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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의 피크닉 ㅣ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 이름만 보고, 다른 거 아무 생각 없이 선뜻 사 읽은 책. 기억하시지? 김희선이 쓴 <무한의 책>에서 나오는 ‘신’이자 ‘외계에서 온 존재’인 파충류 형태의 두 관찰자,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개체인 관찰자들의 이름이 하나는 아르카지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스였던 거. 그때 물론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이디어가 기발해서 좀 웃었다. 협업을 해서 SF 소설을 쓴 형제의 이름을 동일한 두 개체로 썼으니 그러하지 않겠는가 말이지. 게다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이란 매우 흥미롭고 재미난 소설의 작가(들)이니 말 하면 뭐해. 이 형제들 이름을 그냥 기억만 하고 있었는데 쇼핑 중에 눈에 이 형제들이 번쩍 띄어 뭐 두 번 생각할 거 없이 그냥 구입해 두 달 스무날이 지난 오늘, 드디어 읽었다. 아시잖아, 책 사놓고 처음 출판한 시기 순서대로 읽는 습관. 이 책이 러시아가 아닌 소비에트 연방이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였던 1972년에 발간되어 순서가 밀렸을 뿐이지 읽기를 미뤄두었던 건 아니다.
이 책 <노변의 피크닉>도 외계생명체 이야기다. 하지만 외계생명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 생명체가 13년 전에 왔다 간 걸 제외하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밝혀지지 않는다. 어디서 왔는지는 백조자리의 알파성과 지구를 잇는 한 지점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걸 믿는 인종은 한 명도 없다. 심지어 그걸 밝힌 자신의 이름을 딴 ‘필먼 방사점’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 밸런타인 필먼 박사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자면 13년쯤 전에 상당한 지능을 갖춘 외계인이 지구에 무슨 목적인지 하여간 와서 잠깐 놀다 갔다. 마치 우리가 어느 날 차를 몰고 캠핑장에 가 바비큐 파티를 곁들여 실컷 놀다온 것처럼. 그런데. 시대가 1970년대 초반. 경치 좋은 동네 가서 밤새(사실은 ‘밤새’는 구라다. 우리나라에선 거의 모든 국토가 밤 열두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는 통행금지라서 밤새 놀지는 못했으리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난 다음날, 늦잠을 자고 깨서 아침밥 해먹기도 귀찮아 어이, 어이, 일어나. 아침 대신 가다가 삼백집에 들러 콩나물 해장국이나 한 그릇씩 하자고, 할 거 아닌가. 그래 대충 정리하고 (21세기가 아니라 1970년대 초니까) 쓰레기도 그냥 함부로 막 버려 서둘러 뜬 자리엔 안주 찌꺼기, 소주 반쯤 찬 병과 빈 병들, 삶은 닭다리, 옛날 헌 차에서 흐른 엔진오일, 깡통따개, 병따개에다가 혹시 알아, 쓰고 던져버린 콘돔도 두어 개 있었을지? 심지어 순금반지 하나도 끼어 있지 않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스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푸짐하게 싸놓은 똥 무더기도 몇 덩어리 있고. 하여간 인간들이 떠나고 좀 시간이 지나 드디어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 생물들. 참새도 좋고 너구리도 좋고 맹꽁이, 남생이도 좋으며, 하다못해 쇠똥구리, 사슴벌레, 하늘소, 물방개 등 곤충들도 좋다 이거다. 이 터줏대감 격인 생물들 입장에서 인간들이 버리고, 놓고, 싸고, 아깝지만 잃어버리고 간 온갖 것들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떤 용도의 것인지 도대체 알지를 못하겠는 거다. 달착지근한 콜라가 밑창에 깔린 매끈한 병 속에 망설이지 않고 퐁당 빠진 풍뎅이는, 아무 생각 없이 콜라병을 그냥 놔두고 온 인간들하고는 달리 풍뎅이 입맛에 딱 맞는 설탕물 속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할지 아닐지, 어떻게 아느냐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이 시작한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13년 전에 외계 생명체가 지구의 여섯 곳을 방문한 건 틀림없다. 물론 외계인한테도 한반도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포함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어떤 용도인지 현생 인류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할 쓰레기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자면) 똥 무더기를 (탑처럼)쌓아놓고, 어질러놓고 가버렸다. 방문지 여섯 곳을 지구인들은 ‘구역’이라 일컫고 각 구역은 파란 헬멧을 쓴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키기로 지구인들은 합의를 해버렸다. 그중 한 곳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하몬트. 여기가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미국은 아니다. 미국에선 하몬트 출신의 이민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책에 나오니까. 하몬트 출신은 하몬트를 떠나 지구상 어떤 곳을 가든지 정말 재수 없는 일(그냥 재수 없는 일 수준이 아니고 기근, 가뭄, 해일, 토네이도, 역병 등등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을 포함)이 발생하는 걸 전 세계인이 다 깨달았기 때문. 하지만 인류는 위에서 예로 들은 풍뎅이가 아니라서 외계인이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 인간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것들을 일단 보호하기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된 것이고, 평화유지군이 보호한다면 그만큼 중요한 물건들이 구역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어서 물건들이 도대체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해당 용도를 인류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연구소도 생겼고, 외계인들의 쓰레기가 그리도 중요하니 그걸 훔쳐 내다 파는 족속들도 생겨났는데, 이 도둑놈들의 무리를 ‘스토커’라 부른다.
책의 21쪽 각주를 보면 스토커stalker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사용한 스토커는 접근 금지 지역인 구역에 잠입하여 방문자들이 남기고 간 물체를 가져와 팔아넘기는 자들을 말한다. ‘스토커’에는 ‘남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사람’인 범죄자 외에도 ‘사냥꾼’이란 뜻이 있다”고 해놓았다. 현재 최고의 스토커로는 ‘대머리수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버브리지.
아참. 스토커들이 외계물자를 훔쳐낼 때, 일찍이 콜라병에 빠진 풍뎅이의 예를 들었듯이 해당 물품의 용도와 효과 등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그 물자에 접근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어서 스토커들의 도둑질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주로 빼오는 물자는 그것의 정확한 이름과 용도를 몰라 그냥 편하게 깡통, 옷핀, 배터리, 팔찌, 스펀지, 근질이, 탄산진흙, 도자기함 등등으로 부른다. 비싼 값에 거래되는 이런 것들을 훔쳐 내오는 스토커로 엄지손가락 톰, 주인공 빨강머리 레드릭 슈하트, 두꺼비자식, 뼈가죽, 쉰목소리, 안경잡이, 철면피, 푸들 등이었으며 책을 쓰는 시점에는 거의 다 죽었다. 설탕물에 빠져 죽은 풍뎅이처럼 각 물체들이 포함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도 역시 죽음으로 보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물론 살아남는다 해서 안전한 건 아니다. 외계물건의 내재적인 힘은 가끔 인간의 생식세포에도 영향을 주어 처음에는 틀림없는 인간이었다가 자라면서 짐승의 단계로 퇴행하는 아이를 생산하기도 하는 것.
SF 소설의 매력은, 나처럼 평소 SF를 특별히 챙겨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하기로는 특히, 박진감 넘치는 인간박멸작전과 대 외계인 항쟁운동을 기대할 텐데, 이건 전혀 아니다. 높은 수준의 과학을 갖고 있는 외계 생명체는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이 유원지의 풍뎅이를 고려하지 않듯이) 그냥 피크닉 와서 한 판 놀고 갔을 뿐이다. 졸지에 원주민 또는 아마존의 석기시대 인으로 변한 인류가 고급한 문명을 앞에 놓고 벌이는 몬도가네. 그걸 구경하는 일.
이거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