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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나보코프는 이 책 영어 판의 (오만한)서문에서 소설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를 그의 대표작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반면 독자는 소설 속에서 나보코프 스스로가 독자로 하여금 그리 생각을 하게끔 수시로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하여, 저절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위의 표현으로 책의 성격은 대강 나왔다. 범죄 소설이며, 험버트와 닮았다는 건 게르만이 악당이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 “그렇지만 험버트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땅거미가 질 무렵 거닐도록 허락된 낙원으로 가는 푸른 오솔길이 있다. 반면 게르만은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다.”(작가 서문. 240쪽)라고 선언하여, 책의 제목이 <절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했다. 절망Despair을 키릴 문자로 쓰면 영어로 읽는 것보다 울부짖음 소리가 훨씬 우렁차다나.
반면 역자 최종술은 “나보코프는 ‘예술로서의 살인’이라는 주제 속에 도스토옙스키와 푸시킨의 문맥을 통일시킨다. 게르만의 형상은 라스콜니코프뿐 아니라 푸시킨의 위대한 시인과도 그로테스크한 유사성을 지닌다.”라고 주장하며(260~261쪽) <절망>은 무수한 작품들을 패러디한 완성체로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한 책 <죄와 벌>에선 주인공의 이름을 ‘라스콜니코프’라고 하는 것(민음사, 을유문화사 등)과 ‘라스콜리니코프’(동서문화사 등), ‘라스꼴리니꼬프’(열린책들) 등등 많고 많으니 이름 갖고 시비하는 일 없으시기 바람)
나는 먼저 게르만과 험버트의 비교는 두 작품을 쓴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그냥 비교해서 얘기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렸고, 라스콜리니코프와의 유사성에선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고 나니 비단 라스콜리니코프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모든 살인자들과도 어딘지 모르게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여, 역자의 의견에도 동의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염두에 둔 것은 널리 알려졌듯이 1919년 적군이 내전에 승리하자마자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유럽으로 터전을 옮겨 (작품 활동은 훨씬 전부터 시작했지만)스물두 살부터 “블라디미르 시린”이란 필명을 써 발표한 것, 1934년에 잡지에 <절망>을 연재하고 다음 해에 <사형장으로의 초대>와 1937년에 <재능>을 연재한 다음부터 모국어인 러시아를 버리고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근데 뭐 때문에 이리 구구절절 사연이 기냐고?
잠깐 스토리 얘기 해드리지.
위에서 잠깐 비쳤듯이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러시아 출신이고 지금 베를린에 살고 있는 초콜릿 사업가인데 싼 가격에 가공기계를 구입하러 프라하에 갔다가 우연히 자기와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여겨지는, 그래서 아주 똑같이 생겼으리라 스스로 최면을 걸어버리는 펠릭스란 사내를 만난다. 자기 생각에 둘이 얼마나 닮았느냐 하면, 한 사람인데 둘로 쪼개진 느낌이라 빈혈이 생길 정도라나? 뭐 약간 미친 듯. 왜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기분이 들었느냐 하면, 지금 초콜릿 사업이 거의 망해가는 수준이라 파산선고가 불을 보듯 확실하여, 비록 불법이라도 한 방에 거금이 생길 모종의 범죄를 구상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내용은 책 중간을 넘어갈 정도면 알 수 있다. 완전히 자신하고 똑같이 생긴(생겼다고 착각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해, 자신이 특정한 곳에 가서 범죄를 벌이고 있는 시간 이 펠릭스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잔머리. 물론 나부코프가 이런 뻔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할 인간이 아니라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건 직접 읽고 나서 아시면 되는 거니까 그리 하시고, 자, 만장하신 신사숙녀 여러분! 자기하고 완전하게(는 아니고 거의) 똑같이 생긴 인물이 특정 행위를 하는 거, 이것과, 진짜 내 이름이 아니라 필명을 써서 소설작업을 하는 것과, 이방의 나라에서 자기가 버리고 온 조국의 문자로 작품을 쓰는 것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시 안 계실까요?
이 소설이 원래는 러시아 키릴문자로 썼다가, 몇 년 후에 영어로 작가가 직접 옮겼다고 하는데,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스스로가 어려서부터 대단한 문재로 인정을 받은 영재였음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어서 당연히 본인도 알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비교적 젊은 30대 초반에 써서 중반에 출간한 책에도 숱한 말장난, 번역서는 아무리 읽어도 감흥이 없는 그런 말장난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 독자는 그게 아무리 재미난 거라도 뭐 이해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고,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여 상상력으로 쓰고 있는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건, 흔히들 뭐라고 하느냐면, 독자가 작가 자신이 겪을 일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의미의 수기手記적 기록이라는데, 설마 <절망>을 나보코프의 수기적 기록으로 읽는 종자들은 없겠지. 내가 읽기로는 이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책상 위에서 머리로만 쓴 소설이라. 주로 러시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역자 최종술의 해설처럼 숱한 작품의 주인공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하다못해 작품 중에 작가가 직접 다른 작품과 주인공들을 불러내는 것들 말이다. 거기에 만일 내 생각도 추가할 수 있다면 필명 사용에 따른 효용이랄까 진실이랄까, 조금 확장하면 비단 필명 사용이 아니더라도 자신 즉 작가와 작품이 서로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 하는 고민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처럼 조금의 쉼도 없이 지옥의 불길을 향한 가시밭길을 가야하는 작가의 숙명도 이야기한 것 아니겠느냐, 하는 백퍼 아마추어의 의견이었습네다.
(하여튼, 나보코프는 책 읽고 독후감 쓰기 참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