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이제 카잔차키스는 그만 읽어야겠다. 다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더 읽던지 하고.
 전에 읽은 <크노소스 궁전>이 정말로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이고, <성 프란체스코>가 정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적은 것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진짜 위인전이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어려서 정여사께서 사주신 위인전, 얼마나 읽기 싫었는데 이제 나이 들어 새삼스레 위인전? 그것도 서른세 살로 죽을 때까지 그냥 남의 나라 쳐들어가기에 여념이 없었던 침략자에 불과한 알렉산드로스를 영웅으로 칭하는 것을? 아이고 머리야. 이 양반 죽은 다음 한 삼백여 년 흐르면 서른세 살 먹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등장하여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오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젊은이라면 혹 몰라도 한 명의 침략자를. 흠.
 알렉산드로스 왕 아시지? 일찍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발이 됐던 지금의 알바니아 바로 오른쪽 옆에 붙은 산동네이자 불가리아 왼쪽의 조그만 나라,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와 더불어 근대사 이후 숱한 전쟁의 싸움터가 되어 변변하게 남아있는 유적도 별로 없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혹시 몰라 부언하자면, 지금의 마케도니아 사람들과 알렉산드로스 왕 시절의 인종은 조금 다르다는 거. 혹시 모른다, 완전히 다를지도. 지금은(아니, 1차 세계대전 훨씬 이전부터) 소위 슬라브 체인이라 일컫는 남 슬라브계 사람들이 대다수 또는 거의 전부를 차지하지만 카잔차키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는 (지금은 흔히 라틴 계열을 일컫는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종족의 무리로) 스스로를 완벽한 그리스 인이라 여겼으며, 자신들을 야만인이라고 비하하는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에게 야유를 보낼 정도였다. 그들은 남쪽 그리스 사람들보다 더 검소했고, 부지런했으며 용맹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산악지역이라 뭐 먹을 게 있어야지. 당연히 한창 시절의 스파르타를 능가하지는 못했겠지만 이미 스파르타는 늙은 귀족 여인처럼 힘은 다 빠지고 자존심만 남은 처량한 신세.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마케도니아와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시기를 잘 만난 거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리스에 마지막으로 테베가 왕초를 먹고 있었는데 거기도 심한 내분으로 비실거리고 있었으며, 페르시아 역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고질적인 내전으로 크세르크세스 시절 같은 위엄을 지니고 있지 못했으니, 이른바, 아니, 이렇게 얘기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틈새시장? 혹은 블루 칩? 하여간 이 비슷한 것이 생겼거나 가능했다는 완전 아마추어의 의견.
 동양에서 가장 유명한 말horse은 동탁, 여포, 조조의 손을 거쳐 관우가 죽을 때까지 타던 적토마, 서양에선 열다섯 살 먹은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누구도 길들이지 못한 완전 검은색의 커다란 야생마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옷을 훌렁 벗고 올라타더니 질풍처럼 들판을 질주했던 부케팔로스. 근데 16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는 그림 <부케팔로스를 길들이는 알렉산드로스>에서 왕자는 옷을 근사하게 입었고, 말도 백마다.

 

 

 그러니 작가나 화가나 알고 있던 건 그냥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말 한 마리를 길들였다는 건조한 내용뿐이었으며, 거기다 자기 상상력을 보태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린 듯.
 책의 내용은 한 깡패 같은 왕이 있어서 마케도니아 산골에서 시작해 그리스를 먹더니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를 침공하고, 이어서 지중해변을 따라 아프리카의 이집트까지 침공, 다시 페르시아로 접어들어 그 위대했던 나라를 완전히 거덜을 내고, 내친 김에 저 사마르칸트 고원,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까지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왕임을 선언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드디어 인더스 강과 히다스페스 강을 넘어 인도에 도달해 코끼리 구경도 했다는 거. 이쯤 되면 야망이 아니라 집착, 그걸 넘어 강박증, 즉 정신이상 수준의 인간으로 봐야 한다. 거기서 자신을 최초로 스타로 만들어준 준마 부케팔로스가 전사해버리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알렉산드로스는 산등성이에 올라 또 동쪽의 광활한 밀림을 보고 침을 흘린다. 하지만 이젠 장군들을 비롯한 전사들이 지쳐 나가떨어져 자칫하면 자신이 골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채 눈물의 회군을 결정한다. 그냥 집에 가면 될 것을 숱한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가며 기어이 이란과 인도 사이의 게드로시아 사막을 건너가는 건 또 뭐야. 그러다가 바빌로니아에 도착해 그리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귀환시키고, 새로이 얻은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등 외국병사를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구상하던 중 병 들어 죽는 이야기.
 딱 여기까지다. 그렇게 세상을 헤집고 다니면서 애먼 사람들 죽여가며 정복한 땅덩어리가 전부 자기 것이 되나? 아니면 조국 마케도니아, 그것도 아니면 그리스 땅이 되냐고? 저 몽고 대평원까지 정복했던 고구려가 정말 끝도 없는 몽고 평원을 다스렸을, 지배했을 거 같아? 이제 꿈에서 깰 때다. 알렉산드로스가 비록 후손이 없지만 만일 있더라도 그가 이룬 정복활동으로 넓어진 국토를 다스렸을 거 같은가? 천만의 말씀. 역사에는 위대하게 거론이 되지만 내 눈엔 그냥 한 미친 왕이 있어서 인도까지 한 번 갔다가 온 거 뿐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내 의견인데, 만일 누가 알렉산드로스를 탐험가라고 하면 난 위대한 탐험가라는 데 완전 동의. 하지만 영웅이라 한다면, 개뿔 영웅은 무슨. 그냥 쌈 잘하는 쌈꾼이었을 따름이지. (그리스의 영웅을 찬양하려 했던 카잔차키스의) 책에도 나온다. 그리스 문명을 아시아에 전파하려고 시작한 정복활동이 나중엔 거꾸로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문명에 적응이 돼버리는 모습이.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 혹은 그리스는 자신의 점령지를 한 번도 다스려보지 못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근데 영웅은 무슨, 개뿔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 이름만 보고, 다른 거 아무 생각 없이 선뜻 사 읽은 책. 기억하시지? 김희선이 쓴 <무한의 책>에서 나오는 ‘신’이자 ‘외계에서 온 존재’인 파충류 형태의 두 관찰자,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개체인 관찰자들의 이름이 하나는 아르카지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스였던 거. 그때 물론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이디어가 기발해서 좀 웃었다. 협업을 해서 SF 소설을 쓴 형제의 이름을 동일한 두 개체로 썼으니 그러하지 않겠는가 말이지. 게다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이란 매우 흥미롭고 재미난 소설의 작가(들)이니 말 하면 뭐해. 이 형제들 이름을 그냥 기억만 하고 있었는데 쇼핑 중에 눈에 이 형제들이 번쩍 띄어 뭐 두 번 생각할 거 없이 그냥 구입해 두 달 스무날이 지난 오늘, 드디어 읽었다. 아시잖아, 책 사놓고 처음 출판한 시기 순서대로 읽는 습관. 이 책이 러시아가 아닌 소비에트 연방이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였던 1972년에 발간되어 순서가 밀렸을 뿐이지 읽기를 미뤄두었던 건 아니다.
 이 책 <노변의 피크닉>도 외계생명체 이야기다. 하지만 외계생명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 생명체가 13년 전에 왔다 간 걸 제외하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밝혀지지 않는다. 어디서 왔는지는 백조자리의 알파성과 지구를 잇는 한 지점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걸 믿는 인종은 한 명도 없다. 심지어 그걸 밝힌 자신의 이름을 딴 ‘필먼 방사점’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 밸런타인 필먼 박사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자면 13년쯤 전에 상당한 지능을 갖춘 외계인이 지구에 무슨 목적인지 하여간 와서 잠깐 놀다 갔다. 마치 우리가 어느 날 차를 몰고 캠핑장에 가 바비큐 파티를 곁들여 실컷 놀다온 것처럼. 그런데. 시대가 1970년대 초반. 경치 좋은 동네 가서 밤새(사실은 ‘밤새’는 구라다. 우리나라에선 거의 모든 국토가 밤 열두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는 통행금지라서 밤새 놀지는 못했으리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난 다음날, 늦잠을 자고 깨서 아침밥 해먹기도 귀찮아 어이, 어이, 일어나. 아침 대신 가다가 삼백집에 들러 콩나물 해장국이나 한 그릇씩 하자고, 할 거 아닌가. 그래 대충 정리하고 (21세기가 아니라 1970년대 초니까) 쓰레기도 그냥 함부로 막 버려 서둘러 뜬 자리엔 안주 찌꺼기, 소주 반쯤 찬 병과 빈 병들, 삶은 닭다리, 옛날 헌 차에서 흐른 엔진오일, 깡통따개, 병따개에다가 혹시 알아, 쓰고 던져버린 콘돔도 두어 개 있었을지? 심지어 순금반지 하나도 끼어 있지 않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스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푸짐하게 싸놓은 똥 무더기도 몇 덩어리 있고. 하여간 인간들이 떠나고 좀 시간이 지나 드디어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 생물들. 참새도 좋고 너구리도 좋고 맹꽁이, 남생이도 좋으며, 하다못해 쇠똥구리, 사슴벌레, 하늘소, 물방개 등 곤충들도 좋다 이거다. 이 터줏대감 격인 생물들 입장에서 인간들이 버리고, 놓고, 싸고, 아깝지만 잃어버리고 간 온갖 것들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떤 용도의 것인지 도대체 알지를 못하겠는 거다. 달착지근한 콜라가 밑창에 깔린 매끈한 병 속에 망설이지 않고 퐁당 빠진 풍뎅이는, 아무 생각 없이 콜라병을 그냥 놔두고 온 인간들하고는 달리 풍뎅이 입맛에 딱 맞는 설탕물 속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할지 아닐지, 어떻게 아느냐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이 시작한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13년 전에 외계 생명체가 지구의 여섯 곳을 방문한 건 틀림없다. 물론 외계인한테도 한반도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포함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어떤 용도인지 현생 인류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할 쓰레기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자면) 똥 무더기를 (탑처럼)쌓아놓고, 어질러놓고 가버렸다. 방문지 여섯 곳을 지구인들은 ‘구역’이라 일컫고 각 구역은 파란 헬멧을 쓴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키기로 지구인들은 합의를 해버렸다. 그중 한 곳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하몬트. 여기가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미국은 아니다. 미국에선 하몬트 출신의 이민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책에 나오니까. 하몬트 출신은 하몬트를 떠나 지구상 어떤 곳을 가든지 정말 재수 없는 일(그냥 재수 없는 일 수준이 아니고 기근, 가뭄, 해일, 토네이도, 역병 등등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을 포함)이 발생하는 걸 전 세계인이 다 깨달았기 때문. 하지만 인류는 위에서 예로 들은 풍뎅이가 아니라서 외계인이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 인간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것들을 일단 보호하기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된 것이고, 평화유지군이 보호한다면 그만큼 중요한 물건들이 구역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어서 물건들이 도대체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해당 용도를 인류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연구소도 생겼고, 외계인들의 쓰레기가 그리도 중요하니 그걸 훔쳐 내다 파는 족속들도 생겨났는데, 이 도둑놈들의 무리를 ‘스토커’라 부른다.
 책의 21쪽 각주를 보면 스토커stalker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사용한 스토커는 접근 금지 지역인 구역에 잠입하여 방문자들이 남기고 간 물체를 가져와 팔아넘기는 자들을 말한다. ‘스토커’에는 ‘남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사람’인 범죄자 외에도 ‘사냥꾼’이란 뜻이 있다”고 해놓았다. 현재 최고의 스토커로는 ‘대머리수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버브리지.
 아참. 스토커들이 외계물자를 훔쳐낼 때, 일찍이 콜라병에 빠진 풍뎅이의 예를 들었듯이 해당 물품의 용도와 효과 등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그 물자에 접근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어서 스토커들의 도둑질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주로 빼오는 물자는 그것의 정확한 이름과 용도를 몰라 그냥 편하게 깡통, 옷핀, 배터리, 팔찌, 스펀지, 근질이, 탄산진흙, 도자기함 등등으로 부른다. 비싼 값에 거래되는 이런 것들을 훔쳐 내오는 스토커로 엄지손가락 톰, 주인공 빨강머리 레드릭 슈하트, 두꺼비자식, 뼈가죽, 쉰목소리, 안경잡이, 철면피, 푸들 등이었으며 책을 쓰는 시점에는 거의 다 죽었다. 설탕물에 빠져 죽은 풍뎅이처럼 각 물체들이 포함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도 역시 죽음으로 보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물론 살아남는다 해서 안전한 건 아니다. 외계물건의 내재적인 힘은 가끔 인간의 생식세포에도 영향을 주어 처음에는 틀림없는 인간이었다가 자라면서 짐승의 단계로 퇴행하는 아이를 생산하기도 하는 것.
 SF 소설의 매력은, 나처럼 평소 SF를 특별히 챙겨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하기로는 특히, 박진감 넘치는 인간박멸작전과 대 외계인 항쟁운동을 기대할 텐데, 이건 전혀 아니다. 높은 수준의 과학을 갖고 있는 외계 생명체는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이 유원지의 풍뎅이를 고려하지 않듯이) 그냥 피크닉 와서 한 판 놀고 갔을 뿐이다. 졸지에 원주민 또는 아마존의 석기시대 인으로 변한 인류가 고급한 문명을 앞에 놓고 벌이는 몬도가네. 그걸 구경하는 일.

 이거 대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보코프는 이 책 영어 판의 (오만한)서문에서 소설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를 그의 대표작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반면 독자는 소설 속에서 나보코프 스스로가 독자로 하여금 그리 생각을 하게끔 수시로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하여, 저절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위의 표현으로 책의 성격은 대강 나왔다. 범죄 소설이며, 험버트와 닮았다는 건 게르만이 악당이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 “그렇지만 험버트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땅거미가 질 무렵 거닐도록 허락된 낙원으로 가는 푸른 오솔길이 있다. 반면 게르만은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다.”(작가 서문. 240쪽)라고 선언하여, 책의 제목이 <절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했다. 절망Despair을 키릴 문자로 쓰면 영어로 읽는 것보다 울부짖음 소리가 훨씬 우렁차다나.
 반면 역자 최종술은 “나보코프는 ‘예술로서의 살인’이라는 주제 속에 도스토옙스키와 푸시킨의 문맥을 통일시킨다. 게르만의 형상은 라스콜니코프뿐 아니라 푸시킨의 위대한 시인과도 그로테스크한 유사성을 지닌다.”라고 주장하며(260~261쪽) <절망>은 무수한 작품들을 패러디한 완성체로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한 책 <죄와 벌>에선 주인공의 이름을 ‘라스콜니코프’라고 하는 것(민음사, 을유문화사 등)과 ‘라스콜리니코프’(동서문화사 등), ‘라스꼴리니꼬프’(열린책들) 등등 많고 많으니 이름 갖고 시비하는 일 없으시기 바람)
 나는 먼저 게르만과 험버트의 비교는 두 작품을 쓴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그냥 비교해서 얘기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렸고, 라스콜리니코프와의 유사성에선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고 나니 비단 라스콜리니코프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모든 살인자들과도 어딘지 모르게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여, 역자의 의견에도 동의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염두에 둔 것은 널리 알려졌듯이 1919년 적군이 내전에 승리하자마자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유럽으로 터전을 옮겨 (작품 활동은 훨씬 전부터 시작했지만)스물두 살부터 “블라디미르 시린”이란 필명을 써 발표한 것, 1934년에 잡지에 <절망>을 연재하고 다음 해에 <사형장으로의 초대>와 1937년에 <재능>을 연재한 다음부터 모국어인 러시아를 버리고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근데 뭐 때문에 이리 구구절절 사연이 기냐고?
 잠깐 스토리 얘기 해드리지.
 위에서 잠깐 비쳤듯이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러시아 출신이고 지금 베를린에 살고 있는 초콜릿 사업가인데 싼 가격에 가공기계를 구입하러 프라하에 갔다가 우연히 자기와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여겨지는, 그래서 아주 똑같이 생겼으리라 스스로 최면을 걸어버리는 펠릭스란 사내를 만난다. 자기 생각에 둘이 얼마나 닮았느냐 하면, 한 사람인데 둘로 쪼개진 느낌이라 빈혈이 생길 정도라나? 뭐 약간 미친 듯. 왜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기분이 들었느냐 하면, 지금 초콜릿 사업이 거의 망해가는 수준이라 파산선고가 불을 보듯 확실하여, 비록 불법이라도 한 방에 거금이 생길 모종의 범죄를 구상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내용은 책 중간을 넘어갈 정도면 알 수 있다. 완전히 자신하고 똑같이 생긴(생겼다고 착각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해, 자신이 특정한 곳에 가서 범죄를 벌이고 있는 시간 이 펠릭스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잔머리. 물론 나부코프가 이런 뻔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할 인간이 아니라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건 직접 읽고 나서 아시면 되는 거니까 그리 하시고, 자, 만장하신 신사숙녀 여러분! 자기하고 완전하게(는 아니고 거의) 똑같이 생긴 인물이 특정 행위를 하는 거, 이것과, 진짜 내 이름이 아니라 필명을 써서 소설작업을 하는 것과, 이방의 나라에서 자기가 버리고 온 조국의 문자로 작품을 쓰는 것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시 안 계실까요?
 이 소설이 원래는 러시아 키릴문자로 썼다가, 몇 년 후에 영어로 작가가 직접 옮겼다고 하는데,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스스로가 어려서부터 대단한 문재로 인정을 받은 영재였음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어서 당연히 본인도 알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비교적 젊은 30대 초반에 써서 중반에 출간한 책에도 숱한 말장난, 번역서는 아무리 읽어도 감흥이 없는 그런 말장난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 독자는 그게 아무리 재미난 거라도 뭐 이해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고,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여 상상력으로 쓰고 있는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건, 흔히들 뭐라고 하느냐면, 독자가 작가 자신이 겪을 일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의미의 수기手記적 기록이라는데, 설마 <절망>을 나보코프의 수기적 기록으로 읽는 종자들은 없겠지. 내가 읽기로는 이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책상 위에서 머리로만 쓴 소설이라. 주로 러시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역자 최종술의 해설처럼 숱한 작품의 주인공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하다못해 작품 중에 작가가 직접 다른 작품과 주인공들을 불러내는 것들 말이다. 거기에 만일 내 생각도 추가할 수 있다면 필명 사용에 따른 효용이랄까 진실이랄까, 조금 확장하면 비단 필명 사용이 아니더라도 자신 즉 작가와 작품이 서로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 하는 고민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처럼 조금의 쉼도 없이 지옥의 불길을 향한 가시밭길을 가야하는 작가의 숙명도 이야기한 것 아니겠느냐, 하는 백퍼 아마추어의 의견이었습네다.
 (하여튼, 나보코프는 책 읽고 독후감 쓰기 참 힘들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허명수 옮김 / IVP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플레너리 오코너라는 소설가도, <현명한 피>라는 책도 몰랐다. 어느 날 옵서버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100선 리스트를 볼 기회가 됐고, 목록 안에 <현명한 피>가 포함되어 있어서 바로 검색해 사서 읽은 책이다. 한동대에서 선생으로 있는 허명수 씨가 번역을 해 Ivp 출판사에서 찍었다. 그래서 한동대학도 검색해봤다. 건학의 이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사회 및 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지성, 인성, 영성의 고등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까지 뒤져봤으면 이젠 출판사 Ivp. 책 속에 나온다.
 “IVP(InterVarsity Press)는 캠퍼스와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는 IV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출판부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문서 운동을 실천합니다.”
 역자가 개신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의 선생이란 건 문제가 아닌데, 출판사가 위와 같은 조직의 출판부였다는 걸 알았으면, 이 책 안 읽었다. 기독교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1940년대 남부 미국에 성서 지대Bible Belt라고 있었단다. 개신교 근본주의가 아주 맹위를 떨친 보수적인 지역이었다는데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 지역 출신이면서도 개신교 속의 (힘겹게? 글쎄 미국 안에서 신구교 간 얼마나 치고 박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가톨릭을 고수했으나, 신구新舊를 따로 따지지 않고 “종교적 비전과 믿음을 인류 전체를 향한 메시지로 승화시켰다”고 작가소개에 나와 있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오코너가 젊은 시절에 루푸스 병이 발병하여 겨우 서른아홉 살에 요절한 작가이며, 남부의 기독교적 작품 활동에 전력했다는 거, 다 좋은데, 문제는 독자인 내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교양이 전혀 없다는 거. 그리하여 나는 250여 쪽에 불과한 짧은 장편소설을 아주 힘겹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반에 남부 촌구석마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보닛 위에 올라 광분한 모습으로 기독교 원리주의에 입각해 연설과 설교와 전도를 해오던 할아버지를 둔 주인공 헤이즐 모츠. 나이가 차 징집당해 전쟁에 참가하고 부상을 입어 제대를 해 연금생활자가 되어 다시 남부로 돌아온다. 이젠 할아버지도 없고, 부모는 일찌감치 더 먼저 돌아가고, 연금 덕에 그냥저냥 먹고 살 만하지만 외려 직접 보고 만지고, 들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는 반 그리스도의 입장에 처했다는 거. 책을 열자마자 서문에 이런 얘기 다 나와 있으니 내가 이 독후감에서 새삼스레 스토리를 얘기한다고 해도 그리 잘못된 건 아닐 테다. 하여간 헤이즐은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설립하려 하는데, 세상에 자기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는 진리에 봉착. 이후 사이비 종교인이자 사기꾼이자 술꾼이자 가짜 맹인 연설자 부녀를 만나고, 얼마 후엔 진짜 종교 사기꾼을 만나고, 살인이 한 건 벌어지고, 자기 눈에 석회를 문질러 스스로 봉사가 되고 하는 일련의 엽기 라인.
 어째 눈에 익다. 난 책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카슨 매컬러스가 기독교에 관해 소설을 썼다면 딱 이렇게 썼을 거 같다고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 남부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 그렇지? 어디서 몇 번 읽은 것 같은 느낌.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윌리엄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과 <8월의 빛>과, 거의 장대처럼 키가 크고/크거나 힘이 장사인 여성들을 주로 출현시키는 카슨 매컬러스. 그래, 전형적인 고딕문학이란 장르다(이렇게 생각했는데 기분 좋게 역자해설에서 딱 포크너와 매컬러스를 언급하는 거다. 난 속물. 이럴 때 어깨가 으쓱거린다). 거기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쓴 <사탄의 태양 아래>같은 광신적인 고행까지 곁들여놓고 나 같은 비종교적 인간한테 옵서버가 선정한 세계 100대 소설이라고 읽어보라고 하면, 그거 곤란하지. 내 눈엔 전부 이상한 인간들뿐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오래 전에 <세일즈맨의 죽음>을 정말 아무 감동 없이 읽었다. 왜냐하면, 그때 내 나이 너무 어려서 세상이 어떨 것이란 짐작도 못했던 시대였기 때문. 그러니 그게 제대로 읽혔겠는가. 생각해보면 나도 세상에다 대고 늘 엄살만 부리던 허약한 젊은이였다. 뭐 지금도 그리 나아진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세일즈맨의 죽음>은 조만간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세일즈맨....>을 다시 읽어볼까 마음먹게 만든 작품이 바로 <모두가 나의 아들>. 이 책을 읽고 얼른 밀러를 검색해서 이이가 공산주의자 아니었나, 확인해봤다.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의 톱니바퀴에 해체되는 가족과 개인이라고 할 수 있어서 검색해봤는데, ‘주의자’ 수준은 아니었다.
 총 세 막으로 구성된 희곡. 밀러 자신이 대공황 시절에 집안이 결딴이 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음식점 접시닦이부터 사환, 운전수 등 안 해 본 잡일이 없었고, 수없이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미시간 대학을 졸업했다고 ‘두산백과’에 씌어있다. 그러니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자본이 인간에게 함부로 행패부리는 건 어려서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거다. 아니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1막에선 그냥 환갑이 지난 늙은 주인공 조/케이트 켈러 부부의 둘째 아들 래리가 2차 세계대전 중 버마 또는 중국 해안 근방에서 실종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일요일의 평화로운 아침. 맏아들 크리스의 초대로 오랫동안 옆집에 살았던 디버 집안의 딸, 앤이 어제 도착해 이제 갓 일어나 식당에서 케이트 여사가 해준 밥을 먹고 있다. 뉴욕에 살고 있던 이 아가씨가 앞으로 사건이 벌어질 이 집에 왜 왔느냐 하면, 크리스가 자기 동생의 애인 앤과 결혼할 것임을 부모에게 통보할 예정이기 때문. 제목이 <모두가 나의 아들>이고, 전쟁 중 비행기 조종사였던 둘째 아들은 버마, 그러니까 미얀마 정글 상공에서 실종, 죽음 또는 전사가 아니라 ‘실종’된 상황이라, 일찍이 메릴린 로빈슨의 공감 가는 소설 <하우스 키핑>에서 봤듯이 사라진 가족을 기다리는 고통과 고독에 대한 작품일 것이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밀러 또한 뛰어난 드라마 작가들이 늘 그렇듯이 시치미 뚝 떼고 독자(또는 관객)을 그쪽 방향으로 몰아간다. 둘째 래리가 틀림없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어머니 케이트 여사는 결코 첫째 크리스와 앤의 결혼을 허락할 수 없는 것.
 여기에 켈러 가족과 조 켈러 씨가 운영하는 회사의 동업자이자 생산담당 부사장 정도였던 스티브 디버 씨의 가족 사이에 오래됐지만 짙은 안개 속에 묻혀있었던 사건이 틈입해온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켈러-디버 회사에서는 항공기 엔진의 헤드를 만들어 군납을 했었는데, 미국 조달청에서 30분마다 조금이라도 빨리 선적을 하라고 독촉전화를 해대고, 만일 납기를 조금이라도 맞추지 못하면 계약이 파기당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만 엔진 헤드에 실금이 간 불량품을 만들어내고 만다. 언제나 건강체질이었던 조 켈러 사장이 하필이면 딱 하루 몸살이 나서 집에 몸져누웠던 날, 납기에 극도로 쫓기는 일이 벌어졌고 스티브 디버 씨는 워낙 새가슴에다가 강박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라 불량 엔진 헤드를 납품해버리고 만다. 그리고는 불량 엔진을 장착한 전투기 스물한 대가 공중에서 폭파되어 조종사 전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디버 씨는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는 상태인 것.
 이런 상황.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대량주문을 받아 생산라인을 풀가동하며 주문량의 일부씩을 납품하고 있는데, 만일 한 번이라도 납기를 지키지 못하면 대량주문 자체를 취소하겠다고 하는 거. 이건 갑질이 아니라 계약에 의거한 정당한 요구다. 돈 많은 거대 회사가 하는 짓이라고 다 갑질은 아니다. 중소기업이 납기 안에 정상제품을 납품할 수 있다고 처음부터 약속을 해서 성립한 계약이다. 근데 눈앞에 납기일이 닥친 순간 불량제품이 쏟아졌다면? 게다가 대량주문 취소가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치명상을 초래한다면? 당연히 회사 문을 닫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반 상식적 대답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디버 씨는 가족과 나의 복지를 위해 납품을 해버렸고, 그래서 스물한 명의 튼튼한 청년들이 이국의 하늘에서 폭발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업하는 게 즐겁고 쉬울 거 같지? 천만의 말씀. 속 편한 건 역시 봉급쟁이다. 디버 씨 봐라. 자기는 진심으로 처자식의 복지와 잘 나가는 회사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불량품을 납품해 지금 교도소에 박혀 있지만, 자식들은 아버지가 너무 불명예스러워 면회는커녕 편지 한 장 써본 적이 없다. 하! 아빠가 날 위해 전투기에 들어갈 불량품을 납품했다고요? 뻔히 공중에서 폭발할 걸 다 알면서도. 그러고도 그게 나를 위해 저지른 거라고요? 내가 언제 회사 물려달라고 부탁한 적 있어요? 자식 키우는 거 다 이런 법이다. 고까워 말아라.
 그래서 이 드라마의 제목이 <모두가 나의 아들>이라?
 천만의 말씀. 난 지금 이 독후감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드라마의 진짜배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다른 얘기들만 열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진짜로 밀러의 <모두가 나의 아들>을 읽은 분들이 이 독후감을 본다면, 참 희한하게도 수박 겉만 핥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여기서 말아야지. 연극을 진짜 연극답게 만드는 마지막 반전의 순간을 확 밝혀버릴 용기까지는 다행스럽게 나는 가지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