떻고 저떻다, 라는 말을 할 재주도, 능력도, 시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냥 읽은 소감, 느낌을 얘기할 뿐이다. 이 시집은 그저께 읽었다. 그런데 시인 김중일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읽은 소감, 느낌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분명히 읽었고, 읽는 중에 자주 지루했으며, 시가 대체로 길었다, 정도. 물론 짧은 시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거.



  기념일



  우리가 함께 매일매일 무수히 구부렸던

  숫자들을 모두 도로 감쪽같이 펴놓아야지


  물고기처럼 평생 물거품과 키스해야지   (p.97 전문)



  짧아서 좋지? 어차피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쓴 시인 줄 모를 텐데 길게 쓰면 길게 쓸수록 독자는 미로에 더 깊숙이 빠질 것 같으니. 1연에서 ‘숫자’가 어떤 날짜를 가리킨다는 건 알겠다. 뜸하지만 간혹 시집 읽은 눈치로. 그러나 ‘기념일’이 구부렸던 걸 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빨랫줄처럼 이어지는 날짜들 가운데 하루를 접어서 구부려 그 날을 기념하게 만드는 거 아닌가? 그걸 다시 편다면, 혹시 기념일이 귀찮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2연에서 평생 물거품과 키스하는 물고기라는 말은 도통 이해불가. 당연히 현대시가 독자에게 무슨 이해를 바라는 바도 아니고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시집 속에 부제를 “흥얼거림으로의 떠듦”이라 붙인 <아스트롤라베>라는 시가 있다. ‘아스트롤라베’는 고대, 중세 시대 때 사용하던 천문관측기구를 말한다. 이 시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어제보다 한 마디쯤 더 작곡된 오늘 밤의 음계

  그 속에 귀속된 마당의 파란 대문은 도돌이표처럼 부유하는 밤의 음표인 우리를 되풀이해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집 속에서, 조금씩 쇠락해가는 개집 속에서 하룻밤 묵은 사막여우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하늘은 해변으로 떠밀려온 부패한 해산물처럼 꾸물거렸다. 새들이 철퍼덕철퍼덕 날갯짓하며, 하늘로 하늘로 노 저으며 까마득히 내동댕이쳐지고 있었다.

  환절기의 새들은 야간비행에 있어서만큼은 대열 속에서 합심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서 날고 있는 자신을 낳은 이가 가장 위협적인 암초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주 드물게는 집고양이가 그 새들을 잡기도 했다.   (부분. p.13)



  이걸 어떻게 읽어야 하나? 오늘 밤이 어제보다 한 마디쯤 더 작곡한 음계라니 시의 서정이나 감정이 아닌 음악, 음률로? 그럴 각오를 하고 읽으면 또 음률적으로 그럴듯하다. 물론 그럴 경우엔 “있어서만큼은”이라는 여섯 글자 단어가 위험하지만. 같은 여섯 글자 단어라고 해도 “철퍼덕철퍼덕”은 세 글자 단어인 “철퍼덕”을 연이어 사용해 충분히 음률적이다. 그거 하나 빼면 음악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은 왜지? 틀림없이 무슨 메시지를 담은 시 같다. 그게 뭔지 몰라서 문제지만. 이 시에서 야간비행하는 환절기의 새들이 나오는 것처럼 시인은 새, 사막여우, 낙타 같은 척추동물을 자주 등장시킨다. <새들의 직업>이라는 시도 있다. 거기에서:



  동생(同生)이 죽었다.

  동생은 죽어 지금 내 발목에 그림자 대신 매달려 있다. 동생은 나름 허공에 질질 끌며 땅속을 걷는다. 땅 속을 걷다보면 태어날 자들과 죽은 자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내년에 피고 질 꽃들을 미리 꺾을 수 있을까.

  동생이 죽었다.

  움직이는 하늘의 파오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듯, 동생의 곡두가 슬픔과 권태의 바깥에서 긴 칼날을 막사 안으로 푹푹 찔러넣듯, 까마득한 하늘 저 멀리 뾰족한 철새떼가 무수히 박혔다 사라졌다.

  동생이 죽었다.

  동생은 구름이란 보풀만 가득 핀 허공을 걸치고 있다가, 한 떼의 새들에 의해 허공과 함께 기워져버렸다. 어제로 벗겨져버렸다.  (부분. P.25~26)



  시 속에 나오는 ‘파오’는 이동형 주거 천막인 게르. 곡두는 허깨비, 허상, 헛것을 뜻한다.

  동생은 아우를 말하지 않는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아우를 칭하는 ‘동생’을 한자어로 쓰면 同生이 맞다. 이 시에서 ‘동생’은 나하고 같이(同) 태어난(生) 것. 그래서 흔하게 이야기하는 ‘내 속의 또다른 나’일 수도 있고, 시 속에서 말한대로 그림자처럼 나한테 매달린 ‘무엇’일 수도 있다. 특히 ‘그림자’의 서양적/유럽적 해석이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림자보다 훨씬 중요한 매개변수로 작동한다. 그게 죽어, 없어져… 그게 뭐, 어떻게 됐는데? 모르겠다. 내년에 피고 질 꽃을 미리 꺾을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가 난데없이 어제로 벗겨져 버렸으니, 동생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거꾸로 흐른다기 보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이 더 적당하다. 당연히 이 의견은 평론가 조강석의 해설을 읽으면서 배운 거다.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힘이 센 역사(力士)를 말한다. 얼마나 늙었느냐 하면 “늙은 아들이 방금 집안에 남은 마지막 명부(冥府)행 티켓을 훔쳐 달아났다”니까 한 마디로 겁나게 늙었다. 그러니까 말은 역사(力士)라고 하더라도 늙은 내력을 봐서 역사history로 봐도 무방하다. 아우가 아닌 동색(同生)을 보듯. 이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모든 의혹에도 아랑곳없이 피곤한 역사는 오늘도 검은 그림자를 벨벳망또처럼 질질 끌며 방으로 돌아옵니다. 백열여덟해 동안 이 전설적인 역사가 아직 한번도 내던지지 못한 게 있다면, 유일하게 역사의 무거운 그림자뿐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

  역사는 제 그림자의 긴 지퍼를 열고, 침낭같이 목관같이 어둡고 아늑한 그 속으로 들어가 몸을 눕힌다. 이봐 친구,


  나는 할 말이 없으니 부탁인데 이제 그만 그 달 좀 치워줘

  내 그림자와 함께 안전하게 사라질 수 있도록    (부분 p.76~77)



  이 시에서 등장하는 그림자. 118년 동안 힘센 역사가 단 한 번도 던져버리지 못한 유일한 것. 자기 자신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결국 늙은 力士 또는 歷史는 그렇게 시체 처리용 검은 비닐 속으로 들어가 지퍼를 올린다. 지금 여러분은 이렇게 또 한 히스토리가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계십니다.

  김중일의 그림자는 <외과의사 늘의 긴 그림자>로 가면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자 이야기만 나온다. 의사의 이름이 “늘.” 물론 중의적이다. 언제나와 같은 의미로 늘을 생각해도 괜찮을 듯.



  늘 그도 사실 자신의 대책 없는 환자들처럼, 평생 태양의 발등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태양과 같은 속도로만 매일 아등바등 걷는다면 감쪽같이 제 그림자를 숨길 수 있다고 믿었지. 구름의 문양으로, 각양각색 병들어가는 걸 숨길 수 있다고 믿었지.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예방법. 늘의 동공과 하늘의 달은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빛을 발한다. 마지막 단추가 풀리듯 달이 구름 속으로 스며든다.   (부분. P.122)



  그만 쓰자. 독후감이 너무 길다. 한 마디만 보태자면, 김중일의 시는 불면이고, 밤이며, 죽음이라는 것. 그만 쓰고 시도 이제 그만 읽을까? 대체로 우리 현대시,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는 전제로, 너무 어둡고 무겁고 우울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내 수준으로는 너무 어렵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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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0-18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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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이언 매큐언, <나 같은 기계들>
화요일. 세르히오 블랑코, <테베랜드>
목요일. 피터 케리, <집으로부터 멀리>
금요일. 장 주네, <꽃피는 노트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