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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피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허명수 옮김 / IVP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플레너리 오코너라는 소설가도, <현명한 피>라는 책도 몰랐다. 어느 날 옵서버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 100선 리스트를 볼 기회가 됐고, 목록 안에 <현명한 피>가 포함되어 있어서 바로 검색해 사서 읽은 책이다. 한동대에서 선생으로 있는 허명수 씨가 번역을 해 Ivp 출판사에서 찍었다. 그래서 한동대학도 검색해봤다. 건학의 이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사회 및 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지성, 인성, 영성의 고등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까지 뒤져봤으면 이젠 출판사 Ivp. 책 속에 나온다.
“IVP(InterVarsity Press)는 캠퍼스와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는 IV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출판부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문서 운동을 실천합니다.”
역자가 개신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의 선생이란 건 문제가 아닌데, 출판사가 위와 같은 조직의 출판부였다는 걸 알았으면, 이 책 안 읽었다. 기독교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1940년대 남부 미국에 성서 지대Bible Belt라고 있었단다. 개신교 근본주의가 아주 맹위를 떨친 보수적인 지역이었다는데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 지역 출신이면서도 개신교 속의 (힘겹게? 글쎄 미국 안에서 신구교 간 얼마나 치고 박았는지 모르지만 하여튼)가톨릭을 고수했으나, 신구新舊를 따로 따지지 않고 “종교적 비전과 믿음을 인류 전체를 향한 메시지로 승화시켰다”고 작가소개에 나와 있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오코너가 젊은 시절에 루푸스 병이 발병하여 겨우 서른아홉 살에 요절한 작가이며, 남부의 기독교적 작품 활동에 전력했다는 거, 다 좋은데, 문제는 독자인 내가 기본적으로 기독교적 교양이 전혀 없다는 거. 그리하여 나는 250여 쪽에 불과한 짧은 장편소설을 아주 힘겹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초반에 남부 촌구석마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보닛 위에 올라 광분한 모습으로 기독교 원리주의에 입각해 연설과 설교와 전도를 해오던 할아버지를 둔 주인공 헤이즐 모츠. 나이가 차 징집당해 전쟁에 참가하고 부상을 입어 제대를 해 연금생활자가 되어 다시 남부로 돌아온다. 이젠 할아버지도 없고, 부모는 일찌감치 더 먼저 돌아가고, 연금 덕에 그냥저냥 먹고 살 만하지만 외려 직접 보고 만지고, 들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는 반 그리스도의 입장에 처했다는 거. 책을 열자마자 서문에 이런 얘기 다 나와 있으니 내가 이 독후감에서 새삼스레 스토리를 얘기한다고 해도 그리 잘못된 건 아닐 테다. 하여간 헤이즐은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설립하려 하는데, 세상에 자기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는 진리에 봉착. 이후 사이비 종교인이자 사기꾼이자 술꾼이자 가짜 맹인 연설자 부녀를 만나고, 얼마 후엔 진짜 종교 사기꾼을 만나고, 살인이 한 건 벌어지고, 자기 눈에 석회를 문질러 스스로 봉사가 되고 하는 일련의 엽기 라인.
어째 눈에 익다. 난 책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카슨 매컬러스가 기독교에 관해 소설을 썼다면 딱 이렇게 썼을 거 같다고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 남부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 그렇지? 어디서 몇 번 읽은 것 같은 느낌.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윌리엄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과 <8월의 빛>과, 거의 장대처럼 키가 크고/크거나 힘이 장사인 여성들을 주로 출현시키는 카슨 매컬러스. 그래, 전형적인 고딕문학이란 장르다(이렇게 생각했는데 기분 좋게 역자해설에서 딱 포크너와 매컬러스를 언급하는 거다. 난 속물. 이럴 때 어깨가 으쓱거린다). 거기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쓴 <사탄의 태양 아래>같은 광신적인 고행까지 곁들여놓고 나 같은 비종교적 인간한테 옵서버가 선정한 세계 100대 소설이라고 읽어보라고 하면, 그거 곤란하지. 내 눈엔 전부 이상한 인간들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