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이제 카잔차키스는 그만 읽어야겠다. 다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더 읽던지 하고.
 전에 읽은 <크노소스 궁전>이 정말로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이고, <성 프란체스코>가 정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적은 것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진짜 위인전이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어려서 정여사께서 사주신 위인전, 얼마나 읽기 싫었는데 이제 나이 들어 새삼스레 위인전? 그것도 서른세 살로 죽을 때까지 그냥 남의 나라 쳐들어가기에 여념이 없었던 침략자에 불과한 알렉산드로스를 영웅으로 칭하는 것을? 아이고 머리야. 이 양반 죽은 다음 한 삼백여 년 흐르면 서른세 살 먹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등장하여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오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젊은이라면 혹 몰라도 한 명의 침략자를. 흠.
 알렉산드로스 왕 아시지? 일찍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발이 됐던 지금의 알바니아 바로 오른쪽 옆에 붙은 산동네이자 불가리아 왼쪽의 조그만 나라,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와 더불어 근대사 이후 숱한 전쟁의 싸움터가 되어 변변하게 남아있는 유적도 별로 없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혹시 몰라 부언하자면, 지금의 마케도니아 사람들과 알렉산드로스 왕 시절의 인종은 조금 다르다는 거. 혹시 모른다, 완전히 다를지도. 지금은(아니, 1차 세계대전 훨씬 이전부터) 소위 슬라브 체인이라 일컫는 남 슬라브계 사람들이 대다수 또는 거의 전부를 차지하지만 카잔차키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는 (지금은 흔히 라틴 계열을 일컫는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종족의 무리로) 스스로를 완벽한 그리스 인이라 여겼으며, 자신들을 야만인이라고 비하하는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에게 야유를 보낼 정도였다. 그들은 남쪽 그리스 사람들보다 더 검소했고, 부지런했으며 용맹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산악지역이라 뭐 먹을 게 있어야지. 당연히 한창 시절의 스파르타를 능가하지는 못했겠지만 이미 스파르타는 늙은 귀족 여인처럼 힘은 다 빠지고 자존심만 남은 처량한 신세.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마케도니아와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시기를 잘 만난 거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리스에 마지막으로 테베가 왕초를 먹고 있었는데 거기도 심한 내분으로 비실거리고 있었으며, 페르시아 역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고질적인 내전으로 크세르크세스 시절 같은 위엄을 지니고 있지 못했으니, 이른바, 아니, 이렇게 얘기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틈새시장? 혹은 블루 칩? 하여간 이 비슷한 것이 생겼거나 가능했다는 완전 아마추어의 의견.
 동양에서 가장 유명한 말horse은 동탁, 여포, 조조의 손을 거쳐 관우가 죽을 때까지 타던 적토마, 서양에선 열다섯 살 먹은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누구도 길들이지 못한 완전 검은색의 커다란 야생마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옷을 훌렁 벗고 올라타더니 질풍처럼 들판을 질주했던 부케팔로스. 근데 16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는 그림 <부케팔로스를 길들이는 알렉산드로스>에서 왕자는 옷을 근사하게 입었고, 말도 백마다.

 

 

 그러니 작가나 화가나 알고 있던 건 그냥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말 한 마리를 길들였다는 건조한 내용뿐이었으며, 거기다 자기 상상력을 보태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린 듯.
 책의 내용은 한 깡패 같은 왕이 있어서 마케도니아 산골에서 시작해 그리스를 먹더니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를 침공하고, 이어서 지중해변을 따라 아프리카의 이집트까지 침공, 다시 페르시아로 접어들어 그 위대했던 나라를 완전히 거덜을 내고, 내친 김에 저 사마르칸트 고원,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까지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왕임을 선언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드디어 인더스 강과 히다스페스 강을 넘어 인도에 도달해 코끼리 구경도 했다는 거. 이쯤 되면 야망이 아니라 집착, 그걸 넘어 강박증, 즉 정신이상 수준의 인간으로 봐야 한다. 거기서 자신을 최초로 스타로 만들어준 준마 부케팔로스가 전사해버리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알렉산드로스는 산등성이에 올라 또 동쪽의 광활한 밀림을 보고 침을 흘린다. 하지만 이젠 장군들을 비롯한 전사들이 지쳐 나가떨어져 자칫하면 자신이 골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채 눈물의 회군을 결정한다. 그냥 집에 가면 될 것을 숱한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가며 기어이 이란과 인도 사이의 게드로시아 사막을 건너가는 건 또 뭐야. 그러다가 바빌로니아에 도착해 그리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귀환시키고, 새로이 얻은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등 외국병사를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구상하던 중 병 들어 죽는 이야기.
 딱 여기까지다. 그렇게 세상을 헤집고 다니면서 애먼 사람들 죽여가며 정복한 땅덩어리가 전부 자기 것이 되나? 아니면 조국 마케도니아, 그것도 아니면 그리스 땅이 되냐고? 저 몽고 대평원까지 정복했던 고구려가 정말 끝도 없는 몽고 평원을 다스렸을, 지배했을 거 같아? 이제 꿈에서 깰 때다. 알렉산드로스가 비록 후손이 없지만 만일 있더라도 그가 이룬 정복활동으로 넓어진 국토를 다스렸을 거 같은가? 천만의 말씀. 역사에는 위대하게 거론이 되지만 내 눈엔 그냥 한 미친 왕이 있어서 인도까지 한 번 갔다가 온 거 뿐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내 의견인데, 만일 누가 알렉산드로스를 탐험가라고 하면 난 위대한 탐험가라는 데 완전 동의. 하지만 영웅이라 한다면, 개뿔 영웅은 무슨. 그냥 쌈 잘하는 쌈꾼이었을 따름이지. (그리스의 영웅을 찬양하려 했던 카잔차키스의) 책에도 나온다. 그리스 문명을 아시아에 전파하려고 시작한 정복활동이 나중엔 거꾸로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문명에 적응이 돼버리는 모습이.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 혹은 그리스는 자신의 점령지를 한 번도 다스려보지 못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근데 영웅은 무슨, 개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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